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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 | - 발길마다 ‘禪茶一如’초의스님 삼매향 - - 대흥사 13 대종사 13 대강사 부도 모셔 - - 산등성 야생차향에 방문객 시름덜고… -
5월25일 새벽 5시. 현대불교신문이 주최하고 ’97 문화유산의 해 조직위원회가 후원하는 불교문화테마여행단 130여명이 네번째 답사지인 해남 두륜산 대흥사(대둔사란 원래 이름을 찾았으나 아직도 대흥사라 많이 불리워짐) 입구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두륜산 기슭에서 뿜어 나오는 맑은 공기, 그 공기에 취한 듯 뽀오얀 얼굴을 내밀며 길을 밝혀주는 달과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은 선지식의 자상한 인도인 듯 피안으로 들기를 권유한다. 대찰의 호방함속에 조화로운 불교의 정서를 깊숙히 간직하고 있는 대흥사 일지암을 향해가는 마음들은 그저 여여할 뿐이었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10리 숲길에 어우러진 떡갈나무, 벗나무, 단풍나무는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두륜산에서 내려오는 여러계곡이 대흥사에서 만나 제법 큰 내를 이루는 이곳은 ‘너부내’라고 불리운다. 이 숲이 대흥사 경내의 무염지(無染池)까지 뻗어 있다. 대흥사 입구 피안교를 건너 ‘두륜산 대흥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천왕문을 지나면 길 오른쪽으로 고승의 사리탑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밭을 만난다. 이곳에는 서산대사(1519~1605)이래 초의스님까지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 납골이 모셔져 있다.
1605년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당신의 의발(衣鉢)을 두륜산에 둘 것을 유언했다. 현재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가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관에 모셔져 있다. 대흥사에서 두륜봉 쪽으로 걸어서 족히 40분은 걸리는 산중턱에 자리한 일지암(一指庵). 가파른 산길을 쉬지않고 올라온 답사객들은 야생 차밭에 아직 남아 있는 차잎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향긋한 한잔의 차를 상상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일지암 암주 여연스님의 지도로 잠시 참선에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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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대웅보전 | | 나뭇가지를 스치는 평화로운 바람소리,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 그 옛날 초의스님이 일지암을 거닐던 그 모습도 향내음을 타고 스치운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성 상실과 문화에 대한 편견과 공해, 가치의 혼돈과 마비현상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현상세계를 되돌아보고 우리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는 짧지만 귀한 시간이다.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는 크나큰 자연의 진리와 불법이 원융되어 함께 숨쉬는 곳이 바로 이곳 일지암입니다. 모든 삼라만상과의 화해, 그것이 바로 초의스님의 삶이었지요. 40세에 이곳에 오셔서 40여년을 두문불출하며 지관(止觀)에 전력하신 스님의 삶은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포용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초의스님은 자연에 묻혀서 꽃과 차나무, 배나무 등을 심고 선을 닦고 시를 읊고 다향에 취했다. 스러져가는 한국차문화를 새롭게 중흥시킨 한국차의 요람 일지암은 지난 79년 한국차인회에 의해 복원됐다. ‘一指庵’ 현판은 강암선생이 썼다. 현재는 여연스님이 일지암 옆에 법당과 요사채를 지어 놓았다. 5월의 문화인물 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기 위해 대흥사와 여연스님은 추모재와 특별기획전 등 많은 문화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떠 있는 명월을 불러다가 촛불로 삼고, 흐르는 구름을 불러다가 병풍을 삼으며, 대숲 스치는 소리 소나무 소리 바람부는 소리 친구로 삼아서 물을 끓여 차를 마셨던 초의스님은 학문으로써 선교를 연구하고 유학과 도교에 까지 지식을 넓혔다. 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하고, 끊어져 가던 우리의 차 문화를 일으켜 <동다송>과 같은 명저를 남겼다. 이런 교류 때문인지 대흥사에는 추사 글씨의 무량수각 현판,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 정조대왕의 어필사액 표충사 현판 등 명필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스님이 보내준 차를 받고 그 폐백으로 보낸 희대의 명필 ‘명선(茗禪, 간송미술관 소장) 차를 마시며 참선에 든다’의 의미를 잠시나마 느끼며 발걸음을 북미륵암으로 옮겼다.
바위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40여분 지나면 보물 제48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북미륵암에 도착한다. 북미륵암 용화전 앞으로 멀리 완도 앞바다가 펼쳐진다. 산 정상에서 만나는 가없는 푸르름의 바다는 깨달음을 향한 혜안을 가질 것을 넌지시 독촉한다. 내려오는 길에 그 유명한 유선여관의 진돗개 노랑이를 만났다. 대둔산 일대를 거침없이 뛰어 다니며 등산객들의 길을 안내한다는 노랑이는 건네주는 음식을 맛있게 받아먹으며 강행군으로 지친 참가자들의 마음을 여유롭게 풀어주었다. (후원: ’97 문화유산의해 조직위)
* 전문가 안내- 여연스님<일지암 암주>
- 일지암 초의선사 40년 수행처…우리차 우수성 일깨운 ‘茶고향’- 초의선사(1786~1866)가 근 40여 평생을 독처지관(獨處止觀)하며 살았던 일지암. 남종화(南宗畵)의 대산인(大山人) 소치(小痴) 허련이 그의 스승으로 모셨던 선사의 모습을 <몽연록(夢緣錄)>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서 일지암을 가장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스님이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이다. 소나무 숲이 깊고 대나무 무성한 곳에 몇 칸의 초실을 엮었다. 늘어선 버들이 처마에 닿아 있고 풀꽃이 섬돌에 가득 차서 그늘이 뒤엉켜 있었다. 뜨락 가운데는 상하의 못을 파고 처마 아래에는 크고 작은 물통을 놓아 두었는데 대쪽을 연결해서 멀리서 구름비친 샘물을 끌어온다….” <몽연록>의 일부를 살펴 보듯이 일지암은 산꼭대기 아래 초실을 엮은 아주 작은 암자이다. 대둔사의 오랜 세월 빛나는 선의 광맥에서 가장 찬연하게 꽃 피운 13대(代) 종사의 기개를 활발하게 펼쳐 냈던 곳이다. 40세에 일지암을 조성하였는데 백파(白坡)선사와 추사 김정희가 벌인 선문논쟁을 벌였던 저 유명한 <선문수경(禪門手鏡)>에 대한 선사의 사상적 논지를 밝힌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초의선과(艸衣禪課)>를 이곳에서 저술하였던 것이다. 초의선사는 <선문사변만어>를 통해 수행상의 문제인 참된 선지를 개념화 된 임제삼구(臨濟三句)에 고착시켜 선의 우열을 가늠하고, 선을 체계화, 이론화하고자 한 백파선사의 선론(禪論)을 비판했다.
초의선사는 또한 종래의 형이상학적 심지법문(心地法門)의 도리에서 나아가 즉사즉리(卽事卽理)의 선수행을 제창, 일상생활의 현실 토대위에서 선리(禪理)를 파악하려 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 일지암에서 저술한 작업중에 가장 빛나는 것이 있다면 <동다송(東茶頌)>과<다신전(茶神傳)>이 아닐까 한다. 조선후기 사회 모든 부분에서 사대사상이 강한 시기였을 때인데도 초의선사는 중국차에 대한 애호와 흠모에 가득차 있는 풍토를 타파하고 동다(東茶) 즉 우리차에 대한 우수성을 말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한 것을 이 저술에서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스님은 차를 만들어 추사나 다산으로 부터 중국차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검증을 받기도 했다. 스님의 차례(茶禮)와 다도(茶道)는 단 순한 차 한잔의 의미가 아닌 선다일미(禪茶一味), 다선일체(茶禪一體)를 통해 체득한 진리,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다시말해 체(體)와 용(用), 선(禪)과 교 (敎), 차(茶)와 선(禪), 나아가 부처와 중생의 모두를 평등한 한 맛으로 융섭 하여 우주적 삶 전체로 귀일시켰던 것이다. 시, 서, 화, 차, 선이 하나의 거대한 화엄의 바다로 나투었고 우주적 본성이 인간 삶의 뜨락에 일체화 되어 그야말로 ‘선다일여(禪茶一如)’의 옛 향화 (香火)가 꽃피운 곳이 일지암 작은 초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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