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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SOFA 협정
소파(Status Of Forces Agreement)협정은 한미간의 ‘주한미군지위에 관한 협정’이자 불평등 협정이다.
형식상 1966년 7월 9일 한미간에 협정이 체결되고 이듬해 부터 발효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그 이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부터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불평등한 규정이 상호 체결되었었다.
처음엔 우리의 필요에 의하여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였으나 한국에서 미군들의 강력범죄가 종종 일어나서 한국에서 개정을 요구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반미감정이 점점 커지는 조짐이 보이자 1991년 1월 4일에 재조정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땅에서 범법 행위를 저지른 미군의 범죄자를 우리 경찰이 수사하고 우리 법정에 세우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르는 불평등 조약이다.
자세히 아는 바는 없으나 내 생각에 우리는 미군 철수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정서를 앞세워 SOFA 협정의 개정을 우선시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GI들은 외출 시 신분증인 ID Card, 국내 어느 미군부대에서든 식사를 할 수 있는 Meal Card와 한국 경찰의 조사를 받게될 시 제시할 SOFA Card를 소지하고 외출을 한다.
16. KATUSA 사병의 질
어쩌다 TV에서 카투사에 관한 내용이 방영되는 수가 있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니 당연히 GI 동료나 상급자가 나온다.
카투사에 대하여 물어보면 그 답변은 한결같이 ‘카투사의 근무태도는 우수하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으며 우리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카투사는 우리부대의 자랑이다.’등등 칭찬 일색이다. 과연 그럴까? 그말이 사실일까? 한국 전역에 방영되는 TV 방송 인터뷰에 차마 마음에 안 들어도 말 못하고 추켜 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분명히 카투사의 질은 우수하다.
수치로 정확히 나타난다. 우선 40여개 항목을 Test하여 일정한 점수 이상을 획득한병사에게 주어지는 보병 병사에게 자랑인 ‘EIB 휘장’이라는 것이 있다. ‘EIB’란 ‘Expert Infantryman Badge’의 약자로 우수한 보병에게 주어지는 휘장이다. 가로로 기다란 장총이 그려진 가슴에 다는 뱃지인데 GI와 카투사의 통과율이 집계된 것을 보면 GI는 평균 통과율이 20~30%이고, 카투사는 60~70%로 2~3배나 높다고 한다.(해마다 차이가 많음)
체격이 우리보다 크고 힘이 센 GI가 체력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병사를 선발하는 테스트에서 GI보다 우수한 이유는 뭘까?
내가 생각하기엔 우선 우리가 머리에서 앞선다. 모병을 통하여 모집되어 학력이 높다고 볼 수 없는 집단인 GI와 최소한 TOEIC 800점 이상의 고학력 집단인 카투사와 격차가 크다.
체력 측정에서 GI와 카투사가 1:1로 힘 겨루기를 하는 것이라면 카투사가 이기기 매우 힘들다. 대부분 체력 측정은 팔굽혀펴기, 윗몸 일으키기, 군장지고 달리기처럼 개인적 능력을 평가하는 것인데 이는 체격과 별 연관이 없어 서로 비슷하다고 본다. 카투사와 인터뷰한 영상을 보니 미군에 특히 뒤 떨어지는 부분은 수류탄 투척이라고 한다. 그것 역시 개인에 관한 문제인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신력인 면에서 GI는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해도 되니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반면 카투사는 그해 못하면 제대 전에 다시 도전하기 어렵다. 당연히 성취욕이 매우 강하다. 체면을 중시하는 국민성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EIB 휘장을 따야한다.
사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훈련소에서 배운대로 한발 한발을 신경 써서 쏘는데 GI는 신경 안쓰고 대충 쏘고 마는 성격이 많다. 내가 근무하던 1970년대 초에는 모병이 아닌 징병제로 입대한 GI가 많았는데도 그랬었다.
우리 부대가 보병부대가 아니어서 그런지는 모르나 나중에 사격 표적지를 떼어와 비교해 보면 카투사의 적중률이 현저히 높았다.
행정병들은 또 어떠한가? 미국인들은 직업에 귀천이 없어서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직업도 별스럽게 생각지 않는 반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사무직을 지식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영어회화 능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학력이 높은 카투사가 서류작업에는 많이 앞설 수밖에 없다.
또 GI들은 연장을 하지 않는 한 근무연한이 1년 밖에 안되지만 우리는 3년 가까이(지금은 2년 가까이) 근무하므로 근무환경에 더욱 익숙하다.
카투사가 없으면 부대가 잘 안 돌아갈 정도가 되는 곳도 많다.
우리 본부중대의 예를 들면 BEMS(여단전자통신장비정비소) Section에 근무하는 병력은 카투사가 절반이 넘는다. 학력 높으면서 3년 가까이 한곳에 근무하고 있고 대부분 학교나 직장에서 비슷한 공부나 일을 하던 사람이 대부분이니 처음 올때는 다소 생소한 기계에 서툴러도 이내 적응이 되어 일년만 지나면 선수가 된다. 타 부대에서도 못 고치는 장비를 우리부대 BEMS에 가지고 와서 고쳐 가는 것을 많이 봤다.
BEMS에서 카투사를 일시에 빼 버리면 Team Spirit 같은 큰 훈련이 곤란해질 지경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사오십 여년 전처럼 지금도 부대 내의 물건을 빼 돌리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인데 우리도 국민소득이 3만달러에 육박하고 있는데 그때와는 사정이 많이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여름에 야영을 다닐때 A텐트라고 해서 지붕만 있고 바닥은 날바닥에 깔자리만 깔고 잘 때인데 자다보면 별이 보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누가 걷어 갔기 때문에!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대천해수욕장 모래밭에서 야영을 하는데 별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는 천장, 벽, 바닥이 일체형인 텐트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데 자고 일어나 보니 문 앞에 내 놓았던 코펠이 사라졌다. 문밖에 내놓은 물건이면 헌 운동화조차 남의 것이던 때였다.
17. 하급자의 미귀
이제 나도 제대가 두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서서히 선임하사로서의 역할에도 누수현상이 생긴다.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하여 지시사항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
나는 후임자를 뽑아놓고 지금 OJT를 시키고 있는 중이다.
제대를 앞두고 몸조심한다고 술을 적게 마셔 실수를 하지 않고, 하급자들을 때리거나 괴롭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한참 쫄병과도 농담 따먹기를 하는데 가끔 울화가 치미는 때가 있다.
그래서 군대에는 빳따가 없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외출증에 보면 귀대 시간이 명시되어 있는데 대부분 그날 24:00시로 되어 있다.
그날을 넘기지 않고 부대 정문만 통과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부대 들어오기 싫어서 정문 밖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을 보내다가 10분을 남겨놓고 부대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는데 보통은 11시 안에 다 들어온다. 어차피 김포 공항동에는 시내버스가 10시경이면 끊어진다.
만약 밤 12시 안에도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안 들어오면 미귀(未歸)이고 탈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보통은 12시 조금 넘겨서 들어오면 ‘미귀’라고 하여 탈영과는 구별한다. 이것도 인사과에 보고를 하여 처벌을 받아야 한다.
내가 불안한 것은 미귀자가 처벌을 받을까봐서가 아니라 시간 좀 넘겨서 귀대할 것으로 예상은 하지만, 혹시라도 귀대 시간 넘겨(탈영하여) 사고를 냈을 경우 미귀 즉시 보고를 하지 않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을 내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임하사 회의가 있을 적마다 파견대장이나 인사계는 인정에 끌려 미귀자를 보고하지 않다가 사고가 나면 같이 영창 갈 수가 있으니 즉시 보고하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내가 외출, 외박증을 끊어 내 보낸 하급자가 시간내 들어오지 않으면 잠을 못잔다.
중대 내 모든 외출, 외박자는 내 방에 들려 외출증과 신분증을 내고 자러 가야하는데 12시 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인사과에 보고를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한번 미귀를 한 하급자가 있어서 경고를 주었는데 또 미귀를 하였다.
참다 참다 미귀자에게 후임자(나의 선임하사 조수)를 불러오라고 시키고 물었다.
“내가 아무리 내일 모레가 제대라고 하지만 도저히 못 참겠다. 사실대로 인사과에 보고를 하래? 나한테 맞고 넘어갈래?”
보고하라는 사람 하나 없다.
후임자 보고 마대걸레 자루 하나 뽑아 오라고 하여 마대자루가 부러지도록 두들겨 팼다.
“너, 잘봐라! 선임하사를 보면서 애들에게 무조건 잘해 주려하면 네가 피곤하고 자꾸 사고가 터져 잘못하면 너에게도 같이 연대책임을 묻게 되니 가끔은 애들을 잡아 돌려라!”
일종의 시범 케이스로 뭔가 보여줬더니 소문이 나서 한동안 아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잘 돌아 갔다.
18. 기타 참고 사항
(1) 쪼꼬렛트 기부미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한글은 물론 1, 2, 3, 4도 못 읽던 시절이니 당연히 영어의 A자도 모르던 시절부터 나는 영어 회화를 했었다.
나 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이 거의 다 놀고 있다가 매우 드물게 일년에 한 두번 동네 앞에 지나가는 미군들이 탄 찝차나 트럭을 보면 우루루 달려 쫓아가며
“헬로, 헬로, 쪼꼬렛트 기부 미!”
하고 소리쳤다.
혹시라도 먹던 초컬리트라도 던져 주면 답변도 한다.
“쌩큐, 쌩큐!”
더러는 진짜 초컬리트나 껌, 사탕 등을 던져주고 가는 때도 있다.
먼지만 일으키고 그냥 지나가면?
“께라리 깟뎀”
누구한테 배웠는지도 모르지만 생존을 위해서인가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A’자를 비롯하여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 알고 있었던 그말이 문법에 맞는 말인지 영어사전에 나오는 말인지가 몹시 궁금했다.
‘헬로, 기부 미, 쌩큐’는 알겠는데 ‘께라리 깟뎀’은 교과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표현하기 곤란한 욕설이어서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했다.
1963년부터는 유일하게 아스팔트가 깔렸던 1번 국도(천안초등학교와 천안북중 사잇길)를 넘어 성정동에서 천안중학교로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1번 국도로는 미군 차량이 꽤 많이 지나다녔다. 어느날 오후 하교길에 만난 미군 트럭뒤에는 여러명이 일어서서 노래하고 떠들며 오고 있었는데 나는 오래간만에 또 한번 코 흘릴 때 부터 알고 있었던(어쩌면 엄마 뱃속에서 부터 배워 가지고 나왔는지도 모르는) 영어를 또 써먹어 봤다.
“헬로, 쪼꼬렛트 기브미!”
그랬더니 웃으며 깡통 몇개를 던져 주었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달려가서 집어보았다.
몇개는 빈 깡통이고 반쯤 안되는 액체가 담긴 깡통이었다. ‘미국사람이 먹는 것이니 맛있겠지’하고는 한모금 마셨다가 ‘퉤퉤’ 뱉어버리고 말았다. 톡 쏘고 씁쓸한 것이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액체였다. 깟뎀, 깡통같은 미국놈들! 성인이 되어서야 그 액체의 정체가 캔맥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께라리, 깟뎀’은 카투사가 되어서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원 문장은‘Get out of here. God damn’이고 ‘get out of here’를 줄여서 ‘get outta here’가 된다. 연속 발음을 하면 ‘게라러히어’가 되니(듣기로는 ‘게라리어’가 됨) ‘께라리’에 ‘갓댐’을 붙여서 하는 말이니 미국인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된다.
- 이거,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내가 힘들여 설명하고 있나? -
‘god damn’은 ‘신의 저주’라는 뜻이지만 그저 욕일 뿐이다. ‘Jesus Christ!’(지저스 크라이스트)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이런 제길할’, ‘빌어먹을’,‘오, 주여!’정도의 뜻인 것과 같이!
가끔 미국영화를 보면 도둑들이나 군인들이 하던 일, 작전을 모두 마치면 서둘러 자리를 뜨자는 말로 ‘렛스 게라리어(Lets get outta here)’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2) Business Girl
양놈들로 부터(고운말을 씁시다. GI) 그들끼리의 대화 중‘비즈니스 걸’이라는 얘기를 가끔 듣고 ‘비즈니스’는 사업, 상업 등의 뜻이 있으니 자영업을 하거나 백화점이나 직장에서 돈을 버는 여성을 말하는 줄로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직장여성은 ‘Office Lady’이고 비즈니스 걸은 몸을 파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매춘부(or 양공주)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이들과 자주 마주 친다. 헌병대에서 정문에 근무할 때는 우리에게 확인이 되어야 부대 출입할 수 있으니 자주 만나게 되고 위병소에서 신분증과 ‘VD Card’라는 이름의 성병검진카드가 있어야 우리의 확인을 거쳐 게이트 안에 대기하고 있다가 클럽의 관계자가 정해진 시간에 나와 에스코트하여 들어간다.
젊은 여성들만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20대 전후부터 40대 까지도 있다.
젊은 여성은 젊으므로, 나이 많은 여성은 경험으로 말을 잘하고 분위기 파악을 잘하여 테이블의 주도권을 잡아 그들 나름대로 사는 방식이 있다.
그 외에는 우리도 주머니 사정만 넉넉하면 수시로 근무 종료후에 NCO Club에 놀러 가므로 곳곳에 눈에 띄어 김포지구의 양공주(GI상대 성매매 여성)들은 거의 안면이 있다.
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가장 큰 로망이 어떻게 해서든지 GI를 잡아서 국제결혼을 하여 미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더러는 당장의 작은 수입보다 미래를 위하여 GI의 마음을 잡으려고 오히려 GI에게 돈을 써가며 헌신 봉사하는 경우도 있다.
성공하여 여러 다른 양공주들의 부러움 속에 축하를 받으며 미국으로 들어가는 수도 있으나몰래 버리고 혼자 귀국을 해 버리는 나쁜 GI도 많다. 미국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다시 나와서 클럽을 드나드는 여성도 있다.
이들이 사는 동네를 기지촌이라하여 어지간한 규모의 미군부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그곳에는 양공주 뿐만아니라 군납업자들, 미군상대 상인들, 각종 업소들, 이들의 숙소를 제공하는 업자들, 더러는 이들을 뜯어먹고 사는 폭력배들 등 부정적인 요소가 많이 알려져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동네의 이름에는 텍사스가 많다. 그리고 간판이름이나 벽화 등 마을의 분위기도 미국 시골 마을의 분위기와 흡사하게 꾸며져 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이들(양공주들)로 부터 막대한 양의 달러와 GI PX의 물품이 흘러나와 어려운 우리 경제의 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시절을 거치고 들어온 따지고 보면 불쌍한 여성들인데 우리 국민들로 부터는 백안시 당하며 천대받고 있다. 부대 내의 한국 사람들인 카투사, 하우스보이, 종업원, 노무대들로 부터도 더러운 여성 취급을 받아서 가끔씩 갈등이 일어나는 수도 있다.
사실 그들이 하는 일이 상을 주어야 할 만큼 훌륭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 그들이 있으므로 다소 경제적인 어려움을 덜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유교 사회적 참을성이 부족하고 성적 에너지가 넘치는 자유분방한 20대 초반의 젊은 GI들의 욕구해소를 담당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면 일반 양가의 여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누군가는 사회의 하수도 역할, 청소부 역할을 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일로서 현재 우리나라와 사과라는 말을 모르는 일본 사이에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위안부와는 또 차이가 있겠지만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아닌 괴물로서 점차 미군부대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언젠가 완전 철수가 될 것이므로 이들의 미래도 뭔가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 역시 시대의 변화를 따라 한 때는 러시아 여성들이 지금은 대부분 필리핀 여성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3) 쓰리코타
어려서 부터 어른들이 미군부대 차량을 말할 때는 찝차나 쓰리코타(3/4) 얘기를 많이 했다.
찝차를 얻어 타봤느니 쓰리코타에 치어 다친 적이 있다느니.....
내가 미군부대에 들어오니 그것이 또 궁금했다.
찝차는 많이 보아서 알고 있고 도대체 어떤 차가 쓰리코타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카투사가 된 그 시기엔 쓰리코타가 없었다.
미군부대에 돌아다니는 가장 흔한 차종은 트럭인 Two Snap(2와1/2톤차, 두톤반차) 초급장교들이 주로 타고 다니는 찝(Jeep)차, 나중에 우리 본부중대에 파견대장 찝 운전병이 들어와서 몇번 얻어 타봤다. 날씨 좋을 때 특히 꽃피는 봄날 덮개인 호로를 벗겨내고 시내를 한바퀴 돌면 마치 지금의 컨버터블 차량의 덮개를 접고 타고 다니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으로 많은 차량은 1과1/4톤(5/4톤차) 차로 ‘화이브 쿼터’로 부른다. 아마 쓰리코타(3/4톤차)는 이미 사용이 폐기되고 이 화이브쿼터(4/5톤차)로 대체된 모양이다.
투스냅과 화이브쿼터 차량은 짐칸의 옆면을 접었다 폈다하는 의자로 만들어서 사람도 짐도 다 싣고 다닐 수 있다. 군용 화물 트럭이자 병력수송용 차량이다.
그 외로는 용도에 따른 특수한 차량들이 있었다. 요즘 많이 눈에 띄는 납작한 전투 차량 험비는 한대도 본적이 없다. 전투부대가 아니어서 그랬던건지는 잘 모르겠다.
(4) 거짓말에 대한 GI들의 태도
미국사람 참 속이기 쉽다. 바보 수준에 가깝게 뻔한 거짓말에도 잘 속아 넘어간다.
난 정말 처음엔 미국사람들은 모두 바보인 줄 알았다. 그걸 정직성인 것으로 빨리 이해를 해야지 못 알아채고 작은 위기를 넘기려고 자주 거짓말을 했다가 나중에 그 미국인이 거짓말인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참말을 해도 믿지를 않는다.
그들은 정직한 사람과 거짓말쟁이를 2분법적으로 판단을 하여 거짓말쟁이라고 생각되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핑계라는 이름으로 거짓말에 대하여 관대한 문화를 가졌다.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이해해 주는 잘못된 관행에 길들여져 있다. 미국인들은 강도에게 조차 거짓말을 잘 안한다.
우리도 이런 문화를 바꿀 필요가 있다. 무슨 모임 같은 곳에 나가지 못했을 때는 그럴 듯하게 변명하려고 머리 굴리지 말고 다소 욕을 먹더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자.
그래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선진국은 국민소득만 높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도덕성도 같이 높아야 된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우리나라의 치안과 도덕성에 관하여 추켜 세우는 동영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우리 끼리만 자화자찬 하는 것은 아닌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뻔한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 너무나 많다.
거리에 놓여있는 물건이 잘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옛날보다 살기가 좋아져 갖고 싶은 물건을 구태여 남의 것을 가져갈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도 곳곳에 설치된 CCTV가 있어서 남의 것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함부로 가져 갔다가는 큰 곤욕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안 가져 가는 게 아니라 못 가져 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잠깐 잡소리 하나! 나는 많은 CCTV를 보면서 옛날에 베스트 셀러였던 조지 오웰이 쓴‘1984년’의 빅브라더 같은 독재자가 나와서(뭐 김정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되겠다.) CCTV를 독재를 강화하는 통치수단으로 삼으면 문제가 보통이 아닐 것 같아서 자꾸 시설을 늘리는 것이 불안하다. 나중에 성능이 더 향상되면 집집마다 방마다 다 설치를 해도 별 돈이 안들 것이고 인공지능 로보트를 시켜서 감시하게 하면 일일이 사람이 모니터를 지켜보며 감시를 하지 않아도 효과적으로 국민을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5) Happy Smoke
우리는 인기 절정의 연예인들 중에 종종 대마초를 피우다 적발되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봐왔다.
역사가 깊다. 아주 오래전부터 잊을만 하면 꼭 한번씩 터진다. 나는 이해가 안된다. 살을 깎고 피를 빼는 고통을 감내하며 노력을 하여 오른 연예계 정상에서 무엇이 부족하여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을 자초하는지?
한편 그 기분이 어떻기에 그러는지 한번 경험을 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었다.
시골 어른 들 말씀이 옛날에는 우리 동네에서도 대마를 재배하는 집이 많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피울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어디서 조금만 구해서 한번 맛을 보고는 싶은데 구할 방법이 없다.
카투사가 되어 미군부대에 와보니 대마초는 ‘Happy Smoke(또는 마리화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너무나 보편화 되어 있었다. 중독이 되어서 아편 중독자처럼 폐인이 되어있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는데 나는 본적이 없고 GI의 6할 이상은 피우는 것 같다. 미국의 어느 주에선가는 대마초가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 평상시는 어딘지는 모르지만 잘 숨겨두어 모르겠다. 그러나 주말만 되면 친한 사람들끼리 어느 한방에 모여서 집단으로 피운다. 그럴 때에는 대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벽에 어두운 색 바탕에 형광색으로 그려진 환각화를 붙여 놓기도 한다. 물론 우리 방에서 피우는 수도 있다. 그럼 내 침대에서 잘 수가 없으므로 다른방 외출나간 카투사의 방 침대에 가서 자거나 다른 방에서 온 그 사람의 방에 가서 잔다. 주말에 방은 거의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술에 해피 스모크에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어 늘어져 있어서 내가 들어가도 아무도 반응이 없는 수도 있다. 그러면 알아서 나가는 수밖에.....!
더러는 근무중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피우는 수도 있고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피우는 GI도 있다. 음주운전보다 더 위험한 경우가 되겠는데 나도 한번 그런 트럭을 타 본적이 있었다. 뒷칸에 타고 가는데 어디서 누릿내가 자꾸 나는 것 같아서 보니까 운전을 하면서 피우고 있었다. 아찔한 생각이 났지만 어쩌지 못하고 부대에 돌아와서 보고를 할까말까 망설였다. 그사람이 어떤 벌을 받게 될지 몰라 선듯 보고를 하기도 어렵다.
평상시 착한 사람이고 나의 부탁을 가끔 들어 주는 사람인데.... 다른 GI와 상의 끝에 다음에 한번 또 그러면 그자리에서 보고하겠다고 얘기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도대체 이게 어떤 맛이기에 이렇게 한국이나 미국이나 -아니지 미국이 훨씬 더하지- 대마초에 미쳐있나 호기심이 발동하여 주말에 책상위에 놓여있던 대마초를 조금 가져다 사람 없는 넓은 야구장 한 가운데에 가서 피워봤다. 누리끼한 냄새를 맡으며 한동안 피워 봤는데 별 느낌없고 또 누가 볼까봐 얼른 배럭스로 돌아왔다.
우리 카투사가 대마초를 피우다 적발되면 아마 부대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카투사가 GI들로 부터 신임 받는 것 중 하나가 대마초로부터 청정지역인 것 때문이기도 한데!
나보다 6개월 정도 선임 중에 BEMS(전자통신장비수리소)에서 책임자로 일하는 최병장이 있었는데 이사람이 나와 성격이 잘 맞아서 같이 술을 마셔도 불편이 없어서 잘 어울려 다녔는데 어느 날 술자리에서 해피스모크 얘기가 나왔다. 한번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번 피워 봤는데 아무 느낌도 없더라 중독이 되어야 느껴지는 모양이다라고 말했더니 아니란다, 양이 적었던지 피우는 방법이 잘못되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야 반응이 더 빠르다고 한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 한번 같이 피워보자’ 였다. 나쁜짓도 같이 하면 용기가 더 생긴다.
어차피 최병장은 믿을 만한 사람이고 나쁜 짓이겠지만 한번 쯤은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다음 주말에 실행을 해 보기로 했다.
GI중에는 우리에게 대마초를 주면서 피워보라는 사람도 많다. 그걸 받아서 피워 봤다간 ‘해피스모크를 피우는 카투사’로 계속 꼬리표가 되어 따라 다닐 것이다. 대마초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말에 배럭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기저기 책상위에 널려 있는 것도 많다. 구하기 보다 보관하기가 더 어렵다. GI들에게 카투사가 Happy Smoke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만 퍼져도 사건이 되고 나까미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토요일 외출나갔다가 시내에서 같이 만나서 술을 마시고 들어와 결행하기로 D-Day를 정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늦은 밤에 한방에 다른 한명과 함께 셋이서 최병장의 지도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담배 피듯이 뻐끔거리면 안되고 ‘후~~~~욱’하고 길게 가슴 속까지 도달하도록 흡입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마초 가루가 목으로 넘어가 재채기를 해대며 몇번 빨아도 아무렇지도 않아서 불평을 했더니 자꾸 조금만 더 해 보란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정말 머릿속이 멍 해지면서 가슴이 울렁거리며 뭔가 다른 신호가 왔다.
최병장은 벌써 침대에 엎드려 퍼져 있다.
조금 있으니 앉아있는 몸이 동서남북 어느 방향인가로 자꾸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나도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빙빙 돌면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한다. 술에 많이 취한 것과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느낌이다. 그리고 분명히 누워 있는데 내몸의 어디가 침대에 접촉하고 있는지가 느껴지지 않으면서 마치 뭉실뭉실 유동성 있는 구름위에 누워있는 듯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몸을 반듯하게 하고 있어도 뱀처럼 구불구불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다. 상하로 좌우로 유연하게....! 저절로 쿡쿡 웃음이 나오고 그동안 아팠던 신체의 부위가 다른 곳 보다 더 시원한 것이 느낌이 좋다.
완전히 황홀한 환각상태가 온 것이다.
그렇게 몇시간을 꿈같은 상태로 퍼져 있다가 깨어났다. 깨어날 때는 머리가 띵하니 아프고 목구멍이 따가우며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일단 흔적없이 깨끗이 치우고 각자 말없이 흩어져 자기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후회와 다시는 피우지 말아야겠다는 각오가 섰었는데 몇 주일이 지나니 술만 마시면 자꾸 충동이 일었다. 그 뒤로 한번 더 경험을 하니 그 다음에는 그 충동이 더 강하게 일어났다. 서서히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렇게 해서 중독이 되는가 보다.
그 이후로 충동을 완전히 물리치는데는 매우 큰 의지가 필요했다.
나중에 이가 아팠는데 누가 자꾸 술을 마시자고 하여 싫지만 술을 마시고 귀대를 하였는데 어찌나 이가 아픈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견디다 견디다 참을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고 부대내 Dispensary(양호실, 작은 병원)에 가보니 당직자가 있었다. 이가 아파서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약좀 달라하니 주었다.
방에 돌아와 약을 먹으니 이 아픈 것이 서서히 완화되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지난번 대마초를 피웠을 때와 비슷한 환각상태가 된다. 구름위에 떠 있는 것 같고 아팠던 부위가 더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 상태로 들어갔다.
‘뭐야, 이건? 합법적 환각상태?’
그 뒤로 두어번 술을 사다놓고 디스펜서리에 가서 이가 또 아프다고 하여 약을 타다가 술을 마시고 환각상태를 맛 봤다.
나중에 누군가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러지 말라고 한다. 환각상태가 되어 아픈 것이 더 시원하고 기분 좋게 되는 것은 정상상태로선 있을 수가 없고 뇌에 작용하여 뇌세포를 갉아 먹는 것이므로 갈수록 시간이 짧아지고 약의 양이 늘어가다가 중독되어 폐인이 되는 거라고! 아마 청소년들이 본드를 흡입하는 것도 이런 것과 같은 것인가 보다.
그 뒤로 지금 까지는 한번도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으며, 지금은 그런 유혹이 생기지조차 않는다.
호기심! 일시적인 정신적 만족을 얻을 수는 있으나 자칫 인생을 망치는 길로 빠져들 수 있다!
(6) 인사과 근무
자대배치를 받으면 누구나 인사과로 일단 넘겨지게 된다. 인사과는 단위부대에서 최고 상위에 있으므로 부대내 카투사의 인적관리는 절대적이다.
이미 각 예하 중대에 특명이 나 있는 신병들도 인사과에 모아놓고 한사람씩 개별 면담을 통하여 쓸만한 사람이 있다 하면 그자리에서 특명을 바꾸어 인사과에 주저 앉힐 수가 있다.
꼭은 아니지만 대체로 명문대 재학중이고 인물 훤출하며 똑똑해 보이면 인사과에 근무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본인 자신도 끝발있는 인사과에 근무하게 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카투사 인사과는 진급, 휴가, 외박 등에 우선하므로 좋은 점도 많지만 나쁜점도 없을 수는 없다.
첫째, 상대하는 사람이 거의다 카투사 뿐이므로 영어를 말할 필요가 거의 없다. 절실한 애로 사항이 없어 미군부대에 왔으니 영어 좀 제대로 배워 가지고 가자고 처음했던 결심은 차차 약화되어 영어회화 핸드북은 먼지가 쌓인다.
둘째, 전에 한번 말한 적이 있는데 특과일수록 빳따가 세다. 부대 내에서는 고참의 횡포를 고발할 곳이 없다. 만약 선임자를 잘못 만나면 그 사람 제대할 때 까지 지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왕고참이 되면 영외 거주자인 파견대장, 인사계 이인지하(二人之下)에 퇴근 후 야간에는 우리 부대내 카투사 사회에서는 무인지하(無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왕이 된다. 인사계, 파견대장과 말만 되면 영외거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한민국 젊은이 중 영장을 받고 입대한 사병 중에서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 전국에 몇명 안된다.
(7) 왝(WAC, 미여군)과 결혼
GI 여군을 왝(WAC, Womens Army Corps)이라고 부른다.
우리 김포 베이스에는 서너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가끔 보기는 보았는데 어디서 무슨 일은 하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접촉할 길이 없으니 사귀어서 결혼까지 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이다.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매우 큰 신분상승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런데 별을 딴 사람을 보았다. 내가 선임하사 볼 때 이웃 부대에서 전입온 나보다 몇 개월 선임인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어디서 어떤 수단으로 성공을 했는지 WAC와 벌인 전쟁에서 깔아 뭉개고 결혼에 성공을 하여 단숨에 미국시민권을 획득하고 같이 Stateside(미국본토)로 들어갔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미국에 들어가서 GI에 지원하여 엽전GI가 되어 근무를 하다가 2년 정도가 지나서 다시 한국근무를 지원하여 김포에 와서 근무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 보수도 우리의 10배 가까이 되어 우리를 저 아래 미개하고 더러운 원숭이 비슷한후진국 국민정도로 보고 있었을 텐데 그 여군이 그 사람의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들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마치 요즘으로 치면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한국여성이 고물상 쓰레기더미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일하고 있는 동남아인 불법체류자와 결혼한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사람 인물이 뛰어난가? 내가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키나 생김새나 나와 별 차이가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똑똑한 것도 보통에 불과하고!
그럼 그 여군이 못 생기고 바보 같은가? 역시 그것도 아니다. 잘 생긴 백인여성이었다.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8) 가봉 봉고 대통령 방한
내가 제대를 3개월 정도 앞둔 1975년 7월 5일에 아프리카 가봉국의 봉고 대통령이 방한을 했다.
그때까지 국민들은 가봉의 봉고 대통령인지 봉고의 가봉 대통령인지 헷갈려 할 만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었다.
이것은 친북 성향을 보이는 가봉을 회유하려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때 비공식으로는 원자폭탄 개발을 위하여 필요한 자원이 가봉에 산출되기 때문이라는 설도 퍼졌었다.
불과 인구 100만의 소국이고 봉고 대통령은 남다른 엽색행각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부에서는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 결과 남한 방문 후 북한을 방문하려 했으나 북한이 거절하였다하고 그로 인하여 가봉은 확실하게 한국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우리는 가봉에 15층 짜리 백화점 건물도 지어주고 봉고대통령을 한방 치료를 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한의사 한명을 주치의로 현지에 파견하기도 했다한다.
위 내용은 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나와 관계있는 내용을 말하자면, 그 당시 인천공항은 세워지기 전이므로 당연히 김포공항을 통하여 봉고 대통령이 방한을 했다.
지금 1박2일이었는지 2박3일이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안나지만 김포공항과는 동편에 낮은 철조망(가끔 넘어 들어가기도 할수 있는)을 경계로 하고 있는 우리부대 사병들은 전원 휴가를 얻어 귀향조치 되었다. 부대 내에는 꼭 남아있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만 남게되었다.
며칠 전 부터 관계기관에서는 무엇을 찾는지 부대 전체를 샅샅이 수색을 하였다. 또한 방한 전날은 청와대 경호실 소속으로 생각되는 공수부대원들이 공항 외곽 여러 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경비를 섰다.
별 내용은 아니지만 내가 군 복무 중 있었던 일이므로 간략히 써 봤다.
(9) 화장실 문화
화장실을 군대에서는 뭐라고 할까? 우리들이 알고 있는 화장실을 뜻하는 영어도 여러가지 이다. 백화점이나 병원 등 여러사람이 사용하는 공공화장실에도 용어는 통일되어있지 않다.
WC, Toilet, Rest Room, Mens Room, Wash Room, Bath Room, Lavatory, Sanitation 등등
그런데 군대 화장실은 또 이런 것과 전혀 다르다. 군대에서 이런 말만 알고 화장실을 찾다간 영원히 못 찾는다.(사실은 짐작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기는 하지만.)
군대 화장실은 ‘Latrine’라고 한다. 병영이나 야영지 등의 ‘임시 화장실’이라는 뜻이라 한다.
화장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가 경험한 화장실 문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얘기해 본다.
문화란 그 지역의 환경에 맞춰 그 지역 사람들이 오랫동안 이어온 정서이기 때문에 쉽게 변화하기 어렵다. 그러나 새로 흘러 들어온 문화가 현저히 편리하다면 그 변화기간은 짧을 수 있다.
오래전에 식인문화(食人文化)에 대하여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 문화에 먼 우리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문화로 얘기되고 있지만, 그 문화를 이해하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식인문화는 사실 세계 여러곳에 퍼져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 널리 알려진 파푸아 뉴기니 오지에서 있었다는 식인문화는 서구에서 식민지배를 정당화시키기위하여 과장되어 퍼뜨리 면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을 먹기위해 사냥하여 먹은 것은 아니라 한다. 주로 전투 중에 포로로 잡은 사람을 먹었는데 그 지역 원주민들 사이에선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먹히면 그사람들 몸에 살아남게 된다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포로로 잡힌 사람에게 죽여서 땅에 묻어주겠다고 하면 안된다고 제발 먹어달라고 애원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안 그렇겠지만 내가 현역 카투사 시절 용산 Main Post 군용버스 터미널에 가면 화장실의 칸 수가 매우 여러개 있는데 모두 문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황당하여 어떻게 지나가는 사람이 다 보는데 큰 볼일을 볼수 있나 민망하기 짝이 없었는데 여러번 사용하다 보니 사람 많고 바쁠 때 매우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중에는 볼일을 보다가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인사하는 수준까지 되었다. 사실 남성 소변기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청소부 아주머니들은 볼일보러 서있는 사람 발 근처까지 와서 걸레질을 하기도 한다.
<권장 화장실 사용방법>
① 현재 사용하지 않는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 놓자.
닫아놓으면 환기 불량으로 곰팡이가 슬기 쉽고, 화장실 특유의 냄새가 나서 불쾌하다.
또 닫혀 있으면 처음 방문한 사람이 방의 문과 구별을 못하여 바로 찾지 못한다. 다음 사용자가 바로 이용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자.
② 화장실에 휴지통을 없애자
이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을 비롯하여 요즘 전국적으로 이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휴지를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사용한 휴지는 변기안에 넣어 흘려 내보내자. 휴지통을 보는 순간 인상이 찌푸러든다. 치우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다.
③ 남자도 앉아서 소변을 보자.
아무리 정확히 조준 정확히 사격을 한다 해도 소총처럼 단발이 아니기 때문에 빗나가는 양이 많아 다음 사용자가 몹시 불쾌하다. 완전무결하게 닦아 놓는다 해도 앉아서 볼일 본 것만은 못하다.
④ 화장실용 휴지(Roll Paper)를 식탁위에 놓지 말자.
외국인들이 보기엔 요강에 음식 담아놓고 먹는 것처럼 혐오스럽다. 요강이 아무리 깨끗하다해도 연상되는 것이 있어 식욕이 안나는 것과 같다
냅킨 Paper도 휴지만큼 가격이 저렴하니 식탁위에 냅킨 Paper를 사다 놓고 쓰자.
(10) Phonetic Code(구문 통화표)
“How Me? Over!” - ‘어떻게 들리냐? 이상’
“Lima Charlie. Over”- ‘크고(Loud &) 깨끗하게(Clear) 들린다. 이상’
요즘이야 통신기술이 발달하여 전화통화 시 소리가 작고 잘 안들리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옛날에는 유선이라도 거리가 멀면 통화의 질이 안 좋아 소리가 작거나 들릴 듯 말 듯 끊어지기도 하고 소리가 커도 ‘지지직’ 거리는 소리로 알아듣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무전(무선전화)의 경우는 더 심하다. 위의 여러가지 악조건에 전파가 파도소리 처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경우도 많다.
상대의 전파를 잡아 통화가 이루어졌어도 나는 잘 들리는데 상대는 잘 안들리는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그래서 첫머리에 쓴 것 처럼 서로 상대의 전파상태를 확인한 후 교신을 하는 것이다. 우리 말로는 ‘감 잡았다. 오버!’
여기서 ‘Over’란 내말은 끝났으니 네가 말하라는 뜻이다. 더이상 할말이 없으니 교신을 끝내자고 할 때는 ‘Out’이라고 한다.
(나는 1990년대 초에 아마추어 무선(HAM)통신기사자격 면허시험에 응시하여 2급 아마추어 무선통신기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한때 무전기를 구입하여 아마추어 무선국 개국을 하고 Call Sign ‘HL3QLN’을 받아 잠시나마 활동을 한 적도 있었다.)
교신상태가 고르지 못한 것은 말할 필요없이 무선일 경우가 특히 더 차이가 심하다.
잘못 알아들으면 군대나 여객기에서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통신상태가 고르지 못할 때는 ‘A, J, K’, ‘B, V’, ‘E, C, G, Z’, ‘D, T’, ‘L, N’등을 구별하여 듣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에서는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서 Phonetic Code(구문 통화표)를 만들어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군대와 항공기, 아마추어 무선사의 교신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사용하면 혼란을 막을 수 있고 편리하다. 불과 몇분이면 외울 수 있으니 한번 외워 사용해 보시도록!
한국군에서는 1중대, 2중대, 3중대.... 이렇게 이름이 주어지는데, 미군에서는 대개 A중대, B중대, C중대.... 이렇게 나간다. 이런 때도 보통 Alfa Company, Bravo Co, Charlie Co 이렇게 부른다.(아래 Phonetic Code표 참조)
PHONETIC CODE
A-Alfa B-Bravo C- Charlie D-Delta E-Echo F- Fox trot G-Golf
H-Hotel I-India J-Juliet K-Kilo L-Lima M-Mike N-November
O-Oscar P-Papa Q-Quebec R-Romeo S-Siera T-Tango U-Uniform
V-Victar W-Whiskey X-X ray Y-Yankee Z-Zulu
(11) Official Greetings(공식적 인사법)
외출을 나갔다가 터미널에서 정복을 입은 고참 상사가 서 있어서 그냥 지나가기도 뭣하여 걸어가면서 가볍게 거수경례를 하고 ‘단결!’하였다.
이분은 군대생활이 완전히 몸에 밴 모양으로 조금도 망설임 없이 ‘탁’소리나게 뒷꿈치를 붙이더니 절도있는 동작으로 손을 올리며 ‘필승!’하고 받았다.
나는 아마 인사를 받지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손도 인사를 받을 때까지 올리지 않고 바로 내렸는데 군기 빠진 카투사의 허술한 인사에 절도 있는 FM 군대 상급자의 답례를 받으니 미안함을 느꼈다.
GI들의 공식적인 상관에 대한 인사법을 확실히는 모르겠다. 나는 실내나 정지 상태가 아니면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고 걸어가면서 거수경례를 했었다.
한국군은 사병간에도 상급자에게 거수경례를 하지만 GI들은 장교 이상에게만 거수경례를 하지 같은 사병간이나 하사관에겐 거수 경례를 하지 않는다.
그럼 인사를 하지 않느냐? 그렇지는 않다. 인사말은 하되 거수경례만 하지 않을 뿐이다.
인사는 미국사람들이 훨씬 더 잘한다. 우리는 아는 사이가 아니면 그저 닭 소보듯이 소 닭보듯이 무표정하게 스쳐 지나가지만, GI 뿐만이 아니라 민간인들 모두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특히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웃으며 인사를 잘한다.
공식적인 인사말은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 밤 12시부터 낮 12시까지는 오전이고‘Good Morning!’, 오후 시간은 낮 12시부터 저녁 5시(저녁식사 시간?)로 알고 있고 인삿말은‘Good Afternoon!’이며 5시부터 자기 전까지는 저녁인사로 ‘Good Evening!’이다.
그러나 보통 비공식적으로는(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고개를 까딱하거나 손바닥을 펴 들으면서 ‘Hi!’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외 많이 쓰는 인삿말 문장은 ‘How are you doing?’, ‘How is it going?’,‘What’s Happening?’드물게는 ‘Long time dont see. Kim?’등이며 받는 말로는 ‘Pretty good.’,‘Not much.’,‘So so.’등으로 받고 ‘How about you?’라고 묻는다.
(중학교 때 배운 ‘How do you do?’,‘How are you?’는 들어보기 어렵다.)
헤어질 때 인사는 상황에 따라 상관에 대한 공식인사는 ‘Good bye. Sir!’이나 가까운 사람 끼리는 See you later(again, tomorrow, in the morning,), Catch you later, Take it easy 등을 쓴다.
## 인사를 안하고 지나가는 하급자
우리 식으로는
“야, 임마! 왜 인사도 안해?”
더 심하게는
“너, 죽고싶어 환장했냐, 인사도 안하게?”
도 생각할 수 있고, 좀 부드럽게라면
“야, 인사나 좀 하고 다녀라! 응?”
정도가 되겠다.
GI 장교는 이렇게 한다. 내가 몇번 당했다.
“Gentlemen!”하고 부른다.
처음엔 어리둥절 왜그러나 하고 쳐다보니 승용차를 타려는지 열린 문을 안쪽에서 잡고 빙그레 웃고 서 있다. 차를 밀어달라 소리인가 의아한데 같이 가던 고참이 먼저 알아 차리고
“Good morning. Sir?”
하고 인사를 하니
“Good morning.”
하고 웃으며 인사를 받더니 차에 타고 시동을 건다.
두번째는 똑같은 경우인데 또 깜막했다. 뭐 도와달라는 줄 알고 인사는 안하고
“What can I do for you, Sir?”
하고 물으니 먼저 거수경례를 하면서
“Good morning.” 한다. 화들짝 놀라
“Good morning. Sir?”
하고 거수경례를 했더니
“Good. Pretty good!”
하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 간다.
다음 부터는 어쩌겠는가? 미안한 마음에 늦을 세라 먼저 할 수 밖에!
(12)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높은 신분에 요구되는 정신적 의무’또는‘상류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라고 나온다.
6.25 전쟁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아들이 참전을 하여 싸웠으며 워커 장군의 부자는 공히 참전하다 안타깝게 둘 다 전사를 하였다.
(광진구에 있는 ‘워커힐(Walker Hill)’은 ‘군화의 언덕’이라는 뜻이 아니고, ‘워커 장군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1961년 사단법인 워커힐로 설립되었으며 당시 한국에 적당한 휴양지가 없어 일본으로 휴가를 떠나는 주한미군을 타깃으로 워커힐호텔을 세웠으며, 워커힐이라는 이름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해리슨 월턴 워커(Harris Walton Walker) 전 미8군 사령관을 기념한 것이다.)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아들 밴플리트 2세는 공군 B-26 조종사로서 해외 그리스에서 근무하다 귀국을 하자 마자 아버지가 참전 중인 한국으로 날아왔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자기 어머니께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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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어머니께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므로 기수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저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어 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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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플리트 장군의 외아들인 그는 1952년 4월 4일 북한으로 철도 보급을 공격하는 작전에 출격을 하였다가 대공포를 맞고 실종되었다고 하며 미군이 수색을 위하여 출동을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자 장군은 더큰 희생을 막고자 수색중지 명령을 내리고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전사자로 처리 되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에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선에서 실종된 군인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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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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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적인 중국 국가 주석 모택동(毛澤東)은 적을 가까이 둘 수 없다고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북한을 도와 참전을 했다.
차남이 정신이상자로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장남 모안영(毛岸英)이 참전을 하게 되자 측근들이 참전을 만류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아마 인민들은 아무도 거기에 가려고 하지 않을 거야!”
결국 전쟁 초기 참전을 했던 모안영은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사망을 하였다.
모택동은 늘 이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측근들에게 종종 얘기를 하였다 한다.
우리를 도우러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낯선 땅으로 달려온 미군, 유엔군은 물론 적군인 중공군 중에도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왜 직접 당사국인 우리나라에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인가? 많이 있는데 내가 못 들은 것인가?
혹시라도 높은 지위에 있는 정치가든 군인이든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자신의 아들들은 가장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하게 빼 돌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대체 우리나라에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있기나 한 것인가?
만약에 우리나라 명사 고관들 중 전쟁 기간동안 군대에 갈만한 아들이 있는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죽일 놈이고....!
최전선에서 전투 중 죽어가는 병사들이 배경이 없어 죽는다고‘빽’하며 죽었다는 우스갯소리가 하나도 우습지 않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관리들은 백성들로 부터 고혈을 짜내는데 진력(盡力)한 사람이 많았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다산 정약용처럼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관리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같이 근무하던 미군들의 답답하리만치 요령없고 바보같은 우직함, 직급이 높은 사람일 수록 보여지는 고지식해 보이는 도덕성은 저절로 존경심이 생겨난다.
실제로 전쟁이 난다면 군인은 군인이니까 내 한목숨 던져서라도 내가 지킬 곳은 지킬 것이라는 신뢰가 가는데 우리 군에서는 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서부터 총알이 날아오는 전선에 서면 감히 맞서지 못하고 숨어 버릴 것 같은 마음 때문인가?
우리에겐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태생적으로 생기질 않는 민족인 것인지?
19. 끝 맺으며
현재도 한국과 미국은 동맹관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평등한 동맹관계인 것도 또한 분명하다.
주권국가로서 전시작전권 마저 미군에 있다는 것을 비롯하여 SOFA 협정 등 군사적인 면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종속되어있다시피하여 미국은 우리나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면 때문에 미국을 싫어한다는 사람도 많다.
1950년 7월 하순 6.25전쟁 발발 초기에 패주하던 미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약 300명의 노근리 피난민 학살 사건은 가슴 아픈 일이다. 내 생각에는 전쟁초기에 계속되는 후퇴로 너무 당황하여 상황을 잘못 판단한 미군 지휘부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또 몇해 전에는 의정부에서 여학생 2명이 미군의 탱크에 깔려 죽은 사건이 일어나서 나라가 요동친 일도 있었다.
혹자는 미군은 한국에 원조를 해 주고 주둔을 함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하도록 하면서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반미주의자들의 말대로 미국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군들(유엔군들도 대부분 그렇지만)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지구상 어디에 붙어있는지 나라 이름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참전을 했으며 무려 3~5만명의 미군이 전사나 실종을 했다는 것에 대하여는 어쨌든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미주의도 그 때 미군의 희생과 전후의 원조로 살아남아 현재가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에서 더 이상 죽지않고 살아남은 것이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했던 것인가?
인간의 목숨은 그때나 지금이나 소중한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임을 당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같은 것은 나중에라도 진실을 밝혀 실질적 발포 책임자를 찾아내고 그에 대하여 처벌은 언제라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그사람이 이미 고인이 되었더라도 유죄라는 것을 꼭 밝힐 필요가 있다.)
월남전에서의 우리 한국군의 잘못도 있다면 밝혀서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평등 협정인 SOFA 협정의 개정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사건에서는 과잉대응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 국민의 목숨만 소중하고 미국 국민 몇만명의 6.25 참전 전사자의 목숨과 수십만명의 부상자들은 아무 가치도 없고 그 가족들은 슬픔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살아있는 전사자들의 가족도 많고 참전 용사도 많다.
그들을 섭섭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미군이 철수를 해 버리면 우리는 북한 보다 더 뒤에 있는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압력과 간섭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특히 고구려, 발해)를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하여 왜곡하는 이유는 나중에 너희는 원래 중국의 일부인 나라의 후손이니 우리가 관리한다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종전 후 중국이 미국과 달리 북한에 남지 않고 바로 빠져 나간 것은 미국보고 너희도 빨리 나가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본다. 미군만 빠져 나가면 중국은 구태여 북한에 진주하지 않고서도 북한과 우리를 정치, 경제를 모두 종속시켜 미국보다 몇 백배 더한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 올 것이 뻔하다.
나는 중국에 의한 세계 질서가 미국에 의한 세계 질서보다 매우 더 위험하고 우리나라에 피해가 더 클것으로 본다.
반면 또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의 일본에 대한 태도이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분명히 한국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미국은 한국을 우선시 하지 않는다. 2차대전에 맞서 싸워 서로에게 큰 피해를 입혔건만 미국은 늘 우리보다 일본을 우선하는 정책을 펴왔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현재 미국 대통령의 천방지축 적인 발언 행태를 보면 그간의 미국 대통령들이 속내를 숨기며 우리에게 우호적인 체 해 왔던 것을 트럼프 대통령이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우리가 서로 믿고 소통할 나라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우리는 과거 투표를 할 때 뽑아주고 싶은 지도자가 없어 투표장에 가기가 기분좋지 않은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렇다고 투표를 안하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훌륭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하면 덜 나쁜 지도자라도 뽑아야 된다.
국제관계에서의 선택도 마찬가지, 덜 나쁜 국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내가 겪은 32개월의 KATUSA 생활이 카투사의 일반적인 생활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직업이 다양한 것처럼 한국군이든 카투사든 군대에서도 보직이 무척 다양하다. 훈련소에서는 다같은 훈련을 받지만 자대 배치가 되면 보직에 따라 모두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군대에서 남이 하는 일을 모두 알수 없다.
군대다운 진정한 군대는 보병이다. ‘인디언 헤드’패치에 빛나는 2보병사단에 카투사의 절반 정도가 근무하는 것으로 안다. 나는 그들의 생활을 구경조차 한 적 없고 짐작조차 못한다. 나는 통신부대에 근무하면서 또한 통신에 관한 일은 전혀 해 보지 않아서 정작 군대생활 같은 군대생활은 해보지 못하고 자대헌병 2개월을 빼고는 모두 사무 보직의 일만했다.
자대 배치를 받을 때에는 2보병사단에 떨어질까봐 우려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2보병 사단에 가서 보병 보직을 받아 근무를 했었더라면 몸은 조금 더 고달팠을지 모르나 영어를 더 많이 배웠을 것 같고 좀더 역동적인 추억이 많은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몸 편한 군대생활을 했지만 처음 몇개월 동안은 안경을 다섯번이나 깨 먹었다. 얻어맞다가, 운동을 하다가, 일을 하다가, 싸움을 말리다가 등등 뭐 꼭 유리를 깨먹었다기보다 안경테를 부러뜨린 경우가 많다.
얼마전 통일전망대에 갔다가 한국 육군의 구형막사와 신형막사의 모형 전시해 놓은 것을 보았다. 구형막사는 내가 훈련소에서 사용하던 막사와 거의 비슷해서 반가웠다. 신형막사는 옛날 내가 생활하던 미군부대 Barracks보다도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오십년이 흘렀으니 강산이 변해도 네댓번 변했을 것이니 미군부대 또한 엄청난 변화가 있으리라.
이글은 어디까지나 나의 역사로서 기록한 것이지 자랑을 하거나 ‘미군부대는 이런 곳이야!’하고 알려주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자잘한 얘기를 최대한 삽입하려고 노력했다.
재미있는 부분만 뽑아 정리하여 올릴까 하다가 그것도 번거롭고 시간이 많이 걸려 전량을 올려 보았다. 읽기에 지루하셨더라도 양해를 바란다!
<끝>
첫댓글 쵸코렛을 내가 사줘야겠네~
나도 오빠가 카츄사로 있던 시절에 어깨가 으쓱했던적이 종종 있었지
가끔 필통에 'made in usa'가 찍힌 연필을 담아서 갖고 다니면 애들이 미제 쓴다고 부러워 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