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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봉덕사 (종) 원문보기 글쓴이: 善正花
대구 보광원 조실 화산스님“짧은 만남-긴 그리움을 詩碑에 담았다네” |
대구 어느 노(老) 스님이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시비를 제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만해 사랑이 어느 정도 이길래 아흔이 다 된 노스님이 시비를 제막할까 호기심이 일었다. 종무소측은 시비 제막일 당일인 11월23일은 도저히 따로 인터뷰 시간을 낼 수없다며 난감해했다. 다음날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올해 세납 88세인 노스님은 젊은이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터뷰는 시비 제막식이 있은 지 4일 뒤에나 간신히 잡혔다.
<사진설명 : 화산스님은 통도사 강원 시절 만난 만해 스님과의 인연을 따라 한평생 사회와 종단 재가불자들을 위해 헌신해왔다. 치열한 화두 정진으로 한암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스님은 50여년간 도심 포교에 매진하기도 했다.> 대구 수성구 지산동 주택가. 대부분 그린벨트에다 농지였던 이곳은 최근 주택촌으로 형성된 신도시다. 화산(華山)스님은 40여년 전부터 이곳에 보광원을 창건, 불자들을 대상으로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주변 주택들과 큰 차이가 없다. 사람 교화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에 비해 건물불사에 크게 집착하지 않은 탓이다. 절 입구를 들어서자 한 켠에 서있는 만해 시비가 확 들어온다. 대구에서 처음 세운 시비 제막식에는 지역 관계인사, 동화사 주지스님, 광복회 임원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이날 제막식에서 스님은 젊은 시절 만해와의 인연담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만해를 추모하며 직접 지은 시 ‘님의 철학’을 직접 낭송하기도 했다. ‘님의 철학’ -자작시 “님의 님이여 님은 님을 위하여 살다가 임을 위하여 갔습니다/ 님을 그토록 못 잊었나요 밤이면 밤마다 낮이면 낮마다 못 잊어 못잊어 울었나요/일초각도 못잊어 님 님 님이었습니다/ 이 시집은 여러분의 자손까지 읽히고 싶지는 않다고 하신 말씀 피 안나게 남의 가슴을 찌르는 부탁의 말씀/ 그러나 님은 애처롭게 눈앞에 둔 님을 두고 갔습니다/ 옛말에 장군은 평화를 이룩했지만 장군은 평화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님이 아니신가요” 한평생 만해를 그리워하며 마침내 대구 지역에 처음으로 시비를 제막한 화산스님. 만해스님과 어떤 인연을 맺었길래 평생을 그리워했을까. 스님은 뜻밖에 통도사에서 만해스님을 만난 ‘단 며칠’간의 인연이 평생을 스님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했다. 만해 스님이 옥고를 치르고 난 뒤 통도사를 방문했다. 화산 스님은 당시 통도사 강원을 다니는 학인이었다. 만해스님은 통도사에서 강연을 했다. ‘기피인물’ 만해스님을 모시는 사찰이 거의 없을 때였다. 스님들 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들까지 만해스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만해스님은 모인 청중을 향해 ‘철창의 철학’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화산스님은 바로 엊그제 같이 기억이 생생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만해스님은 나라가 멸망한 뒤 만주 독립군 군관을 양성하는 학교를 찾았다. 만주에는 독립군 뿐만 아니라 첩자들도 많았다. 군관학교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만해스님은 일본이 보낸 밀정으로 오해를 사 독립군이 쏜 총을 맞았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 통도사를 찾은 만해스님은 그날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아 나는 참으로 위대한 선물을 받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만해스님은 또 말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는데 한 중학생이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라며 우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화산스님은 “강연을 듣고 모두 떠날 줄 모르고 울었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모두 꿈으로 돌아갔다” 고 회고했다. 화산스님은 또 “일제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낙인 찍혀 책을 볼 수 없었던 ‘님의 침묵’을 통도사 뒤 탁자 위에서 베끼던 일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며칠을 통도사에서 머물던 만해스님이 다시 길을 떠났다. 화산스님은 강원 도반들과 함께 스님을 배웅했다. 가는 길에 큰 바위위에 새긴 글을 보며 화산스님이 말했다. “스님도 돌에다 이름을 새기시죠” 그러자 만해스님은 “저 돌 위에 새기면 오가는 사람들 입에나 오르내리지. 새길려면 뭣하러 바위에 새겨 삼천만 국민들 가슴 속에 새겨야지.” “학인시절 만해스님과의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져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부지런히 정진하게나” 화산스님은 그 짧은 인연이 평생의 가르침이 될지 몰랐다. 화산스님은 그 후 참선공부를 하기위해 한암스님 회상에 찾아들었으며 일본 유학길에 올라 경전을 더 연마했다. 그러면서도 민족해방과 중생교화를 위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만해스님의 뜻을 잊지 않았다. 해방 후 민족의 앞날을 결정하는 정국의 한 가운데서 스님이 불교혁신운동의 기치를 올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한 진보단체의 고문을 맡고 있는 것 역시 스님의 역사 사회인식을 보여준다. 스님은 하지만 한암 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은 선사다. 스님은 그래서 참선공부를 최고로 친다. 불교는 마음을 닦는 공부이기 때문에 참선을 통해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상대방을 편안케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지혜를 얻는 것이 최고의 인생살이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마음 바탕위에서 스님은 늘 찾아오는 사람을 반기며 신도들에게도 즐거운 마음으로 법문한다. “스님들은 포교를 열심히 해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스님은 종단에 대해서도 “올바로 개혁을 해야 본원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민주주의 국가는 삼권분립이 원칙이듯 우리 종단도 입법 행정 사법이 동등하게 맞서는 제도가 뒷받침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집행부의 잘못을 감독하고 엄히 다스리는 호계원의 본래 모습을 되찾지 못하면 종단의 개혁은 요원”하다는 스님의 지적이다. 스님은 시인이기도 하다. 시비 제막식 날 수상록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펴냈다. 스님은 한 평생을 규정지은 만해와의 짧은 인연도, 깨닫기 위해 맨발로 금강산을 찾았던 일도, 젊을 적 사회를 변혁시키기위해 나섰던 열정도 “모두가 인과의 꿈”이라고 한다. 돌아나오는 길에 만해스님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대구=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a
●화산스님은… 화산스님은 1919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7살에 통도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자장암 몽초스님. 대강백이면서 선객으로 불리던 분이다. 화산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3년간 나무하고 채마밭을 매면서 행자로 보냈다. 3년간 경전 공부를 마친 스님은 참선을 공부하기 위해 당시 금강산 마하연 선방을 맨발로 찾아간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사진설명 : 대구에서는 최초로 만해 시비를 제막한 화산스님이 ‘님의 침묵’ 시비와 마주하고 있다.> 스님은 “금강산까지 기차가 있었지만 아직 공부가 안됐는데 시주금을 축내면 죄받는다는 생각에 첫날은 소요산 자재암에서 자고 다음날 맨발로 금강산까지 찾아갔다”고 회고했다. 당시 마하연 선원에는 탄허,청담, 성철 자운스님 등 50여명의 구참 납자가 정진중이었다. 그 뒤 한암스님을 찾아 인가를 받았다. 한암스님은 “풀을 헤치고 걸망을 지고 허덕거리는 것은 견성하기 위함인데 네 성품자리가 어디고”라며 물었다. 화산스님이 “천년 묵은 무덤속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생각해서 눈물을 흘리는데 다만 저 돌사람이 알고 구름은 만리풍에 빗겼습니다”고 답했다. 이에 한암스님은 흡족한 듯 “네 갈길을 가라”고 했다. 스님은 이후 일본 임제선문학교와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해방후 불교혁신운동을 이끌던 33인에 포함되는 등 불교진보운동에 몸담았던 스님은 여러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통도사 강주로 후학을 양성하고 1962년부터 대구 보광원을 창건, 오늘날까지 불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불교신문 2284호/ 12월6일자] 2006-12-02 오전 9:34:42 / 송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