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서소문역사공원의 발자취
처형장에서 도매시장으로, 그리고 공원으로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소문역사공원은 서울역 부근 염천교와 서소문 고가도로 사이에 자리한다.
서울역에서 시작하는 통일로 왼편에 자리한 녹지대이다. 공원 주변을 둘러보면 높은 건물군이 자리하고 있고
그 사이로 재개발이 예정된 구역도 산재해 있다.
서울 강북 도심 1만 7,340㎡ 너른 땅을 주거공간이나 상업 시설로 개발하자는 의견이 많지 않았을까?
그런데 인근 지역에 재개발 이슈가 아무리 많아도 서소문역사공원은 시민을 위한 공원이라는 사명을 계속
지닐 것으로 보인다. 공원 이름에서도 나오듯 ‘역사’라는 의미가 담겨서일까.
(2022. 07. 11)서소문역사공원 입구. 염천교와 서소문 고가도로 사이에 있고 공원 바로 옆으로 철도가 지난다. 트 강대호 기자)
서소문밖 형장
조선 시대 서울의 처형장은 대부분 한양 도성 밖 서쪽 지역에 있었다. 지금의 용산 일대인 ‘당고개’와 ‘새남터’,
그리고 절두산 성지인 ‘양화진’ 등이 그렇다. 특히, 서소문을 나가면 바로 나오는 만초천 변 백사장은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형장이었다. 지금의 서소문역사공원 자리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참수형인 ‘효시경중(梟示警衆)’이 주로 이루어졌다. 백성에게 죄의 깊음과 벌의 엄중함을
경고하기 위해 잘린 머리를 장대에 높이 매달아 전시하는 형벌이었다. 이렇듯 ‘경중(警衆)’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처형장은 유동인구가 많은 교통의 요지나 상업중심지에 자리 잡았다.
서소문 밖은 마포와 용산 포구로 이어지는 길의 시작점이었고 칠패시장이 인근에 있어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조선 초기부터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주로 대역 죄인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특히, 19세기에 들어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대거 벌어진 현장이기도 했다.
당시 천주교 박해로 전국에서 수많은 이가 처형되었는데 서소문밖 형장에서만 82명(다른 기록에서는 98명)이 순교했다.
이들 중 44명이 성인에, 27명이 복자에 품해졌다.
서소문역사 공원 안에 자리한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철길 옆 시장
일제강점기 경성역은 철도의 중심지가 된다. 경의선이 바로 옆으로 지나는 서소문밖 형장 일대는 철도 시설 용지가 된다.
그곳에 시장이 들어섰다.
1927년 총독부는 의주로, 지금의 서소문역사공원 일대에 ‘경성수산시장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성부 산하 수산물 도매시장을
운영한다. 1939년에는 청과류까지 포함하는 ‘경성중앙도매시장’을 개설한다. 즉, 식민지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법정 도매
시장’을 연 것이다.
(1938) 서소문역사공원 자리에 있었던 경성수산주식회사. 총독부 산하 경성부에서 운영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경성중앙도매시장에는 인근 철도에서 연결된 인입선이 있어 운송에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시장에서는 수산물과 청과류의
도매가 이뤄졌는데 특히, 수산물은 경성부, 즉 총독부 산하 서울을 관할하는 관청에서 직영했다.
청과류는 대행회사를 선정하여 간접적으로 관리했고 수산물도 나중에는 대행회사를 통했다.
일제가 법정 도매시장인 경성중앙도매시장을 개설한 이유는 생활필수품인 식품의 도매가격을 관리하기 위함이었는데 관련
연구에 따르면 수수료 수입, 즉 세입 증대의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시대부터 전통이 내려오는 위탁도매상들을 통제할 목적도 있었다고.
한편, 해방 후에도 그 자리에 시장이 계속 있었고 명칭만 ‘서울중앙도매시장’으로 바뀐다. 여전히 정부에서 관리하는 법정 도매시장이었다. 따라서 관리 담당도 총독부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상공부로 바뀌었는데 1960년대부터는 농수산부와 소관 다툼을 벌인다.
하지만 관청의 통제 아래에 있던 중앙도매시장은 상권이 계속 위축된 반면 사설 위탁도매상이 자리 잡은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의 상권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중앙도매시장에 입점한 도매상들은 중림동을 벗어날 계획을 세운다.
용산으로, 그리고 가락동으로
옛 의주로 옆 중림동에 있던 중앙도매시장은 만초천을 끼고 있었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서대문과 청파로를 거쳐 원효대교에서 한강과 만나는 하천이다. 1960년대에 만초천은 복개되는데 원효로 구간 공사는 정부가 아닌 민간이 맡았다. 복개공사를 대가로 그 일대에 시장을 개설해 10년간 운영권을 가지는 조건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들을 참조하면 나진산업이 이 공사에 참여했고 나진산업은 복개가 끝난 후 그 자리에 시장 시설을 건립해 시장 운영 허가를 받는다. 1969년에 문을 연 ‘나진시장’에는 중림동 중앙도매시장의 도매상 다수가 입점하게 된다.
(1977) 용산청과물시장에 열린 김장시장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1977) 용산청과물시장에 열린 김장시장의 모습. (사진: 국가기록원)
그런데 원효로에 새로 만든 시장에서의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중앙도매시장에서 청과류 부문을 위탁 운영하던
‘서울청과주식회사’도 1975년에 용산으로 이전한다. 같은 해에는 근처에 ‘태양시장’도 생긴다. 원효로와 용산역 사이에
법정 도매시장과 사설 위탁도매시장 여러 곳이 몰려 있었던 일명 ‘용산시장’ 혹은 ‘용산청과도매시장’의 시작이다.
한편, 중림동 중앙도매시장의 수산물 도매 부문은 1975년에 노량진으로 이전한다. 지금의 ‘노량진수산물시장’이다.
1970년대 서울에서 가장 큰 ‘김장 시장’이기도 했던 용산시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농수산물유통시설의 근대화와
유통체계 구조개선 사업으로 1985년에 가락동으로 이전했다. 지금의 가락동농수산물도매시장이다.
(2022. 06. 15) 나진상가. 예전에 나진시장이 있던 자리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그리고 용산시장이 있던 자리는 1985년 용산전자상가 들어섰다. 나진시장 자리는 나진상가로, 태양시장 자리는 선인상가로, 그리고 서울청과 자리는 용산전자랜드가 되었다.
서소문역사공원
한때 처형장이었고 시장이 있던 곳이 어떻게 공원이 되었을까?
서울시 고위공무원이었던 손정목(1928~2016) 전 서울시립대 교수가 그 과정을 저서에 남겼다.
1971년 중림동 중앙도매시장의 이전이 결정되자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이었던 손정목은 그 자리를 ‘공원’ 부지로
만들 것을 건의해 시장의 재가를 얻는다. 그는 중앙도매시장 자리에 버스터미널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혹시
정치인이나 재벌 등 권력가들이 사유지로 만들까 우려해서였다.
서소문역사공원 입구. 오른편 건물도 도매시장 자리였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결과적으로 그 자리는 터미널도 사유지도 되지 못했다. 1973년부터 옛 중앙도매시장 자리는 근린공원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도로, 그리고 염천교 사이에 갇혀 있어 도심 속 섬과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쓰레기
집하장으로도 썼고 지자체인 중구청이 청소차 차고지로 이용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천주교와 지자체 등 관련 기관들이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을 벌여 역사공원과 박물관을 조성해 2019년
6월에 일반에 공개했다. 지상 1층에서 지하 4층까지 연면적 4만 6천여㎡ 규모다.
공원 지하에 자리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서소문 일대의 역사와 유적을 전시한다. 서소문 밖이 국가의 공식 처형장이었고 한국 최대 가톨릭 순교성지임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이 일대가 한때 시장이었던 사실은 단 몇 문장으로 언급한다.
다만, 옛 도매시장의 흔적은 공원 근처에 '중림시장', 혹은 '합동 새벽 시장'으로 남아 있다. 수산도매시장이 있던 시절부터
인근 주민과 상인을 상대로 새벽에 열리는 소매유통 시장이다.
(2016) 중림시장, 혹은 합동 새벽 시장.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 참고 문헌
김영환, <서울 만초천과 주변 시가지 변천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 한울
조병찬, <한국시장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시장>
서울역사박물관, <서소문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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