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앤 피플: 21년째 낭독봉사 이어온 배우 최재원
“낭독으로 따뜻한 세상 속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난 9월 종영한 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에서 악역 나도진을 연기했던 배우 최재원 씨. ‘국민 밉상’이라는 애정 어린 별칭을 얻을 정도로 그는 나쁜 남자였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런 그를 ‘착한 남자’, ‘바른 생활 사나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오래도록 시각장애인을 위해 낭독봉사를 해 온 최 씨의 숨은 선행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21년째 매월 스무 곳의 자선단체를 후원하고 있는 ‘기부 천사’이기도 하다.
Q. 반갑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비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A. 안녕하세요? 1995년 데뷔한 올해 25년 차 배우 최재원입니다. 이번 드라마에서 온갖 미움을 독차지하다 보니 거리감이 느껴졌나 봅니다. 그만큼 작품에 잘 녹아들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네요. 데뷔 후 줄곧 유머러스한 배역만 연기하거나 교양 프로그램 MC 등으로 활동했어요. 반듯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많이 보여드렸죠. 그러다 지난해 SBS 드라마 ‘스위치-세상을 바꿔라’에서 카리스마 있는 악역을 맡았고, 이번에도 밉상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변신을 시도했어요. “배우는 닥치는 대로 연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새기며 고민과 도전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Q.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은 언제 처음 하셨나요.
A. ‘배우가 되면 어떨까?’ 하고 스치듯 생각한 적이 있어요. 홍콩 출신의 액션배우 성룡이 멋져 보였거든요. 고등학교 때 예술 쪽을 전공하고 싶어 연극영화과 연출 분야에 지원했는데,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연출보다 연기에 더 끌리더라고요. 적성도 연기 쪽이 더 맞았고요. 그래서 방송국 탤런트 공채시험이 있을 때마다 응시했어요. 한 해에 서너 번꼴로 지원했는데, ‘칠전팔기’를 넘어 ‘12전13기’를 달성했죠. ‘정말 연기자의 길이 내 길이 맞을까’ 하는 흔들림도 있었으나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1년만 더, 1년만 더’를 반복하면서 최선을 다했죠.
Q. 데뷔 후 낭독봉사와 기부를 꾸준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낭독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합니다.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성당에서 주보를 보다가 ‘낭독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접한 게 발단이었죠. 하상장애인복지관에서 교육을 받고 처음 녹음에 임했을 때가 생생하네요. 처음에는 실수 연발이었어요. 작업 중간중간 직접 듣고 다시 녹음하는 일을 셀 수 없이 반복했죠. 이러다 언제 녹음도서가 완성될까 싶어 편집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쭉 읽은 적도 있었어요. 2년 전부터는 KBS 공채 동기 모임 ‘한울타리’와 함께 낭독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간 무료급식이나 김장봉사, 지체·뇌병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목욕봉사, 연탄봉사 등을 펼쳐왔는데, 기왕이면 연기자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낭독봉사가 좋지 않겠냐고 건의했죠. 고맙게도 다들 흔쾌히 찬성해주었습니다. 기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어머니께서 여러 곳에 기부를 하시면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표본을 실천하고 계시거든요.
Q.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군요.
A.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어요. 아버지는 무디지만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셨고, 어머니는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일러주셨죠. 저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해주셨어요. 저 역시 부모님의 사랑을 재현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최근 큰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이따금 티격태격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풀어가려고 합니다. 집안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야 제 삶에도 웃음이 가득할 수 있으니까요.
Q. 낭독봉사의 매력을 꼽는다면요.
A. 낭독을 통해 만들어진 ‘소리책’은 테이프나 음성파일 형태로 시각장애인에게 제공됩니다. 수필이나 소설, 각종 교양서 등 녹음이 이루어지는 도서 장르도 다양하죠. 시각장애인은 제 음성을 매개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인물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접합니다. 녹음하는 동안에는 감정에 집중하고 목소리를 조절하는 등 연기 기법을 다소 활용합니다. 이렇게 하면 시각장애인이 더 몰입도 높은 독서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바람을 담아서요. 시각장애인은 제가 표현하는 소리로 세상을 만납니다. 그러니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녹음한 소리책은 이 세상에 그 파일, 그 테이프 하나뿐이잖아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보람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이런 게 낭독봉사의 매력이죠.
Q. 배우로 활동하며 낭독봉사까지 꾸준히 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A. 아무래도 일이 불규칙적이다 보니 힘든 부분이 있어요.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면 연기하느라 정신이 없고, 촬영이 끝나면 밀린 또 다른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분주하거든요. 몸이 너무 피곤할 때면 낭독봉사가 후순위로 밀릴 때도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낭독봉사 중에 한참을 졸았던 적도 있죠. 하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낭독봉사 같은 사회공헌활동은 꼭 하고 싶어요. 복지기관에서 행사 진행 제의가 들어오면 일정이 되는 한 꼭 맡으려고 해요. 제가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공인으로서의 작은 의무가 아닐까요.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A. 역할이 주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해 연기할 겁니다. 지금처럼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할 것이고요. 단, 혼자만 행복한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혼자 하는 연기, 혼자 찍는 드라마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단 한 장면이라도 스태프가 있어야 촬영이 가능하죠. 삶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가 아닌 가족이 함께 웃으면 좋고, 주변이 같이 행복하면 더 좋고, 세상이 한결 따뜻하고 재미있는 곳이 되면 더더욱 좋겠지요.
그는 인터뷰하는 내내 웃었다. 기자를 배려해 차근차근 천천히 말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따뜻한 나눔 행보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손끝으로 읽는 국정 145호 피플 앤 피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