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해 내가 다니던 일신초등학교도 입시에 대비하여 5학년 때 성적을 고려하여 60명을 선발하여 일류중학교만을 목표로 삼은 특별학급을 편성했다. 남학생 30명 여학생 30명으로 된 혼성학급이다. 뭇 학생들의 선망과 한편으로는 질시의 대상이 됐다. 나도 5학년에서 성적을 기준으로 한 탓인지 이 학급에 편성되었다.
여기에서 탈락하여 일반학급으로 배치된 학생들은 열등감에 사로 잡혔고 특별반 학생들은 우월감에 사로 잡혀 우쭐됐다. 그런데 나는 특별반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나는 여학생들과 한반이 되어 공부하는 것도 왠지 싫었고 그곳에 뽑힌 학생들의 가정도 전부 나보다 부유했고 특히 치맛바람이 대단했다.
또 특별반에 선발됐다고 으스대며 잘난 척 나대는 모습도 싫었다. 특히 내 친구 덕균이와 한반이 되지 못한 게 못내 섭섭했다. 덕균이도 제법 공부는 잘했는데 선발되지 못한 이유가 공정하지 못한 선발기준 때문으로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다른 반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모두가 이 특별반에 들어오려고 야단들인데 오히려 나는 다른 평범한 반으로 보내달라고 하니 선생님께서는 어이가 없었나보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서 안 된다고만 말하신다.
그래서 나는 울면서 버텼다. 여학생이고 남학생들이 나를 둘러싸고 이상한 녀석인 양 쳐다본다. 나는 며칠간 교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애서 서성대니 할 수 없었는지 다른 반으로 보내졌는데 우연히도 덕균이가 있는 6학년 3반이였다.
이를 계기로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혼성 특별반을 두고 그 장단점에 대한 논란이 되었는지 특별반이 얼마 후에 해체되고 평범한 반으로 재편성되었다. 나는 졸지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평범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치솟은 반면에 특별반에 속했던 소수에게는 눈에 가시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6학년에서는 매달 모의고사를 치렀다. 시험 결과는 덕균이와 내가최 상위권을 서로 다투었다. 다음해 (58년) 입시철이 왔다. 그때 정부에서는 중학교 입시전형방법을 개정하여 발표됐다. 지나친 입시과열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각 중학교의 입학생의 반은 무시험으로 나머지 반은 유시험으로 선발 한다는 내용이다.
수험생입장에서는 무시험으로 합격 못하고 유시험으로 시험을 치룰 경우 입학정원이 반으로 줄었기 때문에 합격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전년도에 비하여 더욱 어려워진 방식이다.
무시험 전형자가 되기 위해 권력이나 부유한 집의 치맛바람이 개입할 여지가 충분했고 또 그런 사례가 만연했다. 부정한 마음만 먹으면 그에 따라서 성적순을 뒤바꿀 수가 있었다. 입지부정이고 입시비리다.
결과를 보니 정말 그랬다. 최 상위권을 번갈아 하던 나와 덕균이도 성적이 뒤바뀌어 5등과 6등이 갈수 있는 학교로 무시험 배정이 되었다. 엄청난 불공정이다.최상위권이 였던 덕균이와 나는 5등과 6등으로 밀려나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수긍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런 일에 나서서 노골적으로 항의를 하거나 시정을 요구하진 못했다. 기득권집단에 대한 비평보다는 부러움이 섞인 질투만 있었다. 오랫동안 젖었던 권위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시부정을 빙산에 일각이었고 사회전체의 총체적 부정과 더불어 3년 후에 4. 19혁명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아무튼 최상위권이 경기 중학교나 서울 중학교에 무시험기회를 빼앗긴 나와 덕균이는 어린 마음에도 억울했고 분했다.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 중학교에 유시험으로 라도 도전하기로 했다.
입학시험 날이다. 넓은 학교 운동장에는 입시를 응원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학부형들로 만원이었다. 입시를 치루고 난 후 집에 돌아와 나름대로 확인해보니 무난하게 잘 치렀다고 생각은 되었다.
며칠 후 발표 날이다. 전날 밤 나는 금방 잠이 들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의 밤새며 새벽신문을 기다리신 것 같다. 조간 조선일보에 실린 합격자 명단 속에서 내 이름 석 자를 찾으시느라 한 명 한 명 이름을 큰소리로 읽어 내려가신다. 옆에서 마음조리며 보는 내 눈에는 아버지 손끝이 약간 떨리신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순간 “여기 있다”고 외치시는 아버지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춘 것으로 기억된다. 잠자던 동생들도 모두 깨어나서 환호했다. 다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찾아보니 덕균이도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일신초등학교에서는 초특급 일류중학교인 경기중학교에 3명 서울중학교에 4명의 합격자가 배출됐다. 그 일신국민학교는 내가 졸업한지 십 년 후 도심화에 밀려 지금의 극동빌딩이 됐고 학교 흔적은 사라졌다. 일제 강점기 고종의 외동딸인 덕혜옹주가 다녔던 학교가 일신 초등학교다.
첫댓글 일신국민학교 시절까지 기술이 끝났습니다 다시보니 오타도 많고 문맥도 어색한부분이 많군요 끝까지 읽어주신 동문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시월초 연휴 끝나면 사춘기때인 중학교시절을 몇회올리겠습니다 그래야 이 글이 마무리가 될것 같아서요 연휴 멋지게들 보내세요^&^
특별학급...역시 선배님은...^_^...대단하십니다..
저희들도 5학년 때...미리 중학입시를 보는 친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물론 우수한 학생의 경우만 말입니다..
교가를 들으니...정말 세월이 무상해 집니다....선배님...감사하게 보고 듣고 갑니다...
추신 : 선배님...교가 음원 파일을 올려 주시면 안될까요?
ㅎㅎ 착각하셨네 저~노래는 모교의 교가가 아니고 그때 졸업식 노래지요 필요하시면 그냥 긁어가시면 됩니다 ㅎ전 아직도 <아침해 솟아온다 구름헤치고>로 시작되는 교가를 부를 수 있어요ㅎ
아 !!! 역시나 우등생의 발자취는 남다른 점이 있는듯합니다. 현 회원님들 중에두 선배님처럼 명문출신이 보입니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두 발표되는 합격자 명단, 새벽녁 배달되는 잉크냄새 풍기며 낭보를 알리곤했죠 ... 졸업식 때 눈물바다가 되었던 제 3절 가사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만나세~~~" 에서는 뭉클합니다. 선배님의 감성어린 글귀 감동입니다 이 번 정모 때 나오시길 .... ~ *
우등상장을 탓으니 우등생은 맞는데 머리가 남달리 뛰어난 것도 아니고ㅡ국민학교 시절엔 그저 시키는대로 한 고지식한 모범생였을 뿐예요 중학교부터는 정말 머리좋은 녀석들 틈에서 고생만 했어요 ㅎ정모날 그날은 선약이 있습니다ㅎ그 전에 몇분 시간 나시면 이곳으로 놀러오세요ㅎ
선배님의 글~~
감동적으로 잘 읽었습니다. .
저의 어린 그 시절과도 많이 비교가 되어
가슴 뭉클 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ㅎㅎ 감동까지 하시다니. . .ㅎ읽어 주시는 것만도고마울 따름입니다 ㅎ
잘 구독 했습니다. 선배님 (^&^)(__)(^&^)
마총무님~ 근데요 어제부터 특별회원이라고 떠 있던데 내가 특별하짓 하는건가요? ㅎㅎ저~글속에 특별반도 싫다고 눈총받으면서 도리질했는데 여기서 특별한 회원이 됐으니 늘그막에 가문의 영광입니다 ㅎ
@구름정 오늘 일기장에 특별한 날 이였다고 기록 해 놓으셔요. 선배님.(^&^)
선배님~ 뚝심있는 어린이셨군요ㅎㅎ
당찼던 모습도 보이고 그러면서도
수줍움 많은 아이였을것 같아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져요 ^_^
글을 읽다보니 저 고등학교 입시
치를때 생각도 새록새록 나고요^^
중학생이 된 선배님 기대해볼게요^^
사람은 때가 지나면 그 때가 그리워 지지요 학생때는 제일 큰 스트레스가 시험공부인데 그래도 그때가 그립기만 합니다 당차진 못했고 마음 약하고 고지식한 모범생였어요 ㅎ지금도 슬픈영화를 보면 눈물이나요ㅎ 그때 같은 중학교에 입학한 단짝친구 덕균이는 작년에 고인이 됐지만 그와의 추억이 중학교에서도 계속되기에 몇회로 정리해서 올리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계속 박수부탁 드려요ㅎ주말 잘 보내세요~ㅎ
아쉽게도 이번회로 일신국민학교 때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군요..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당차게 밀고 나가는 뚝심이 막강했던 소년시절 선배님의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있어 재미있고 교훈적입니다..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하겠습니다..^0^
오늘 그 옛날 금수장여관였던 엠베서더 호텔에서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고 동국대학 후문과 제일병원 옛날 필동파출소앞을 지나 코리아하우스 그리고 필동주유소 옆으로 빠져나와 모교터인 극동빌딩 앞과 아스토리아호텔을지나 그때시절 세종여대자리를 보며 남산길로 오르다 KBS자리 그앞에 명지대학자리 건너편 숭의여고터를 눈팅하며 옛생각을 많이 했어요 대한극장 옆골목도 극동빌딩 바로 옆골목도 그대로 있더군요 언제 시간 내서 틈나는 몇 동문들과 인현동을 포함한 옛 추억길을 더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ㅎ 지금은 여의도 서울 세계불꽃축제구경하고있습니다ㅎ
아름다운 추억으로 써 내려온 글들을 내려 읽다보니 뚝심있는 후배였슴을 알게되여 자랑스럽습니다. 가시 밭 길을 걸어야만 했던 지난 날을 뒤도라보면 내세울 것이 하나없이 지워져 버리는데, 이제는 보약이 돼였구나 생각하며 살아간담니다. 90세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다니, 저와 비슷하네요. 저도 생존하여 계신 어머님이 94세 입니다.
동생이 모시고 용인에서 살고 계심니다.
다음 글이 기대됨니다.
벌써 11시가 넘었네요. 나머지는 내일로 미루어야 하겠네요.
국민학교 선배님을 만나니 정말 기쁨니다 어머님이 계시군요ㅡ 우리부모 세대들이 고생하신 분들이고 이 나라 경제발전의 견인차 주역들이지요 우린 그저 그분들이 시키는 대로 나서 월남전참전 중동파견 독일광부 간호원으로 행동대원역할을 열심히 수행했고요 ㅎ자당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선배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ㅎ
구름정, 늘 하는 버룻으로 동래의 삼학도 인공수로 트래킹 길을 돌며 활짝 핀 해국을 들러보았습니다. 바닷가에 핀다하여 해국이라 이름 지어진 꽃이 오늘따라 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후배님이 있어 일신카페가 좀더 활성화 될 것 겉습니다. 정말 만나게되여 매우 기쁨니다. 한글날인 오늘이 휴일이네요. 즐거운 일만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