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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4.20~1945.4.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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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경부근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마을 브라우나우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교적 엄격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1903년 13세에 아버지를 잃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05년 실업학교를 퇴학하고 미술대학에 진학하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1907년 18세 때 어머니를 잃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물려받은 유산과 그림엽서 등을 팔면서 생활하였다. 당시 오페라와 바그너에 심취하였고 매일 도서관을 다니며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하였다. 이때 인종이론이나 반 유태주의를 익혔고 히틀러의 정치사상이 형성되었다. 독신자합숙소의 공영시설(公營施設)에서 생활하면서 젊은 시절이 가난하고 불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공영시설은 비교적 사치스러운 시설로 알려져있어 어려움을 극복한 자신을 과장하기 위해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帝國) 내의 격렬한 민족투쟁의 와중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자가 되어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였으며,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증오하였다. 1913년 병역을 기피하여 독일 뮌헨으로 피신했지만 1914년 당국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신체검사에서 부적격으로 판정되어 병역이 면제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대한 애국심으로 열광하였던 히틀러는 독일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장(鐵十字章)을 받았다. 독일이 패전한 후 뮌헨에서 공산혁명이 실패하였는데, 그 직후에 히틀러는 군대에서 정치교육을 받고 반(反)혁명사상으로 정신을 무장하였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스)이라는 반(反)유대주의적인 작은 정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웅변에 능하였고, 그 웅변의 힘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당세를 확장하였으며,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여 당의 선동가로서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당명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으로 변경하고 1921년 7월 29일 마침내 당내(黨內)의 독재적 지위를 가진 당수가 된다. 그는 군부 ·보수파(保守派)와 손잡고 민족공동체의 건설, 강대한 독일의 재건, 사회정책의 대대적인 확장, 베르사유조약의 타파, 민주공화제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유대인의 배척 등을 역설하였고, 특히 대중집회를 자주 열어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1923년 11월 8∼9일 뮌헨에서 봉기(히틀러의 봉기)를 획책했으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출옥 후 와해된 당의 조직을 재편하고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것을 꾀하였다. 옥중에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출판하여,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내의 여러 가지 경향을 종합 ·정리하고, 1930년 9월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18.3 %의 득표율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일생이 바로 나치스의 역사가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독재지배를 요구하였는데,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나 P.힌덴부르크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자본가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大生存圈)을 수립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하여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4년 7월 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保守帝政派)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반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의 지하호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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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실패 10년 만에 권력을 쟁취, 히틀러의 나치 독일 시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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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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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언론 자본을 장악하고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는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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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독일을 광란의 도가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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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가스로 유대인 1만 5천명 정도만 죽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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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저택 사진이 최초로 공개됐다. 25일 데일리메일은 히틀러가 살았던 저택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히틀러 저택 사진은 사진작가 후고 예거가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2년 여 동안 베를린에 있는 히틀러의 집무실과 바이에른 사저를 찍은 것으로 7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히틀러 모습 사진에 커서를 두면 영문해설도.. 히틀러 저택 사진은 그의 호화스런 생활을 짐작케 하고 있다. 화려한 외관과 고급스러운 내부로 구성된 히틀러 저택은 수려한 경관까지 자랑한다. 보도에 따르면 사진작가 후고 자에게르는 1945년 전쟁이 끝날 쯤 자신이 촬영한 히틀러 사진 2천여 장을 가죽 서류가방에 숨겼고 미군 병사들에게 가방을 수색 당했지만 사진은 들키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 저택 사진을 포함한 히틀러 사진들을 12개의 유리 항아리에 넣어 뮌헨 근처 땅 속에 묻었다가 10년 뒤 발굴해 한 은행의 귀중품 보관소에 보관해왔다. 히틀러 저택 사진을 접한 네티즌들은 “히틀러 저택 으리으리하네”, “히틀러 저택은 영화 세트장 같다. 정말 저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었구나”, “지금 웬만한 부자들도 따라잡기 힘들 듯”이라며 감탄했다. |
첫댓글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침상에 몸을 던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이불과 베개에 묻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그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운 적이 없다.
이런 일을 일으킨 원흉에 대한 증오가 자라났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서 나의 운명을 점점 분명히 자각하게 되었다.”
역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제독다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