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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시바 모리헤이 (植芝盛平,1883~1969)
다음 글은 나우와 유니 무예동에서 활동하시는 나잇헤드(조규섭)님께서 번역하신 일본 출판물인 '세계의 격투기 히어로들'중 개조(開祖)를 다룬 부분을 허가받고 발췌, 게재한 것입니다.
"상대와 싸우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싸운다고 생각하면 벌써 패한 것이다."
과거 무술이란 신비와 환상의 베일속에 쌓여 있었다. 옛 명인이나 달인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면, 그저 초능력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특정한 몇몇에게만 전 해지던 무술도, 그 기술이 널리 알려지게 되며, 신비의 베일이 한 장 또 한 장씩 벗겨져 나 간다. 신기(神技)의 비밀이 파해쳐지며 알려지는 것은 바로 '신통력'을 잃는 것이다.
아이기도.(合氣道) 현대 무도중 하나이며,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있음에도 아 직도 그 신비로움을 잃지 않고 있다.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기술이 신에 달했다' 라고 칭송되던 천재무도가이며, 수많은 신비로운 체험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그는 검술, 창술, 장(杖)술등을 특기로 하였으며, 맨손으로 하는 체술(體術)로도 절대 패함이 없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생애를 통하여, 아이기도의 정신과 그 신화 속의 한 명을 접해보자.
1.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생애
A. 유년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메이지 16년(1883년) 12월 14일 '와까야마'현 '다나베'시의 중농가정 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자가 귀한 집안이었으며, 우에시바도 다섯남매중 유일한 남자였다. (누나:3명, 여동생:1) 그래서 그는 양친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컸다. 부모가 귀하게 키워서였는지, 어려서는 물리나 수학을 좋아하여 독서에 몰두한 반면, 신경과 민으로 매우 약했었다고 한다. 부친은 아들의 빈약함을 걱정하여 아들에게 힘자랑도 하고, 아침일찍 산보도 같이 나가고, 동네 꼬마들과 스모를 하게 하는등 아들의 체질개선에 힘썼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아버지인 '우에시바 고우로꾸'(植芝興六)은 당시에는 매우 큰 체격 으로 천칭에 걸린 쌀 40되¹짜리를 양손의 새끼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내렸다 할 정도였으며 모리헤이의 증조부 또한 괴력의 소유자여서 '다나베'의 어전시합에 나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상들의 괴력과 소학교(초등학교)시절 선생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에서 자극받아, 그는 점점 심신을 단련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그는 무술과는 전혀 인연없는 그저 조그맣고 빈약학 소년이었다.
※ 1. 되 : 斗는 사전에 10되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도량형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B. 무술과의 만남
우에시바는 메이지 34년 (1901년) 18살 때 홀로 동경으로 올라왔다. 상인으로서 대성해 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상경후 처음에는 꽤 고생하였으나, 반년후 그는 자신의 힘으로 1한채를 전새냈을 정도 까지 됐다. 그는 '우에시바 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학습용품등을 취급했다. 점원도 4∼5명이나 되어, 그의 나이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장사하는 것은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나보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그는 우울한 기분을 다스리기 위해 '기도류'(起倒流)유술을 배우게 됐다. 무술과의 만남은 이때 부터 이며, 처음에는 기분전환을 위해 시작한 것이다. 우에시바는 이 때, 짧았지만 '신가게류' (新陰 流) 검술도장에도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동경에서의 생활이 오래되지는 않았다. 원래 튼튼하지 못한 데다가, 상경해서 부터 무리했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1902년 여름, 각기병에 걸렸다. 상업에 흥미를 잃게되고, 징병검사도 가까워져서 우에시바는 이 기회에 가계를 정리하고 귀 향하기로 결심했다.
C. 병사들의 신
귀향한 그는 군대를 이끌고 적을 무찌르는 꿈을 품고, 의기양양하게 신체검사를 받았다. 하 지만 키가 155㎝밖에 않되서 불합격되었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징병검사관과 직접면담하기 위해 버텼으나, 수송병으로만 입대가 가능하 다고 하여 우선 단념한다. 그래도 군인의 꿈을 포기하지 않던 그는, 어떻게든 키를 키워볼려고 눈물나는 노력을 하 였다. 산에 올라 거목의 가지에 매달리고, 험한 비탈길을 뛰어오르고, 계곡을 뛰어넘어 다니는등 필사 적으로 신체를 단련시켰다. 이런 훈련은 종종 밤중까지 계속되어, 마을에서는 '산에 괴물이 나 타났다'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이렇게하여 그는 점점 튼튼하게 되어 체중도 75㎏을 넘었다. 그의 완력의 감함은 유명 한데, 그 기초는 이때 쌓여진 것이다. 우에시바는 메이지 36년 (1903년) 12월, 재신검에 합격하여 '오오사까 제 4사단휘하 제 37연 대' (일명 기주(紀州)연대)에 편입되었다. 그렇게 바라던 군입대를 한 그는, 하루종일 열심히 일했고, 다른사람은 싫어하는 일도 솔 선수 범했다. 산에서 단련한 덕에 체력또한 뛰어났으나, 가장 뛰어난 것은 '부대최고'라 불린 ' 총검술'이었다.¹ 동경에서 유술과 검술을 배웠으며, 입대후에도 틈틈이 부대근처에 있던 '유생 류'(柳 生流)유술 도장에 다녔었으나, 이런것만으로 그 정도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역시 무술 에 대해서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생각된다. 이러한 실력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마음씀씀이도 좋아서 그는 부대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런 화려한 활약덕에 그는 '병사의 신'이라고 까지 불렸다. 그는 메이지 38년 (1905년) 8월에 '오오사까 제 4사단 와까야마 제 61연대'에 배속, '러일 전쟁' 에 참전하였으며, 거기서의 전공으로 '군조'(軍曹;하사관계급)로 승진하였다. 우에시바는 당 시를 이렇게 말했다. "몇번 전투를 격어보다보니, 날아오는 총알이 보이게 되더군. 어느쪽에서 오든지 보이는 거야. 그래서 총알 피하는것도 쉽게 하게 됐지" 군조로 승진후 그는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추천입학을 상사로부터 권유받았다. 이것은 직업 군인으로서의 출세를 보장받은것이어서 그도 마음에 들었으나, 집안의 대를 이어나갈 것을 걱 정한 부친의 반대로 포기하였다. 그의 4년간의 군생활은 이렇게 보냈다.
※ 1. 총검술 : 당시 일본군의 총은 자료등에도 나오듯이 미군의 M1소총보다 길었으며, 대검 또한 현재형태의 것이 아니라 30여㎝이상의 긴 꼬챙이 처럼 생겼었음.
대동류합기유술 당시의 개조
D. 대동류와의 만남
제대후, 우에시바는 욕구불만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것을 걱정한 부친은, 종종 들리던 간사이(關西)의 유도가 '다까끼 기요시'(高木喜代市)를 초대하여 자신의 집에 유도도 장을 열었다. 이후, 우에시바는 짬이 날때마다 다까끼의 지도로 유도를 배워, 강도관류의 근대 유도를 익히게 된다. 유도로 스트레스는 풀리나, 이렇다할 목표를 찾지 못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돕고 있던 그는, 얼마후
정부의 '북해도개척 이주민단체 모집계획'에 관심을 가지게된다. 그래서 마을의 유 지들을 모집하여 '단체이주'의 뜻을 굳힌다. 그는 메이지 43년 (1910년)에 사전답사를 마친후, 54가구 80여명의 참가자를 모았다. 그 로부 터 2년후, 그는 29살의 나이로 紀州 의 단체장이 되어 지금의 '北海道市 文別郡 白竜村'에서 황무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우에시바는 거기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사업이나 행정적인 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벌목작업에서 그의 완력이 발휘 되었으며, 여기서 더욱 단련되었다. 중노동에 의해 단련된 그의 힘은, 한팔로도 여러명의 장정 을 버텨낼 정도였다. 그는 후에 "내 팔은 벌목작업으로 단련된거니깐 나무보다도 튼튼한건 당연하지"라 했다. 1915년 2월. 개척사업이 한창이던 때, 우에시바는 '요시다 신따로'(吉田幸太郞)¹의 소 개로 '다께다 소가꾸'와 만난다. 우에시바는 중요한 일이 한창이었으나, 다께다가 묵고 있는 여관에서 10일간 머무르며 지도 를 받았다. 이 이후 그는 대동류의 수련에 열심이었으며, 다께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초 대하 여 같이 지내며 개인교습을 받을 정도였다. 다께다도 그를 아껴서 후계자로 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 1. 요시다 신따로 : 다께다 소가꾸를 수행하며 대동류를 배웠으며, 교수대리(사범대 리)를 허가받았다. 2차대전이후 동경에서, 그 후에는 茨城縣의 히따찌(日立)市에서 대동류를 전파했다. 극진공수의 최영의에게 대동류를 가르쳤음.
E. 오모토(大本)敎와의 만남
북해도에서 우에시바는 '가미유우베쓰'(上湧別)마을의 위원이 되어, 여러 가지 사업추진 외에 새로운 낙농에 대해 구상하는등 여러방면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북해도에서의 생활은 장 래가 보장된것이었다. 그러나 1919년 말.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바로 귀향을 결심 했다. 북해도의 모든 재산을 팽개쳐둔체 급히 고향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다시금 인생의 방향 을 바꾼 인물과 만나게 된다. 오까베(陵部)에 있는 '오모토'교의 '데구찌 오니사브로'(出口王仁三郞)¹라는 '진혼, 신 내림'의 거물과 만난 것이다. 그는 부친의 회복을 빌기 위해 교또의 시타오까베(下陵部)에 들려, 데구 찌와 만나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결국 그는 오까베까지 들린 관계로 부친의 임종을 지켜 보지 못했다) 부친의 사후, 그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오까베로 옮길 것을 결심했다. 데구찌는 그를 환영하였으며, 近侍(보디가드)로 중용하였다. 우에시바도 이때 많은 정 신적 영향을 받았다. 데구찌는 우에시바에게 이렇게 말하며 격려했다. "자네는 하고 싶은데로 유술이든 검술이든 무엇이든 수련하는게 (종교)수행에 제일 좋아. 무 도를 천직으로 하고, 그 길의 끝을 구하는것에서 대우주의 '神·靈·現' (신, 귀신/영혼, 인 간)의 세가지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거지. 대동류도 아직 '신과 내가 일차가 된' 참된 무술 이라 고는 생각하지 않네. 자네는 '우에시바流'의 길을 가게나. 참된 무도란 공격을 멈추게 하 는 사 랑과 선의 길을 위해서 있는거라네. 오모토의 신이 도와주실걸세. 반드시 한 문파를 이 룰거 야." 우에시바가 이 말을 듣고 바로 그런 맘을 먹거나 행동에 옮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대동류에서 떠나 아이키도를 창시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데구찌의 이 말 은 예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1. 데구찌 오니사브로 : 본명은 '우에다 기사브로'(上田喜三郞) 오모토교의 창시자 '데 구찌 나오'의 막내딸 '스미'(2대교주)의 남편으로, 오모토교의 교리와 교단확립에 기여함. 진혼, 신내 림에 유능하고, 81권짜리 '영계(靈界)이야기'를 씀.
■ 우에시바 塾 (강좌)
오까베에서 데구찌에게 사사받음과 함께, 우에시바는 '우에시바塾'을 열어 대동류를 가르 쳤다. 1922년 봄에는 다께다 소가꾸를 오까베에 초대하여, 약 반년간 다께다와 우에시바가 동욜 류를 지도하였다. 그해 9월에는 目錄 '合氣柔術秘 奧義之事' (합기유술(=대동류)의 비기를 전수 한다 는 뜻과 그 목록 책자)를 받아, 그해 9달 15일부로 대동류합기유술의 교수대리(다께다의 대 리사 범)의 자격을 허가받았다. (일본은 이런식으로 어느 한 문파에서 도장을 내는것등을 인정 받아 야 하며 거기에 따른 문서나 책을 주기도함) 이 때 우에시바가 가장 즐겨 수련했던 것은, 창술과 검술이었다 한다. 그는 밤이되면 '모토미야'(本宮)산속으로 들어가, 창이나 연습용 창(앞에 보호용 덮개를 씌운), 장, 진검이나 목검등으로 아주 고된 수련을 하였다 한다. 특히 창의 수련은 독특한 방법을 고안하였다는데,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에 원을 그리며 서있는 나무들 가지에 7∼8개의 굵은 실로 감싼 스폰지공을 늘어트리고, 9척짜리 (약 270㎝) 연습용창으로 한번에 질러 부수는 방법이다.
1교
F. 몽고에서 '고려국'(高麗國) 건설계획
1924년 2월 13일. 우에시바는 데구찌를 따라 몽고로 건너간다. 이것은 오모토교의 힘으로, 몽고에 국가를 건설한다는 웅대한 게획의 하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작림¹의 신뢰가 두텁던 '노점괴'라는 마적단 두목과 협력하여, 데구찌가 그들 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고려국'이라는 자치국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이 진행되다, 마적의 배신을 두려워한 장작림의 의심으로 단적단과 전원 학살당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데구찌일행은 총살되기 직전에 구출된다. 계획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크게 인기였다. 여기에 대한 기록 출 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우에시바는 130일 가까이 오지 몽고에서 그야말로 생사의 관문을 넘나들기를 여러번 하 였는 데, 이 귀중한 체험은 그의 무술과 정신을 크게 바꾸었다. 몽고에서 그는 고통만이 아닌, 신비한 경험(超常體驗)을 하게된다.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장작림의 배반으로 궁지에 몰린 데구찌 일행은, 피신도중 종종 습격을 받았다. 산길로 도망 가는데 갑자기 좌우에서 일제히 총알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우에시바는 온몸으로 데구찌를 보 호하는데 필사적이었다. "한발자국도 나갈수는 없다. 그러니 총알은 날아오고, 그저 몸을 숙이고 비틀고 해서 피할 뿐이었지. 집중해서 보다 보니, '오른쪽에서 겨누고 있구나. 아! 이번엔 왼쪽이다'하고 확실하게 느낄수 있게 됐지. 총알이 날아오는 것보다 한템포 더 빨리, 흰 빛의 덩어리가 '확'하니 날 아오지. 그럼 재빨리 피하면 뒤에서 총알이 날아와 스쳐지나가는거야. 매일같이 그러는 가운 데, 자연스럽게 무도의 심오한 뜻이 번뜩이더군. 상대의 살의(殺意)는 내가 평상심(平常 心)이 되면 될 수록 확실하게 직감할 수 있다는 것이지"
※ 1.장작림 : 중화민국 군벌. 신해혁명으로 출세, 일본군의 군사고문관을 겸함. 36만의 병 력을 거느리며, 대원수까지 되었으나, 일본군에 의해 암살당함.
G. 무도에 눈뜨다.
귀국후 우에시바는 감각과 신체가 발전되어 상대의 입장이나 기분까지도 모두 알수 있게 되어, 행동이 세심해졌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워져서 다시 재회한 사람들은 '죽을 고비 를 넘기면 사람이 크게 되는구나'라고 감탄하였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수련시 에도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한다. 1925년 봄. 그는 절대 잊을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된다. 어느날, 검도교사로 유명한 어느 해군장교가 찾아왔다. 우에시바의 이야기를 듣고 겨루어 이겨보겠다는 생각 같았다. 우에시바도 이런 부류를 상대하는데 익숙해져서, 언제나처럼 흔쾌히 수락했다. "그럼 당신은 목검으로, 나는 맨손으로 하지. 자, 사양말고 시작하시게나." 장교는 키도 조그만 우에시바의 이런 말에 흥분하여 자세를 가다듬고 목검으로 내려 쳤으 나, 우에시바는 그것을 피했다. 그 장교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하고선 진지하게 점점 간격을 좁혀 가며 기회를 틈타 재빨리 쳐들어가면서 공격하였으나, 우에시바를 스치지도 못했다. 두 번다 실 패한 그는 필사적으로 속공을 했으나, 우에시바는 흐르는 듯이 몸을 피했다. 결국 그 장 교는 지쳐서 도장바닥에 쓰러졌고, 목검으로 우에시바를 스쳐보지도 못했다. 우에시바는 이 일에 대해 후에 이렇게 말했다. "별로 대단한것도 아니네. 상대가 치고 들어오는 것보다 더 빨리, 조그만 빛의 덩어리가 확- 하니 먼저 날아오면, 그뒤에 그 흰빛이 온 길 대로 목검이 온다는 것을 알았지. 그래서 흰 빛만 피하면 목검같은건 쉽게 피할수 있던거지" 그 직후, 우에시바는 놀란만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도장에서 나와 우물에서 땀을 닦고 한숨을 돌린후, 마단 건너편의 오래된 감나무 쪽으 로 걸어갔다. 이때 갑자기 온몸이 자지러지며 꼼짝도 할수 없게 됐다. 그리고는 발밑의 땅이 흔들리기 시 작하며 주변이 어지러울 정도로 무수히 많은 금실이 비오듯 내리며, 땅에서도 황금의 기 운이 넘치며 우에시바의 몸을 감싸자 그는 자신이 황금의 몸으로 된다고 느꼈다. 또한 이 '황금의 몸'은 점점 더 불어나 우주 가득히 차게됐다. 동시에 몸과 마음이 가벼 워지 고, 새들의 지저귐과 벌래들의 소리가 들리며, 눈으로는 나뭇잎의 흔들림, 바람의 흐름도 확실 하게 보이게되어, 대우주와 하나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신을 봤다!"라고 직감했다. "나는 그 후,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기겠다는 생각이 가득하면, 아무 것도 않보이게 되는거지. 사랑을 가지고 모든 것을 감싸고, 氣를 가지고 모든 것을 흐름에 맞길 때, 그제서야 자신과 타인이 하나가 되는 '氣·心·體 '의 움직임의 세계가 열리는거지. 그래서 깨 달음을 얻은 사람이 저절로 소위 '승리'라는 것을 얻는거지. 이기지 않으며 이긴다. 바르 게 이 기며, 나를 이기며, 순식간에 빠르게 이긴다. 이것은 '나와 남이 하나가 되며' '신과 내가 하나 가 되며' 우주가 곧 내가 되는 사랑의 '조화의 신'의 절대적인 승리이며, 무도의 길이란 거 기에 도달하는 것을 최상으로 한다. 그런것들을 느낀것이겠지" 이 깨달음은 우에시바가 지금까지의 무술과 결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이상의 무술을 창시하게 되는 첫발걸음이었던 것이다.
■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이긴 사나이
어느날, 우에시바는 도장에서 아이키도를 보러 온 군인들과 시합을 하게 됐다. 군인들의 무 기는 권총. 물론 우에시바는 맨손이었다. 5명의 상대가 25m떨어진 곳에서 일제사격을 하였지만, 어떻게 된것인지 사격을한 다음 순간 그들중 한명이 누군가에 의해 던져져 날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에시바가 그들의 뒤에 서있었다. 이러기를 2번. 결국 동일한 결과였다. 이것을 보고있던 '시오다 고죠'( 塩田剛三)'가 자신이 알던 어느 명사수에게 '우리 선생님은 총도 못맞힌다'고 하자, 그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우에시바를 찾아왔다. 그는 문맹이었으나 총솜씨라면 날아가는 새의 머리도 맞추는 명사수였다. 그가 우에시바 앞에 앉아서 겨누고 쏘려는 순간, 우에시바는 소리쳐 이것을 중지시켰다. "그만! 자네의 총은 피할수 없어" 시오다가 "정말 그렇습니까?"라고 물어보자 "이 사람은 맞힐 수 있어. 왜냐면, 마음속에 아 무것도 없어. 정말로 자신과 총알이 하나가 되서 날아오는거지. 아무것도 없는거야. 이 사람은 나도 맞힌다네"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일본 이와마의 합기신사
G. 사조. 입적.
'참된 무도의 길'로의 첫걸음을 내딛은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서서히 대동류와 멀어지게 된다. 기술도 딱딱하며 격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부드럽게 변하며, 격한 동작의 기술이나 상대의 손 을 뒤집어 고통을 주는등의 기술도 점점 없어지게 된다. 이때 명칭도 '대동류'에서 '합기유술', '합기무술', '합기무도'등으로 바뛰어가며, '합기'의 정신도 성숙되어간다. 시간이 갈수록 완성되어 가는 아이키도였지만, 우에시바는 2차대전 전과 그 중방에는 일반인 들에게 아이키도를 보급하는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엄한 입문규정을 두어, 제한된 사람만이 입문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전후, 그의 아들이자 현대 2대도주인 '우에시바 기쇼우마루'(植芝吉祥丸)를 시작 으로 많은 제자들의 노력으로, 아이키도는 세상에 보급되었다. 현재 전세계의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아이키도를 수련한다. 이런 아이키도의 번영을 보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969년 4월 26일 오전 5시 천수를 다하니 그의 나이 86세였다.
■ '대동류'와 '다께다 소가꾸'에 대한 연구
대동류는 유명한 유술의 한 유파이나, 메이지(明治) 후반에 돌연히 나타날때까지의 계보가 거 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께다 자신은, 대동류는 '회진'에서 수백년동안 발전·전승된 기술 이라 고 밝혔으나, 그 류파의 이름은 회진의 무술의 기록에 나타나있지 않다. 현재 제일 유력한 설 은, 이 대동류가 다께다 가문에 전승되던 무술이라는 것이다. 다께다는 '오리지날 대동류' 라고 할수 있는 무술에, 자신이 무술수업에서 얻은 무술들을 받아들여 현재의 '대동류'를 완성시 켰다 는 것이다. 또한 다께다는 '호시나 지까노리'(保科近悳)¹에게서 '오시끼우찌'(御式內;御敷居內)라는 대동 류의 중추가 되는 비기를 배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시끼우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 으나, 다께다가 친구에게 "지금 하고있는건 '호시나'상에게서 배운거라네"라고 혀여, '호시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다께다가 회진에서 배웠음이 확실한 것은 '오노파 잇또류'(小野派一刀流)의 검술뿐 이다. 게다가 그가 동경에서 '지끼신가게류'(直心影流)의 검술을 '사가끼바라기찌켄'의 내제자가 되어 수행한 것과, 후에 '사가끼바라'의 소개로 '교우신메이찌류'(鏡新明智流)의 종가 '모모노이 소조우'의 지도를 받은것도 알려졌으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검술이며 유술을 수행한 기록은 없다. 다께다가 구마모토현에서 '오끼나와 가라데'의 고수와 겨뤄, 검술수련으로 단련된 '운신법'을 써서 상대를 맨손으로 이겼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오끼나와 가라 데'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규슈'와 '오끼나와'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가라데의 고수를 찾 아다니며 시합을 했다 한다.
※ 1. 호시다 지까노리 : 회진의 사무라이 가문의, 본명은 '사이고우 다노모 지까노리'라 했음. 회진전쟁(반란) 이후 그의 윗대에서 '호시다'로 개명. '다께다 소가꾸'와 만난 것은, 후꾸시 마현 의 '쓰쓰고와케'신사(神社)에 궁사(宮司)로 있을때였다. 소가꾸는 다께다 가문의 신사를 잇기 위한 견습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첫댓글 대륙기주지방 소개 http://blog.naver.com/zeddking/41705184
출구왕인삼랑. 심해 님의 글에서 본 것 같네요. 이 자도 일본의 그 대단한 계획에 연관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