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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마음을 같이하고 함께 도전(挑戰) 해야만 열리는 미래
헌법이 규정한 국민의 기본의무(國民─基本義務)인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토방위의 의무를 포기하거나 기피하지 않는 국민, 국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인을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을 다 누리는 국민이 많을 때, 그 사회와 국가는 지속적인 발전과 안녕이 있어집니다.
국민은 벼락부자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인권과 신장(伸張)이 보장된 가운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합니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큼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바랄뿐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룬 대기업들과 자본가들이 공동의 이익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어 나누어 줘야 합니다.
70년대부터 지금까지 오직 축재(蓄財)만 해왔고, 국가나 국민이 어떻게 바라보고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에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건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국가발전에 장애를 주는 거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가, 대기업의 건전한 사회참여는 순수한 자의(自意)에 의해서만이 이루어 져야 합니다.
정부나 정치권, 법률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개인의 재산이나 명예를 침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부터 정치권에서 대기업에 대한 제제나 법적 구속력을 행사하는 것은 전제군주(專制君主) 체제나 독재정권(獨裁政權)하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과거 정치인들 가운데 대기업의 공평분배를 통한 국민들의 불평등(不平等)을 해소하자고 하며 부유세(富裕稅)를 증세하고 대기업의 소득세율(所得稅率)을 높이자고 주장을 합니다만, 이것 역시 2015년 통계를 보면 상위 10%의 사람들이 한국전체 소득세 83%를 납부하고 있고, 이 10%의 사람들이 97%의 법인세(法人稅)를 납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36%~40%의 국민들은 직업과 소득이 있지만 는 소득세를 하나도 내지 않고 있는 것이 어처구니 같지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 부유세(富裕稅)를 주장하고 법인세율을 높여 더 많이 세금을 내도록 하자는 논리는 반대로 기업가, 재벌에 대한 불평등이고 모순을 조장하는 것일뿐더러 국민들로 하여금 지금도 심각한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고 사회갈등을 증폭시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확언(確言)하는 것은 불평등이나 가난문제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근간 정치권과 일부 국민들에 모든 것을 국가 최고통수권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정상적인 버릇이 생겼습니다만, 정부는 만능도 아니고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을 정부가 행사해야 하는 것으로 몰고 가면 과거 세계역사를 보더라도 권력은 부패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부패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경제 분배(經濟分配)만을 최대의 가치로 우선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민주주의(民主主義, democracy)는 그리스어(語)의 ‘demokratia’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demo(국민)’와 ‘kratos(지배)’의 두 낱말이 합친 것으로서 ‘국민의 지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국민(國民)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기본적 인권(人權),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 정부의 여섯 가지 시책(施策)중 국민의 복리증진(福利增進)을 위한 것도 있지만, 가장 우선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인 선거, 출판, 결사(結社), 언론, 비판,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한 보장과 국민의 재산권보호, 국토보호 등입니다.
재산 분배를 통한 평등을 원칙으로 하지 않습니다. 지구상에 100% 분배의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곳은 공산독제국가뿐입니다. 불평등의 문제 해결을 복지제도((福祉制度)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 역시 모순(矛盾)인데, 한두 번 나눠 준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빈부격차도 없을 뿐더러 성공한 나라도 없습니다.
어떤 제도이전에 우선돼야 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식(國民意識)의 개혁입니다.
<우리의 민주투쟁의 근본 결점은 아무런 원리(原理)의 주장이 없는 점입니다. … 또 다른 하나의 정권을 세우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대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건지자는 것이 우리목적입니다. … 사람 그 자체를 고치지 않고는 정권을 열 번 변경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1981. 함석헌 선생이 쓴 짧은 글 중에서.>
복지제도(福祉制度) 즉 나눔에 대하여 ‘간디’선생은,
<충분히 노동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하면서도 정직하게 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무료로 양식을 제공하지 않으며, 그런 혜택 받는 사람이 건강하다고 편명(篇名)될 경우에는 무료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시킴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한 습관이 지금까지 나라의 명예를 더럽혀왔으며, 게으름과 위선, 심지어는 범죄까지 키워온 것이다. 그러한 그릇된 자선(慈善)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이
나라의 힘에 아무런 보탬이 도지 못했으며, 베푸는 사람에게 쓸모없는 명예를 더해주었을 뿐이다.> <The Mind of Mahatma Gandhi 1967. p81>
20.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신의 음성이 들립니다.
한국은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세계가 놀랄 만큼의 경제성장을 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노동에 일찍 지친 국민은 임금보다는 여유와 휴식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팽배(澎湃)하기 시작했으며, 90년대 말-2천년 초에 세계국가들의 상식을 벗어난 GNP(국민총생산, Gross National Product) 3만 $가 되기 훨씬 이전에 주 5일 근무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국민은 이를 대환영하며 쉬면서도 과거처럼 10%이상의 고도경제성장을 유지할 것으로 낙관했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세계인들이 “한국은 너무 일찍 샴푸인 을 터트렸다”는 비야냥(Alay etmek)거릴 때입니다. 이 말은 아직 결승점에 도착하기 이전에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잠시 머물렀던 조그만 그룹사의 경영총수는 조금 여유가 있어지면 1억 미만을 투자해 새로운 회사를 창립하여 젊은이들이 경영하도록 했습니다. 기업의 수익을 나눠 갖는 방식도 있지만,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작은 회사를 차려 경영토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 실정이 서로 믿기 어려운 일로 작은 회사 창립보다는 상여금을 우선 할 수 있습니다만, 일자리 창출을 하여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정당한 노동의 결과를 통해 자신의 미래 삶을 엮어 나가도록 하는 일은 매우 소중한 일입니다.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매우 건전한 사람입니다.
성서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라는 말씀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지켜왔고, 앞으로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조직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짐이 되고, 또한 돌아다니면서 진보(進步)를 방해하는 일만 만들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급식 하는 곳이 매우 많습니다. 또한 그런 일을 박애(博愛)라고 하고, 이일을 통해 유명인사까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무료급식을 하는 것에 수차례 가보면 진정 일할 수 없는 허약하고 병든 사람이나 노쇠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일하기 싫은 사람들, 일에 대하여 의욕을 상실한 사람들이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 우려 됩니다.
지금처럼 무료급식 하는 것은 무료봉사자들과 기업들,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밥을 나눠주는 것으로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들에게 밥을 주는 비용을 모아 일거리를 제공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무료급식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 일하기 싫어하고 얻어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입니다. 무료급식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무료급식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 즉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사람들의 끝은 결국 발전적이지도 않고 창의성도 없습니다. 만약, 신이 나타나 그들에게 말할 기회가 있게 된다면, 이 한마디 밖에 없을 겁니다.
“ If a man will not work, he shall not eat.”
인류 역사 중에 가장 교육을 잘하여 국민 모두 탁월한 지식과 지혜를 소지하고 있는 유태인(猶太人)의 경우, “ 배곯은 자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그냥주면 주는 사람도, 받다 먹는 사람도 종국(終局)에는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종교지도자로 있었던 몇 년간 청소년으로 편성(編成)된 고아원을 직접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제일 아동이 많을 때가 22명이었고, 연령은 8세부터 17세까지 이었습니다. 22명 모두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상태로 출생신고와 호적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그때 일반적인 상식으로 숙소를 마련해주고 먹을 것, 입을 것을 기증 받아 주게 되면 고아원 운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아원 운영으로 수익(收益)을 볼 수도 있고, 골목대장 행세도, 박애를 실천하는 선한 사람으로 칭찬도 받으며 국가나 행정기관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당경찰서에서 위촉하는 ‘청소년 선도위원’도 되고 해당지역 유지(有志)행세도 할 수 있습니다.
90년대 초 당시 국가에 신청하면 한 어린이당 27만원의(당시로는 많은 금액) 식비를 제공해주고 많은 지원이 있었으니 식량이나 다른 걱정은 해결되고, 단체나 지인들에게 부탁하면 기부금과 의복, 물품 등 생필품을 많이 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황을 알고 나의 경제여건으로는 버겁고 염려되었지만, 우선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기로 하며 소문도 내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노력해 모든 비용을 충당하기로 하고 새벽부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다른 고아원을 전전한 경험이 있는 청소년들은 처음에는 먹을 것 많이 없는 고아원, 간식도 없는 곳이라고 불평했지만, 1년이 지나니 그때야 조금 나의 처신을 이해를 했습니다.
구청이나 행정기관, 정치인들, 사업가들이 종종 쌀이나 의복, 기증금을 들고 와 아이들을 모아 놓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방문과 기념촬영을 생색내기 가식적(假飾的)인 행동이라고 생각해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은 이 청소년들의 미래를 열어주는 일입니다. 정말 일하기도 싫어하고, 공부하는 것도 매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이 있어야 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정신을 갖도록 하는데 2년이나 걸렸습니다.
나 자신은 가난하지만 가난해진 이유는 본인 자신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을 책망하거나 지지(支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불구자(不具者)어거나 쇠약(衰弱)함으로 도저히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종교기관이나 국가에서 당연히 구제(救濟)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구제 사업을 하는 이들이 사람들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불러 일으켜 속이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좋은 일이라는 제목을 걸고 많은 자선금(慈善金)을 받아내며, 언론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도 반갑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나는 90년대 초부터 한경직(韓景職, 牧師, 1902-2000)목사님과 함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자선단체를 운영한다는 빌미로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윗사람들과(한경직 목사, 이한빈, 박세직, 김경래) 의논해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급자족(自給自足)하고 국민의 기탁금을 100% 세계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결정해 실천을 했습니다. 홍보를 위해 언론도 이용하지 않았고 국가나 행정단체로부터 표창(表彰)하나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직까지 그렇게 운영한 봉사단체는 한국에 없는 것으로 압니다.
역사가운데 인간의 칭찬과 명성(名聲), 표창(表彰)에는 항상 검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내가 받은 영예와 영광 뒤에 희생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자(賢者)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일, 옳은 일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는 성서의 말씀에 순종함이 옳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지금도 많은 자선단체들이 국민의 기탁금 중 60% 이상을 자신들의 단체 운영자금, 임대료, 직원 월급, 활동비등 경상비(經常費)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봉사단체 운영자들도 일하기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선행, 구제는 가까운 주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돌아보아’라고 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요즘은 국가, 경제, 정치관계가 세계화라고해서 선행과 구제까지 세계화를 주장하며 본의(本義)보다는 여행과 부대비용(附帶費用)에 많은 허비(虛費)를 합니다.
진정한 봉사자(奉仕者), 즉 국가나 사회 또는 약한 자를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사람과 단체는 순수하게 자신의 것으로, 자신이 희생하며 봉사해야만 가장 이상적인 봉사이고 단체입니다. 운영을 자급자족(自給自足)해야만 진정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하지 못할 경우 그 봉사는 선하고 순수한 많은 국민을 속이고 있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돈으로 자신들이 명색(名色)을 내는 것이라는 질책을 면할 수 없습니다.
21. 사랑과 용서는 인간의 본성(人間本性, human nature)입니다.
인간본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 철학자들은 인간의 독특한 특성은 그 ‘적응성(適應性)’에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동물 중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오래 종족을 보존하게 된 것은 특별한 본능이나 자질을 갖고 태어 낫 다기 보다는 성숙해 감에 따라 계발되거나 환경에 의해 자동적으로 야기되는 것으로, 활동하고 문화를 통해 ‘사회화(社會化)’하며 생존하는 적응력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존재가 자연적으로 탐욕스럽거나 공격적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를 인식하고 반성하는 능력을 발전시켜 왔고, 이것은 합리적(合理的)행위와 합리적, 사회적 발전의 계기로 사용해 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오상지덕(五常之德)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으로 봅니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논하려는 것은 성선설(性善說)이나 성악설(性惡說)을 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인 ‘야스퍼스(Jaspers)’의 학설<인간은 ‘사람임(Menschsein)’이 아니고 ‘사람됨(Menschwerden)’ 이다>라는 말은 지금까지 인간 본성을 가장 짧고 현명하게 정의했습니다.
분명히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고부터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아름답게, 가치 있게 만들어 가기 위해 조그만 행동이나 생각들도 원칙(原則)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 중에 사랑과 용서가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 용서하는 데도 효율성(效率性)을 위해 선배들의 연구와 경험에 의해 이미 정해진 규칙(規則)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적응성(適應性) 극대화(極大化)를 위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를 해야 하는데, 이때 지나친 고집(固執)이나 주장(主張)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집과 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권력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됨과 동시에 자기 형성에 실패자가 됩니다.
규칙(規則)을 예로 든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연약한 사람에 대하여 친절함이 남달라야하고, 사랑에는 조건 없는 용서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좋은 사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부드러운 사람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규칙입니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각양각색(各樣各色)을 수밖에 없습니다. 습관의 차이, 문화의 차이, 양심까지도 다를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사이에도 양심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인간을 창조할 때 신이 허락한 인간의 본성 중에 가장 고결(高潔)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인간은 모두가 하나 되고 대화가 되며 화합(和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본성을 성숙하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신이 준 본성을 준수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숙명(宿命, fate)입니다. 이것만이 세계 평화, 인간의 안정, 사회의 번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연약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한편, 약한 사람이 다른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미미한 일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규칙은 갖은 사람, 강한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이 원칙이 의식개혁의 교훈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정신입니다.
22. ‘사랑하라’는 것은 신의 확고한 계명(誡命)이고 범 종교의 대의(大意)입니다.
사람이나 그 어떤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을 사랑(愛, love)이라고 하고, 긍정적 감정 뿐 아니라 그리움이나 안타까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까지 포함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속에 언제나 신뢰(信賴, trust)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사랑이라는 trust의 어원은 ‘편안(便安)함’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trost에서 연유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믿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혹시 그 사람이 배신(背信)을 저지르진 않을까 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배신을 위한 예방(豫防)에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게 해 주는 효과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계 미국 대학교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는 95년 여름에 출간한 <트러스트, Trust>에서 “한 나라의 경쟁력은 그 나라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 일본, 독일은 고(高)신뢰 사회고, 프랑스, 중국, 이탈리아는 저(底)신뢰 사회라고 합니다. ‘후쿠야마’의 분류에 따르자면, 한국은 저신뢰 사회에 속합니다. 그는 한국의 미래는 저신뢰 사회라 앞으로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후쿠야마’의 한국에 대한 비평이 있은 후, 이화여대 석학교수이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이어령(李御寧, 1934-)박사는 <문화일보>1997년 5월 22일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1세기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혁명적인 변화는 ‘가족의 와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보 산업 사회에서의 가족은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 지금과 같은 가족 제도가 과연 21세기에도 온전할
것인가 등에 관한 거지요. <트러스트>는 21세기형 가족 제도의 틀로써는 미래 사회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트러스트>는 특히 동양문명권의 경제를 분석하면서 동아시아, 특히 중국,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의 대기업들은 대부분 가족 중심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 ‘후쿠야마’는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트러스트’가 없는 나라는 절망적입니다. 정국(政局)도 전망이 없습니다.
세계는 가족 이상의 신뢰를 요구합니다. 21세기의 세계 경제는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성(信賴性)을 둔 경제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후쿠야마’의 이 지적은 지금 정치 경제 전반에서 가족 중심의 폐쇄적인 틀 때문에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경종(警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계문화사전, 2005. 8. 20., 인물과 사상사> 참조
공자의 제자 자공이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비축하는 것(足食), 군비를 넉넉히 갖추는 것(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民信)”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공이 “어쩔 수 없이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중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며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民無信不立)”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부 및 정치 지도자에 대한 신뢰만 추락한 것이 아니라 구성원 상호 간 신뢰도 추락 한다는 것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근간 언론의 자료에 의하면 국회의원을 신뢰하는 사람이 국민의 5%뿐이라고 합니다. 신뢰를 잃은 사람들이 맹활동하는 것은 앞으로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뢰를 잃은 한국국회위원들의 활동은 독일 격언에 <가장 두려운 것은 바보가 부지런한 것이다.>와 경우가 같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신뢰 수준, 즉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설문에 ‘그렇다’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우리나라는 1982년 38%, 1996년 30%, 2000년 27%로 하락하였고 2010년에도 26%에 그쳤습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신뢰와 협력의 공동체가 아니라 불신의 사회,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경쟁 지상주의 구조(構造) 하에서 아직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만연한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남일보.[아침을 열며] 信賴의 價値, 김형곤. 법무법인 중원 구성원변호사. 2016. 7.4>참조
각자 신의 목적아래에 있고, 신이 주도(主導) 하는 대로 따르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시간에 긍정적으로 내가 상대방을 도와줄 일, 도움이 될 일을 찾으면 됩니다.
사랑에 신뢰함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응대(應對)이고 예의입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 오히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정치꾼 일부사람들이 북한을 두둔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이런 사랑을 가지고 북한을 지지한다면 호응합니다만, 국내정치에서 의견이 다르고 소속된 정당이 다르다고 해서 원수처럼 대하고 아노미(anomie)현상을 위해 마타도어(matador), 즉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해 상대편을 중상모략하거나 그 내부를 교란시키기 위해 하는 흑색선전(黑色宣傳를 난발(亂發)하면서, 유독 북한을 무조건 사랑하자고하는 것은 국가 정체성 파괴요, 혼미(昏迷)하게 하는 것일뿐더러 국민들에 대한 권력자의 사기행각(詐欺行脚)이고 후에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님을 미들것인가 못 미들슨 님이시라
미더온 時節도 못 미들줄 아라시라
밋기야 어려와마ᄂᆞᆫ 아니 밋고 어이리
< 임을 믿을 것인가? 아마도 못 믿을 것이 임이로다.
믿어온 그 시절도 믿을 바가 못 되는 줄로 알았도다.
믿기야 어려웠지만 임을 믿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
(李廷龜. 1564-1635. 漢學四大家. 眞本 靑丘永言 p104)
23. 진실 된 사랑이 있는 곳이 유토피아(utopia)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가 유토피아라면, 소중한 사랑이 있는 곳이 모두가 원하는 이상세계입니다. 지구상의 많은 종교들, 성현들이 추구하는 세계역시 용서와 신뢰가 포함되어있는 사랑의 세계입니다.
우주는 힘(力)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연의 원리도 모두 힘에 의해 작동하고 운영되며 성장을 합니다. 지구를 포함한 광활한 우주는 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가도 힘에 의해 존재하고 침략을 막아 내기도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이웃 나라들 간에 힘을 겨루기도 합니다.
자연과 우주뿐만 아니라 인간들 역시 힘에 의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온 우주를 덮고 있는 힘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유 없는 힘은 우주를 파괴합니다. 조절되고 절제되지 않은 힘은 분쟁과 파멸을 불러 옵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아무 쓸데가 없이 커 보일 뿐이지만, 이를 석공(石工)의 정성과 목적 있는 작업은 건축에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사랑이 이와 같습니다. 사랑은 창조를 불러 옵니다. 사량은 희생과 용서와 신뢰를 안겨줍니다.
한국의 탈무드라는 별명을 가진 동화가 있습니다. 제목은 <의좋은 형제>이고 옛날 교과서 실렸던 실화입니다. 이 미담(美談)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106-2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현재 대흥 초등학교 건너편에 ‘의좋은 공원’이 있고 이성만(李成萬) 형제의 우애(友愛)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습니다. 대흥면은 낚시로 유명한 예당저수지를 생각하면 쉽게 기억 될 겁니다.
시대는 연산군 3년(1497)때이고, 고증(考證)에 기록된 사실의 줄거리는,
<오래된 옛날 대흥면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제가 일 년 동안 애를 써서 농사지은 후 벼를 베고 두 형제는 똑 같이 나누기로 하고 각자 몫만큼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 날 밤 식구도 많은 딸려있는 형을 위해 동생은 형의 집에 볏단을 더 많이 옮겨다 놨습니다.
허나 형 역시 새살림을 차린 동생을 위해 자신의 볏단을 동생네 집에 옮겨다 놨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음날 밤에 두 형제는 같은 행동을 하다가 중간에 서로 만났습니다. 이유를 서로 말한 형제는 서로 손을 잡고 만면(滿面)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
이 사실의 기록은, 연혁(沿革), 풍속(風俗), 묘사(廟社), 궁궐, 관부(官府), 토산(土産), 효자, 열녀, 성곽, 산천, 누정(樓亭), 사사(寺社), 교량, 명현(名賢)의 사적, 시인의 제영(題詠) 등을 실은 중종 25년(1530)에 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형제간의 우애(友愛)의 미담(美談)을 기록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알려 귀감(龜鑑)이 되도록 했습니다.
두 형제의 사랑 이야기는 48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따듯하게 해주고 사랑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깨달게 해주고 있고, 사랑의 실천이 어려운 것이 아님을 느끼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형제의 사랑의 힘은 성미(性味)가 까다롭고 고집이 세고, 비인간적으로 통치한 연산군(燕山君)까지 감동시켰고, 후세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배운 수많은 어린이들, 사람들을 지금까지 감동시켜줬고 가슴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原子)들 간에 결합력(結合力)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원자들 간에 결합력이 없고 충돌이 있었다면 지구와 우주는 산산 조각나고 안개처럼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주, 지구의 무생물(無生物)들도 결합력에 의해 존재하듯이, 유생물(有生物)인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결합력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 사회와 국가가 구성되고 화합이 되며 생존과 번성(繁盛)을 하게 됩니다. 아울러 개개인이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사랑을 소지(所持)한 사람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은총(恩寵)이 있음을 알게 되고 신에게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유사이래(有史以來)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존재하며 번영(繁榮)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질투와 미움보다는 사랑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지금까지 생존, 유지, 번영의 경우도 이 원리에 해당됩니다.
24. 모든 것은 사랑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내가 짧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가장 노력한 것은 사랑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을 가장 확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신이 나를 살아가도록 한 이유도, 신의 존귀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사랑뿐 이였습니다. 학문에서 말하는 진리 역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할 때 진실하게 살아가게 되고, 나라를 사랑할 때 애국 할 수 있습니다.
초야(草野)에서 태어났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사랑의 원리를 깨달고 사랑을 가슴속에 품기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사랑을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경험과 삶의 애환(哀歡)속에 진정한 사랑을 하나둘씩 깨달아 갑니다.
아마도 나의 경우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자살하는 고통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렸을 때 큰 질병에 걸렸을 때 치료할 수 없어서 병의 아픔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드리며 이겨내야만 하는 애절한 때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사랑을 절실하게 사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해와 실리(實利)를 떠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고 모든 사람과 정의로운 평화를 나누려고 하는 마음은 내가 살아오면서 뼈아프게 경험한 것으로 인한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신의 존재와 인도를 부정하지 못합니다.
사랑, 평화는 나에게는 쉽게 얻어진 감상적인 것도 아니고 어쩌다 생긴 운명적인 것도 아닙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갈등하든 전쟁터를 통해 확고해진 국가관과 생명에 대한 사랑은 독서를 통해서든지 도서관에서, 강연 등을 통해 편안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기에 생명을 버려서라도 꼭 실천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어느 한사람이라도 나의 영혼 속에 있는 사랑의 순수한 열정을 발견했다면, 내가 투쟁에 가까운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고 발견하지도 못할 겁니다.
아직 이룬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진실을 사랑하는 한 앞으로 어떤 경우에라도 정직함과 화평, 그리고 사랑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위해 몇 번 직업을 전전(前前)하며 진리를 사랑했고, 신이 지금까지 생존하도록 한 이유가 그 때문이라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5. 어리버리 하게 살아온 세월이 한스럽지만,
이제라도 사람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국 학생은 고등학생 때까지는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우수하지만, 대학생이 되면 경쟁력이 곤두박질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미국 명문대학에 유학 간 한국 유학생의 44%가 중도에 탈락을 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격 주간 종합 경제지이고 1930년에 창간한 <포춘(Fortune)>지가 선정한 미국 500대 기업에 재직하는 한국계 간부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의 0.3%로 미국 유학생의
비율이 세계적으로 1, 2위를 다툴 정도로 많지만, 미국기업에 취직해 역량을 인정받는 비율은 터무니 없이 낮다고 평가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인, 집필가인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 1936- )’는 한국에 대하여 “한국과 이스라엘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둘 다 단일민족으로 고유문화를 지녔고, 오랜 세월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중략)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워하는 점은, 한국이 물질이 풍요로워진 대신 영혼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상이 물려준 훌륭한 정신적 유산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니지 돌아봐야 합니다.”
<혼 잃은 우리교육 유대인 교육에 답이 있다. 고재학. 일곡문화재단. 2015. p18>
내가 유태인(猶太人)의 가정에 TV가없는 것을 너무 나이들은 1998년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거실에는 우리 가정처럼 커다랗고 고급스럽고 멋있는 TV는 없고, 책이 들어찬 책장이 몇 개 있습니다. 저녁 식사시간에 물론 TV도 없지만, 어쩌다 있더라도 TV를 켜놓는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태인들은 집에 TV가 없거나 있더라도 보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 번째는, 시각(視覺)을 통해 전달되는 강렬한 세속저질문화(世俗低質文化)를 차단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일간신문까지도 구독하지를 않습니다. 혹시 신문이나 잡지를 보더라도 대중가수나 대중연예인들의 나오는 면을 없애고 보고 자녀들에게 내놓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영상매체, 허영(虛榮)을 부추기는 상업매체의 강한 중독성으로부터 어린이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물품정보는 허영을 불러오는 것이지 진정한 정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국가가 EBS라는 교육방송도 운영합니다만, 유태인들은 TV를 통한 영상교육에 매우 엄격한 규제를 가하고 있고, 활용하더라도 오랜 심의를 통해서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에 항의하고 반대하며 시시비비(是是非非)에 탁월한 한국인은 ‘그것은 유태인의경우이고 한국이 다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를 통 털어 1,700만 명뿐인 유태인이 노벨상 수상자가 22%이고(2004-2007에는 33%) 개인 수상자중 5명중에 한명이 유태인이며, 세계 모든 분야에 위인, 재벌, 정치가들은 모두 유태인이니, 그들을 본받는 것이 당연하고, 더욱이 한국인의 TV 시청시간은 평균 2시간이 훨씬 넘어갈 정도로 심각할 뿐 더러 상업매체(商業媒體)가 국가정보, 뉴스, 대중 여론 등 모든 것을 편파적(偏頗的)으로 관여하고 국민여론을 유도(誘導)하는 때에, 유태인처럼 거부하고 조심하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방법에 유용(有用)하겠기에 논하는 겁니다.
그래도 이해 안 되면 대중매체의 유용성을 열거(列擧)해 보기 바랍니다.
내가 TV를 비롯해 구독하든 일간지를 집에서 내 보낸 지 8년째 됩니다. 그 결과로 8년간 성장한 나의 내면의 인성과 성격, 그리고 국가관, 사회관, 대인관계, 영혼의 성장을 측량(測量)해보면 놀랄 정도입니다. 묵상(默想)과 독서시간, 집필(執筆)하는 시간은 평생 해온 시간의 수배로 늘었고 좋은 일을 위한 명상(冥想)이 생활화 되었습니다. 일찍이 실행했더라면 신을 더 가까이 했을 것이고, 교양 있는 사람이 이미 됐을 겁니다.
영상매체에 대한 중독성(中毒性)을 좀 더 논하려고 전문가의 주장을 수록(手錄)합니다.
1). 영상매체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주의력과 감각을 자극해 묘한 이완감((弛緩感, relaxation) 즉, 바짝 조였던 정신이 풀려 늦추어지게 하고, 잘 조성된 분위기 따위가 흐트러져 느슨해지게 하며 편안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영상매체를 더 많이 보게 하며, 마치 약물중독 과정과 똑 같다고 합니다.
2). 영상물에 장기적으로 노출된 어린이는 물론이고 성인까지도 좌뇌(左腦)활동을 크게 위축 시킨다고 합니다. 모두 알고 있는 상식으로 좌측 뇌의 기능은 언어능력과 수리력, 논리력, 분석력입니다. 영상매체는 질문과 대답을 다해주기 때문에 시청자, 청취자가 숙고(熟考)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영상물을 계속 봤을 때, 매우 공격적으로 변하고 폭력성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4). 영상매체를 통해 성적(性的) 자극을 받게 되면 비정상적인 성적 행위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5). 영상매체는 인간관계와 감성지수(感性指數, Emotional Quotient)에 안 좋은 영향을 행사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생활 깊이 들어와 밀접한 관계로 생활화하고 있는 영상매체, TV와 신문들은 유익한 점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혼 잃은 우리교육 유대인 교육에 답이 있다. 고재학. 일곡문화재단. 2015. p27-29>
나는 매우 조그만 행동, 부끄러운 일이지만, 황혼이 돼서야 TV와 허접한 신문들에 빼앗겼던 시간을 되찾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26. 내가 졸필(拙筆)을 계속 쓰는 이유입니다.
사람의 실수 중 7-80%가 말의 실수이고 행동의 실수는 20%가 넘지 않는 다고 합니다. 나도 말의 실수를 많이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서에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낀다.>고 했고,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조심한다고 하지만 변변한 지식이 없고 행실이 가벼우니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막연히 말을 아낀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기에 글을 가까이 하게 된 것입니다. 우스운 말로, 사람이 결코 숨기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가난과, 기침과, 무식(無識)이라고 합니다.
글을 쓰고 부터 생각의 범위와 언어의 경계를 알게 됐습니다. 본인은 그때부터 생각의 실수, 말의 실수를 줄이게 됐다는 말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지는 25여년이 넘지만, 글로인해 고민했다든가, 후회를 한 적은 없습니다.
글을 쓸 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통제(統制)가 있어야 합니다. 통제가 밖으로부터 있어질 때에 효과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습니다. 글 쓰는 자 스스로의 통제를 만들고 준수해야 합니다.
내가 자신의 통제를 위해 선택한 방법이 6-70년대 이전 학자들의 사상이외에는 받아드리기를 조심하는 것입니다. 6-70년대에 활동한 선배들은 왜정치하에서의 치욕(恥辱)과 곤욕(困辱)서러움을 거쳤고, 민족의 대 환란인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과 피폐(疲弊)해진 전후(戰後) 한국의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 새순처럼 살아남은 선배들입니다. 나에게 이런 선배들의 사상(思想)과 지성(智性)이야
말로 좋은 심판관(審判官)이고, 등용문(登龍門)이며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입니다.
글을 쓰는 목적은 봉사이지만, 한번이라도 선배들의 수양(修養)된 정신을 표현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글을 쓸 때 내용과 어휘(語彙) 선택에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만, 이모든 것은 나에게 훈련이고 나 자신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약점을 찾아내게 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허영심과 근거 없는 자만심(自慢心), 공동생활에서 적응되지 않는 관습(慣習)들, 거칠고 투박(偸薄, rusticity)한 잡초(雜草)들을 뽑아내게 하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많은 글들은 자신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글들이고 완벽하지는 안치만 나의 영혼을 움직인 속삭임, 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쓴 글들의 내용과 정신대로 살아가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많은 숙제를 안고 울상인 어린아이처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양심의 외침과 옥죄임과 억압(抑壓), 눌림 속에 남은 생을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27. 나는 평범한 소시민(小市民)이요, 도덕주의자(道德主義者)입니다.
도덕주의자(道德主義者, moralist)는 일반적으로 도덕적 가치 또는 도덕적 의미를 기본적으로 중시하는 지적, 정서적, 윤리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폼페이(pompeii)는 이탈리아 나폴리 남동부 해변에 자리 잡고 있는 BC 700년경 세운 도시로 79년 8월 24일에 베수비오산(Vesuvio Mt) 화산 폭발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매몰됐습니다.
근래 폼페이를 발굴하다가 특이하게 ‘도덕주의자의 집(House of the Moralist)’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나에게는 그런 특이한 호칭을 붙일만한 내 소유의 주택은 없습니다만, 만약 있었다면 나의 명패(名牌) 대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집(The home of a loved one truth)’이라는 명패를 붙이고 싶습니다.
폼페이의 주택은 2천여 년의 기간과 화산의 열기로 벽이 손상되면서 써놓은 글들이 사라져버렸지만 나머지는 지금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주인이 손님에 요구하는 예절을 써놨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발을 깨끗이 하고 리넨(linen)을 더럽히지 마시오. (아마식물(Linum usitatissimum)의 줄기에서 얻은 인피(靭皮)섬유로, 의복용 섬유로서는 가장 오래된 섬유)
2. 다른 남자의 아내를 존중하시오.
3. 싸우지 말고 싸우려거든 집에 돌아가시오. 라는 글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부정적으로 전해지는 소문에는, 폼페이는 향락과 방종, 타락의 도시로 신의 노함을 받고 멸망했다고 하는 한국 종교지도자들만의 지나친 종교적 해석을 합니다만, 도시가운데 도덕을 강조하는 집이 있었다는 것은 고무(鼓舞)할만한 일입니다. 나는 살아온 평생에 조상이 전해준 대로 모든 일들, 즉 정치, 사회, 경제, 학문, 예술, 종교에 까지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생각해 왔으며, 여기서 부득이하
게 마찰이 생길 때에는 이익(利益)과 손실(損失)의 여부를 떠나 도덕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규칙을 실행해왔습니다.
불완전하고 변화와 다양성을 가진 인간생활에 절대적이랄 수 있는 도덕의 규칙이 절실합니다.
작금에는 이런 도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상황윤리(狀況倫理, situation ethics)가 나오기도했습니다. 상황윤리는 보편적인 윤리 규범, 도덕적 규범을 부정하면서, 구체적인 상황에 처한 개인은 자신의 윤리적 당위를 스스로의 직관을 통해 식별해야 한다는 이성론(理性論)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점 더 발전에 도덕의 필요성이나 신의 존재까지도 부정하며 자신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을 지나치게 완벽한 것으로 내세우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주택에 경계를 상징하고 방어를 목적하는 울타리, 담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 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인정하며 화목(和睦)하다는 목적입니다. 울타리나 담장은 단절과 경계를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도덕(道德)은 자신을 비롯해 서로 다른 상대방과 사회의 건전한 전과 협동을 위한 약속이기 때문에 개인의 입장(立場)과 판단을 우선하는 상황윤리에 맡길 수 없는 일입니다.
28. 자의적(恣意的)이고 자신의 실리(實利)를 우선하는 정신은 민주주의 정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개인이 없이 사회가 존재 하지 못 합니다. 우선 첫발걸음인 개인의 평안과 만족이 있어야 사회에 대하여 협력할 의지가 생깁니다.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현상입니다. 마찬가지로 개인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때 그가 속해있는 이웃이나 사회 역시 평안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사상, 즉 개인이 평안하고 어느 정도 욕구충족이 됐을 때, 이웃과 사회에 대하여 협조하게 된다는 것은 근 7-8백년간 한국을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유교(儒敎)의 사상입니다.
하기는 맹수들도 자신의 배가 불렀을 때에 먹이를 다른 동족에게 양보합니다. 이성이 없고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동물들은 스스로의 양보나 배려는 없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사상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유교의 오륜(五倫)의 정의를 밝혀보면, ‘부자유친(父子有親)하고, 군신유의(君臣有義)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하여, 붕우유신(朋友有信)해야 한다.’ 입니다. 이것을 지키려 노력하여 외국인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국민도덕의 향상이 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효(孝)와 수신
(修身)를 너무 과중하게 취급한 결과 국가나 사회, 이웃을 집을 자신의 가정보다 경시(輕視)하는 풍조가 생기게 됐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최우선이고 더 소중하고, 그 이외 것은 차선으로 취급하게 됐습니다. 서양철학의 지식과 인식이 있다면 내가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를 먼저를 실천한 서구에서는, 자신의 진보적 욕구를 해결하고 평안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화평하고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보된 민주주의는, 항상 자신이 평안해야 다른 사람이 평안하다는 원리에서, 진일보(進一步)하여 다른 사람이 평안해야 비로소 자신이 형안해질 수 있다는 관념(觀念)입니다.
그래서 모두의 안녕과 화평을 위해 자신의 힘을 투자하고 기여하는 봉사(奉仕)를 열심히 합니다.
종교가 가르치는 사랑과 봉사는, 유교적 사고(思考)처럼 내 것이 충족된 뒤 남는 힘을 은행에 저금하듯이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이웃의 고통을 해결해줌으로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민주주의의 대의(大誼)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동양적 사고의 발상(發想)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유교(儒敎)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자신의 식량창고를 채우고 나서 이웃을 바라보는 형식의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것입니다.
입법기관이나 정당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표적인 개인주의, 자당(自黨)을 위한, 자신만을 위한 것입니다. 사회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봉사하여 이루려는 민주주의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요원(遙遠)합니다. 내면은 유가(儒家)의 사상으로 자신만을 우선하면서 곁으로 서구사상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척 거짓을 말하는 정치꾼들과 종교인들을 바라볼 때 성서의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말씀이 정답입니다.
개인은 형성된 단체를 위해 희생하고, 그 단체는 사회를 위해, 사회는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이렇게 실현된 국가는 모든 국민을 포용(包容)하는 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에 골간(骨幹)은 의무와 책임에 대한 자제(自制)와 겸손입니다.
이것이 결여된 자유, 민주주의는 혼란과 방종의 천박(淺薄)함뿐입니다. 책임 있고 의무가 있으며 절제(節制)된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제도입니다. 작금처럼 붕당(朋黨)정치의 정수(精髓)를 가지고 있고 편파적이고 지역갈등을 극대화하고 배타적인 동시에 극히 무식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결말은 퇴보와 그들의 소멸(掃滅)뿐입니다.
29. 민주주의 의 폼(形態, form)과 멋(高尙, tastefully)
민주주의는 인간집단의 향기 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을 침해(侵害)할 수 없고 정당한 행동과 활동은 자유입니다. 잠시 3-4년간 목사로 봉직(奉職)했든 기간 중 지도자의 규례(規例)를 배웠는데, 목사(牧師)의 생활수준은 신도들의 경제생활수준의 평균 이하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늘 이거(移去)할 준비, 죽을 준비, 설교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몰론 신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한 번도 월급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신자들, 고통당하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길은 그들보다 잘살기보다는 영혼의 맑음을 실천하므로 용기를 주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가난은 수치(羞恥)가 아니고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 불편(不便)한 것은 내의 진실을 믿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미약한 사람의 말에 귀기우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만약 내가 부자였고 이력을 늘 자랑하였더라면 추종(追從)하는 신도가 좀 더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 미약한 사람은 절대로 프라이드(pride) 즉, 자신의 존재 가치, 소유물, 행위에 대한 만족에서 오는 자존심이나 긍지(矜持)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지켜야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도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의지하여 부담을 줘서도 안 됩니다. 또한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한편 가난한 사람은 능력껏,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건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삶을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자유롭게 영위(營爲)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멋입니다.
또 민주주의의 멋은, 철저한 준법정신과 실천입니다. 민주주의의 토대(土臺)는 자유가 아니고 절제(節制), 자제(自制)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지켜주고 배려해주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준법(遵法)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함입니다. 불법(不法)은 오직 자신만을 위함입니다. 신이 준 계율(戒律)과 국가의 법을 복종으로 지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준법은 타인
에 대한 봉사이며, 신을 사랑하는 신의 모습을 가진 아름다운 향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민주주의에게는 극한 이기심이나 편파적인 사고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거나 집단에 손해를 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준법정신을 가진 사람의 향기로 인해 다수의 범법자(犯法者)들이 있더라도 사회가 유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는 항상 투쟁하는 사람들, 정치하는 사람들, 언론들로 인해서가 아니고 준법정신을 실천하는 소수의 선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30. 다수(多數)원칙 이론이 民主主義 정신을 훼손(毁損)합니다.
사실 철학에서 다수라는 것은 무미건조(無味乾燥), 무가치(無價値)한 것으로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지연(地緣)이나 학연(學緣)등의 우스꽝스러운 다수를 가지고 모든 것을 극대화 시키며 결의하는 것은 폭력보다도 더 해악(害惡)서러운 일입니다.
발전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수(多數)의 힘이 적용되는 사례가 적어야 합니다. 진리와 자유에 대하여 가장 두려운 적(敵)은 밀집(密集)된 다수입니다. 다수를 따르는 이유는 진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힘(力)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수라는 것은 대세(大勢)를 따르는 바보들과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들, 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전혀 모르고 따라다니는 대중들입니다. 그래서 다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거반 다 무지(無知)하고 정신적인 빈곤과 무력한 사람들입니다.
동양인에게 다수를 맹신(盲信)하는 경향이 유달리 강한데, 공자의 말 중 人衆勝天(인중승천) 즉, ‘사람이 많으면 하늘에도 이긴다.’ 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千雀莫如一鳳(천작막여일봉)이라는 말도 있는데, ‘참새 천 마리가 봉 한 마리만 못하다’는 말이니, 보잘 것 없는 다수가 진실한 사람 하나에 못 미친다는 뜻입니다. 공자의 말이라고 다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근래 한국종교의 후진성(後進性)은 다수를 가지고 모든 것을 전횡(專橫)하려는 권세를 당당하게 취하는 데 있습니다.
지성이 있는 사람은 공익성이 없는 이론을 극단화시켜 다수라는 수단으로 결의하는 행태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小數)의 의견과 행동에 대하여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되며 모욕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다수의 자유로운 의견과 행동의 자유를 소수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입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정치계에서는 다수의 규칙이 전적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주주의는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개인의 의견과 행동의 자유를 보장해줘야 합니다.
세계인들이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이유는, 민주주의가 개인의 인격을 강조하고, 모든 국민을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주는 경형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래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실망하지 않고 기다리는 이유는,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은 그 사회에 원천적(源泉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행착오(試行錯誤)와 훈련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많은 시간 지금과 같은 혼란과 차질(蹉跌)의 고통을 감내(堪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1. 질(質)과 양(量)중에 질을 택하는 지혜
나의 경우 늘 소수, 약한 자, 없는 자들과 함께 해왔고 함께하기를 즐겼기 때문에 자연히 질적(質的)인 것이 익숙하고 우선하는 습관을 가지게 됐습니다.
종종 나는 스스로 나 한사람으로 그대로 있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 속에있다 보면 지금까지 내가 선택한 목표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람들, 광범위한 사람들을 알고 교제하는 것이 어느 한때는 좋았지만, 진정한 길을 가려할 때에 방해가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내가 선택한 길을 이해받거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신에게 받은 확고 불변(確固不變)의 한 신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관심이 없어도 즐
겁게 행보(行步)할 수 있습니다.
32. 나는 과거(過去)를 기억할 뿐이고 사랑의 대상은 미래(未來)입니다.
과거를 논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나에게 어떤 수치(羞恥)나 과오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일들은 신(神) 조차도 어떤 변화를 줄 수 없는 영역입니다. 다만 신중(愼重)한 때에 과거를 회상하는 이유는, 최고의 예언자(豫言者)가 과거이기에 참고할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구상할 때 과거만큼 명확한 자료를 주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It is the old cow's notion that she never was a calf’ 늙은 소는 이제까지 송아지였던 때가 없는 것으로 안다. 는 말의 의미는 인간의 경우 노인이 젊은 사람에게는 젊었을 때 너보다 강했다고 자랑을 하는 것이 어리석음을 지적한 말입니다.
간혹 과거를 행복하게 생각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하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매여 있습니다. 흘러간 물로 물방아를 돌릴 수 없건만, 3-40년 전의 유명 대학에 매여 있고, 더 오래된 청년 때에 매여 지금도 과거의 철 창속에 자신을 구속시키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대학졸업장으로 현재의 불만과 슬픔, 자신의 실패를 덮으려 하고, 대인관계 때에 성공의 열쇠로 사용하려합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허세를 부리는 것은 비생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전형(全形)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의 경우는 거의 다 상대방에게 강압적(强壓的)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고, 과거 경력을 자존심으로 활용하여 상대를 제압(制壓)하려는 것이며, 과거 치적을 통해 결코 소인배(小人輩)가 아니라고 하는 거만과 교만의 진상(塵想)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이런 것을 받아드릴 때 당하는 정체성 혼란에 대한 0,01%의 배려나 이해심이 없습니다. 과거를 지나치게 자랑하는 사람의 경우 교만의 극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양인은 어느 경우이든지 자신의 경력을 먼저 말하지 않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경력을 밝히므로 상대편이 받아야 하는 위화감(違和感), 불쾌감(不快感)을 줘서 안 된다는 세심(洗心)한 배려 때문입니다.
다만 불가피하게 과거경력을 말해야 할 때는, 상대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될 때만이 가능한 일 입다. 그러나 진정, 자신의 과거 학력과 경력이 대인 관계 중에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 경력은 자신이 살아온 하나의 생애 일뿐이고, 자신만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되고 교훈도 못됩니다.
내가 무지(無知)의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본인의 미래는 신이 정한 영역(靈域)이고, 현재와 연결된 미래는 신의 선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 열려지지 않은 미지의 미래이기에 다만 최선을 다해 충실한 생활을 할 뿐입니다.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1992)’가 말한 “Auch wenn ich wüsste, dass morgen die Welt zugrunde geht, würde ich heute noch einen Apfelbaum
pflanzen". 비록 내일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을지라도, 나는 오늘 아직 한 그루 능금나무를 심겠다. 는 이 유명한 말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 종교개혁자인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한 명언입니다. 매우 훌륭한 정신입니다.
과거 많은 현인(賢人)들, 사상가(思想家)들은 이와 같이 철저한 미래개념을 가지고 충실했다는 것을 배웠기에 본인도 같은 사관(史觀)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33. 정직(正直)함이 힘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직이 삶의 수단이 되기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전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운전법규대로 정직하게 양보운전하면 하루 종일 제자리에 서있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정직하기에 대하여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비중은, 자신이 그만큼 부정적이고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많이 익숙해 있다는 증거 일수 있습니다. ‘규정대로 운전하기 어렵다.’는 말은 도로상의 불법을 지적하려는 의도이지만, 자신의 운전습관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진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불안하리만큼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중학교 3학년 때 1960년 초 전교학생위원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한국 전체 중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무감독(無監督)시험과 교내 매점의 무인판매(無人販賣)를 실천해봤습니다. 교사들이 위험한 발상이고 실패할 것이라고 했지만, 만약 부족한 금액이 발생하면 내가 충당하기로 하고
몇 달 계획 한 후 실행했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때 구호를 ‘부정의 100점보다 양심의 50점이 낫다’ 이었고, 무인판매대에 ‘몇 십원에 양심을 팔지 말자’이었습니다. 오래전 내가 사업에 관심이 있을 때, 윤리경영(倫理經營)을 주장했고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정직하면 돈을 벌지 못 한다’는 말이 길거리 표어만큼이나 흔하게 상식화됐을 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직한 사업가 일수록 성공 할 확률이 높습니다.
우선 제일먼저 신이 인간에게 말한 정직에 대한 교훈이 <나쁜 일로 모든 재산은 헛것이 되지만,
바르게 살면 죽을 자리에서도 빠져 나간다.>라고 했습니다. ‘S. 셰익스피어’는 <정직한 것만큼 풍부한 재산은 없다>고 했습니다.
정직에 대한 속담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가 영국인데, 생활 여건이 가난해 정직하지 못한다는 인식들에 대하여, “A ragged coat may course an honest man.” 즉, 누더기를 입었어도 정직한 사람은 정직하다. 고 가르쳤으며, 종교인들이 정직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에 대하여, “ God is in an honest man's heart.” 신은 정직한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고 했습니다.
또 영국인들은, “ An honest man is the noblest work of God.” 정직한 자는 신의 가장 고귀한 작품이다. 라고 하면 인간이 신의 창조물임을 주장하기 이전에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라고 단언(斷言)했습니다. 심지어 “하루만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다. 일주일 동안 행복 하고 싶거든 결혼해라.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지어라. 그러나 평생을 행복하게 지나려면 정직하여라.” 라고 했습니다. 이런 속담들은 그 나라의 문화를 대변해주는 반면에 정직함이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것을 비유로 말했습니다.
수치스럽게 내 주변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라는 말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사람은 요령(要領)이 있어야 한다.’, ‘우선 돈만 벌면 된다.’는 말을 쉽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가는 행복, 풍요로운 삶의 행복은 정직을 통해 온다는 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입니다.
하지만 지식이 없이 정직한 사람은 박약(薄弱)하여 아무 곳에도 필요 없고, 정직하지 않으며 지식이 있는 사람은 위험하니 조심하고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정직이 모든 생활에 최선의 방법입니다만, 정직의 성향(性向)은 많은 재산을 축적(蓄積)한다든지, 재산이야말로 인생의 최대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하게 취급하는 신의 가르침 중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유독 한국인만이 불가사의로 취급하고 종교지도자들도 언급하기를 거리끼지만,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납득하며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34. 성숙된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란 이런 것입니다.
역사 속에 인류가 노력해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 즉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문명(文明, civilization)이라고 합니다.
문화(文化, culture)는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키며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등을 의미합니다.
이런 문명이나 문화에 대하여 많은 역사학자들, 사상가들이 미래에 대하여 염려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인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Franc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는 그의 저서인 <道德的 反省>이라는 책에 “국가에 사치와 극도의 문명은 쇠퇴의 확실한 전조(前兆)이다.
그것은 모든 개인이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공익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강연 중 “현대문명의 위기는 기술문명이 토끼같이 달리는데 비하여 정신문명이 거북이걸음으로 뒤를 좇고 있는데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정의로운 문명은 쉽게 넘어서는 욕망(慾望)과 욕구(慾求)를 자제하며 스스로의 생활 범위를 절제하는데 있습니다. 소유(所有, ownership)의 본능은 미래를 대비하고 준비하는 인간의 본성을 기초합니다.
어느 정도의 소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층 더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하지만, 많아지는 소유는 소유욕(所有慾)이 주인이 되고 소유자는 노예로 전락을 하게 됩니다.
소유욕이 자신에게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넉넉하고 많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 아니면 늘 없는 것만을 생각 하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소유욕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한 증거를 알려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권리가 50%이고, 의무가 50%라고 인식하면 정상입니다. 소유의 권리만 알고 의무를 모른다면 그는 집착(執着)소유욕을 가지고 있다는 중증상태(重症狀態)입니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이 1869년 옥스퍼드 대학 교수로서 강의 중에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의 선박이 난파했을 때에 그 승객 한사람이었던 광부가 금괴 200파운드(1 lb- 450g, 200lb=90kg)를 넣은 띠를 몸에 두른 채 해저에 가라앉은 것이 발견 되었다. 그런데 그가 바다에 가라앉았을 때에도 그가 금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인인가, 아니면 금이 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인가?” <뒤에 온 이 사람에게>
사용하지 않는 재물은 소유욕(所有慾)이며, 사용할 때 비로소 소유(所有)가 된다는 깨달음에 내가 평생 모아 아끼고 소장하고 있었던 1만권의 장서(藏書)를 내놓게 했습니다.
현재 파산(破散)당하고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식사꺼리를 염려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도 사용하지 않는 많은 재산들과 물건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낭비하고 대수롭지도 않게 소홀(疏忽)히 써버리고 있습니다.
내가 감명 받은 폴란드 태생의 프랑스의 물리학자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의 일화가 있습니다. 일명 ‘퀴리부인’은 1903년 여성으로는 최초 남편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受賞)했고, 8년 후 다시 한 번 그녀는 홀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유는 세계최초로 방사능 발견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노벨화학상은 방사능의 원소 중 라듐(radium)과 폴로늄(polonium)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여기자가 퀴리부인과 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퀴리부인은 “1g이라도 좋으니 연구하기 위해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라듐이 소원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라듐을 발견한 과학자 자신이 라듐의 부족을 소원으로 말하니 기자가 이해를 못하고 다시 같은 질문을 하자, “내가 가지고 있던 1g의 라듐은 연구소에 기부를 했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에 여기자는, “당신은 자신이 별견한 라듐에 대하여 특허(特許)를 받고, 큰돈을 받게 되면 얼마든지 라듐을 구입할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권면하니, 퀴리부인은 웃으면서, “원소(元素)는 만인의 것입니다.”라고 짧은 말로 대답을 했습니다. 짧은 대답은 긴 설명이 필요한 훌륭한 정신입니다.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더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생활비 몇 만원을 간절히 소원하지만, 부자는 수십 수백억 원을 소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많은 비중이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없는 것만 생각하고 갈망(渴望)하는 소유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숙된 문명과 문화는 개개인이 욕구를 계속 늘려가고 주머니를 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고 절제하며 가난한자, 약한 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35. 가장 두려운 적(敵)은 외부에 있지 않고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AD 1세기경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도(使徒) 파울로스(Apostle (그)Παυλος, (히)שאול,)’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고백을 했고, 또 다른 곳에는 <나는 내속의 나와 계속 싸우고 있다.> 고했습니다.
항상 자신의 속사람과 싸우고 이기기 위해 매일 죽는 성인 ‘파울로스’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욕구를 채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밖의 세상과 사람들과 싸울 때, 그는 자신을 자제하고 절제하며 사랑하기 위하여 죽음을 경험하며 싸웠습니다.
적(敵)에게 긍정적이고 호의적이라든지 무관심하다면, 그는 패배(敗北)를 자처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적은 자신의 가슴속에 있고, 자기 자신보다 질이 나쁜 적은 없습니다. 심약(心弱)사람, 무지(無智)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밖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둡니다.
작든 크든 불행의 모든 일의 책임을 밖으로 돌립니다. 자신에 대한 분석과 원인을 반성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옹호(擁護)하고 지지(支持)와 보호하며 숨기려는 거짓을 범합니다.
교양인(敎養人)이란 항상 자신을 자제(自制)하고 절제(節制)하며 수양(修養)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중요한 일에 대하여 자신의 힘이 미약하므로 종교를 통해 자신을 통제 할 수 있고 복종해야 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진정한 자유를 주기위해 엄격하고 냉혹한 정신적인 수련을 원칙으로 하고 교육을 합니다. 종교의 본질은 마치 엄격한 군대와 같습니다.
군대는 국토를 수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위해 통제와 규율에 대한 절대복종이라는 특성이 있고 긴박(緊迫)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해야 하는 살인을 위한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는 방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계율에 복종하지 않는 방종은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천박한 생활밖에 없습니다.
이같이 자신을 지키며 자신의 내면의 적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종교가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진정한 의미이기에 종교의 계율에 절대 복종하고 희생까지 감수합니다.
36. ‘사람답게 사는 것’은 ‘진실하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종종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참되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이 질문을 매우 어렵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참되다’는 것의 정의가 다릅니다.
다양한 생활, 문화의 차이, 습관의 차이, 인식에 차이에서 오는 정의가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옳은 것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잘못된 것으로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같은 조건과 환경 속에 살지 않기에 벌어지는 혼란입니다.
그리고 같은 문제에 대한 차이가 가장 심한이유는, 생활기반의 지식과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고 삶중에 환경에서 있어진 고통스러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주장은 강하지만, 영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고 고난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거짓말을 많이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인간이 참되게 살아간다는 것,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과정 중에 진실을 사모하고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게 진리라는 것은 변명(辨明)하고 위장(僞裝)하는 수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진실은 불의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정제(精製)되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로 위장한 불의(不義)일 뿐입니다.
나 자신도 정직하게 표현하면, ‘이것이 진리이다’라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다만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인 신을 사모 할 뿐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원리를 본인의 생활과 관념의 기준으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까지 진리를 찾았다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경이롭고 완벽한 자연 속에 보여 지는 신의 창작품과 인간역사의 진행과정에 진리로 주관함을 조금 느끼며 늘 경탄(敬歎)할 뿐입니다. 늦은 40세가 넘어서야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과 감수(甘受)가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기필코 찾지 못하고 생을 마칠 찌라도 후회는 없습니다. 가능하면 살아있을 때 진리의 흐릿한 모습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진리와 사랑의 근원이요, 진수(眞髓)인 신을 사랑합니다.
37. 예술(藝術), 예술가(藝術家), 예술인(藝術人)
나는 근대 예술인들에 대하여 별반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근래에 와서 예술인들이 무지한 대중들이 예술의 진가(眞價)를 격하(格下)시킨다고 원망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또한 국가에서 지원을 안 해 준다고 항거(抗拒)를 합니다.
그러나 진상(眞常)은 대중예술인들이 대중을 업신여기고, 심지어는 국가가관을 무시해 격하(格下)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의 예술의 퇴락(頹落)은 예술인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예술은 경험을 넘어설 만큼의 고상(高尙)한 형태의 지식입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서든지 예술인은 도덕적인 인격이 기초되어야 합니다. 예술인이 자신이 가야할 길, 행동해야할 것, 올바른 것을 알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면서 다른 대중에게 더 높은 세계를 보여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순수한 예술은 누구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며 감동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상향(理想鄕)을 일러주기 위한 것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고상한 전통 예술이든, 대중예술이든 간에 예술인은 항상 자신에게 귀를 기우리고, 올바르게 자신을 깨달은 후 이를 표현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예술을 생활의 방편으로, 좀 더 직언(直言)하면 생활의 구실과 편하면서 인기를 누리는 매력으로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생활의 권태감(倦怠感, ennui)를 잠기 잊어버리려는 도락주의(道樂主意), 향락주의(享樂主義)로 예술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에게 위안꺼리로 대중예술이 필요합니다.
예술인이나 이를 바라보는 시민이나 너무 원칙과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감독(監督)과 제재(制裁), 제한(制限)을 당해야 하며, 가공(加工)당함이 많을 때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의 순수함과 높은 교훈과 감성을 주기위해서는 슬픔의 고통과 번뇌(煩惱), 억압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예술인들이 방종에 가까운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술이 아니고 객기(客氣)일 수 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여유 속에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면 언어와 행동의 저질스런 유희이고 작품에는 생명력이 없는 상업적인 일환(一環)이고 예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가식(假飾)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흥(感興)을 주고 용기를 준 예술가들에 창작예술의 탄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참조한다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필수품이 의식주(衣食住)이듯이, 예술은 인간 정신의 필수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근래 예술, 대중예술은 의식주에도 사치품(奢侈品)이 있듯이 생활의 사치품, 기호식품의 성향(性向)이 다분(多分)합니다. 향락산업(享樂産業)의 일종이 되어 간다는 말입니다.
예술인으로 칭호(稱號)를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들 중 몇몇 사람을 알고 지냅니다만,
그들에게서 인간의 정신적인 진보를 위한 노력이나 건전하고 모범적인 도덕생활과 창작(創作)을 통한 순수한 감동을 주기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은, 전혀 수양을 거치 않은 원초적(原初的)인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인간의 내면의 자아(自我)를 올바르게 형성토록 하며 진실한 삶으로 영위(營爲)토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즉 예술인, 예술가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깨우치려하기 이전에 자신의 삶에 도덕화(道德化), 인격화(人格化), 예술화(藝術化)가 선행(先行)됐어야 합니다. 즉 예술인은 전문적인 지식과 도덕이라는 두 날개를 달아야만 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희귀(稀貴)하기 때문에 예술인들을 가까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38. 두려움(fear, 恐怖), 불안(不安)에서 자유 함
내 삶에 두려움과 불안은 나를 더 높은 정신세계와 내면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몽학선생(蒙學先生, schoolmaster)이 됐습니다. (고대 헬라 시대에 주인의 자녀가 6-7세가 된 시기로부터 성인(보통 12살 혹은 15-16세)이 될 때까지 일상적인 시중(의복, 식사, 교양 등)을 들고 학교까지 안전하게 인도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책임을 맡았던 전문 노예를 말하며 supervision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 말씀사>참조
두려움을 몰랐다면 진리를 사모(思慕)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진리를 추종(追從)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이 없이 살아갈 것은 소원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없는 생활이야 말로 가장 평안하고 행복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행복을 위해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기 원해서 라기 보다 사람이 가장 고상(高尙)하고 기품(氣品)이 있는 교양을 갖추는데 두려움과
불안이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와 두려움이 병행(竝行)하지 못함도 이 때문입니다. 또한 도덕(道德)과 불안도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하면 불안과 두려움이 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보금자리는 질병, 재산의 잃어버림, 죽음, 실패, 이별, 명예 상실 등 환상(幻想)의 구조물들입니다.
그러나 해결방법, 벗어 날 수 있는 비결은,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하므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복(克服)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물리치거나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수양(修養)을 통해서 정제(整齊)된 아름다운 인격으로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세계, 또 다른 자신과의 진지한 대화와 수련(修練)과 절제를 위한 투쟁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육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안(私案)들을 집착(執着)을 하게 될 때 불안과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집착에서 벗어나면 해결 됩니다. 종교에서 ‘너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된다.’고 하는 경고도 이런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체의 지나친 욕망들과 분에 넘치는 재물에 대한 집착(執着)에서 벗어나면 그때부터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자리할 곳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깊은 의미의 가르침입니다.
나에게도 가정, 건강, 부귀영화(富貴榮華), 명예를 갈망하는 육신적인 집착의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그것들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바꿀 뿐입니다. ‘벗어 버리라’고해서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 것’이라는 개념에서, ‘신의 것’이라는 인정과 인식을 할 때 무한한 자유와 두려움의 구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재산은 내 것이라는 소유욕(所有慾)에서 잠시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 될 때 행복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별명을 ‘청지기(steward)’, 즉 주인(소유권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委託管理人)입니다. 또 하나의 인간의 별명은 ‘나그네(traveler)’
입니다. 나그네를 시로 표현한 시인 박목월(朴木月, 1915-1978)선생의 글이 있습니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읽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청록집(靑鹿集) 1946>
오래된 영화중에 ‘하숙생(下宿生)’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1966년에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출연은 신성일, 김지미, 최남현, 김희갑, 전계현등이고, 그때 주제가로 가수 최희준씨가 부른 노래 제목이 ‘하숙생’이라고도 했고 ‘인생은 나그네길(Life is on the lonely road)’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숙생(下宿生)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나그네라는 말의 어원도 의미가 있는데, ‘나간 사람’으로 문지방을 넘어 방에서 뜰로 나간다, 뜰에서 빗장을 풀고 문밖으로 나간다, 문과 문 사이의 길을 걷는 보행자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모두 나그네이니 내 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다 두려움과 불안에 노예가 되지 말고 흔연(欣然, gladly)히, 주어진 삶을 기쁘고 기분 좋게 살아가면 됩니다.
이때까지 자신이 주인으로 착각하든 마음에서 청지기, 나그네로 인식을 바꿀 때 모든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게 되며, 어떤 경우에도 빼앗기지 않는 평안과 행복, 자유를 누리게 됨과 동시에 신의 성품을 소지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39. 내가 죽음(死亡)을 이기게 된 때,
내가 죽음과 얼굴을 마주하고 바라보며 죽음의 냄새, 선명한 죽음의 빛깔을 보게 된 때는 23살,
생(生)과 사(死)가 실타래처럼 뒤엉켜 혼란하고 어려웠던 전쟁터에서입니다.
모면(謀免)하고 회피(回避)하려고 해도 필할 수 없는 군인(軍人)이라는 제한된 환경과 직무 속에 성큼 다가서는 죽음을 불가항력(不可抗力)으로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 가쁜 호흡, 염분(鹽分)이 군복에 배어 색(色)이 변해버릴 정도의 혹독한 더위, 멍멍한 정신, 그리고 신에게 살려달라는 비명(悲鳴)같은 외마디 기도뿐이었습니다.
외마디의 발악적(發惡的)인 기도를 신이 들었다는 확신도 없었고, 수없이 적과 조봉(遭逢)하여 10여분의 짧은 전투가 지나간 후, 포연(砲煙)의 먼지위로 겨우 하늘이 보이고, 손과 발이 내 몸에 붙어 있고 군복위로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을 본 후 그때서야 매캐한 화약 냄새와 흙을 뱉으며 뜨거워진 총을 끌어안은 채 철퍼덕 주저앉아 신에게 짧은 기도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두 번의 월남파병(派兵)과 2년이 훌쩍 넘는 긴 참전(參戰)에서 생명유지 방법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직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신이 자신의 섭리(燮理)에 따라 필요한 기간(其間)에 생명을 줄 것이고, 필요 하지 않은 때에 더 연장해 주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막연히 두려워할 것만은 아니고, 살 수 있다는 신념(信念)과 확신(確信)이 그다지 효력이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또한 나의 삶과 죽음은 신의 영역이지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막연히 두려워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죽음 앞에서 오히려 태연자약(泰然自若, imperturbability)할 수 있었던 이유 입니다.
불가피한 죽음 앞에 반항하거나 두려워하기 보다는 신의 판단과 결정을 순응(順應)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삶에 대한 태도가 아니고, 더더욱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에 대한 초연(超然)한 신앙의 상태입니다. 아마도 많은 선배들이 신을 사랑해 순교(殉敎)를 할 수 있었고, 많은 환란(患亂)과 고통을 의연(毅然)히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 역시 이 인식 때문이라고 봅니다. 쿠오바디스(Quo Vadis)의 장면 중 죽음 앞에서 찬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이러했을 겁니다.
죽음에 대한 긍정성(肯定性)을 든다면, 첫째는, 생명에 대한 모든 결정은 신의 섭리이고 권한에 있다는 것과,
두 번째는, 황량(荒涼) 고통스러운 나그네의 삶을 청산(淸算)하게 해주는 해방적(解放的)인 의미가 있습니다.
40. 건강(健康)한 정신, 건강한 육체(A healthy mind in a healthy body.)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신체적인 건강에 대하여 관심이 적음은,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히 건강해서가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 할 정도의 건강에 만족하고 더 좋은 신체를 만들기 위해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건강관리, 건강유지는 부유한 사람들의 여유이며, 가난한들 사람에게는 분에 넘는 사치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보다는 초연(超然)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마음과 행동을 단순하게 하며 범사(凡事)에 순수(純粹)함을 지키려고 합니다. 건강도 다른 원리와 같이 목적과 수단이 순수하면 그 결과를 얻게 되든지 못 얻게 되든지 간에 갈등이나 고통을 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신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집착(執着, obsession)은,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는 특징이 있는데, 특히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힘이 매우 강합니다. 집착이 없는 마음은 과거의 실패와 오류를 참고해 현재와 미래를 도전하게 합니다. 그러나 집착은 과거에 안주(安住)하게 합니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 절망, 성공과 행복을 회상(回想)하므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합니다.
집착은 지혜가 없어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을 뜻합니다.
집착은 또한 잘못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재산, 돈에 대하여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고,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현재 정치계에서 비인간적, 비윤리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은 표본입니다.
정신적인 평형(平衡)을 유지할 때 건강합니다. 내가 계획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행복하고, 건강이 좋은 안 좋든 행복합니다. 가난을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질문을 할 때 ‘건강 비결’의 짧은 대담은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있어진다.’(A healthy mind in a healthy body.)라는 말을 합니다. 로마의 풍자(諷刺)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라틴어, Decimus Iunius Iuvenalis, 55-140)’가 한 말입니다만, 정신이 건강해 평형(平衡)을 유지하므로 모든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 육체에도 건강함이 오게 된다는 말은 모든 종교에서도 같은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면, 울타리 기능을 하는 육체보다는 주택기능을 하는 정신을 더 소중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착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순수함으로 평형(平衡)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나에게 늘 유혹하는 것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대류(對流)인 유물사관(唯物史觀)으로 인해 보이는 것, 실리적(實利的)인 것, 경제우선주의, 소유와 행복이 동일하게 보이는 환상들입니다.
이런 것이 나의 정신을 피폐(疲弊)하게 합니다. 그래서 늘 싸우고, 늘 힘들고, 항상 나를 채찍질 합니다.
소중한 정신의 건강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며, 신이 허락한 일정(日程)을 육신의 건강의 쇠락(衰落)으로 준수하지 못하는 불행한 상황이 파생(派生)되어 신에게 질책(叱責)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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