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세계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장준하 전집중 제 1권 돌베개를 이성자씨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여 쉽게 쓴 책입니다.
아시다시피 장준하 선생은 1944년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중국으로 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백범선생님 곁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입니다.
이 책의 서평을 장준하 선생의 돌배게서문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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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지낸 단 2년간의 체험수기이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부터 조국광복이라는 감격이 민족의 숨결처럼 펄럭이던 1945년까지 나는 부끄러울 것 하나 없는 20대의 젊은이로 살았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나 지금은 내 나이도 오십 줄에 들어섰다. 이제 나는 그 2년간의 체험을 좇아 우리 현대사의 한 증언자가 되고자 이 수기를 발표한다.
오늘날의 정치현실은 나로 하여금 주저 없이 붓을 들게 했다. 나는 그 당시의 국내외 사정과 우리 젊은이들의 저항정신을 내 눈으로 본 대로 기록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내 증언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나는 일제 말기에 끌려간 한국 학병들의 저항정신에 대해 썼다. 내가 갔던 곳이 중국이었고 학병이란 이름으로 끌려갔었기 때문에 중국대륙의 학병 이야기만을 쓸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학병이란 이름으로 끌려가 일제에 투쟁한 이야기는 요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하나의 교훈이 될 것이라 믿는다. 더구나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겐 그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둘째, 나는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썼다. 중경 임시정부 안팎의 분위기와 정부 요원들의 생활상을 숨김없이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연장된 듯한 오늘날의 정치풍토와 정치현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리고자 했다.
정치현실이란 거시적인 인과관계로 엮어지는 엄연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우리가 오늘의 정치풍토를 돌아보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이미 1940년대에 뚜렷이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조국광복을 위한 대일항쟁이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썼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가로 알려지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과연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분명히 밝혀 두고자 한다. 내 수기 가운데 이 부분은 조금도 주저 않고 씌어졌다. ‘나도 독립운동을 했다’,고 큰소리치는 일부 저명인사들은 과연 그 때 무슨 일을 했는가? 오늘날, 나는 그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얼굴을 붉힐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또 광복군만 해도 그렇다. 광복군 출신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일부 인사들이 광복군 모자 하나를 얻어 쓰고 실제로는 과연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도 역사 앞에 밝히고자 한다.
나는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이 수기 속에서 중언부언했다. 나는 이 말을 광막한 중원 대륙의 수수밭 속에 누워 마른입으로 몇 번이나 되씹었고, 또 이말을 파촉령에서 눈덩어리 베개를 베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부르짖었다. 그 말은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못난 조상에 대한 한탄이며 다시는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였다.
그러나 광복을 맞은 조국은 이제 적반하장의 세상이 되고 있다. 그 이후의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 총칼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들은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
창세기 28장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이야기는 결혼 일 주일 만에 고국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내가 일본군을 탈출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약속한 암호였다. 마침내 나는 아내에게 부치는 마지막 편지에 그 암호를 사용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라고 쓴 다음 “어느 지점에 내가 베어야 할 그 ‘돌베개’가 나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썼다.
그 후, 나는 돌베개를 베고 중원 6천 리를 걸으며 밤을 지새웠고, 잠을 잤고, 꿈을 꾸기도 했다. 중원에서 지낸 2년이 바로 나의 ‘돌베개’였다. 더구나 그것은 축복받는 나의 ‘돌베개’였던 것이다.
춘원 이광수가 쓴 글 가운데 「돌베개」라는 수필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의 ‘돌베개’는 중원의 ‘돌베개’이므로 외람된 마음 드는 것을 알면서도 이 수기의 제목을 『돌베개』라고 붙였다. 요즘 나는 50대 초반을 보내며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