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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 있습니다.
가까운, 참으로 가까운 사이인 목사님의 사모님이 한 병원호스피스센터에서 돌봄을 받고 계시는데 오늘 내일 중으로 운명하실 것 같다며, 그러기 전에 현재의 몸 상태로서 줄 수 있는 유일한 신체의 장기인 각막을 주고자 하니 각막 이식을 하고자 수술이 필요한 분이 계시면 알려달라는 소식을 듣고 이곳저곳 아는 목사님들께 그 소식을 전하고 살아 계실 적에 얼굴을 뵙기 위하여 한 분 목사님과 함께 출발하려는 순간에 전화를 또 받았습니다. 이제는 오시지 않아도 된다는....방금 소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아쉬웠습니다. 조금만이라도 더 일찍 출발 했었으면 뵐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밀려오는 아쉬움으로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그리고는 사모님의 시신이 옮겨져 안치될 병원장례식장으로 서둘러 향했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여 그곳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사모님을 먼저 곁에서 떠나보낸 목사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사유는 췌장암이었습니다. 이 판정을 받고 2개월 정도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들이 온다는 소식을 목사님으로부터 듣고는 잠깐이나마 정신을 가지시며 힘을 얻으시는 듯 했는데, 저희가 오기까지를 그 시간을 미처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시 한번 아쉬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신학을 하고, 같은 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고, 목회를 하면서 목사님과 더불어 사모님과 함께 지냈던 날들이 주마간등처럼 떠오르며 지나갔습니다. 얼마나 자주 찾아뵈었는지요. 얼마나 가까우며 친밀하게 대해주셨는지요. 목사님과 신학과 성경, 그리고 교회 이야기를 나누며 때로는 논쟁도 하였던 때 중 많은 시간에는 교회에서도 사택에서도 사모님의 애정과 손길이 있었습니다.
3일간의 입관과 발인 및 하관, 그리고 화장에 이르기까지의 장례 절차를 동료 목사님과 함께 집례하면서 주 안에서 죽은 자가 어떤 것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한 동안 사모님의 장례에서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있다가 불현 듯 전했던 이야기를 떠 올려 정리해 보았습니다. 곧 잊어버리고 말 것이기에.....그렇게 아쉽게 잊을 수는 없기에.
입관 : 이스라엘로 불리는 야곱은 요셉에 의해 애굽 땅 고센에 자리 잡고 살면서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것에서 있는 일인 자손이 번성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살아 147세가 되어 세상을 뜰 때가 가까이 다가 온 것을 알고는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일렀습니다. 자신이 죽거든 애굽 땅에 묻지 말고 애굽에서 매어다가 조상 이삭과 아브라함이 누워 있는 땅으로 가 그 곁에 묻어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창 47:27-31; 50:5). 야곱이 이처럼 유언적인 청을 요셉에게 한 것은 단지 조상이 묻혀 있는 땅과 집이 그리워서 죽어서나마 그곳에 묻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가 아닙니다. 야곱은 조상이 있는 땅과 조상이 누워 있는 곁에 묻혀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서 조상인 이삭과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체결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어 그의 자손이 번성할 것과 그 자손이 거할 땅을 약속하여 주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주님이 되셔서 그들이 화를 당하지 않고 복을 받게 하실 것을 약속으로 주시며 이것이 그들과 함께 하는 천하민족의 복이 될 것임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온 땅의 나라와 백성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그 언약을 잇는 언약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에 있는 조상들과 함께 할 것이었습니다. 이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또한 자신의 언약이 되게 하신 언약의 땅, 곧 약속의 땅을 소망하여 바라봄에 있어 왔습니다. 이는 야곱이 애굽 땅 고센에 정착하여 사는 중에서도 언제나 그래왔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에게서의 일생은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품고 믿음으로 따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봄은 하나님께서는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자신과도 잇게 하셨고, 그리고 자손 대대로 그 약속을 잇게 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사 반드시 언약하신 그대로 성취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야곱은 비록 몸은 노쇠하여 애굽 땅에 있는 동안 14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애굽에 그의 몸이 묻히기를 원치 않았으며,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인 가나안으로 옮겨져 조상들이 누워 있는 곁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죽음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의 성취에 의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주와 영원히 함께 할 것에서 그동안 두터운 장막으로 있던 육신에서 벗어남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에게 흙에서 취해지는 것에서의 몸이 아닌 하늘에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몸을 입히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강림 - 재림 - 케 하여 우리의 죽을 몸을 반드시 다시 살리시는 부활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라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라고 말하였습니다.
발인 :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 있음을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말해줍니다. 만일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리심을 받지 못하셨을 것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어온 우리의 믿음도 모두 헛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두를 전파한 우리 모두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 될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하면, 그리고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그리스도께서도 살리심을 받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 가운데 있어 망하였을 것이니 참으로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만일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의 삶뿐이어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만 가치 있는 것일 텐데도 이를 모르고 이것에 소망을 두고 살지도 않으며 이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음으로 이 세상 사람들보다도 못할 터이니, 가장 불쌍한 자들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12-19).
하지만 말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결코 불쌍한 자들로 남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참으로 복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들을 자신과 같은 부활의 열매가 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5:20-23). 그러기에 고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 맺음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지금 살아 있는 우리 모두도 다 고인과 동일한 부활의 열매로 맺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채울 백성으로 채워졌을 때 생명이신 부활의 주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결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이 되지를 못합니다. 죽음은 주 안에 있는 자의 생명을 결코 삼키지 못합니다. 주 안에 있는 자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삼켜 죽음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이죠. 그러니 말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리심을 받음에 있게 하는 부활의 권능을 주님에게서 보며 아직 주 안에서 살아 있는 자들을 위로하며 격려하여 주께 더욱 마음을 두어 굳건히 함으로써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일에 항상 힘써 나갈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고전 15:54-58). 이것이 고인을 장례 치르는 발인에 있는 유족을 비롯한 그리스도인이 고인을 향한 슬픔 마음으로부터 가져나가야 할 굳은 마음의 다짐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관 : 하관은 조성한 묘지에 고인을 묻는 것입니다. 지방에 따라서 하관 형태는 크게 두 종류를 갖고 있습니다. 관 채로 땅에 묻는 곳도 있고, 관에서 고인을 꺼내 몸만 땅에 묻는 곳도 있기도 합니다. 오늘 날에는 묘지를 조성할 땅의 부족을 비롯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화장이 크게 늘었습니다. 아마도 전체 장례에서 70-80%를 차지할 듯 싶습니다. 이런 추세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고인은 하관을 통해서 매장이든 화장이든 어떤 방법으로에 의해서이든 육신의 몸을 벗음에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으로 고인의 몸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더 나은 새로운 몸을 입음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면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으면 썩어질 몸은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병이 들며 죽는 비천한 것이지만 이 몸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영광스런 몸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이지만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에는 다시는 죽음에 있지 않는 생명력이 왕성한 굳센 강한 몸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죽음을 앞에 둔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몸이지만 다시 살아난 뒤에는 하늘에 있는 영적인 몸으로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사람 아담은 땅에서 남으로 그 후손은 흙에 속한 몸을 받아 났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주는 영으로 자신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고전 15:42-46)
이렇게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욕된(비천한) 몸이 영광스런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땅에 속한 육의 몸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몸이 겪을 부활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에 있는 우리 몸은 반드시 죽음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게 부활한 우리는 주와 함께 주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이 복스러움을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환상 계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사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수정처럼 맑은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왔습니다. 그 강은 새예루살렘의 넓은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데, 그 강의 좌우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새 열매를 맺고 있었고, 그 나뭇잎은 온 세계의 민족들을 치료하는 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제 도성 안에는 더 이상 저주 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거기에 있고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그분의 종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뵘에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밤이 없으며 등불이나 태양이 쓸데없으니 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십니다. 그들은 거기서 영원토록 왕처럼 살 것입니다.”(계 22:1-5)
고인은 주 안에서 죽음에 있음으로써 OO세를 사시는 평생에 흙에 속한 육에 있음으로서 겪은 모든 것은 다 벗었습니다. 슬픔뿐인 것도, 수고뿐인 것도, 고통뿐인 것도, 그리고 죽음뿐인 것도 모두 다 벗었습니다. 고인에게서 그 모두를 그의 곁에서 옮겨 영원히 제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신에 고인은 주 안에서 죽음에 있음으로써 OO세를 사시는 평생에 흙에 속한 육에 있음으로서는 결코 겪을 수 없는 큰 것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인이 그의 일생에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영접한 믿음에 있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처럼 맑은 강, 이 강으로 인해 달마다 새 열매를 맺는 열 두 종류의 생명나무에서 의도하고 있는 생명의 풍족함,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의 휩싸임에 있어 왕처럼 살 것의 복됨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유족과 그리고 믿음 안에서 함께 하고 있는 우리가 고인에게서 보는 것이 이것입니다. 고인이 주 안에서 죽은 자로 있음으로써 주님과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히 있음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기에 고인이 우리 곁에서 더 이상 있지 않음으로 인한 슬픔에 있지만 이 슬픔을 이김에 있으며 주께 더욱 소망을 두고 믿음을 돈독히 해 나가는 것입니다.
고인이 비록 우리보다 앞서 주 안에서 죽은 자로 있습니다만, 살아 있는 우리보다 먼저 주의 나라에 앞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고인보다 후에 주 안에서 죽는 자로 있을 것이지만, 죽은 자에 비해 살아 있는 우리가 나중에서야 비로소 주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 있는 자는 죽은 자로 있든 살아 있는 자로 있든 그 누구도 먼저 앞서거나 뒤로 뒤처져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 있는 자는 주와 함께 하늘에 있는 자와 주와 함께 땅에 있는 자 모두가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 모두는 주님과 하나 된 몸으로 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그럴 것이며, 주께서 다시 오신 이후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고인과 함께 고인이 믿음을 가지고 소망 중에 있던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날을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심으로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고인과 함께 고인이 믿음을 가지고 소망 중에 있던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그 날이 임하기까지 우리 몸의 실체인 그리스도와 믿음의 형제들을 존중히 여기며 힘써 사랑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참으로 신속히 날아가며 지나가는 것이 세월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성경의 마지막이요, 또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
첫댓글 자상하신사모님~^^
많이 그립습니다...
다시 만날것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