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충(趙冲)의 자는 담약(湛若)이며 시중(侍中) 조영인(趙永仁)의 아들이다. 태어난 지 1개월 만에 모친이 죽었는데,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몹시 슬퍼하며 추모하니 집안에서 효동(孝童)이라 칭찬하였다.
음서(蔭敍)로 관직에 보임되었으며, 태학(太學)에 들어가 상사(上舍)에 올랐다. 명종(明宗) 때 등제하여 내시(內侍)에 이름을 두었는데, 널리 알면서도 기억력이 뛰어나 전고(典故)를 외우고 익혔다. 희종(熙宗) 때 국자대사성 한림학사(國子大司成 翰林學士)로 제배되니 한때 전적(典籍) 중 많은 것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제배되었다. 고종(高宗) 3년(1216)에는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 상장군(樞密副使 翰林學士承旨 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문신이 상장군을 겸하는 것은 문극겸(文克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가 도중에 폐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왕이 조충의 재주가 문무를 겸하였다 하여 특별히 제수한 것이었다.
당시 금산왕자(金山王子)의 병사들이 북쪽 변방을 난입하였으므로,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을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로 삼고 조충(趙冲)은 그를 돕게 하였으며, 우승선(右承宣) 이연수(李延壽)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로 삼아 5영군(五領軍)을 속하게 하였다. 또한 경도(京都) 백성들을 조사하여 관직의 유무를 논하지 않고 무릇 종군(從軍) 가능한 자들은 모두 군대에 속하게 하고 또한 승려들도 징발하여 군사로 삼으니 합쳐서 수만에 달하였다. 정숙첨 등이 순천관(順天館)에서 군사를 점검하였는데, 당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모두 모두 최충헌(崔忠獻) 부자의 문객(門客)으로 삼았고, 관군은 모두 노약자인 데다가 여윈 군졸이어서 원수(元帥)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왕이 숭문전(崇文殿)에 거둥하니 군신들이 들어와 알현하며 좌우로 나누어 섰다. 정숙첨과 조충이 융복(戎服)을 입고 여러 총관(總管)들을 거느리고 뜰에 나아가 예를 행하자 왕이 친히 부월(鈇鉞)을 주었다.
일관(日官)이 금기(禁忌)로 최충헌에게 아첨하였으므로 출정한 군대는 대로를 경유하지 않고 보정문(保定門)에서 성의 남쪽을 따라가다 산예역(狻猊驛)에 숙영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렸으므로 사졸(士卒)들은 추위에 얼어 능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다가 눈이 그치자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렀다. 마침 평주방어군(平州防禦軍)이 돌아왔는데 전군(前軍)이 창기(槍旗)를 멀리서 보고 적병이 이른 것으로 오인하여 드디어 〈다투어〉 도망하여 무너졌으나 오직 조충만은 병사들을 통제하여 정숙하게 하였다. 정숙첨 등은 적의 군사가 염주(鹽州)·배주(白州)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흥의·금교(金郊) 양 역 사이로 물러나 진을 쳤다가 다시 국청사(國淸寺)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이듬해에 정숙첨이 면직되고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방보(鄭邦輔)가 그를 대신하였다.
정방보와 조충 등이 염주에서 군사력을 과시하자 적병들이 달아났다. 5군의 원수들이 안주(安州)까지 적들을 쫓아오다가 태조탄(太祖灘)까지 갔는데 비를 만나자 〈추격을〉 그치고 술을 마시면서 잔치를 즐기고는 방비 시설을 두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백마를 타고 진중(陣中)으로 갑자기 들어와 깃발을 들고 휘둘렀다. 갑자기 적병이 크게 몰려왔고 급히 5군을 포위하였다. 전군(前軍)을 먼저 무너뜨리고, 이어서 중군(中軍)을 치고 들어와 불을 놓고 성루(城壘)를 불태웠다. 모든 군의 사졸들이 흩어져 달아났으나 오직 좌군(左軍)만이 대항하여 싸웠다. 정방보와 조충이 좌군으로 달려갔지만, 좌군도 패함으로써 5군이 모두 무너졌다. 대장군 이의유(李義儒)와 백수정(白守貞) 및 장군 이희주(李希柱) 등이 전사하였다. 사졸로 죽은 자들은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짐수레와 군량, 병장기도 모두 빼앗겼다. 정방보와 조충은 달아나 서울로 돌아왔으며 싸움에 진 군졸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적의 추적이 선의문(宣義門)에까지 이르니 황교(黃橋)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다.
〈이에〉 조야(朝野)가 크게 놀라니, 어사대(御史臺)에서 상소하여 말하기를, “정방보와 조충은 적을 바라만 보고는 위축되어 싸울 마음이 없었으며 군사를 버리고 놀라 달아났으므로, 힘을 다한 사졸들을 몰살되게 하였습니다. 또 역대로 전해오던 병서(兵書)와 문서 및 병장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에게 빼앗겼습니다. 장수를 보낸 뜻에 부응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그 관직에서 쫓아내소서.”라고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어사대가 다시 파직을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조충은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복직되고 이어 추밀사 이부상서(樞密使 吏部尙書)로 임명되었다. 간관(諫官)이 아뢰기를, “조충은 지난번 패군으로 탄핵되어 면관(免官)되었습니다. 지금 상을 가해줄 공이 없는데 다시 옛 관직을 제수하셨으므로 청컨대 내리신 명을 거두시고 그가 공을 이루기를 기다렸다가 관직 제수를 허락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따랐다.
여진(女眞)의 황기자군(黃旗子軍)이 압록강을 건너와 인주(麟州)·용주(龍州)·정주(靜州)의 3주 경내에 주둔하자 조충(趙冲)은 〈그들과〉 싸워 510여 명의 수급(首級)을 참획하였다. 또 인주 암림평(暗林平)에서 싸워 그들을 크게 물리쳤는데, 살육되거나 사로잡히거나 강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겨우 300명의 기병만이 달아났다. 즉시 조충은 복직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 尙書左僕射)로 소환되었다.
적이 날로 기세가 세지고 관군이 유약하여 능히 제압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조충을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김취려(金就礪)를 병마사(兵馬使)로 삼고, 차장군(借將軍) 정통보(鄭通寶)를 전군(前軍)으로, 오수기(吳壽祺)를 좌군(左軍)으로, 신선주(申宣冑)를 우군(右軍)으로, 이림(李霖)을 후군(後軍)으로, 이적유(李迪儒)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삼고는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처음에 조충이 패군하였던 것을 한탄하며 시를 지어 말하기를, “10,000리 전장 달리던 준마 발 한번 헛디디고는, 슬피 소리내어 울며 지내다 계절 바뀌는 줄도 몰랐네. 만일 조보(造父)로 하여금 일러 다시 채찍 가하게 한다면, 마당의 모래를 짓밟듯이 오랑캐를 꺾을 것을.”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부오(部伍)를 정돈하여 가지런히 하였으며 호령(號令)을 엄하고 명확히 하여 추호도 범하지 못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도 감히 서생이라 하여 쉽게 대하지 못하였다.
조충 등이 장단현(長湍縣)을 지나 동주(洞州)에 이르렀을 때 동곡(東谷)에서 적을 만나 모극(謀克) 고연(高延)과 천호(千戶) 아로(阿老)를 생포하였고, 이어 성주(成州)에서 여러 도(道)의 병사들을 기다렸다.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이적(李勣)이 군사를 이끌고 오다가 적을 만나 부득이 앞으로 나오지 못하자, 장군(將軍) 이돈수(李敦守)와 김계봉(金季鳳)을 보내어 그들을 치고 이적을 맞아오게 하였다. 이윽고 적이 두 길을 따라 모두 중군(中軍)쪽을 가리키며 오자 우리 병사들은 좌우 날개를 펼쳤고 북을 치면서 전진하니 적은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는 흩어졌다. 이돈수 등이 이적과 함께 와서 모이자 녹사(錄事) 신중해(申仲諧)가 군사를 나누어서 군량을 수송하였는데 적이 또 요격하니, 장군 박의린(朴義隣)이 독산(禿山)에서 적을 물리쳤다. 적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뒤 기병 등 수만 명이 예봉을 세워 공격해 왔다. 아군이 또 패퇴시키자 아장(亞將) 탈랄(脫剌, 토라)는 도망하여 돌아갔다. 적괴(賊魁)도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다가 귀로(歸路)에서 아군의 요격을 받을까 우려하여 강동성(江東城)으로 입보(入保)하였다.
몽고 태조(太祖)가 원수(元帥) 합진(哈眞, 카치운) 및 찰랄(札剌, 차라)을 보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동진(東眞)의 포선만노(浦鮮萬奴)가 보낸 완안자연(完顔子淵)의 병사 20,000명과 더불어 거란적(契丹賊)을 토벌한다고 성언(聲言)하였다. 화주(和州)·맹주(孟州)·순주(順州)·덕주(德州) 등의 4성(城)을 공격하여 깨뜨리고는 곧바로 강동(江東)으로 향하였다.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 수송로가 끊어지자 적은 성벽을 굳게 지켜 몽고군을 지치게 하였다. 합진이 이를 근심하다가 통사(通事) 조중상(趙仲祥)과 덕주(德州)에 사는 진사(進士) 임경화(任慶和)를 보내 원수부(元帥府)에 첩(牒)을 보내어 아뢰기를, “황제께서는 거란병이 그대의 나라로 도피한 지 3년이 되었는데 아직 깨끗이 소멸시키지 못한 까닭에 군사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고자 하신다. 그대의 나라는 다만 물자와 군량으로 〈우리를〉 돕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어 청병(請兵)하였는데 그 말투가 매우 엄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제께서 명하시기를 적을 무너뜨린 후 형제가 되도록 약속하라 하시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서성(尙書省)에서 첩으로 답하여 말하기를, “대국이 군사를 일으켜 폐봉(弊封)의 우환을 구제하려 하니 지휘하는 것은 모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조충(趙冲)은 곧바로 쌀 1,000석을 수송하고, 중군판관(中軍判官) 김양경(金良鏡)으로 하여금 정병(精兵) 1,000명을 거느려 호송하게 하였다. 김양경이 도착하자 몽고와 동진의 두 원수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상석에 앉히고 잔치를 열어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양국이 결의하여 형제가 되었으니, 마땅히 국왕께 아뢰어 첩을 받아오는 즉시 나도 또한 돌아가서 황제께 아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몽고와 동진이 비록 적을 토벌하여 우리를 구해준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몽고는 이적(夷狄) 중에서도 가장 흉악하고 사나우며 또 일찍이 우리와 우호관계를 맺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외가 깜짝 놀라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의심하였다. 조정의 의논 또한 가부를 아직 회보(回報)하지 못하고는 결국 그들에게 음식을 보내 위로하려 하였다. 조충만은 홀로 의심하지 않고 신속히 보고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몽고는 회답이 늦어지는 것에 화가나 크게 꾸짖었는데 조충은 그때마다 적절하게 그들과 화해(和解)하였다. 이듬해 조충은 합진·완안자연 등과 더불어 강동성을 공격하여 이를 깨뜨렸다. 합진 등이 돌아갈 때 조충이 의주(義州)까지 전송하자 합진은 조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려 하지 않았다. 몽고군이 우리 장수들의 말을 빼앗아 가려하니 조충이 이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관마(官馬)이므로 비록 죽더라도 가죽을 바쳐야 하므로 빼앗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몽고군은 이를 믿고 있다가, 어떤 장군이 은을 받고 말을 주자, 몽고군이 조충의 말이 거짓이라 여기고 다시 말을 빼앗아 간 것이 많았다. 완안자연이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원수는 뛰어나게 훌륭한 것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대 나라에 이런 원수가 있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충이 한번은 술에 취하여 그의 무릎을 베고 잤는데, 완안자연은 그가 놀라서 잠에서 깰까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좌우에서 베개로 바꾸라고 청하였으나 완안자연은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충의와 은혜 및 믿음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개선하여 돌아오자 최충헌(崔忠獻)은 〈조충(趙冲)의〉 공을 시기하여 영아례(迎迓禮)를 중지시켰다. 〈이후 조충은〉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 判禮部事)에 제배되었고, 이윽고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守太尉 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 修國史)를 더하였다. 이듬해에 죽으니 나이 50세였다. 부고가 있자 왕은 크게 슬퍼하며 사흘 동안 조회를 거두고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조충의〉 사람 됨됨이와 풍모는 유난히 크고 훤칠하였으며 겉으로는 장중(莊重)하였으나 속으로는 너그럽고 온화하였다. 무릇 선비를 만나면 즐거워하며 지위로 차별하지 않았다. 세 번 과거를 주관하였는데[文闈] 선발된 이들은 모두 명사(名士)였다. 〈이들은〉 밖으로 나가면 장수가 되고, 안으로 들어오면 재상이 되니[出將入相] 조야(朝野)가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평시에 정무를 볼 때 일찍이 모나게 각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됨을 관후(寬厚)하며 활달(豁達)한 장자(長者)로 여겼다. 대군을 거느리고 중대사를 해결한 이후에는 그에게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않는 비범한 도량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동고(東皐)에 독락원(獨樂園)을 열고 매번 공무에 여가가 생기면 어진 사대부를 초청하여 금(琴)을 타고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뒤에 고종묘정(高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조숙창(趙叔昌)과 조계순(趙季珣)인데, 조숙창은 따로 전기가 있다. 조계순은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를 광정(光定)이라 하였으며, 아들은 조변(趙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