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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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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묘 역시 향토유적으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아서 위치는 정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부친인 임원준선생 묘역 주변에 있다고 해서 찾아 보았습니다. 도로에서 보았을 때 임원준선생 좌측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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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조씨 무덤 중간에 임사홍 무덤이 있습니다. |
▲ 임사홍 묘 하단에서 우측으로 임원준선생 묘역이 보입니다. |
임사홍[1445(세종 27)~1506(중종 1)]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훈구파의 거물로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의(而毅). 아버지는 좌찬성 원준(元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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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사홍 묘역 전경. 벌초를 하지 않아서 묘비를 확인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
효령대군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도 각각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들어 왕실과 밀착된 관계를 형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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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상석은 쪼개져 있고, 묘역 좌우로 풀속에 문인석 한쌍이 서 있습니다. |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재직중 훈구파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하여 사림파 공격의 표적이 되는데, 1478년(성종 9)에는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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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 봉분으로 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묘인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1490년 관압사(管押使), 1491년 선위사(宣慰使)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8년(연산군 4)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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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사홍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뒤의 봉분은 부인의 봉분인 듯... 묘비에는 정경부인 효령대군 손녀 전주 이씨로 쓰여 있어... |
당시 그의 아들인 희재(熙載)도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에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함께 모의,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성종 때의 중신과 사림들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특히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어 중종반정 이후 다시 중앙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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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사홍 묘 뒤에 있는 창녕 조씨 묘역 전경. 앞뒤의 창녕 조씨 묘는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습니다만... |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했으며 이어 다시 부관참시되고 가산도 몰수당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했다. 〈서거정묘비명〉·〈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월산대군이정비명〉 등 여러 금석문이 전한다 |
임사홍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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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4-8 우측이 임원준 묘이고, 좌측이 임사홍 묘. 현장에서 빨간선을 따라가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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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무덤 자체가 그 사람의 성품을 알아본다고, 살아 생전에 덕행을 많이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