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조제프 르페브르는 19세기 프랑스 화가로, 여성 누드와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이다. 그는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의 예술적 공적을 인정받아 프랑스 학사원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쥘 조제프 르페브르(Jules Joseph Lefebvre)는 1836년에 프랑스 뚜르낭(Tournans)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인 르페브르는 아미앙(Amien)시의 지원을 받아 파리로 거처를 옮겨 르페브르는 에꼴 데 보자르 파리(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많은 학생들을 가르친 레옹 꼬니에(Leon Cogniet)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1위 수상자에게 프랑스 정부의 지원으로 로마에서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로마 콩쿠르를 수상하기 위해 1853 년부터 1861년까지 여러 차례 도전하였다. 마침내 르페브르는 그의 작품 '프리아모스의 죽음'(La Mort de Priam)으로 1861 년에 1 위 상인 로마상을 받아 로마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르페브르는 5 년간 로마에서 머물면서 로마의 고전적인 문화와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거장들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그는 또한 로마에서 매너리즘에 영향을 받으며 특히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에 깊게 감명받아 그의 작품을 따라 그리며 연습하곤 했다. 이 시기에 르페브르는 같이 공부하던 프랑스 출신 예술가인 레옹 보나(Léon Bonnat), 카를로스 듀란(Carolus-Duran) 등과 교류하며 이후 평생에 걸쳐 이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1866년에 르페브르는 그의 부모와 누이를 여의면서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르페브르는 그가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인 '코르넬리아'(Cornelia, Mother of the Gracchi)에 대한 혹평을 받으면서 심각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이 시기 이후 그는 프랑스에서 성공한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역사화보다는 초상화와 누드를 집중적으로 그리게 되었다. 전환점을 맞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은 1868년부터 즉각적으로 살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머지않아 1870 년에 선보인 '진리'(La Verité, 1870)으로 르페브르는 예술계는 물론 대중들의 이목까지 끌게 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르페브르는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를 수상하였다.
르페브르는 큰 성공을 이끈 '진리' 이후에 여성 누드 작품을 비롯한 여성 모델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중 하나는 '그라치엘라'(Graziella, 1878)로, 이 작품은 캐서린 로리야드 울프(Catharine Lorillard Wolfe)가 의뢰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849 년에 유명 프랑스 시인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e de Lamartine)이 쓴 '그라치엘라'라는 책에서 나오는 여자 주인공을 그린 것이다. 책 '그라치엘라'의 주된 내용은 아름다운 나폴리 어부의 딸인 여자주인공에 대한 필자의 사랑으로, 르페브르는 멀리에 있는 베수비오(Vesuvius) 산을 바라보며 그물망을 고치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그렸다.
쥘 르페브르(Jules Joseph Lefebvre)가 그린 오달리스크는 유명한 그림은 아니지만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앵그르의 유명한 그랑드 오달리스크처럼 척추 관절이 세마디쯤 더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역시 앵그르가 그린 유명한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에서처럼 도자기같고, 우유빛 같은 기가 막힌 피부빛을 위한 예리한 붓터치의 처리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 완벽한 그림이다.
아마 이런 그림이라면 위의 오달리스크를 따를 그림이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그림 가운데 그나마 메이져 미술관에 도착해 있는 그림이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그림이다. 적어도 신고전주의적 화가의 그림이라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