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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메시지 (설교안)
설교 대상: 굿네이버스 서울성동지부 회원들
제목: 굿네이버스 사역에 기독교회적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신학적 반성과 갱신
본문: 시편 8편, 에베소서 1:16~23
설교 목적
국내 최대의 NGO 단체인 굿네이버스는 그 본연의 사역인 빈곤 퇴치와 상생사회 건설에 기여하려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를 가로막는 기독교회의 신앙적, 신학적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다. 설교자는 시편 8편과 에베소서 1장을 상고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인간의 존재 목적과 그 임무,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 경영의 목적과 그 완성에 대하여 재정의함으로 기독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되돌아 보고자 한다. 그 결과 굿네이버스의 설립목적과 정신, 그리고 핵심가치가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회의 본래 정신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임을 입증하고, 기독교회 신자들이 갖고 있는 기존 신앙과 신학적 패러다임을 검토하여 바로잡고자 한다. 이는 교회들과 신자들이 선한 일에 동참하고 연합하는 일에 촉매가 되게 할 것이다.
설교 개요
1. 그리스도인이 선한 사업에 동참하고 연합하는 일을 가로막는 장애물
2.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교회의 임무
3. 굿네이버스와 교회가 함께 열어가는 상생의 세상
1. 그리스도인이 선한 사업에 동참하고 연합하는 일을 가로막는 장애물
우리들은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회가 사회를 위한 각종 선한 사업에 가장 열심을 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것은 교회의 비리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와 신자들이 스스로 안위하는 ‘근거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로 알고 싶다. 과연 비그리스도인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향한 선한 봉사활동에 더 적극적이고 더 많이 동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만약 사실이라면 왜 그런지를 알고 싶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사업이라는 것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활동을 말하며, 생명을 돌보고 더 풍성하게 하는 모든 노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업은 더 나은 세상에서 상생과 공생과 번영을 위해 애쓰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그것은 빈곤퇴치를 위한 구호사업, 약자를 보호하고 그 용기를 북돋우는 격려와 지원, 그리고 각 단체가 중점을 두는 모든 활동이며, 그것을 위해 서로 연대하고 연합하는 모든 노력을 포함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사업에 동참하고 연합하는 길에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신앙 자체에 있는 오해와 결함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제시함으로 이 장애물을 더 분명하게 생각해보고자 한다:
1. 만약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곧 심판 받아 불에 타버릴 곳으로 인식한다면 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진정으로 노력할 수 있을까?
2. 만약 우리의 구원이 이 세상으로부터 건짐 또는 ‘들림’ 받아 저 위 하늘에 있는 천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선한 사업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가?
3. 세상은 점점 나빠질 것이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결국에는 심판만이 세상을 치유할 유일한 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일에 진정으로 나설 수 있을까?
4. 이 세상은 잠시 잠깐 살다가 지나가는 곳이며, 우리의 진정하고 영원한 삶은 사후에 들어가는 ‘내세’에서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과 인생은 나그네를 위한 여관이며, 훈련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귀결이 아닐까?
5. 구원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타종교인이나 비신자들은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없고, 결국 이 세상과 함께 불에 탈 존재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결국 그들의 ‘개종’을 도와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협력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기독교인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장애물로서 그 생각이 완고할수록 선한 사업은 더욱 제한적이 될 것이고, 왜곡된 동기를 가지고 선한 사업에 참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신이 그런 올무에 갇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며, 이 사업이 더 많은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가 된 것처럼,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은 주의 종들이 모두 힘써야 할 일이다. 그럴 때마다 높은 산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고 새 길이 열릴 것이다.
이사야는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미리 말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40:3~5
그러면 위에서 제기한 장애물을 제거하여 평탄한 길을 내기 위하여 성경을 살펴보고 바로잡아 보자.
2. 성경이 보여주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교회의 임무
위 장애물은 각각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고, 성경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라고 도전한다:
1. 이 세상은 무엇인가?
2. 구원이란 무엇인가?
3.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기대해야 하는가?
4. 인생의 의미와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5. 인류는 연합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알아가는 작업은 어쩌면 평생토록 수행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성숙해감에 따라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더 깊어지고 분명해지고 구체화될 것이다.
나는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두 가지 본문을 살펴보면서 찾아 보려고 한다. 그것은 시편 8편과 에베소서 1:16~23이다.
시편 8편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시편 기자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노래한다. 성경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다.
2.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맡아 다스리는 대리인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음을 받은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시며, 그것을 통치하시는 왕이시며, 돌보시는 목자시며, 포도원의 농부처럼 그것을 가꾸시며, 마침내 그것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 완성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
하지만 왜 우리들은 이 세상이 잠시 후에는 불에 타서 없어질 곳으로 여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 다른 성경구절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2~13
베드로 사도는 도둑같이 주의 날이 올 것이므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라고 권면했다. 그 날은 낡은 세상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은 신천신지 곧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 천지는 곧 하늘과 땅이며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노아 홍수 이후에 천하를 뒤덮은 물이 물러가고 마침내 뭍이 드러나서 새로운 땅에 노아의 가족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거기에 정착했을 때, 그들은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물려받았다.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더 이상 종이 아니며, 더 이상 파라오의 신전건축자들이 아니다. 이제 자유인이며, 이제 열방을 위한 제사장들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주시려고 그들을 다시 창조하셨다. 이 사실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이사야 43:1, 7, 15
본래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하고 공허한 땅’에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물을 나누시고, 새롭게 생긴 땅과 하늘에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활동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성경의 방식이다. 현대인들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생각하는데 익숙하지만, 성경은 창조의 시작을 공허하고 혼돈한 땅으로부터 질서와 충만으로의 창조를 말한다. 즉, 카오스(chaos, 혼돈, 무질서)에서 코스모스(cosmos, 질서, 조화)로, 공허(emptiness)에서 충만(fullness)로의 활동이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는 성경의 표현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활동은 언제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선언이 실현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노아의 새 창조에서 반복되며, 이스라엘의 창조에서 다시 재연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은 교회의 창조로 이어진다. 이렇게 보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과 회복, 그리고 치료와 갱신은 지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표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는 말이 낡은 세상을 청산한다는 의미의 ‘시적인’ 표현은 아닐까? 노아 시대의 낡음은 홍수 심판으로 청산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게 일하신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성경의 용어의 의미는, 하나님이 낡은 세상을 정리하시고 새롭게 하셔서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처럼 신천신지 곧 신천지는 어떤 무리를 가리키는 이름도 아니며, 이 세상이 아닌 어떤 다른 세상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신천지는 새롭게 된 이 세상을 말한다. 그렇게 되는 날을 가리켜 주의 날 또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날을 사모하며 기대하라고 기도를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일을 행하시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막 1:15), 지금 제자들 무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으며(눅 17:21), 귀신이 쫓겨나가는 현장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마 12:28, 눅 11:20)!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그 아름다움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지으신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시려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입히셨다. 그것은 영화와 존귀로 관을 쓴 왕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그렇게 하시려고 혼돈하고 공허한 땅을 질서와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실 때마다 세상은 새롭게 되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새롭게 된 이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결국 이 세상은 곧 하나님의 세계요, 하나님의 왕국이요, 하나님의 나라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생각해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맡은 대리인이며, 하나님의 세계를 관리할 청지기이며, 장차 완성될 충만한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다. 성경에서 상속자를 자녀라고 말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7).
그러므로 인간이 그 본래적 임무를 잘 수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일이며,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의 삶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자신이 얼마나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달아 당당하게 살면서 자신의 임무를 발견하고 그것에 충성하는 삶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그렇게 살지 못하던 사람이 회복되어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될 때, 그는 ‘구원받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새롭게 결단한 삭개오에게 말씀하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나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마리아 여인도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적인 자긍심을 회복하고 공동체 속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이 마땅히 어디에 드려져야 할 지를 바르게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구원 받은’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범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을 정의하기를,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신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1)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2)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3)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4)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서 1:16~23
이 본문은 바울의 기도다.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다. 어쩌면 바울의 기도는 교회를 세울 때, 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핵심 내용을 다시 상기시키는 의도가 있으며, 바울 사도가 누군가를 가르칠 때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았던 주안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바울의 기도에서 그 내용은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이며, 그의 성도들이 알기를 간절히 바라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인은 다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1. 하나님이 누구신지
2.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지
4.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세상을 경영하시는 통치자시며, 그리고 마침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때 세상을 완성하실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부르실 때, 그 피조세계를 관리할 대리인으로, 그리고 함께 다스릴 동역자로, 마침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을 상속자(자녀)로 부르셨다.
그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의 소망과 부르심의 소망은 장차 풍성한 세상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기인한다. 아담의 창조 목적이 그렇고, 노아 가족을 신세계에 이끄실 때 기대하셨던 바가 그렇다. 그뿐 아니라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도 그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을 목적으로 하셨다. 물론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장자로 불러냈을 때도 온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셨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의 핵심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완성하시고 새롭게 열어가실 세상을 언제나 그 대리인들에게 주기를 기뻐하신다. 그 풍성한 기업은 아담에게 새로 지어진 세상이며, 노아 가족에게 기업은 신세계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는 그 기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그리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온 세계를 비추게 할 것이니, 결국 하나님이 그 부르신 사람들에게 주시려는 것은 열방이다. 시편 기자도 이점을 명확하게 노래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7~8
이렇게 하나님은 그 대리인들에게 한 지역을 줄로 재어주시고,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원심운동적인 생명력을 온 세상에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 중심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네 줄기의 강줄기는 온 땅을 비옥하게 한다. 그 중심은 가나안 땅이다. 그곳은 장차 시온산이 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실 거룩한 땅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다. 바울은 교회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임을 계속 일깨워준다. 교회는 하나님의 샘물이 흘러나오는 에덴이며, 거룩한 말씀을 받은 새 이스라엘이며, 마침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사실을 강조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크고 놀랍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
이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여기시는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떤 존재로 대하시는지, 특히 교회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장차 하나님이 완성하실 세상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동참할 때 맡은 일이 어떤 것인지, 나아가 이 모든 일을 이방 나라들과 그리고 열방과 함께 이루어나갈 때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클지 등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동참한 바울과 같이 확신을 가지고 모든 선한 사업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초두에 계획한 세 번째 주제는 다음 기회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 주제는 다음과 같다:
3. 굿네이버스와 교회가 함께 열어가는 상생의 세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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