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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1:15-17절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주제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강론
로마서는 바울에 의해 기록된 서신인데 성경 66권 중 65권을 잃었다 해도 “로마서”만 가졌다면 복음은 세워졌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5)한 대로 당시 세계중심인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13)합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증언하고자 한 복음을 우선적으로 서신을 통해서 전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1:1)하고 시작이 됩니다.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소명(召命)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6)고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마음 설래 도록 감격스런 일입니까?
그리고 부르실 때는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1:1)는 것이 사명(使命)인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받은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4, 15)하는 것입니다.
1-17절 안에 “복음”이 7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증언하려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한 1:17절입니다. 1:17절은 복음을 잃어버린 중세 암흑시대에 루터에게 조명하셔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나의 복음”(2:16)이라 말하고 로마서를 마치는 16:25절에서 또다시 “나의 복음”이라고 언급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증언한 “복음”이기 때문에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로마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이 한마디에 대한 해설(解說)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1장-8장이 복음을 증언하는 부분인데 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시작한 바울은 8장에 이르러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33-34)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어찌하여 “복음”의 핵심인가부터 말씀을 드려야만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담 하와가 어찌하여 추방을 당했는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둠”(고후 6:14)이 함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방을 당한 아담의 후예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어떻게 하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당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6), 즉 의로운 자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통해서 “탐심”(貪心), 즉 율법이 마음의 문제인 것을 깨달게 되었던 것입니다(7:7). 행동으로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을 범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얼마나 범했던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가능했겠습니까?
7: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합니다. 7:23절에는 “죄”와 싸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승리했는가? 아닙니다. 번번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즉, 생포되어 끌려갔노라고 진술합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죄와 싸워보았습니까? 그리하여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오호라”하고 탄식을 해보았습니까? “정죄 감”에 짓눌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은 경험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절감해보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어찌하여 “복음”의 핵심이 되는가를 아직 알아야 할 만큼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이제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즉 마음은 원이로되 우리 행위로는 온전하지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자력으로는 불가능한 “의”를 하나님께서 행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하여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이 나타났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해주신 것이기에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 교회가 서 있는 교회냐 넘어지는 교회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칭의교리에 서 있는가 여부를 보면 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힘입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서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넘어지는 믿음입니까? 이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점을 붙잡았으니 로마서의 각 장에서 이점이 어떻게 증언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1장의 중심점은 단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17절입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하)고 하박국 2:4절을 인용합니다. “의인”이 되는 길, “사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 만일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1: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즉 심판이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의”를 입지 않으면 그 앞에 설 자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할 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고 외치는 소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대신 받아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면 복음도 필요 없고 주님의 십자가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날은 반드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나타나는가?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1:18)에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경건치 아니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죄요, “불의”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인 “죄”가 무엇인가? 1:23절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죄입니다.
그러면 이웃에 대한 “불의”는 무엇인가? 1:29절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합니다.
②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외쳐도 귀를 기울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심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서 1:18-3:20절까지 이방인의 죄, 유대인의 죄를 고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39절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즉 모든 사람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결론을 맺기를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3:20)합니다.
③ 그러면 죄론 다음에 무엇이 와야 하겠습니까? 3:21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하고 1:17절에서 선언한 로마서의 중심주제로 돌아가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임기응변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즉 구약성경을 통해서 언약하시고 예언하신 대로 성취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루터는 3:21-24절을 “작은 복음”, 즉 복음의 요약이라고 말했습니다.
㉠ 첫째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받을 수가 있는가? 3: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즉 “믿음”으로 받는다고 대답합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외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 둘째로, 어찌하여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게 되었는가? 3: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기쁜 소식입니까?
㉢ 셋째로, 나 같은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는가? 3: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고 대답합니다. “속량”이란 그리스도께서 내 죄 값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합니다.
이렇게 증언한 후에 3:27절에서는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즉 자랑할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느니라,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고 말씀합니다.
④ 그런 후에 4장은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4:1)하는 질문으로 시작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두 조상이 있는데 “아브라함과, 다윗”(4:6)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의롭다함을 얻었는가를 성경을 들어서 증언함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을 확증하는 것이 4장의 내용입니다.
㉠ 첫째로 아브라함인데 4:3절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합니다. 그리고 4:4절에서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일을 하고 품값을 받듯 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는가? 4:7절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다윗이 기록한 시편 32:1절의 인용인데 “의롭다”고 여겨주심은 의롭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범한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하자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하심 같이 “죄”를 가려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죄 가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 그런 후에 4:10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할례”에 대해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무할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합니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창세기 15장에서요, 할례는 17장에서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 이점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을 4:18-22절을 통해서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백성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상황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이 되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4:20-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합니다. “약속과 확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의롭다함”,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4:24절에서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있는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를 믿는 것이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나 자신의 믿음은 무엇을 믿는 믿음인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⑤ 5장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하고 시작이 됩니다. “의롭다함”을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4가지로 말씀합니다.
㉠ 첫째 축복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합니다.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우리도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목(和睦)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했다”는 점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말고 “누리라”고 말씀합니다.
㉡ 둘째 축복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5:2상), 즉 하나님 앞에 서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6장 마지막 절은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7:9절에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흰옷”을 입고 말입니다.
㉢ 셋째 축복은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5:2중)고 말씀합니다. 이 “들어감”은 아담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추방을 당한 것에 대한 해답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갈 수가 있는가? 벌거벗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입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언제 들어갑니까?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기도를 드릴 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히 4:16)는 점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의의 옷”을 입고 말입니다.
㉣ 그리고 넷째 축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하), 즉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최종적인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합창을 하듯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 입고 왔나이다”라고 대답하십시다. 이것이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⑥ 6장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하고 시작이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믿음, 믿음”하니까 행함은 필요하지 않단 말이냐? 죄를 범해도 괜찮단 말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6장은 복음을 곡해하고 방종하는 “율법폐기론 자”들에 대한 경계입니다.
㉠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하고 한 마디로 물리칩니다. 그러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는 뜻이 무엇인가? 이는 사탄의 진영인 “사망”에서 하나님의 진영인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반대로 “하나님께는 죽은 자요, 죄에 대해서는 산 자”였던 것입니다.
㉡ 그러면 어떤 방도로 옮겨졌는지 6:5절을 보겠습니다. “연합”(聯合)이라는 말이 2번 등장하는데 이는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하신 그런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과 연합을 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6), 함께 죽고(8), 함께 장사되었다가(4), 함께 살리심”(8하)을 받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찬양이 있는데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디 있었습니까? 정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바로의 지배에서 해방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거할 수가 있단 말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6: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사탄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우리 “영”은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죽을 몸”은 지배할 수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6:13절에는 “불의의 무기와, 의의 무기”가 있는데 우리 몸의 지체인 “입, 손, 발”등이 사탄에게 불의의 무기로 악용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⑦ 7장은 반대로 자기 힘을 의지하는 “율법주의자”에 대한 경계입니다. 열쇠는 7:6절의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좌”로 치우치게 되면 율법폐기론 자처럼 방종하게 되고 반대로 “우”로 치우치게 되면 율법주의자처럼 또다시 “정죄”감에 얽매이게 됩니다.
㉠ 그러니까 7장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이루려한다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7장 안에 “나 또는 내”가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확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신의 힘으로 “의”를 이루어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가능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고 자신을 건져줄 “누구”를 찾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다음 절인 25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하고 “감사”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구원해줄 “누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⑧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하고 시작이 됩니다. 7장의 사람은 계속적으로 “정죄 감”에 빠져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정죄함”이 없게 되었는가?
㉠ 8:2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합니다. 해방을 받은 “너”가 누군지 아십니까? 7장에 34번이나 등장하면서 몸부림을 치던 그 사람,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해서 나를 해방시켜주셨단 말입니까?
㉡ 8: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합니다. 나 자신이 율법을 행함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해주셨습니까?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즉 우리 대신 자기 아들을 정죄함으로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 영광스런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8:29-30절을 “끊어지지 않는 황금고리”라고 말합니다.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하심, 영화롭게 하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의롭다하심”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 남은 고리는 영화롭게 하심입니다. 이는 앞으로 이루어주실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이미 받은 것으로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에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8:33-34절에서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합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여러분을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자기 아들의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서 의롭다고 여겨주셨는데 “누가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정죄할 수가 있단 말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5:6-10절을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아껴두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10)하고 “때”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해주셨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6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도다”고 말씀하고 8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그의 아들이 죽으셨다”고 표현을 바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한 “원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죄인인 나를 위하여, 원수인 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9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10절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확실하게 증명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자주 실수하고 넘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의롭다함과, 화목”한 것이 취소되거나 무효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 원수”였을 때에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이루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구원을 받을 것이니(9), 더욱,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고 확신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5:20절에서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합니다. 인류의 시조를 넘어뜨린 “죄”는 지금도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하고 벌떡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넘치는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아십니까?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한 칭의인 것입니다.
바울은 영광스런 은혜로 가득 찬 로마서의 교리부분을 8:38-39절로 마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합니다.
바울은 “나는 확신한다”고 말씀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도 로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습니까?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로마서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05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