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정(栗亭) 박서생(朴瑞生)
율정 박서생 선생의 고향은 현재 우리군 비안면으로 본관은 병산(屛山)으로 비안(比安)의
별호입니다. 호는 율정(栗亭)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고려시대 때 문하시중을 지내 벽상공신으로 병산군(屛山君)에 봉해졌던 박우(朴瑀)는
병산 박씨의 1세가 되는 중시조입니다.
고조는 고려 때 판도사 판서(版圖司 判書)를 지낸 박계오(朴繼五)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직장(直長) 박종주(朴宗柱)이고, 조부는 예부 낭중(禮部 郎中) 박윤보(朴允甫)
입니다. 부친은 박점(朴漸)이며, 손자 박효원(朴孝元)은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으로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역임하였습니다.
박서생(朴瑞生)[?~?]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음보(蔭補)로 성균학정이 되었습니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병과 3등으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서 을과 1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이조참판과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자,
왕이 높은 지조와 청렴결백함을 기리어 청백리에 책록되기도 했습니다.
세종대에 통신사로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수차(水車)와 물레방아를
만들어 농사 기술의 혁신을 가져왔으며, 탄광을 개발하고 무역을 진흥시켜 실학 운동의 선구자로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고향인 비안현관아 옆에 공자묘(향교)를 창건하여 향리 선비들이 학문에 힘쓰게 하였습니다.
이 때 서부리 일원의 집터를 향교부지로 기부하고 스승의 야은 길재의 고향인 구미 금오산 동쪽에
율리(밤실) 기거하면서 스승 길재의 행장을 정리하고 길재의 도학을 세상에 널리 알렸습니다.
※ 정하묵(鄭夏默)이 지은 사적비가 금오산에 있고, 유석우가 지은 기적비 (紀蹟碑)가 금오산
채미정(採薇亭) 아래에 위치하고 있슴.
박서생과 관련된 자료는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어 생몰년조차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1898년에 건립된 박서생 사적비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용천리 417-1에 있어
박서생의 삶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사적비 전면에 ‘유명조선 가선대부 이조 참판 율정 박서생 사적비(有明朝鮮嘉善大夫吏曹參判栗亭
朴瑞生事蹟碑)’라고 새겼습니다. 측면에 ‘대한광무이년무술사월삼일(大韓光武二年戊戌四月三日)
에 비를 세웠고 춘추관 기주관 정하묵(丁河黙)이 찬하고, 비안군 초대 군수 김용배(金容培)가
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는 박서생의 학풍, 야은 길재와의 관계 등 박서생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에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글자를 판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1721년에 세워진 율정(栗亭) 박서생(朴瑞生)이 주향인 구천서원(龜川書院)과 병애공(屛崖公)
박충인(朴忠仁) 북촌(北村) 박효순(朴孝純) 부자가 배향된 병호충렬사(屛湖忠烈祠, 일명 병호
서원(屛湖書院))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습니다.
이에 비안 박씨(比安朴氏) 문중에서는 1935년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일제의 억압 속에서 병산정을
건립하고, 후손 박주봉(朴周鳳)이 정동철(鄭東轍) 선생에게 기문을 요청하였습니다.
병산정은 비안현의 누정인 망북정(望北亭) 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첫댓글 율정 선생에 대해 재조명하면서 좋합 보고서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가 율정애 대해 연구하실 분 없으신지?
올해 중으로 문화원에서 율정선생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향토사연구회를 비롯한 향토사학자들께서 주관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해 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6년 전쯤 율정 선생에 대해 세미나를 한 기억이 납니다. 어떤 주제로 할 것인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