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로(海公露)
해공 신익희 선생(海公 申翼熙 先生)
오늘은 경기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에 있는 해공 선생님의 생가를 찿았다.
공의 본관은 평산(平山) 이요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海公)이시다.
이 사진은 서하리 마을 앞 해공로변에 선생의 동상과 함께 세워진것인데 바로 이 탑 뒤에 보이는 마을에 선생의 생가가 있다.
해공 신익희상(海公 申翼熙像)
선생은
1892년 출생하여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들어가 한국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역임하며, 기관지인「學之光」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으며,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인 광주에서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ㆍ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1919년 3.1 운동 때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 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내무차장 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여,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ㆍ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근,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ㆍ자유신문사 사장ㆍ국민대학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광주(廣州)에서 무투표(無投票)로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 부의장(副議長)이 되었다가 이승만(李承晩)이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國會議長)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韓民黨)의 김성수(金性洙)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결성하고 대표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2대 국회의장이 되었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확대 발전시켜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하여,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와 맞서 선거유세를 벌이다가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내에서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다.
해공 선생께서 불운 하게 급서만 아니 하였더라면 ~ 이승만 독재 정권을 그야말로 국민들의 민의에 의해 실각 시키고 선생을 대통령으로 당선만 시켰더라면 ~ 그 처절한 4.19의거도 5.16군사혁명도 어니 거치고 자유민주국가로 발전 할수 있었을터인데 .....
하늘은 무심 하게도 잠시 이 나라를 버리려 했었슴인가 .... 한때 온 국민은 선생을 잃고 좌절 해야만 했었다.
만앙정(萬仰亭)
해공 선생께서 태어나 자란 생가이다.
2월 하순의 쌀쌀한 날씨 속에 한 거대한 인물이 그 옛날 이 고택에서 나고 자라 나셨다 생각 하니 자못 마음이 경건해지는 순간이었다.
주인 없는 만앙정이 쓸쓸함을 더해 가는데 역사의 아이러니를 곱씹으며 발길을 돌렸다.
부디 선생의 업적과 민족정신이 이 나라 온 국민들에게 가슴 깊이 새겨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서하리 해공선생의 고택에서 바라본 앞산이다.
이 마을에 저녁노을이 질 때에 비치는 빛이 너무도 아름다워, '서쪽하늘에 지는 아름다운 노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해온다. 조선시대에는 '서하동'(西霞洞)이라고 불러왔다. 지금도 속칭 '사마루'라고 부른다.
이 마을은 경안동에서 퇴촌면을 거쳐 양평군 강하면으로 통하는 00번 지방도로를 따라 퇴촌면 방면으로 가다가 초월읍 무갑리에 이르기 직전 좌측으로 경안천을 건너 팔당호 상류에 형성되어 있는 농촌 마을이다.
첫댓글 안녕하셔요 저는 사진속 마을에 살고있는 서하리 지도자 안병국 임니다 우리마을 차아주셔서 감사함니다 6월달에는 토마토가 많이 나오니 또차자주새요 설물드릴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