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바울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철저한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었으나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전할 때에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데 앞장 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맡아 가지고 다메섹에 사는 신자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늘에서 빛이 비춰 오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함으로써 개종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에게서 세례를 받음으로 어두워졌던 눈이 밝아지고 성령 충만함을 입어 모든 사람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180도 전환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바울에 대해 다메섹에서의 증언, 광주리 타고 피신하는 바울, 예루살렘에서의 증언 등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첫째, 다메섹에서의 증언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다메섹에 갈 때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는데 그는 마침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0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온 바울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하고 전도하니 듣는 자들이 다 놀랐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회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21절).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 자기 마음 가운데 영접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고, 구원받는 체험을 갖고, 그리스도가 구주 되심을 힘있게 증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의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기 마음 가운데 이루어져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전도를 받을 때에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갖고 우리 안에 역사하여 우리의 영과 합하여 우리 속에 그리스도 형상을 이루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칼빈의 5 대 교리를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이제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바울이 돌변하여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을 안에 계시게 된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번 여름에 우리 자녀들이 Family Reunion 모임을 이곳에서 갖기로 하고, 제가 제 자식들에게 가르칠 것을 준비하는 중에 「내 증인이 되라」는 한 책자를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한 가지 감동을 받은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우리가 말씀과 함께 되어 그리스도화 되어야 한다." 라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화신이 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하고는 행동을 달리하면 전도가 되지 아니합니다. 전도하는 말과 함께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그대로 본 받아 행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바울은 간증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기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수였다." 하지 아니하고 "구원받은 현재에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했습니다. 죄에서 구속받은 감격이 얼마나 큰지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받고 영생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심을 감격에 넘치는 마음으로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각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변론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신 그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변증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에게 핍박이 닥쳤습니다.
둘째. 광주리 타고 피신하는 바울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바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바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바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23-25절),
지금도 다메섹에 가면 바울을 창문으로 달아내린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받아 타고 있던 짐승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공모를 했다고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암살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권세를 갖고 있는 도시의 집권자들과 공모하여 성문을 지키며 도피를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선교 여행 중에 이적 기사를 많이 행한 대사도입니다.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바울이 어떻게 광주리를 타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바울을 포로로 해서 자기 종을 삼으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종이 된 바울이 왜 조그마한 다메섹성에서 왕 노릇을 못하고 잡혀 죽을 신세가 되었습니까?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굴복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닥쳐왔습니다.
그 까닭은 주님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재림시까지 이 세상의 전도자들은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당하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사 세상을 심판하실 그때는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심이 입증될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까지는 교회가 이 불신 세상에서 핍박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우리 주님께서 산상팔복을 가르치실 때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회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 5:11~12)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욕을 얻어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 형님 이인재 목사님이 우리집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었는데 전주 이씨 양반 집에 장자가 예수 믿어 제사에 참예하지 아니한다고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핍박이 일어났던 것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2-23절에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했습니다.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바울에게 "내가 너를 지킬 터이니 너는 염려하지 말고 여기 있으라." 그렇게 지시하지 아니하시고 "너는 이곳을 피하라." 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피할 길을 찾는데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고 있으니 도망갈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상의해서 피할 방법을 찾은 것이 광주리에 담겨 성문에서 달아 내리는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광주리 타고 도망 치는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말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달려 오던 그가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전도자가 되더니 다메섹 성문으로 광주리 타고 도망하는 초라한 신세가 됐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불 때는 가련한 신세가 됐습니다. 대제사장의 권세를 배경으로 한 그때는 의기양양하던 청년 바울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는 광주리 타고 도망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불행한 것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최고의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어떻게 광주리 타고 도망하는 것이 바울에게 영광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했습니다.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셋째, 예루살렘에서의 증언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 다닌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닌 제자들과의 사귐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과 처음부터 예수님 제자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일합니까? 이를 점검하려 예루살렘에 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려 하니 사도들이 두려워하여 면담을 허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중재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나바의 본 이름은 요셉입니다 (행 4:36),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권위자입니다. 바나바는 중재 역할을 잘했습니다. 바나바가 사도들에게 가서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받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에게 세례 받고 진짜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하고 증거해서 사도들이 의심없이 바울을 만나도록 하였습니다. 다메섹에서 전도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당해 쫓겨 왔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사도들이 믿고 증거하는 예수와 동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3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도들과 똑같은 자격으로 사도의 직분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8~29절).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에 바울은 그들에게 동참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증거하기를 "스데반을 죽인 것이 잘못이다." 했을 것이고,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됐다. 이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섬길 수있다." 라고 증거하였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할 때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바울의 증언이 힘있는 증거이건만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는 먹혀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증인은 생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헬라어에 증인이란 말과 순교자란 말은 같은 뜻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도 그를 죽이려는 것을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 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30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절).
사울의 개종과 전도의 사역으로 예루살렘과 전 지역의 교회들이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핍박자를 대전도자로 만들어 인류 구원의 대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가 된다." 라는 말처럼, 순교적 신앙을 가진 전도자들의 전도를 통하여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었습니다.
이방인이 된 우리들이 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모두 전도자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