독립운동가 박열(朴烈)은 1902년에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함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ㆍ1운동에 참가하여 어린 나이에 퇴학을 당했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며 신학문을 공부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한 살 연하의 일본인 처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가 조선인 유학생을 사랑하여 따라다니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생에 큰 소용돌이가 일게 된다. 문제는 박열이 평범한 유학생이 아니라 세상의 전복을 꿈꾼 혁명가였기에 22년의 삶을 일본 교도소에서 보내게 되고 23세의 처녀는 의문의 죽음을 한다.
박열은 1921년, 김판국ㆍ조봉암 등과 더불어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지만 곧 이들과 결별하고 스스로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 비밀 결사단체 ‘흑도회(黑濤會)’와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한다. 조직의 목표는 일왕(일본인들은 그를 천황이라고 부른다) 암살이었다. 1923년 10월에 치러질 예정이었던 일본 왕자 결혼식 때 왕과 왕자를 죽이기 위해 폭탄 입수를 계획하였다.
박열은 동지 김중한을 상하이에 밀파해 폭탄 반입을 추진하던 중 1923년 9월 1l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모종의 일을 꾸미는 수상한 조선인’(不逞鮮人)이라는 혐의를 받고 검거되고 만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 당국은 박열 일당의 일왕 암살 모의 사건을 ‘모의’가 아니라 실행 단계였다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세상에 태어난 지 18년 8개월밖에 안 된 앳된 일본인 처녀 가네코도 함께 체포되어 3년 가까이 재판을 받는다. 도쿄 대심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은 것은 1926년 3월 25일, 두 사람은 일주일 뒤에 일왕의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나를 죽이려 한 죄인을 내가 용서했다’는 것도 국제적인 이슈였다.
두 사람의 재판 과정을 다룬 신문기사
무기로 감형이 되자 조선인 남자 박열과 일본인 여자 가네코는 옥중에서 혼인 신고서를 작성한다. 감옥에 갇혀 있어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두 사람. 혼인 신고서만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전직 경찰관과 술집 여급 사이에 태어난 가네코는 처절할 정도로 불행한 성장기를 보내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가네코는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모두 양육을 거부당해,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가지 못했던 그는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첩을 집에 데려오곤 하던 아버지가 이모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가 버리자 집안은 완전히 파탄이 난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이 남자 저 남자를 집에 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고모뻘 된다는 웬 할머니가 나타나 아홉 살이 된 가네코를 조선에 데려가는데, 양녀로 데려간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요, 혹독한 식모살이였다.
조선에 건너간 해가 1912년이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서 할머니의 학대를 받으면서 약 7년간 살았는데 본인이 간절히 원하여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에 있는 동안 3·1운동을 목격하였고,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한 그녀는 이에 동감하게 된다.
가네코는 조선에서 영하의 추운 날씨이건 뙤약볕 뜨거운 한여름이건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채 빨래 일을 하며 보낸다. 할머니 집을 뛰쳐나와 7년 만에 고국 일본으로 돌아가자 어머니는 딸을 창녀로 팔려고 한다. 어릴 때 헤어진 이후 그때서야 나타난 아버지가 소개해준 남자는 하필이면 어머니의 남동생이었으니, 우리의 윤리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다.
외삼촌과 결혼한 뒤 곧장 소박맞은 가네코의 운명을 ‘기구하다’는 것 외에 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헌 가방 하나를 들고 도쿄로 간 가네코는 신문팔이를 하며 학비를 마련해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들어간다. 때마침 그 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박열을 만남으로써 그녀의 인생은 급선회한다.
가네코는 인쇄소 여직공․가게 종업원․파출부 같은 일을 하며 영어공부를 하는 한편 헤겔과 니체의 책을 밤 1~2시까지 읽으며 사상무장을 해나가고 있었다. 학교 주변 오뎅집에서 그를 처음 만나기 전 이미 가네코는 잡지 《조선청년》에 시를 발표한 박열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 가네코는 박열이 두 달이나 나타나지 않자 그를 찾아 나선다. 가네코가 박열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남아 전한다.
지금까지 몇 번인가 선생님께 편지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마는 나는 어리석다 할 생각으로 썼다가는 찢고 찢고는 다시 쓰고 하여 드디어 오늘에 이른 것이로소이다. 그러나 오직 선생님께만은 말씀드리오니 양해하여 주실 줄 아오며, 또한 지구 위에서 내 과거의 생활을 얼마라도 정당하게 이해하고 비판하여 주는 이가 있사오면 고맙겠나이다. 나는 지금 이 같은 생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나이다.
이어지는 편지 내용은 바로 그 처절한 과거지사 고백이었다. 박열은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읽은 뒤 이 불행한 여인을 위해 친구가 되어주기로 마음먹는다.
가네코는 박열이 꿈꾸는 일, 즉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돕겠다고 나섰다. 이에 박열은 그 일은 당신의 조국을 배반하는 일이라며 반대했으나 가네코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박열은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자신의 품에 뛰어든 일본인 여성을 감싸안는다. 동창생에서 동지인 동시에 연인 사이로 바뀐 것이다. 박열과 동거생활을 시작한 가네코는 그래도 부모니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인 유학생과의 관계를 알리자 아버지는 가계를 더럽혔다며 부모자식 관계를 끊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박열은 조선의 예복을 입고 재판 내내 조선어를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인 가네코도 하얀 비단저고리에 한복치마를 입고 등장해 박열과 조선민족을 위한 투쟁을 함께 한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6,661명을 학살한 일본은 국제적인 비난을 모면할 호기로 이 재판을 주목, ‘대역사건’이라고 대서특필했는데, 물증 없이 오로지 불령사 멤버의 자백으로만 재판을 끌어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특별대우를 받는다. 그 과정에 간수들의 묵인 아래 몇 시간 함께 있었는데 그만 아기가 생긴다. 형무소 당국의 직무유기에 쏟아진 비난은 담당판사의 옷을 벗기고, 내각을 퇴진케 한다.
박열과 가네코는 서로 다른 형무소로 이감되고, 이감 후 3개월이 되지 않아 가네코의 사망 소식을 들은 박열은 오열한다. 형무소 당국은 가네코가 철창에 노끈을 매어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어디에서도 자살 도구인 노끈이 발견되지 않았다. 형무소는 끝까지 그 이유에 대해 입을 다물었고, 그래서 가네코의 사인은 끝까지 비밀로 남는다.
박열은 가네코의 기일이 오면 하루 종일 먹지도 않은 채 가네코를 추모했다.
박열은 무려 22년을 복역하고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에 석방된다. 해방 후 일본에서 ‘신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줄여서 ‘민단’이라고 한다)의 단장이 된다. 1948년 귀국하여 장학사업을 하던 중 6ㆍ25 때 납북된다. 북한에서는 박열을 항일투사로서 대접을 해주어 북한에서 1974년에 죽는다.
일본인 아내 가네코의 묘는 남편의 고향 근처인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있다. 박열에게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니, 그는 남북한이 함께 인정한 진정한 항일투사였다.
첫댓글 기구한 운명이여! 운명의 파도를 헤쳐간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란 체험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청간의 학문체험 또한 가치있다면 나에게 재체험되어야한다. 그럴려면 학문을 소재로 상구의 수레바퀴를 굴려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