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은 생애의 절반에 가까운 35년을 비슬산에서 살았다. 1227년 스물 두 살 나이에 선불장(選佛場)에서 상상과(上上科)로 급제한 뒤 포산 보당암(寶幢庵)에서 수행을 하면서 포산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1249년까지 22년 동안 포산에서만 이곳 저곳 거처를 옮기면서 지냈는데 몽고군의 침탈이 남쪽에까지 미쳤을 때에도 일연은 포산을 떠나지 않았다. 떠나기는커녕 포산에 남아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면서 감응을 빌던 중 문득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무주(無住)에 거(居)하라"고 했다. 이에 곧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머물면서 "삶의 경계는 줄어듬이 없고, 부처의 경계는 더함이 없다(生界不減 佛界不增)"라는 귀절을 참구(參究)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깨달아 "오늘에야 비로소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고 했던 것도 바로 포산에서였다.
그 무렵은 몽고군의 침탈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곤궁한 삶을 살았는지에 관하여, 서여 민영규 선생은 '일연과 진존숙'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까스로 도망쳐서 생명을 부지한 백성들에게 올바른 경작지를 잃고 살아남을 길이란, 군사상의 전략적 요지에서 멀리 벗어난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화전민이 되는 길밖에 없다. 일연이 왕실에서 주는 호사(豪奢)를 마다하고 평생의 도량으로 삼았던 곳이란 바로 그러한 화전민의 세계다. 일연과 같은 시기의 송광사 6세 사주(社主) 원감(圓鑑)이 남긴 시문집을 보면, 이러한 화전민과 더불어 십 년을 같이 사는 동안에 제대로 담근 장(醬)을 맛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며, 하늘에 떠가는 무심한 구름을 보고도 그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참회의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포산에서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일연은 1249년 상국(相國) 정안(鄭晏)의 청을 받아들여 남해 정림사로 가서 대장경 판각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후, 윤산 길상암, 강화 선월사 등지에서 주석하다가 1264년 영일 오어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때마침 비슬산 인홍사의 만회(萬恢)가 주지 자리를 양보하게 되면서 일연은 다시 비슬산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는 비슬산 동쪽의 용천사를 중창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삼기도 하는 등, 1277년 왕명으로 청도 운문사로 옮겨갈 때까지 다시 13년 동안을 비슬산에서 지내게 된다.
비슬산에 일연이 족적을 남긴 곳으로는 초기의 보당암, 묘문암, 무주암을 비롯, 인홍사, 용천사 등 비슬산의 동서, 남북에 두루 걸쳐 있다. 이런 연유로 일연은 비슬산에 대해서 꽤나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애착을 보여주는 글 중의 하나가 피은편 '포산이성'조가 아닐까 싶다.
"신라 때에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사(聖師)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함께 포산에 숨어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아 서로 10여 리쯤 떨어져 있었으나,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면서 매양 서로 찾아다녔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자 하면 산 속의 수목이 모두 남쪽을 향해서 굽혀 서로 영접하는 것 같으므로 관기는 이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다. 또 관기가 도성을 맞이하고자 하면 역시 나무가 모두 북쪽을 향해 굽히므로 도성도 관기에게로 가곤 하여 이렇게 지내기를 여러 해가 되었다. 도성은 그가 사는 곳 뒷편 높은 바위 위에 늘 좌선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위 사이로 몸을 빼쳐 나와서는 허공을 날아 떠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혹 수창군(壽昌郡)에 가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 터에 두 성사의 이름을 붙였는데 모두 유지(遺址)가 있다. 도성암(道成巖)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후인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나는 '포산이성'조의 흔적을 더듬느라 여러 차례 비슬산을 오르내리면서 관기와 도성이 달빛을 받으며 다녔다는 길을 나름대로 짚어 보기도 했다. '포산이성'조 묘사에 따르자면, 도성과 관기가 오갔던 길은 비슬산 정상인 북쪽 대견봉에서 조화봉을 거쳐 남쪽 관기봉에 이르는 비슬산 주능선 길이었던 같다. 십리가 넘는 그 길 주변에는 예나 지금이나 키 작은 관목과 풀들이 무성했을 것이고, 바람이라도 불면 주변의 풀과 나무들이 몸을 눕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를 맞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도성과 관기의 이야기는 그런 풍경들로 수식되어 있고 일연은 찬시에서 두 성인을 이렇게 묘사한다.
달밤에 거닐어 산수를 즐기던,
두 분 늙은이의 풍류(風流)생활은 몇 백 년이었든고.
산골에 자욱한 안개며 고목(古木)들은,
흔들흔들 찬 그림자 아직도 날 맞는 양.
일연이 두 성인의 교유(交遊)를 '풍류'로 표현하고 있음에서 그러한 모습을 '신선놀음'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연이 두 성인의 자취를 찾던 그 무렵은 일연 자신도 몽고군의 침탈을 피해 비슬산에 숨어 지낼 때였다. 산 속으로 피난 온 백성들이나 승려들은 낮에는 밥 지을 불도 마음대로 못 피웠을 것이며, 산길이라도 마음놓고 다니려면 해가 진 다음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십 년 동안 제대로 담근 장(醬)을 맛보지도 못할 정도의 고초(苦楚)였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피난생활을 겪은 일연이 도성과 관기의 옛일을 한갓 '신선놀음'으로 묘사했을 리가 없다. '신선놀음'은커녕, 두 성인의 삶은 일연과 동시대 백성들이 겪었던 피난생활보다 더 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귀절에 드러나 있다.
"반( )은 우리말로는 피나무라 하고, 첩( )은 우리말로는 갈나무라 한다. 두 성사(聖師)는 오랫동안 바위너덜에 숨어 지내면서 인간 세상과 사귀지 않고 모두 나뭇잎을 엮어서 옷으로 삼으면서, 추위와 더위를 넘기며 비를 막고 앞을 가릴 뿐이었다. 그래서 반사(㮽師)·첩사(𣛻師)로 호를 삼았던 것인데, 일찍이 들으니 풍악(風岳)에도 이런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옛 은자(隱者)들의 운치가 이와 같은 것이 많았음을 알겠으나 다만 답습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나뭇잎을 엮어 옷으로 삼으면서 추위와 더위를 넘기는 삶. 그것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근본주의적인 금욕(禁慾)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삶이 얼마나 철저했으면 일연 자신도 "답습하기 어렵다"고 했을까? 일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두 스님이 남긴 아름다운 행적에 관한 기록'이라 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인용하고 있다.
붉고 누른 풀 엮어 앞을 가리우니,
헤진 나뭇잎 옷이요, 길쌈한 베 아니더라.
바윗돌 위 앙상하게 여윈 소나무 뿐인데
해 저문 숲속으로 나뭇짐 돌아오네.
한밤중 달빛 향해 도사리고 앉으매,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 대로 반 남짓 날도다.
거적자리에 가로누워 단잠 들자니,
꿈 속에도 티끌세상 갈 바 있으랴.
두 암자 빈터에는 구름만 오락가락,
사슴은 오르건만 인적은 드물어라.
지금 비슬산에서 두 성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지명 같은 데에서 두 성인의 흔적을 어렴풋이 짚어볼 수는 있다. 우선 도성이 살았다고 알려진 곳에는 도성암(道成巖)이라는 바위가 남아 있고, 그 바위 아래쪽에 도성암(道成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관기의 유적에 대해서는, 비슬산 남쪽 봉우리에 붙여진 관기봉(觀機峰)이라는 이름이 있을 뿐 달리 흔적을 찾을 길 없다. '포산이성'조에 의지하여 추측해 보자면, "남쪽 고개에 암자를 정하였다"고도 하고, 도성의 거처와 "서로 떨어지기가 십여리 쯤 되었다"라고도 하는 점으로 미루어, 관기의 처소는 지금의 관기봉 아래 너덜 근처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