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작은 허점”에 빠진 사나이
2016년 5월 즈음이었죠. 인천국제공항 송환대기실에 28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6개월 넘도록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터미널〉(The Terminal, 2004)을 떠올린 사람이 저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제작 당시 17년째 프랑스 드골 공항에 머물고 있던 이란 남성을 모티프로 한 영화였어요.
〈터미널〉의 빅토르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JFK 공항의 국제선 환승 터미널 67번 게이트에 9개월째 거주하고 있습니다. 빅토르가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고국을 떠나오던 날, 바로 그 시각에 그의 조국 크라코지아에 쿠데타가 발생해서 여권과 비자가 효력을 잃고 맙니다. “Unacceptable!” 미국의 입국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된 거지요.
공항의 차기 보안국장을 노리는 출입국관리소 책임자 프랭크 딕슨(스탠리 투치)에게 빅토르는 성가신 골칫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입국 자격이 없지만, 난 당신을 억류할 자격이 없어요. 당신은 ‘법의 작은 허점’(crack)입니다.” 딕슨은 ‘허점crack’이라고 말했어요. 균열이고 틈새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증명 서류도 없어서, 빅토르는 딱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딕슨은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오가는 환승정거장에 호출기와 식권 몇 장을 쥐어주고 빅토르를 ‘풀어’ 놓기로 합니다. 공항에서 통용되는 임시 신분증도 마련해 주었죠. 그렇게 빅토르는 JFK 공항의 한복판에서 진정한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이 면세 구역에서 영화가 미국 대형서점 ‘보더스Borders’의 간판을 유독 자주 화면에 담는 것이 우연은 아닙니다. 경계 지대에 풀어주었다고는 하지만, 빅토르는 CCTV 카메라로 24시간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승진을 위한 감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빅토르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주기만을 바라던 딕슨은 그를 내내 주시하고 있었죠. 그리고 궁금해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저 인간은 왜 일부러 기회를 주어도 공항 문밖으로 도주하지 않는지, 무엇을 저렇게도 미련하고 착실하게 기다리고 있는지. 사실 딕슨은 빅토르가 공항 밖으로 나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거든요. 정확하게는 자신의 관할과 책임 영역을 벗어나 주기를요. 급기야 이민국과 경찰 등에 의뢰하지만, 이미 잡아들인 범법자와 불법체류자들로 그들의 ‘아메리카’는 포화 상태였습니다.
타고난 적응 능력을 지닌 빅토르는 공항 생활에 곧 익숙해집니다. 67번 게이트를 보금자리로 만들고 스스로 언어를 배우고 친구들을 사귀고 머리를 쓰고 몸을 써서 돈을 벌고 심지어 미모의 승무원인 아멜리아(캐서린 제타 존스)와 연애까지 합니다. 게다가 기지를 발휘해서 궁지에 몰린 외국인을 도운 일로 공항의 영웅이 되자, 딕슨은 이제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애초에 내 영역을 침범하지 않거나 어서 사라져줬으면 좋겠지만 막상 시야에서 사라지면 조금은 죄책감도 느껴지고 불안해지는 존재, 사고치지 않고 조용히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잘’ 지내는 꼴은 못 보겠는 문제적 인간, 잠재적으로 무슨 범죄를 저지를지 모르므로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자극하는 소모적인 타자. 15년 만에 다시 본 〈터미널〉에서는 이처럼 딕슨이 빅토르를 대하는 방식이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놀랍게도 이 영화는 ‘난민’에 대한 영화가 아니더군요. 난민을 대하는 국가 제도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편견과 모순에 대한 영화였어요. 비록 수십 년 째 내전 중인 전쟁터였지만, 빅토르는 자신의 나라 크라코지아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두려워 할 생각도 없었어요. 망명 신청 또는 난민 자격 심사 요청을 명목으로 빅토르를 당장 공항에서 내보내려고(즉, 미국에 들여보내려고) 했던 딕슨의 마지막 시도도 따라서 무산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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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심드렁한’ 환대를 타자를 잔뜩 노려보다가 쉬이 피로해지는 딕슨 식의 대응과 달리,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희망의 건너편〉(The Other Side of Hope, 2017)의 인물들은 주인공 칼레드(셰르완 하이)를 참 무심히도 대합니다. 시리아인 칼레드는 미사일 공격으로 한순간에 집과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과도 국경 지역에서 생이별을 했는데요, 폴란드에서 ‘스킨헤드’들의 공격을 피해 올라탄 배가 헬싱키 행이었어요. 망명 신청을 하려고 스스로 찾아간 핀란드 이민국은 ‘선진국다운’ 교양으로 칼레드를 맞이합니다. 그는 난민 인정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라크 출신 ‘마즈닥’을 만나 유용한 정보들을 얻고, 난민수용소를 도망 나올 때는 수용소 직원의 말없는 도움을 받았는데요, 가장 큰 도움은 식당 사장 비크스트룀(사카리 쿠오스마넨)으로부터였습니다. 다른 인물들처럼 사장도 사실은 ‘제 코가 석자’입니다. 알콜 의존 환자인 아내를 떠나 이제 막 변변찮은 식당을 인수했거든요.
“(칼레드를) 여기서 지내게 할 순 없어. 평온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게 나쁜 거야? 응? 나쁜 거냐고.” “왜 나한테 그걸 물으세요? 사장님이시잖아요.” 비크스트룀과 종업원 ‘칼람니우스’의 심드렁한 대화입니다. 혹시 냉동고에서 재울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칼레드의 키를 줄자로 재보던 종업원이었어요. 전쟁터이지만 “위험이 확인되지는 않은” 본국에 “자국의 세금을 들여” 고이 돌려보내주겠다는 핀란드 당국의 점잖음과 길거리 ‘스킨헤드들’의 야만적 혐오 사이 어느 지점에, 평범한 그들의 과하지 않은 친절이 있습니다.
그들은 칼레드를 엄청나게 불쌍해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꼭 필요할 때 나타나 꼭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고 또 사라집니다. 자신도 난민 신세이면서 때마다 휴대폰을 빌려주고, 이민자 단속을 피하도록 식당 구석에 숨겨주고, 빈 창고에 돌돌 말린 매트 하나 들여 재워주고, 국경을 여러 개 넘어 짐을 운송하러 떠났다가 “빈 차로 돌아오는 김에” 칼레드의 누이를 공짜로 데려다주고, 인종주의자들이 칼레드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막 불을 당기려던 순간에 목발 짚고 나타나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그들을 쫓아버리는…, 그런 일 정도였어요. 칼레드도 그들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보답을 합니다. 이를테면 종업원들이 사장 몰래 키우던 개 ‘코이스틴넨’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고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것 같은 일들이었죠.
핀란드의 감독인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전 작품 〈르아브르〉(2011)에서도 가봉 출신 불법체류 소년을 온 마을이 나서서 보호하고 보살피게 했는데요. 유난 떨지 않는 담담한 도움과 유머가 오히려 비현실적이어서 동화 같았던 작품이었어요. 때마다 의미심장한 노랫말이 흐르는 이 영화 〈희망의 건너편〉도 그렇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검은 ‘X’를 그려 넣은 마스크로 최대한 가려도 무서운 표정을 감출 수 없던 얼굴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제주도에서 “가짜 난민” 운운하며 난민 반대 시위를 하던 그들 말입니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 찾아온 이들에게 우리도 차라리 심드렁하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친절해도 좋겠다 생각하면서요.
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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