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의 황금시대
페니키아의 황금시대가 시작된 이유는 단순히 이집트의 쇠퇴와 백향목, 자주빛 염료 덕분만은 아니었다. 지중해의 주요 상품인 소금과 포도주, 올리브는 기후와 토양에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페니키아인들이 연결고리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국산 백향목과 염료 뿐만 아니라 키프로스에서 구리와 토기, 이집트에서는 곡물과 파피루스, 소금, 크레타에서는 토기, 에게 해의 섬들에서는 흑요석 무기와 도구를 수입해 인근 지역에 되팔았던 것이다. 하지만 페니키아 인들은 이런 ‘공정거래’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해적질도 서슴치 않았고, 이스라엘 인들을 비롯한 주위 민족들을 습격해 포로를 노예로 팔아먹기도 했다. 《구약성서》의 아모스 예언자의 기록에서 이런 정황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티레를 ‘티로’라고 읽는다.
그들이 형제 계약은 기억하지도 않고 사로잡은 이들을 모조리 에돔에게 넘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티로 성벽에 불을 보내니리 그 불이 성채들을 삼켜 버리리라. (아모스서 1장 9-10절)
페니키아의 장자 시돈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 중 ‘투 톱’은 시돈과 티레 였다. 시조격인 비블로스는 두 도시에 비하면 평범한 항구도시로 밀려나 향후 역사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19세기까지 남아있는 책 중에서는 유일하게 중동에서 쓰여진 고대문헌인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티레에 관한 기록은 없고 시돈만이 언급되어 있다. <창세기> 10장 19절에는 가나안의 경계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참고로 판본은 가톨릭 주교회의 번역본이다.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자까지, 그리고 소돔(Sodom)과 고모라(Gomo
rrah)와 아드마(Admah)와 스보임(Zeboiim)을 지나 라사(Lasha)까지였다.”
고대의 작가들은 시돈을 “티레의 모(母)도시”라고 불렀고, 흔히 페니키아 지역 전체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역사적으로 시돈은 최소한 청동기 시대까지는 티레보다 우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시돈은 섬에 건설된 티레와는 달리 배후에 비옥한 해안평야를 지니고 베카 고원을 경유하는 내륙통로가 연결되어 지리적으로도 유리했다.
하지만 현재 사이다(Saida)라고 불리우는 시돈은 2015년 우리나라와 레바논의 월드컵 예선이 열릴 정도로 티레 보다 훨씬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에 발굴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도시에 대한 기술은 ‘유력한 추정’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 수도인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약 3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시돈은 앞서 말했지만, <아마르나 문서>와 호메로스의 작품들에도 등장했고, 무려 <복음서>와 <사도행전> 에도 언급 될 정도로 대단한 도시였다. 고대 시돈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표현대로 손재주가 아주 뛰어나 금은 세공품과 여인들이 수놓은 옷들을 지중해 세계에서 널리 팔았다. 또 시돈에서 발굴된 유골에는 놀랍게도 금을 사용하여 치아를 치료했던 증거가 남아있다. 이렇게 시돈 사람들은 인류 최초로 치의학을 발전시킨 공로자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돈의 최대 공헌은, 오늘날 알파벳의 원형이 된 페니키아 문자를 지중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한 일이었다.
페니키아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