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선야곡 ★ 작사 유 호 작곡 박시춘 노래 신세영 전선야곡은 1951년 10월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발표한 한국의 대표적 전쟁가요이다.
당시 문화예술인들이 대구에 많이 모여있었다. 육군본부가 자리잡았고, 정훈부가 대구 계산성당에 자리잡아 대구는 전선문학과 가요의 산실이었다. 당시 박시춘 작곡가도 전쟁중 대구에 내려와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전속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가수 신세영(申世影, 1926 ~ 2010.8.22)은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로 192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故 박시춘 씨가 작곡한 대표적인 한국 전쟁 가요 '전선야곡'의 가수이자, 나훈아가 불러 유명한 '청춘을 돌려다오'를 작곡한 인물이다. 유년 시절 대구에서 성장한 그는 1947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구 오리엔트 레코드사 주최 콩쿠르대회에서 입상한 뒤 이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신세영이란 예명은 당시 최고의 여가수들이었던 신카나리아의 '申', 장세정의 '世', 이난영의 '影'을 한글자씩 조합해 만든 것이다. 1948년 '로맨스 항로'로 데뷔한 그는 1951년 발표한 '전선야곡'으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명성을 얻게됨과 더불어 대표곡이 된 전쟁가요로 당시 전선에 메아리친 노래이다. 히트곡으로는 '무영탑 사랑' '영 너머 고갯길' '바로 그날밤' 등이 있다. '전선야곡'은 1951년 박시춘이 곡을 구상해 작사가 유호에게 노랫말을 부탁한 곡이다. 박시춘은 남인수를 생각하고 곡을 썼지만, 오리엔트 레코드사 사장 이병주가 신세영을 추천했다. 2010년 4월 신씨를 생전 마지막으로 인터뷰 한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해방 이후 현인 씨에 이어 두번째로 가수가 된 인물" 이라며 '전선야곡'은 선생님께 대표곡 이상으로 의미가 각별한 곡이라고 했다. 전선에서 그리는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담은 이 곡은 취입한 그날 어머니가 운명하셨기에 이 노래를 더 애절한 마음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 당시 열악한 시설속에 자동차 경적을 피하기 위해 밤에 모포로 창문을 가리고 취입했다고 한다. 이어 "선생님은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든 시기 가요사의 명맥을 이은 분" 이라며 '전선야곡' 등의 노래로 민초의 아픔을 달래준, 가요 역사에서 의미있는 분으로 2010년 8월22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 명예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2010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신세영 씨가 취입했던 '전선야곡'의 음반 재킷> ■ 유 호 <1921년 11월 15일 ~ > 광복 이후 드라마작가 1호인 동시에 현재까지도 최다작의 기록을 갖고 있는 방송작가.
유호(본명 유해준(兪海濬),94세) 선생은 1921년 11월 15일 황해도 해주에서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서울로 이사해 39년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 1943년 귀국한 뒤 얻은 첫 직장이 '동양극장'이었다. 당시 동양극장은 한국 최초의 연극전용 상설극장으로 당대 대중문화의 중심지였다. 극본 쓰는 법을 한번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 극장에서 일하면서 매일 연극을 보니까 속으로 저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한다. 이 때 처음으로 '兪湖' 라는 필명을 썼다. 유(兪)자는 '맑을 兪' 라고도 해서 '맑은 호수' 를 연상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어 해방 직후 미군정이 세운 서울중앙방송(KBS 전신)에 들어가 낭독소설과 라디오 연속극을 쓰면서 우리나라 첫(제1호) 방송작가가 됐다. 노랫말은 당시 방송국 경음악단장이던 박시춘의 부탁으로 쓰게 됐다. 하도 성화를 부려서 자신의 첫 노랫말이자 해방 후 최고 히트곡으로 꼽히는 '신라의 달밤'을 단숨에 썼다는 그다. 심지어는 술집으로 찾아온 박시춘에게 즉석에서 가사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작곡가 박시춘, 황문평, 손목인, 이봉조, 신중현 등 당대 제일의 작곡자들에게 숱한 히트곡 노랫말을 써주고는 돈 한 푼 받은 적 없단다. “모두들 '후딱 쓰고 나가 대포 한잔 합시다' 하면 끝이야. 나도 막걸리 한 잔 마시는 것으로 만족했지. 허허허.” 본격적으로 대중가요에 손댄 것은 1947년 '신라의 달밤' 을 시작으로 '비나리는 고모령' '낭랑18세' '아내의 노래'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50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의 창작열은 불꽃처럼 빛을 발한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 에 이어1.4 후퇴 때는 군인들 사기앙양을 위해 대구에서 '전선야곡' 이 탄생했다.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며 만든 노래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 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역사의 현장에서 생생히 기록된 문화유산들이다. 방송계에서 60년대와 70년대는 단연 '유호시대'였다. 61년 개국한 TBC-TV 주간 기본방송편성표에 한때 '유호극장' 이란 프로그램이 존재하였다. 본격적인 TV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이후 'TBC 일요극장' 을 통해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때문에 방송국 측은 아예 '일요극장' 을 작가의 이름을 딴 '유호극장' 으로 타이틀을 바꾸었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드라마작가 유호란 이름이 얼마나 시청자에게 어필했었나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한마디로 그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유호 드라마의 인기는 거침없이 질주했고 영화로도 속속 제작되었으며 더불어 주제가 역시 크게 히트했다. 맨발의 청춘, 길 잃은 철새, 맨발로 뛰어라, 남성금지구역, 님은 먼 곳에, 등. 방송드라마 인기 못지 않게 주제가 만으로도 그는 가요계에서 동시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밖에도 군가 '맹호부대의 노래’와 '진짜 사나이' 도 그의 빼어난 솜씨가 빚어낸 명곡들이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1980)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제3회 내성문학상(來成文學賞)(57), 제1회 방송문화상(放送文化賞)(68)을 받았으며 2011년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박시춘[朴是春] 1913.10.28 - 1996.6.30 한국가요 100년사라 말하는데 2013년은 박시춘이 태어 난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생애 삼천여곡을 작곡한 가요계의 대부! 그가 빠지면 우리가요 100년사는 백지와 다름없을 만큼 박시춘은 위대한 작곡가, 가요계의 대명사, 가요계의 베토벤, 국민 작곡가등 으로불려 졌으며 전설이며 보물이라 할 수 있다. 경상남도 밀양 태생. 본명 박순동(朴順東). 아버지 박원거(남포)는 밀양에서 기생을 양성하는 권번(卷番)을 운영하였다. 부유한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며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기타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어둠 속에 피는 꽃>등을 발표하며 1929년 작곡가로 데뷔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937년 김정구(金貞九)의 첫 취입 노래인 <항구의 선술집>이 호평을 받았고, 강문수(姜文秀)와 재회하여 남인수(南仁樹)라는 예명으로 <애수의 소야곡>을 취입하였다. <애수의 소야곡>은 1937년 말에 발표된 일제 강점기의 트로트 곡으로 후에 '가요 황제'로 불리게 되는 남인수의 출세작이자 대표곡으로 유명하다. 광복 이후에는 1946년에 직접 박시춘악단을 조직해 공연을 하기도 했고, 조국분단의 슬픔을 노래한 <가거라 삼팔선>작사가 유호, 가수 현인과 새로운 컴비를 이루어 발표한 <신라의 달밤> 이 곡은 당시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널리 유행했다. <박시춘. 반야월(울고넘는 박달재 작곡). 유호> 또 하나의 비극인 6.25가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 소속으로 전장을 누비며 위문 공연과 많은 군가, <승리의 용사>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임 계신 전선> 등을 작곡하여 우리 군의 사기를 높이고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싸웠으며,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최고의 명곡을 탄생 시켰다. 전쟁 중 아군과 적군을 구분해야 할 특별한 경우 신라의 달밤을 모르면 인민군이라 했는데 인민군들도 배워서 많이 애창 했다 전한다. 주요작품으로는 <비내리는 고모령> <삼다도 소식> <물새 우는 강언덕> <딸 칠형제> <오부자의 노래> <돌지 않는 풍차> 등 수많은 인기곡을 발표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봄날은 간다>등을 여가수 백설희가 취입하게 하여 그녀를 톱가수로 만들었다.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연예인협회 이사장(1961~1972), 음악저작권협회 명예회장(1981)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1982년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그는 심한 당뇨병과 수술불능의 녹내장에 시달리다 1996년 6월 30일 오후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박시춘이 남긴 주옥 같이 아름다운 노래와 악상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며 근간을 이루고 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 전선야곡 ★ 작사 유호 / 작곡 박시춘 노래 은방울 자매
(대사) 총소리도 멎어버린 고지위에 달은 뜨는데 내 고향 내 집에도 저 달이 비치겠지 지금쯤 어머니는 정한수를 떠다놓고 이 아들의 무운장구 저 달보고 비시겠지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 그 목소리 그리워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속에 달려간 내고향 내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오 아~~ 아~~ 쓸어안고 싶었오 ♣ 신세영의 원곡 듣기 ♣ 작사 유 호 / 작곡 박시춘 노래 신세영
♠ 신세영의 전시가요곡 듣기 ♠ ♬ 바로 그날밤 ♪ 유호 작사 / 박시춘 작곡 노래 신세영
(대사) 힌눈 내리는 밤이었 습니다. 전선으로 님을 보내는 마지막 밤 가물거리는 촛불아래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대화는 겨울밤을 녹일듯 더웁기만 했답니다.
나는 당신의 아내, 내 남편의 아내 대한의 아내, 국군용사의 아내이기에 이렇게 님의 무운을 빌며 굳세게 살아 갈것입니다. 1.흰눈이 휘날리는 바로 그날 밤 그대와 나는 촛불을 밝히면서 전선에 가는 짐을 싸고 있을 적에 멀리서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 밤하늘 그렇게 울렸지 아 ~ 그때가 잊지 못할 시절이었네 2.반달이 서산 위에 걸려있던 밤 그대와 나는 화롯불 둘러앉아 청춘일기를 적어보고 있을 적에 눈보라 헤치며 벌판을 달리는 기적도 정답게 울렸지 아 ~ 그때가 잊지 못할 시절이었네 ※ 대사는 더빙(Dubbing)한것으로서 매끄럽지 못한점 양해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