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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가족여행을 떠나기에 이번주 주말편지는 부득불 불금인 지금 보내드립니다. 주말 즐겁게들 보내십시오.
휴가의 절정은 7월말부터 8월초까지라고 합니다. 우리 가족 휴가는 이보다 일주일 일러 덜 붐빌 것 같아 좋습니다. 어머니 칠순 때 시작된, 4남매가 부모님과 함께 하는 가족여행이 벌써 15년차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가족여행 일정 전후하여 어머니 생신, 아내 생일, 둘째 생일, 큰 녀석 신병훈련 6주 마치고 2박3일의 짧은 휴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한 가지씩 뚝뚝 떨어져 있으면 즐거움이, 행복이 더욱 커지고 길게 갈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모두가 모인 가운데 축하 받을 일이 많으니 이 또한 멋진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보답하고자 하는 생각, 사랑의 감정 모두 행동과 표현으로 옮길 때 더욱 빛이 나는 게지요. 그래서 이번, 어머니 생신을 전후한 이 많은 행복할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조금 과장하여서라도 제대로 표현해볼까 합니다. 우리 벗님들도 가족 뿐 아니라 더불어 사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에 담은 따스한 생각을 작은 행동으로 표현하면 모두가 더욱 즐겁고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름휴가 계획 있으신 분들, 즐거운 추억 만드세요. 가능하시다면 직접 휴가계획을 세워 보세요. 매년 휴가 세부계획을 제가 짜는데 가서도 즐겁지만 일정 만들어가는 과정이 여간 재밌는 게 아닙니다. 여기를 갈까 저기를 갈까, 어디를 먼저 갈까,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함께 하는 의미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우리 가족들이 늘 말씀해 주시니까요.
따뜻한 말(모셔온 글)=========================
사랑
위로
감사
배려
이런 따뜻한 말보다 더 따듯한 말이 있습니다.
사랑한다
위로한다
감사한다
배려한다
세상 모든 말은 행동으로 옮길 때 더 빛이 납니다.
---- 정철의 내 머리 사용법 ver. 2.0
▶금년 가족여행일정표(전주, 군산, 담양 등)입니다. 혹 이쪽으로 가실 계획이 있는 분들은 참조하세요....
4. 일정 : 7/23(토)~7/26(화)
1일차(7/23, 금 대구 기준 아침 9시 출발)
1)본가-전주 덕진공원 180km, 2시간
2)수원-전주 덕진공원 180km 2시간
3)인천-전주 덕진공원 219km, 2시간 30분
4)구미-전주 덕진공원 188km, 2시간
(전주 덕진공원에서 11시에 만납시다)
11:00~12:00 전주 덕진공원 둘러보기(연꽃)
12:00~12:15 국립무형유산원으로 이동 6km, 15분 소요
12:15~13:00 국립무형유산원 관람
13:00~13:50 한벽루 중식(한정식)
13:50~14:20 전주향교로 이동(250m) 및 돌아보기
14:20~15:20 자만벽화마을로 이동(400m) 및 돌아보기
15:10~15:40 이목대로 이동(200m) 및 둘러보기
15:40~16:20 오목대로 이동(250m) 및 둘러보기
16:20~17:00 경기전으로 이동(500m) 및 둘러보기
17:00~17:40 전동성당으로 이동(100m) 및 둘러보기
16:50~17:10 풍남문으로 이동(150m) 및 둘러보기
17:10~18:00 한국관으로 이동(400m) 및 석식(전주비빔밥)
18:00~18:30 한옥마을 돌아보기
18:30~19:00 숙소(행복드림마을)로 이동 15km, 30분 소요
19:00~ 체크인 및 휴식/취침(숙소 3실)
2일차(7/24, 일)
07:00~08:00 기상 및 산책
08:00~08:40 숙소에서 아침 식사
09:00~09:50 금강철새조망대로 이동 52km, 50분 소요
09:50~11:00 금강철새조망대, 금강습지생태공원 둘러보기
11:00~11:15 이영춘가옥으로 이동 88km, 13분 소요
11:15~11:30 이영춘가옥 둘러보기
11:30~11:45 경암동철길마을로 이동 5km, 15분 소요
11:45~12:15 경암동철길마을 둘러보기
12:15~13:10 뚱보식당으로 이동(3km, 10분 소요) 및 점심식사(정식)
13:10~13:20 진포해양테마공원으로 이동 1km, 5분 소요
13:20~14:50 진포해양테마공원, 근대건축관(200m), 군산세관본관(400m) 둘러보기
14:50~15:30 히로쓰가옥 이동(800m) 및 돌아보기
15:30~16:00 동국사 이동(500m) 및 돌아보기
16:00~17:20 월명공원으로 이동(1km) 및 월명공원, 해망굴 둘러보기
17:20~17:35 도마야로 이동 4km, 14분 소요
17:35~19:00 저녁식사(회정식)
19:00~20:00 숙소(행복드림마을)로 이동 52km, 55분 소요
20:00~ 휴식
3일차(7/25, 월)
07:00~08:00 기상 및 산책
08:00~08:40 숙소에서 아침 식사
08:40~09:50 죽녹원으로 이동 107km, 1시간 10분 소요
09:50~10:50 죽녹원 둘러보기
10:50~11:20 관방제림으로 이동(150m) 및 둘러보기
11:20~12:20 메타세콰이어길로 이동(2km, 5분 소요) 및 돌아보기
12:20~12:30 중식장소(원조제일숯불갈비)로 이동 4km, 10분
12:30~13:20 중식(숯불갈비, 떡갈비)
13:20~13:50 명옥헌원림으로 이동 19km, 30분 소요
13:50~14:20 명옥훤원림 돌아보기
14:20~14:30 식영정으로 이동 6km, 10분 소요
14:30~15:00 식영정 둘러보기
15:00~15:50 한국가사문학관으로 이동(200m) 및 돌아보기
15:50~16:30 광주호 호수생태원으로 이동(600m) 및 둘러보기
16:30~17:30 소쇄원으로 이동(1km) 및 둘러보기
17:30~18:30 벼슬집에서 저녁식사(능이백숙, 닭숯불구이)
18:30~19:40 숙소(더케이지리산가족호텔)로 이동 63km, 1시간 17분 소요
19:40~ 체크인/휴식/온천욕 및 취침
4일차(7월 26일, 화)
07:00~08:00 기상 및 산책
08:00~08:40 2대순두부에서 아침 식사(순두부, 청국장, 황태해장국, 전골)
08:40~09:40 벽송사로 이동 55km, 1시간 소요
09:50~10:20 벽송사 둘러보기
10:20~11:00 서암정사로 이동(600m) 및 둘러보기
11:00~11:50 금대암으로 이동(7km, 13분 소요) 및 돌아보기
11:50~12:40 실상사로 이동(4km, 7분 소요) 및 돌아보기
12:40~12:50 지리산나물밥으로 이동 8km, 13분 소요
12:50~13:30 중식(나물밥, 떡갈비)
(지리산나물밥에서 중식 후 둘레길 2~3코스 산책해도 좋음)
-각자 귀가 ⓐ-본가 115km, 1시간 20분
ⓑ-수원 261km, 3시간
ⓒ-인천 302km 3시간 30분
5. 숙소
두억행복드림마을 완주군 용진면 두억길 13-12(간중리 269-15), 063-247-0050
더케이지리산가족호텔 구례군 산동면 대평리 729, 061-783-8100
6. 식사
1일차 중식 : 한벽루(한정식)
석식 : 한국관(육회비빔밥) 복잡할 시 풍남정(육회/전주비빔밥) 혹은 백송회관(전주비빔밥)-백송회관은 1.5km 떨어져 있음
2일차 조식 : 숙소(정식)
중식 : 뚱보식당(정식)
석식 : 도마야(회정식)
3일차 조식 : 숙소(정식)
중식 : 원조제일숯불갈비(숯불갈비, 떡갈비)
석식 : 벼슬집(능이백숙, 닭숯불구이)
4일차 조식 : 2대순두부(순두부, 청국장, 황태해장국, 전골)
중식 : 지리산나물밥(나물밥, 떡갈비)
7. 중간에 챙길 것
1일차 중식 한벽루 정식 예약 재확인
2일차 석식 벼슬집 메뉴 예약
3일차 석식 도마야 회정식 예약 재확인
8. 가는 곳 주소
-덕진공원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2가 1314-4
-국립무형유산원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896-1(완산구 서학로 95)
-한벽루 전주시 완산구 교동 7-1(전주천동로 20 전통문화센터), 063-280-7003
-한국관 전주시 완산구 교동 72-2( 태조로 31), 063-232-0074
-풍남정 전주시 완산구 전동 71-1(태조로 52), 063-285-7782
-백송회관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177(서노송동 568-133), 063-282-5001
-두억행복드림마을 완주군 용진면 두억길 13-12(간중리 269-15), 063-247-0050
-이영춘가옥 군산시 개정동 413-1(동개정길 7), 063-452-8884
-경암동철길마을 군산시 경암동 539-4(경촌4길 14)
-뚱보식당 군산시 명산동 22-1(오룡로 58-2 주막골), 063-461-2554
-진포해양테마공원 군산시 장미동 1-4(내항2길 32), 063-445-4472
-근대건축관 군산시 장미동 23-1(해망로 214), 063-450-6110
-군산세관본관 군산시 장미동 49-38(해망로 244-7), 063-730-8721
-신흥동일본식가옥(히로쓰가옥) 군산시 신흥동 58-2(구영1길 17), 063-454-3337
-동국사 군산시 금광동 135-1(동국사길 16), 063-462-5366
-도마야 군산시 나운2동 416-2(나운로 95), 063-471-1113
-죽녹원 담양읍 향교리 산37-6(죽녹원로 119), 061-380-2680
-메타세콰이어길 담양군 담양읍 학동리 578-4, 061-380-3149
-원조제일숯불갈비 담양군 담양읍 반룡리 54-1, 061-381-1234
-명옥헌원림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후산길 103), 061-380-3752
-식영정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76-1, 061-380-3141
-한국가사문학관 담양군 남면 지곡리 319(가사문학로 877), 061-380-2700
-광주호 호수생태원 광주시 북구 충효동 442-4, 062-613-7891
-소쇄원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소쇄원길 17), 061-381-0115
-벼슬집 담양군 남면 지곡리 295( 지실길 46-24), 061-382-1277
-더케이지리산가족호텔 구례군 산동면 대평리 729, 061-783-8100
-2대순두부 구례군 산동면 탑정리 895-5, 061-783-0481
-벽송사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59
-서암정사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15
-금대암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산1-1
-실상사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지리산나물밥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 325-8(달오름길 22-5), 063-636-2747
9. 목적지 개요
마지막, 하루 추가한 일정에 들르는 벽송사, 금대암, 서암정사, 실상사는 자료 가져올 시간이 없어 예전의 여행기로 대신합니다. 네 절이 모두 특징적인 부분들이 있어 흥미롭습니다.
http://blog.naver.com/bornfreelee/50099289060
▶덕진공원 : 덕진공원은 하나쯤의 사연을 간직한 추억의 장소이다. 전주시내에 위치하는 멋진 공원은 드넓은 호수를 안고 있다. 옛 전주 땅의 완산부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의 견훤이 풍수지리를 따라 땅을 파고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하나 지금 형태는 고려시대에 들어 이루어진 자연호수로 보인다. 무엇보다 공원을 상징하는 경관은 여름날 호수 위를 가득하게 채우는 연꽃의 장관이다.
중심을 가르는 현수교를 따라 호수의 절반을 채우는 넓고 푸른 연잎과 그 위로 하얗게 피어나는 하얀색 연꽃은 찾아오는 모두를 감탄하게 만드는 장관이다. 뜨거운 햇빛의 여름날보다 보슬비가 내리는 호수 주변을 우산 아래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국립무형유산원 : 세계무형문화유산의 보호와 전승을 위한 허브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된 대한민국 문화재청 소속기관
-‘장인이 피워낸 꽃’ 특별전
▶전주향교 : 고려 말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으나 태조(太祖) 이성계의 수용(晬容)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 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654년(효종 5)·1832년(순조 32)·1879년(고종 16)·1904년에 중수하였고, 1922년에 명륜당을 보수하였다.
조선 후기의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대성전, 각 10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신문(神門), 외문(外門), 만화루(萬化樓), 5칸의 명륜당, 각 6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계성사(啓聖祠), 신문(神門), 입덕문(入德門), 4칸의 사마재(司馬齋), 6칸의 양사재(養士齋), 2칸의 책판고(冊板庫), 직원실, 제기고(祭器庫), 수복실 등 총 99칸인 대규모의 건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향교는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그 뒤 만화루는 1886년(고종 23)에 홍수로 수몰되었고, 책판고는 관찰사 조한국(趙翰國)이 관고(官庫) 소유 책판을 전주향교로 이장하여 책판고 내에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1920년의 홍수와 1950년 6·25전쟁으로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5성(五聖)·10철(十哲)·송조 6현(宋朝六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또 동무·서무에는 유약(有若)·복불제(宓不齊)·복승(伏勝)·동중서(董仲舒)·한유(韓愈)·이통(李侗)과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도리기둥에 맞배지붕이고, 양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좌우 1칸씩은 눈썹지붕을 이어 달아 꾸몄으며, 전면에는 모두 널문을 달았다. 따라서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9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판본 67종 93책, 사본 32종 51책의 총 99종 144책이 있다.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만벽화마을 : 자만벽화마을은 전주 한옥마을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한 곳이다. 승암산 능선 아래 무수히 많은 가옥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이곳은 원래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형성한 평범한 달동네였으나, 2012년 녹색 둘레길 사업의 일환으로 골목길 40여 채의 주택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유명해졌다. 골목이나 담장별로 꽃, 동화, 풍경 등을 테마로 한 다양한 스타일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지루하지 않게 하나하나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용히 산책하다 보면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살았던 곳을 표시한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와 푸른 하늘과 함께 전주 시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벽화마을의 명소 '옥상 정원'을 만날 수 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식당도 있으며, 대략 3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어 문화재 탐방코스로도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이목대/오목대 : 1974년 9월 24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오목대는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1900년(고종 37)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가 새겨진 비가 세워졌다.
경기전(慶基殿)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유허(遺墟)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모두 오래전부터 전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梧木臺梨木臺] (두산백과)
▶경기전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태종 10년인 1410년 창건되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국보 제317호인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등의 유적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던 어진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옮겨져 화를 면했으며 현재 경기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영정을 모본으로 해서 새로 그린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있으며 한옥마을을 찾은 여행객이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곳으로, 원래의 규모는 훨씬 컸으나 일제시대에 경기전의 서쪽 부지와 부속 건물을 철거해서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간 것이다. 남아 있는 경기전 건물의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전동성당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전동성당은 호남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순교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중국에서 벽돌 제조 기술자를 직접 데려 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공사 시작 7년 만인 1914년 완성되었다. 영화 「약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텅 빈 성당에서 슬픈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성당 내부의 둥근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우며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외관과 중앙 종탑을 중심으로 작은 종탑들을 배치한 상부의 조화로 웅장함이 느껴진다. 성당 앞의 하얀 그리스도상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한국 최초 순교터’ 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풍남문 :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읍성의 남문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1734년 영조의 명으로 개축되었다. 176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1층이 정면 3칸, 측면 3칸, 2층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문루(重層門樓)의 팔작지붕이다. 1768년(영조 44)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일반적인 성문건축과 같이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石築基臺)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다. 하층 내부에 앞뒤 두 줄로 4개씩 세운 고주(高柱)가 그대로 연장해서 상층의 변주(邊柱)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둥 배치는 한국 문루건축에서는 드문 형식이다.
공포(栱包)는 주심포(柱心包)집과 같이 기둥 위에만 배치되었으나 그 짜임은 다포집 계통의 솜씨를 따르고 있으며 우설(牛舌)도 역시 다포집과 같은 형태이다. 공포와 공포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배치하였으며 이는 주심포집에서 변천된 익공(翼工)집 건축에서 시작되었다. 하층 전후면의 중앙 기둥 위에 위치한 공포 하부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나 이러한 장식적인 면은 조선 후기의 건축일수록 더욱 많아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죽녹원 : 담양군이 성인산 일대에 조성하여 2003년 5월 개원한 대나무 정원으로, 약 16만㎡의 울창한 대숲이 펼쳐져 있다.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총 2.2km의 산책로는 운수대통길·죽마고우길·철학자의 길 등 8가지 주제의 길로 구성된다. 죽녹원전망대로부터 산책로가 시작되는데, 전망대에서는 담양천을 비롯하여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들로 조성된 담양 관방제림과 담양의 명물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생태전시관, 인공폭포, 생태연못, 야외공연장이 있으며 밤에도 산책을 할 수 있도록 대숲에 조명을 설치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竹綠苑] (두산백과)
▶관방제림 : 담양읍을 감돌아 흐르는 담양천의 북쪽 언덕에 따라 관방제림이 조성되어 있는데 제방을 따라 각종의 노거목이 줄지어 서 있다. 표고 약 500m되는 곳이다. 이 관방제림은 담양읍 남산리 동정(東亭) 마을부터 시작해서 담양읍 천변리(川邊里)까지 이어지는데 현재는 수북면 황금리를 거쳐 대전면 강의리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말하는 관방제(官防堤)는 천변리의 우시장까지를 말하고 그 길이는 약 2㎞에 이르고 있다.
관방제림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의 종류로는 푸조나무(111그루), 팽나무(18그루), 벚나무(9그루), 음나무(1그루), 개서어나무(1그루), 곰의말채, 갈참나무 등으로 약 4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구역안에는 185그루의 오래되고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큰 나무는 300∼400년 전에 심어진 것이고, 작은 나무는 철종 5년(1854)에 황종림 담양부사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담양 관방제림은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만들고 나무를 심은 인공림으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재해를 막는 지혜를 알 수 있는 역사 및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메타세콰이어길 : 담양에서 순창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높이 늘어선 전국 최고의 가로수길이다. 지금은 옆으로 넒은 새 길이 만들어져 차들이 쌩쌩 달리게 되었지만, 길이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이 길은 잠시 차의 속도를 늦추고 여유를 부려도 뒤에서 뭐라 하는 사람 없는 그런 길이었다. 지금은 이 길 끝부분을 차들이 못 들어오게 막아 관람객들이 걸을 수 있게 만들어놓고 있다. 500m 남짓한 짧은 길이지만 쭉쭉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 길 산책을 즐겨보자.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화석나무라는 별명이 있는데, 은행, 소철 등과 함께 화석으로 발견되는 나무다. 1940년대 중국의 사천성 지역에서 발견되어 그동안 화석으로만 존재가 확인되었던 나무의 실체가 밝혀졌다고 한다.
이곳의 메타세쿼이아는 1970년대 초반에 정부에서 펼친 가로수조성사업 때 심어졌는데, 3~4년생의 작은 묘목이 30년이 지난 지금은 10m가 훌쩍 넘는 키로 자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명옥헌원림 : * 연못과 정자, 백일홍이 아름다운 곳, 명옥헌원림 *
명옥헌원림은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에 위치한다. 별뫼의 원림들보다 한세대 뒤인 1625년, 명곡 오희도(1583~1623)를 기리기 위해 그의 넷째 아들인 오이정(1619~1655)이 도장곡에 창건하였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로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의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다.
* 명옥헌원림의 볼거리, 연못과 백일홍나 *
사각형의 작은 위 연못과 사다리꼴 모양의 아래 연못으로 이루어졌고, 그 사이에 정자를 세웠다. 계곡사이로 수량이 풍부했을 때에 “물이 흐르면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하여 이름을 얻었다. 위 연못은 인공적인 석축을 쌓지 않고 땅을 파내어 큰 우물같이 보인다. 아래 연못은 동서 20m, 남북 40m 크기로 자연 암반의 경사지를 골라서 주변에만 둑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다. 명옥 헌원림은 주변의 자연 경관을 차경으로 도입한 정사 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명옥헌은 연못 주변에 심어진 약20여 그루의 백일홍나무로 유명하다. 꽃 이름과 같이 여름철이 되면 석달 열흘 동안 늘 붉은 꽃나무 열에 연못이 둘러싸이게 된다. 바깥으로는 다시 소나무들이 열 지어 서 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전국의 인재를 찾아 호남지방을 방문할 때 후산에 머물고 있는 오희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명옥헌의 북쪽 정원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들 나무 밑에 인조(仁祖)가 타고 온 말을 맸다고 하여 이 나무를 일명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 계마상 (仁祖大王 繫馬像)’이라고 부른다.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인조는 오희도를 등용하기 위해 세 번 찾아왔다고 하며, 훗날 우암 송시열은 명옥헌의 영롱한 물소리와 경치에 반하여 ‘명옥헌’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기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식영정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 전라남도기념물 제1-1호. 조선시대의 문인 정철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송강정, 환벽당과 더불어 정송강유적으로 불린다.
▶한국가사문학관 :
* 한국가사문학의 본관 담양에서 만나는 한국가사문학관 *
담양군에서는 담양의 가사문학관련 문화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본관과 부속건물인 자미정·세심정·산방·토산품점·전통찻집 등이 있다. 전시품으로는 가사문학 자료를 비롯하여 송순의 면앙집(傘仰集)과 정철의 송강집(松江集)및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이 있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환벽당·소쇄원·송강정·면앙정 등은 호남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오늘에 있게 하고 있다.
한옥형 본관과 기획전시실(갤러리), 자미정, 세심정, 토산품전시장, 전통찻집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요 전시물은 가사문학 관련 서화 및 유물 1만 1,461점, 담양권 가사 18편과 관계문헌, 가사 관련 도서 약 1만 5,000권 등이다.
* 담양의 가사문학 *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산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초당춘수곡·사친곡·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민농가 및 작자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 가사(歌辭) - 고려말엽부터 나타난 3·4조 또는 4·4조의 운문(韻文)으로 된 긴 시가형식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소쇄원 :
‘한국 최고의 원림, 소쇄원’
한국의 민간정원 중에서 최고라는 칭송을 받는 소쇄원은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오늘까지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왜 소쇄원의 정겨운 모습을 사랑하고 아끼며 또 어루만져주고 싶은가? 소쇄원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조성하였으며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또 소쇄원은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하여야 하며, 중국·일본의 정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전남 담양에 위치한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호)은 1530년경에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영한 별서(別墅)원림이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주된 일상을 위한 저택에서 떨어져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 지어진 별저(別邸)를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원림(園林)이란 정원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선 원림을, 일본에서는 정원을 주로 선호한다. 정원이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스런 상태를 그대로 조경대상으로 삼아 적절한 위치에 인공적인 조경을 삼가면서 더불어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소쇄원, 조선 선비문화의 산실’
소쇄원을 조영한 양산보는 15세에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개혁을 추진했던 정암 조광조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아 현세적인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고향에 은둔하게 되었다. 이것이 양산보가 17세의 나이에 창암촌 계곡의 자연 속에 소쇄원을 꾸미게 된 계기였다.
당시의 왕이었던 중종은 연산군 시대의 악정(惡政)을 개혁하였으며,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중용하여 그들이 표방하는 왕도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개혁이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조급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훈구파, 즉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이는 결국 기묘사화를 불러일으켜 신진사류들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소쇄원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풍광을 관상하며 여유를 즐긴 장소요, 이상을 토로하던 문화 담론의 산실이었다.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사유와 만남의 지평을 넓혔다.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는 수양과 학문뿐 아니라 풍류와 사귐을 통한 선비문화의 형성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를 위한 장소인 정자나 별서를 경영하는 일은 곧 그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산물이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서 무등산 원효계곡에는 소쇄원을 비롯하여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 등의 정자원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소쇄원은 주거기능을 갖춘 별서로서 한국 최고의 별서원림이라 할 것이다. 양산보로부터 3대에 걸쳐 조영된 소쇄원의 예전 모습은 송시열이 그린 그림을 1755년에 판각(板刻)한 〈소쇄원도〉(瀟灑園圖)가 있어 짐작할 수 있었으나 목판 자체는 안타깝게 분실되고 말았다. 특히 이 목판화에는 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가 1548년 당시 소쇄원을 보고 쓴 48수의 시제가 새겨져 있으니 이를 〈소쇄원 48영〉이라 한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은 소쇄원의 건축적 구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각 공간에서 일어난 행위와 감상까지 생생히 전해준다. 시에 나타난 정원의 모습과 이미지는 그 자체를 건축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정도이다. 이 시는 소쇄원의 계획 개념을 핵심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대숲의 바람과 소쩍새 울음, 엷은 그늘과 밝은 달, 그리고 취중에 나오는 시와 노래다. 청각적인 소리, 시각적인 빛과 그늘의 대조, 그리고 관람자의 문학적인 감수성으로 소쇄원의 진가를 포착한 것이다. 소쇄원은 이렇듯 시각적 차원을 넘어선 청각적인 정원이며 궁극적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인 정원이다.
‘소쇄원의 건축과 조경’
그렇다면 소쇄원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왜 소쇄원을 최고의 원림이라고 칭하는가? 소쇄원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있는 그대로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느낌에서 출발하여 누가, 언제, 왜 이 정원을 만들었고 어떤 조경물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안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었는지 차츰 관심을 확대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쇄원 구성의 사상적인 배경에는 주돈이의 유학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으며, 생활철학으로서는 도연명의 안빈낙도 사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상징적인 요소로 대봉대 아래쪽에 대나무와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원하는 뜻이며, 광풍각 옆의 석가산(石假山)은 그 건너편 자미수림(紫薇樹林), 광풍각 위의 도오(桃塢), 계곡 위의 매대(梅臺)와 같이 무릉도원의 선계(仙界)를 나타내려 한 것이다.
소쇄원의 풍류적인 분위기는 그 시대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런 풍류적인 모습 속에서 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그래서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변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삶 속에서 자신의 안락(安樂)을 찾았던 비운의 한 선비가 가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이 속에서 하나의 실패로 좌절하고 마는, 어찌 보면 현실을 도피했던 나약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쇄원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민간원림 가운데서 디자인 면에서나 구성 면에서 단연 으뜸이다. 소쇄원은 우선 큰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과 그 사이를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 수많은 나무와 화초, 몇 단의 축대와 단아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아담한 공간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쇄원은 이들 이외에도 ㄱ자로 꺾인 담장과 조그마한 초정(草亭), 계곡을 건너는 나무다리, 물을 흘러가게 하는 홈이 파인 통나무, 네모난 연못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조경물과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자연스러운 경사면을 전통적인 직선의 단으로 처리하면서도 자연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각 공간 또한 부분마다 무리 없이 잘 연결되어 있다. 축대 위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의 정자는 소쇄원에서 가장 오래된 터에 근래에 옛 모습을 본떠 새로이 지은 것이다. 이를 대봉대(待鳳臺)라 한다. 건물을 대봉대라 할 수 있고 그 단을 대봉대라고 할 수도 있다. 이를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 칭하니 귀한 손님 오기를 기대하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대봉대 뒤쪽은 담장에 박힌 애양단(愛暘壇)이란 글씨처럼 따뜻하게 담으로 둘러싸인 마당이다.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효의 공간으로,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가장 빨리 녹는 따뜻한 곳이다. 소쇄원의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위에서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며, 거문고를 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여유롭다. 이를 소쇄원도에서는 1755년의 모습으로 자세히 그리고 있다. 애양단을 지나 계곡을 건너려면 조그마한 통나무 하나로 줄타기하듯 지나야 한다. 이곳에서는 떨어질까 두려워 위엄을 갖춘 양반걸음으로 걸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겸손해진다.
오곡문 아래 수구(水口)를 통해 들어온 계곡물은 소쇄원의 영역을 둘로 나누어 놓으며, 풍부하지는 않지만 면면히 이어져 소쇄원의 생기를 돋우는 생명수가 된다. 독목교(獨木橋)라는 통나무 다리 밑으로는 오곡문(五曲門)이 뚫린 담장 밑으로 흘러 들어온 물길이 다섯 번 굽이쳐 돌면서 흘러내려 간다. 즉 조그마한 연못이라 칭하는 암반 위의 조담(槽潭)에서 머무르고 소폭(小瀑)을 만들며 떨어져 십장폭포를 이룬다. 이처럼 계곡물은 굽이굽이 오곡류를 이루며 흐르다 떨어지나 일부는 통나무홈통으로 연결되어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라는 두 개의 네모난 연못에 이른다. 이 물은 물풀과 물고기를 키우고, 넘쳐서 흐르는 물은 조그마한 장식용 수차를 돌려 비폭(飛瀑)이 되어 광풍각 아래 협곡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수경기법은 낭만적이면서도 풍류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세련된 기법이다.
소쇄원에는 여러 건물이 있었다. 현재의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 초정 이외에도 고암정사와 부훤당이 더 있었다. 소쇄원의 사랑채와 같은 광풍각에 이르는 길은 위와 아래로 통한다. 손님이 저 아래 버드나무에 말을 매고 광풍각 아래에 이르러 제월당에 있는 주인을 부른다. 광풍각은 온돌방의 따뜻함과 협소함, 마루의 시원함, 작지만 당차고 아담한 공간의 핵심으로 모든 것이 모이고 확산되는 정점이 되는 곳이다. 여기에 앉아서 소쇄원의 공간뿐만 아니라 저 멀리 서석산까지의 외부공간을 느끼며 주변을 바라보는 것은 소쇄원의 백미이다.
제월당은 몇 개의 단을 올라 높이 위치하는데 매대(梅臺)의 기다란 담장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른다. 제월당은 구들방과 마루가 있어 안채와 같다. 구들방과 개방된 대청마루가 좁고 긴 마당과 나란히 놓여 있다. 높은 기단을 오르는 단이 있고 넓지 않은 토방에는 신방돌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내려다보는 제월당의 여유는 마당 때문에 더 크다. 제월당 옆의 공지는 공부방인 고암정사와 부훤당의 옛터다. 예전에는 많은 학도들이 모여 학습하였으리라. 마루 위에 걸린 각종 시문(詩文)에는 시간의 흐름이 쌓여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이 돋보인다.
소쇄원의 구성과 영역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입구 아래에서부터 뒷산인 옹정봉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넓고 가득하나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처럼 일련의 흐름은 뒷산 마을로 이어지거나 혹은 다시 소쇄원 출입구로 되돌아온다. 일부는 담장으로 일부는 대밭으로 그리고 일부는 이름 없는 나무로 경계를 이룬다.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느끼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뒷산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대나무숲과 각종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소쇄원인가? 담장 안에 국한된 소쇄원은 한정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느껴져 다소 무미건조하다. 멀리 상념의 나래를 펴서 관조하면 무등산,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나주의 금성산까지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의 확장이 일어난다. 선비들의 도가적 이상향이며 염원의 대상인 ‘무이구곡’(武夷九曲)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쇄원은 우리나라 궁궐 정원의 대표격인 창덕궁의 후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자연 한가운데 있으며 소박하고 개인적인 정서가 농축된 소쇄원에 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의 후원은 궁궐의 정원답게 다양한 시설들이 있어 호화롭고 다소 인위적이며 세련미가 가득하다. 창덕궁 후원은 금원(禁園)이라 하였는데, 이는 왕실만의 것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었으며, 일제가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하여 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고자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면서 비원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창덕궁의 후원에는 부용지, 애련지, 옥류천 등의 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수많은 정자와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활엽수가 많이 자라고 있다. 우리 전통원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물과 나무를 중심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것이다. 특히 우리의 연못에는 전통적으로 중앙에 둥근 섬이 놓이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중국과 일본의 연못은 타원형이거나 굴곡이 많은 모습이다. 규모에 있어서도 우리 연못은 중국의 연못처럼 턱없이 넓어서 위압감을 주거나 일본의 것처럼 작고 인공적이어서 답답함을 주지 않는다.
‘자연의 정원, 문학의 정원’
소쇄원은 건물이나 나무, 계곡을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에서 끝나는 공간이 아니다. 출렁이는 나뭇가지,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떨어져 구르는 낙엽,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가득한 푸르름, 속삭이듯 빛나는 햇빛 등을 비롯하여 자연 속에 녹아나는 한적함과 넉넉함, 이러한 아름다움은 결코 하나 둘에 한정되거나 끝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시인묵객들이 드나들었던 소쇄원은 눈으로 감상하는 시각적 차원을 넘어선 청각적인 정원이며 궁극적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인 정원이다. 자연의 기운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로 합치하는 곳, 그곳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청각과 음영의 효과…. 이제는 우리도 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소쇄원의 원림과 건축적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네이버케스트
▶이영춘가옥 : 일제강점기 군산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가 지은 별장주택으로 일년에 봄철과 추수철에 농장을 방문할 때 임시거처로 사용되던 별장과 같은 건물로 서구식과 한식, 일식의 여러 건축양식이 절충된 다양한 양식적 특성을 띄며,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쌍천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며 이영춘 가옥이라 불리게 되었다.아름다운 건물 외관으로 인해 빙점, 모래시계, 야인시대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장소가 되고 있다.
쌍천 이영춘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쳐라 불리는데 호인 쌍천(雙川)은 두 가닥의 샘물 즉 육제척 질병을 치유하는 샘물과 영혼을 치유하는 샘물이라는 뜻이다.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1903년 10월 태어났다. 평양고보 사법과 시절 담임선생이던 경성제대 와다나베 교수의 소개로 전북 개정의 구마모토 농장에 소속된 2만여 명 소작농 가족을 돌보기 위해 1935년 4월 33세의 젊은 나이에 자혜의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호교사제와 의료보험조합을 실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경암동철길마을 : 1944년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에 준공하여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철로 주변의 마을을 총괄하여 붙인 이름.
경암동 철길은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총 연장 2.5㎞ 철도 주변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1944년 일제 강점기 개설된 철도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동네를 이루었고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경암동 철길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최초로 개설되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북선 제지 철도”로 불렸으며 1970년대 초까지는 “고려 제지 철도”, 그 이후에는 “세대 제지선” 혹은 “세풍 철도”로 불리다 세풍 그룹이 부도나면서 새로 인수한 업체 이름을 따서 현재는 “페이퍼 코리아선”으로 불리고 있다.
2013년 현재 경암동 철길 마을에 모여 있는 집은 오십 여 채 정도이나 빈 집이 더 많다. 살고 있는 가구는 열다섯 가구 남짓이다. 철도 역시 현재 운영되지 않고 있다. 철길 마을의 건축물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에 건축된 것이 대부분이며 벽 색깔은 대부분 푸른색, 자주색, 노란색 계열의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다. 문의 모양이 다양하여 알루미늄으로 만든 문, 판자로 만든 문, 양철로 만든 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골목 양편으로 건축물들이 나란히 서 있는데 오른편의 건물과 왼편의 건물이 외형상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오른편의 건물들은 2층 구조가 많고 왼편의 건물들은 주로 화장실이거나 창고로 사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진포해양테마공원 : 진포해양테마공원은 고려 말 최무선 장군이 함포를 만들어 왜선을 500여 척이나 물리쳤던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8년에 개관한 해양공원이다. 항만을 끼고 있는 광활한 바다를 배경으로 지금은 쓰지 않는 군대 장비 13종 16대를 볼 수 있다. 월남전 등에 투입되었던 위봉함을 비롯한 해군함정, 장갑차, 자주포, 전투기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일선에서 활동하다가 퇴역한 육,해,공군 장비들이 전시 중이다. 군장비 내부 안에 들어가 직접 승선 체험을 할 수 있다. 위봉함 내부에는 진포대첩 모형과 당시에 쓰였던 무기, 최무선 장군이 만든 화포이야기, 군함 병영 생활 체험 등을 전시해놓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근대건축관 : 군산 근대건축관은 과거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대표적 금융기관이었던 조선은행 건물을 개, 보수해 문을 연 곳이다.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고 근대기 변화 속의 아픔, 저항, 인내, 희망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은행은 1920년대 초에 건립돼, 군산항을 통해 반출되는 쌀의 자금과 농지수탈 대출자금 등을 관리했던 곳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로비에 설치된 바닥스크린을 통해 근대 군산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모형을 통해서는 군산의 근대건축물을, 다양한 시청각자료를 통해서는 일제 강점기 군산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지점장실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인 경술국치를 기억하기 위한 전시공간이며, 금고실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화폐 등 유물을 통해 당시 조선은행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응접실에서는 군산 근대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야외전시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방공호와 소설 '탁류'의 주인공들을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옛군산세관 : 대한제국(1908년/순종 2년 6월)에 만들어졌으며 당시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불란서 사람 혹은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는 설이 있다. 군산세관은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건물만이 남아 있으며,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 현재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05년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제1차 군산항 축항공사기간 (1905~1910) 중인 1908년(순종2년) 6월에 만들어졌다. 서양식 단층 건물로 건평은 약 228m² 이었다. 건물의 지붕은 고딕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 낸 것은 영국의 건축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구 세관 옆에는 신세관이 있다.
국내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1) 구)군산세관 본관 / 2) 한국은행 본점 / 3) 서울역사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히로쓰가옥(신흥동일본식가옥) :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히로쓰가옥이 위치한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거주지역으로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샤브로가 지은 주택으로 (구)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명의로 넘어가 오늘날까지 한국제분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바람의 파이터', '타짜' 등 많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이 주택에서 촬영되었다. 건물의 형태는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다. 목조 2층 주택으로, 지붕과 외벽 마감, 내부, 일본식 정원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동국사 : 동국사(東國寺)는 1909년 일본 승려 선응불관 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일제 강점기 36년을 일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온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그리하여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 남겨진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대웅전과 요사채가 실내 복도로 이어진 것이 특징이다. 화려한 단청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처마와 대웅전 외벽에 많은 창문이 일본색을 나타낸다. 조계종 제 24교구인 고창 선운사의 말사로, 동국사의 대웅전은 2003년 7월에 국가지정 등록 문화재 제 64호로 지정되었다.
동국사의 본래 이름은 금강선사였다. 금강선사는 1909년 일본인 승려 내전불관이 군산에 포교소를 개설하면서 창건한 조동종 사찰이다.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일본정부의 요청에 의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정토진종 대곡파가 포교를 개시하였고 1904년 군산에도 포교소를 개설하였고 일연종이 뒤를 이었다. 결국 일본 불교가 우리나라에 진출한 까닭은 순수한 불교포교가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본정부의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 불교를 포교하고자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불교는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을 건립하였다. 금강선사가 창건되기 전 군산에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강사를 창건한 내전불관은 1909년 당시 77세의 고령으로 군산 지역을 순석하다가 군산 일조통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하였다. 1913년 7월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금의 동국사을 신축하였다.
동국사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은 모두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동국사 대웅전은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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