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예수께서 산에 올라 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14 예수께서는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15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뽑으신 열 두 사도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과
17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고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마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혁명당원 시몬,
19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묵상)
예수님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태가 되는 새로운 공동체(-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통합을 의미하는 열두사도로)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택은 상당히 의구심이 갑니다. 왜 그처럼 다양한 개개인들을 한 공동체로 모으셨을까요? 만약 당신이었다면 그분께 여쭈어보았을 것입니다. 왜 마찰이나 분쟁이 덜 발생할 것같은 단일화된 그룹으로 공동체를 만드시지 않느냐고... 그러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분히 충동적인 시몬과 신중한 토마, 불같은 기질의 "천둥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매우 조용했으리라 추정되는 타대오(성경에서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로마에 빌붙은 세리 마태오, 그리고 혁명당원 시몬... 어째서 이러한 다양성을 선택하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꿈꾸는 공동체에 대한 형상화를 희망하셨을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안식처를 찾을 수 있는... 또, 아마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교회가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 그리고 화해의 장 - 단순한 자연스런 공존이 되기보다는 - 이 되어 일치와 조화를 위해 봉사하는 그런 공통체가 되어야한다고 가르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원문)
Jesus seems to have been wildly impractical. Here he is beginning a new community, the seed of a new Israel(thus the Twelve, symbols of the regathered Twelve Tribes of Israel). And yet his choices seem questionable: why bring together so terribly diverse a group of individuals into one community, just when you are beginning, we might ask him? Why not start with a more homogeneous group, a group less prone to friction and fractiousness? Yet here Jesus brings together the impulsive Simon and the cautious Thomas; the fiery "sons of thunder" James and John, and the presumably quiet Thaddeus(from whom we never hear a word!); the former Roman collaborator and tax collector Matthew and the apparently politically progressive Simon the Zealot. Why this diversity? Perhaps Jesus wished to symbolize his dream of a community, in which all find a home. Perhaps he wished to teach that his Church would be a community in which the constant, untiring practice of charity,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rather than simply natural compatibilities, would serve as the basis of one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