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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15> 일본의 신이 된 아리다 야키 도조 이삼평
^아리다 야키(有田燒)는 사쓰마 야키(薩摩燒)와 함께 일본 도예를 대표하는 브랜드다. 예술 도자기 이미지가 강한 사쓰마 야키에 비해, 아리다 야키는 생활 도자기 이미지를 띠고 있다.
^한때는 유럽 시장에서 아리다 야키 한 점이 같은 무게의 금값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다. 근세일본의 잦은 전쟁과 경기부침의 과정에서 생활도자기 산업도자기 이미지가 굳어져, 지금은 주부들의 사랑을 받는 주방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봄가을 이곳에서 열리는 축제 때는 도자기 파시가 형성된다. 인구 2만의 아리다 마치(町) 그 많은 요와 도자기 가게, 길거리 노점상마다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 그릇 종류와 꽃병 같은 미술공예품은 명성에 비해 값이 착하다. 이 도향이 갈수록 유명해지는 까닭이다. 봄 축제는 매년 2~3월, 도조제는 5월 4일부터고 가을 축제는 11월 하순이다.
^아리다는 큐슈 서단의 사세보(佐世保)항에서 지척이다. 후쿠오카(福岡)나 사가(佐賀)시에서 JR 사세보선(線) 열차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나고야 성에 들러 가라쓰(唐津)로 되돌아 나와 찾아가려니 길이 멀고 복잡했다. 시외버스 편으로 큐슈 북안의 항구 이마리(伊萬里) 시를 거쳐, 다시 제3섹터 지선열차 편으로 갈아타고 갔다.
^아리다 역에 내려 안내책자를 받아보니 한 정거장 거리의 가미 아리다(上有田) 역이 르포에 편할 것 같았다. 30분을 기다려 도착한 가미아리다 역은 무인 간이역이었다. 길을 물어볼 데가 없어 같이 내린 노인에게 말을 붙이니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안내지도를 손에 들고 처음 찾아간 곳은 자석광(磁石鑛) 이즈미야마(泉山)였다. 일본 최초의 도자기 생산이 가능하게 했던, 히젠(肥前) 사가 번영의 원천이 된 역사의 현장이다.
^아리다 야키 시조 이삼평(李參平)이 이곳에서 발견한 자석을 원료로 아름다운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인근에 있던 조선도공들이 다투어 몰려들었다. 손쉽게 자석조달이 가능한 곳으로 가마를 옮겨온 것이다. 아무도 살지 않던 산골짜기 여기저기에 공방과 가마가 들어서고 창고와 도공들의 움막이 생겨났다. 세계적인 도자기 명소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즈미 야마 자석광은 대단한 볼거리였다. 400년이 넘도록 자석을 채굴해 없어진 봉우리 자리에 학교 운동장 몇 배 넓이의 공터가 생겨났다. 콧구멍 같은 두 개의 갱도 안에서는 근년까지 자석이 채굴되었다.
^자석광 입구에 우뚝 선 ‘李參平發見之磁鑛地’라는 높다란 돌기둥이 아리다 도자기 역사의 시발점임을 말하고 있다. 우측 도로변 석장(石場)신사에는 도조 이삼평의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가까이 가보니 동상이 아니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옥색 도자기 상이었다. ‘도자기의 신’에 대한 공경의 염이 담긴 것 같았다. 흰 두루마기 차림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이 영락없는 조선도공 모습이다. 근엄한 표정에는 망향의 수심과 고난의 빛도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죽어서 일본의 신이 되었으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갔는지 분명치 않다. 후손들도 정체성에 혼돈을 느낀다. 1993년 대전 엑스포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 전’ 때 만난 13대손 가나가에 쇼헤이(金が江省平)가 ‘귀향’의식을 갖지 못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공식적으로 그는 충청도 금강 마을 출신으로 돼 있다. 이삼평이 죽기 2년 전 스스로 작성해 남겼다는 고문서 <金が江舊記>에는 “정유재란 때 히젠 사가(佐賀)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끌려 와 그의 가신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게 맡겨졌다. 그는 금강도(金江島) 출신이었기 때문에 ’金が江‘이란 성을 갖게 되었으며, 다쿠 밑에서 18년 동안 도기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다.
^금강도가 어디냐를 놓고 설왕설래 끝에 금강(錦江) 가까운 공주시 반포면 온천리라는 결론이 내려져, 1990년 공식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삼평의 14대손도 “사가 현에서는 공식적으로 연행이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한다. (김충식 저 <슬픈 열도>, 2006)
^이설도 많다. 아리다 첫 방문 때 동행했던 고 이진희(李進熙) 교수 의견은 이와 달랐다. 정유재란 때 김해에서 잡혀갔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근거는 그때 나베시마가 김해왜성에서 농성했고, 그의 성이 金が江으로 바뀐 것도 ‘바다(海)를 강(江)으로 고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나베시마가 조선도공을 제일 많이 붙잡아 갔던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이야기다. “공주 학봉리 출신으로 광주(廣州)의 관요에서 일하다가 왜군에게 납치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삼평은 처음 아리다 인근 다쿠(多久) 땅에 가마를 열었다. 자석이 없어 표면이 거친 도기만 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번의 지원으로 1616년 아리다 텐구 골짜기(天狗谷)에서 질 좋은 자석을 발견하고부터 가마를 거기로 옮겼다.
^그때부터 순백색의 자기가 생산되어 아리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36만석 사가 번의 연간 미곡생산량 총액이 10만 냥일 때, 아리다 야키 매출액이 8만 냥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성세에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삼평의 성공은 순식간에 아리다를 붐 타운으로 만들었다. 인근의 조선도공들이 앞 다투어 이 골짜기로 모여들어 가마와 공방을 차렸다. 텐구 골짜기에 여기저기 제도시설이 생기고, 냇가에는 자석을 찧어 자토를 만드는 물레방아 도광장이 밤낮 쿵쾅거렸다.
^조선도공에게 기술을 배운 일본도공까지 몰려들어 질서가 어지럽게 되자, 번의 엄격한 관리가 시작되었다. 조선도공 150여 명을 제외한 얼치기들을 다 추방하고, 골짜기 아래위에 검문소를 두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철저히 단속했다. 이때 쫓겨난 일본 도공과 업계 종사자가 826명이었다니 초기 아리다의 상황이 눈에 잡힐 듯하다.
^그런다고 황금알 기술이 지켜졌을까? 자취를 감춘 도공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번 관리가 걸인으로 위장, 일본열도를 3년이나 찾아 헤맨 끝에 도망친 도공을 찾아내 목을 치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자기 기술을 독점하려는 나베시마 번의 안간힘을 말해 주는 일화다.
^아리다 야키의 전성기는 바쿠후(幕府) 시대 말기였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에 서 아리다 야키가 금상을 받은 것이 그 계기였다. 높이 2m 가까운 화려한 꽃병 등 처음 보는 도자기 장식품들이 유럽 각국 왕실과 귀족사회의 호평을 산 것이다. 3년 후 미국독립 100주년 기념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서 또다시 금상을 받게 되자 그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자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한중일 3국에 베트남 정도였다. 임진왜란과 중국 명·청 교대기 내전으로 두 나라 도자기가 쇠퇴한 틈에 일본 도자기 문화만 황금기를 맞은 것이다. 이삼평은 자기 애호가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질 좋은 중국 안료(顔料)로 푸른 물감을 만들어 중국풍 그림을 그려 넣고 고열로 몇 번씩 구워냈다. 이 제품들이 ‘IMARI’라는 상표를 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출되자 귀족사회의 수요가 폭발했다.
^그때부터 유럽 상류사회 취향에 맞춘 작품들이 생산되어 ‘이마리 도자기’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금색과 붉은 색 안료를 많이 쓰는 중국풍 금란수(金襴手) 양식의 아리다 야키는 화려함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고 권력자 도쿠가와 쇼군(將軍)가에까지 헌상되었을 정도다.
^이삼평 시대 아리다 조선도공들은 가끔 날을 잡아 함께 모여 술 마시고 놀았다. 번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삼평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날은 즐겁게 마시고 망향의 정을 달래는 축제날이었다. 고국의 노래와 춤이 없을 수 없는 법, 고마 오도리 (高麗踊り)라 불린 춤판이 벌어졌다. 이 전통은 오래지 않아 번의 금지령으로 끊기게 되었다. 술기운에 번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까 걱정한 탓이었으리라.
^맥이 끊어질 것이 두려워 도공들은 축제 때 고려 춤을 공연하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번에 읍소했지만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풍속과 혈통을 이어가게 한 사쓰마 번과 비교되는 시책이었다.
^그들이 야유회를 벌이던 장소에는 지금 도산(陶山)신사와 이삼평비가 우뚝 서 옛일을 증언하고 있다. 후세 도공들이 이삼평을 신으로 모신 도산신사 위에 오벨리스크를 본뜬 거대한 비석을 세워 아리다 야키 300년을 기념한 것이다. 봄이면 벚꽃으로도 유명한 명소다.
^신사는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선 시가지 건너편 산비탈에 있다. 사세보선 철길을 건너 산록에서 직선으로 뻗어 오른 가파른 돌계단을 잠시 오르니, 이삼평을 신으로 모신 도산신사가 나왔다. 돌계단 위에 하늘‘天’자를 닮은 아름다운 도자기 도리이(鳥居)가 두 발을 크게 벌리고 서 있다. 도자기 마을다운 발상이다. 일본에 하나뿐인 도자기(분청사기) 도리이라 한다.
^신사는 이삼평 타계 3년 후인 1658년 창사되었는데, 처음에는 고대 오진(應神)천황을 모시다가 후세에 이삼평과 사가 번주 나베시마를 합사하게 됐다 한다. 아리다 마을이 생기자 신사를 짓고, 이웃고을 이마리의 하치만구(八幡宮) 신사에서 오진 신위를 옮겨와 주 제신으로 삼았다.
^이삼평과 나베시마 도산신사에 혼령이 합사된 것은 1917년 아리다 야키 300주년 때였다고 한다. 아리다 도자기 개조 이삼평을 신으로 떠받들면서, 자광발견을 지원하고 도공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보살폈다는 이유로 나베시마까지 합사한 것이다. 고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붙잡힌 자와 붙잡은 자가 함께 제사 밥을 얻어먹는 형국이 되었다.
^도산신사를 지나 한참을 더 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 가며 30분 쯤 오른 자리에 하늘을 찌를 듯 ‘陶祖李參平碑’가 서 있다. 높이 5m가 넘어 보였다. 화강암 비석 뒷면에 나베시마 후손이 글씨를 쓰고, 다이쇼(大正) 13년 10월에 세웠다는 비기가 새겨져 있다.
^해발 349m 봉우리 꼭대기에 화강암으로 대지(臺地)를 조성하고, 그 위에 세운 비석의 위용이 시가지를 압도하듯 우뚝하다. 비석 옆의 도판(陶板)에 새겨진 안내문에 ‘1616년 이삼평이 자광을 발견해 아리다 야키를 창업한지 300년을 기념해 건립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래를 굽어보자니, 골짜기를 따라 길게 형성된 한일자 형 아리다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27년 전 첫 방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국 같았으면 어땠을까 잠시 비교해 보았다. 문득 ‘천황을 모신 신사보다 훨씬 높은 곳에 비를 세운 일’에 마음이 쓰였다. 이삼평을 도조(陶祖) 신으로 추앙하고 숭모하는 아리다 사람들 마음이 아름답지 않은가.
^비석 이름이 ‘陶祖李參平碑’인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이삼평은 일본에 끌려와 곧 가나가에 산페에(金が江三兵衛)로 불렸다. 그런데 창업 300주년 기념사업 때 이삼평이라는 본명으로 비를 세운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수많은 조선도공의 후예들이 치열하게 주장하고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관철되었을까. 그 덕분에 도조는 지금까지 조선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리라.
^산을 내려서니 어느덧 일본의 짧은 해가 저물었다. 인터넷으로 예약해둔 민숙(민박) 집을 찾아가려고 유명한 아리다관에 들러 지번을 댔더니, 멀지 않은 곳이라고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숙소에 들기 전에 저녁식사를 하고 가려는데 좀처럼 음식점 찾기가 어려웠다.
^아픈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마다 휴업이거나 영업시간 종료라 했다. 먹거리 천국인 다른 도시들과 크게 다른 점이었다. 예술도시의 품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물어물어 겨우 찾아낸 곳이 ‘갤러리 아리다’라는 유명한 도자기 식당이었다. 식사 후 벽면을 가득 장식한 2000개의 찻잔 가운데 골라서 차를 받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다음날 새벽 6시 민숙 집을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히 아침끼니를 해결할 곳이 없었다. 나중에 편의점에 들르기로 하고 일찍부터 취재에 나섰다. 교통편도 마찬가지여서 어제처럼 걷기로 했다. 이삼평 묘소는 멀지 않았다. 지도를 보니 아리다관에서 왼편 골목으로 접어들어500m 쯤 떨어진 곳이었다.
^아리다소학교를 지나자 오른편으로 길가에 면한 공동묘지가 나왔다. 200여 평 되어 보이는 묘지 한가운데 가나가에 산페에라는 일본이름의 팻말이 서 있었다. 반 토막 난 묘비 앞에는 시든 꽃이 꽂혔다. 비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맨 위의 ‘祖’자와 ‘月窓淨心居士’는 분명한데 다른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했다. 그는 아마도 불교에 귀의해 월창이라는 계명을 가졌던 듯하다.
^“1967년 아리다 용천사에서 사망자 이름과 수계(受戒)명을 적은 옛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月窓淨人 三兵衛 明曆元年 乙未 8月 11日’이라 적혀있다”는 유용준 교수의 고증은 귀국 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 편을 보고 알았다. 이삼평의 이름과 몰년(1655년)이 일치하는 기록이다.
^묘소에서 불과 100m 남짓 상류 쪽에 텐구다니 옛 가마터가 있다. 20도는 되어 보이는 비탈에 계단식으로 된 가마터 두 기가가 잘 정비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둘뿐이지만 발굴조사 결과 네 기가 확인되었다 한다. 일본 최초의 도자기 생산현장, 일본의 사적지로 지정된 곳이다. 제일 아래쪽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위로 불길이 치솟으며 그릇을 구웠으리라.
^가마 아래쪽 마을에 ‘사라야마대관소(皿山代官所) 자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대관소란 번 관리가 주재하던 곳이다. 도자기 생산과 유통에 관련된 일체의 행위가 일일이 체크되었을 옛일이 떠올랐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는 지금도 광석을 찧던 물레방아가 남아 있다. 돌을 찧어 가루로 만드는 일을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수력을 이용했던 도광시설의 잔재다. 냇가를 따라 이런 물레방아들이 줄지어 있었다니 한창 도업이 번성했던 시대의 풍경을 짐작할 만했다.
^이삼평은 가마와 공방과 방앗간이 있던 이 골짜기 시라카와(白川) 마을에 살았다. 밥 먹으면 일터로 나가 종일 물레를 돌려 작품을 만들거나 그것을 굽고, 저물면 돌아와 잠자는 일상의 연속이었으리라. 그렇게 생산한 작품들은 모두 번에 납입되고, 작가는 걱정 없이 먹고 산 정도의 기계 같은 일상이었으리라. 그 후손들에게 번듯한 무엇 하나 남겨준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와 동료들의 그런 헌신으로 사가 번과 일본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고, 오늘 같은 문명국이 되었다. 취재를 마치고 귀로에 들른 사가 시가지에는 옛 영화 재현의 염원을 담은 깃발이 거리마다 펄럭이고 있었다. ‘150년 전의 사가에 힌트가 있다’는 깃발의 메시지에 사가 도예에의 향수가 짙게 배어있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