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8월 15일(1587년).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는 가운데 대마도 수도 이즈하라(巖原)의 세이잔지(西山寺)에도 수 백 개의 등불이 켜졌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세이잔지의 밤 |
여느 때보다 더 힘찬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멀리까지 퍼졌다. 도주(島主)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다시 제(祭)를 올리는 아주 경사스런 날이었다. 도주는 그동안 천주교를 믿었으나, 천주교를 금하는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방침에 따라 다시 불교로 돌아왔다.
도주가 서양 코쟁이들의 귀신을 섬겨서 마음이 언짢던 도내의 많은 불자들이 기뻐서 빠짐 없이 세이잔지(西山寺)에 모였다....이윽고 대마도의 중신들을 거느리고 '겐소(玄蘇)' 스님이 정문에 나타났다.>
도주가 서양 코쟁이들의 귀신을 섬겨서 마음이 언짢던 도내의 많은 불자들이 기뻐서 빠짐 없이 세이잔지(西山寺)에 모였다....이윽고 대마도의 중신들을 거느리고 '겐소(玄蘇)' 스님이 정문에 나타났다.>
이번영(李繁榮·67)의 장편소설 <왜란: 소설 징비록, 나남>에 실감나게 묘사돼 있는 세이잔지(西山寺) 이야기다. 짤막한 글 속에 420여 년 전의 역사적 인물과 정치적 상황들이 또렷하게 들어 있다.
쓰시마(對馬島)의 세이잔지(西山寺), 도주(島主) 소 요시시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스도교 탄압, 겐소(玄蘇) 스님. 이테이안(以酊庵)....
'鶴翼山 西山禪寺'
이러한 세이잔지(西山寺)는 10여 년 전부터 유스호스텔(youth hostel)로 등록돼 숙박업을 하고 있는 집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호텔이라기보다는 '슈쿠보(宿坊)'다. 일본의 '슈쿠보'는 승려나 참배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숙박시설이다.
세이잔지의 백일홍과 정원 그리고 불상 |
골목길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자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백일홍이 몸체를 비틀고 서 있었고, 그 아래 작은 석조 불상이 빨간 턱받이를 하고 있었다. 정원도 일품.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아름다운 선으로 정성스레 연출된 고산수(枯山水: 물이 없는 일본식 정원)식 정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국에서 예약을 하신 손님이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필자는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1층 다다미방을 가로질러서 가파른(?) 계단을 이리저리 돌아 3층까지 올라갔다. 짐이 있어서 힘이 들었으나 오랜 만에 밟아보는 나무 계단들의 촉감이 좋았다. 전형적인 전통 여관 스타일이라서 다소 불편하기는 했으나 운치가 있었다.
"목욕탕은 한 층 더 올라가시면 됩니다. 내일 아침 식사는 1층 입구 쪽에 있는 식당에서 8시 이전까지 하시면 됩니다."
정숙해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이것저것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방을 나갔다. 유리창을 열자 이즈하라(巖原) 도심과 항구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세이잔지의 특징은 새벽 5시 반이면 누구나 참선(參禪)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탁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종이 울리면서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식당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고풍스럽다. 아침 식사는 시골 냄새가 풍기는 단아한 메뉴. 필자는 밥맛이 좋아서 밥솥 뚜껑을 여러 번 열었다.
학봉 김성일의 시비(詩碑)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 |
이 세이잔지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다. 먼저 잔디밭 정원에 서 있는 조선통신부사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선생의 시비(詩碑)다.
一堂簪蓋兩邦臣 區域雖殊義則均
尊俎雍容歡意足 傍人莫問主兼賓
(한 집에 의관 갖춘 두 나라 신하/ 지역은 달라도 의리와 식은 균일 하도다./
정성껏 접대함에 긴장 풀리고 환대에 족하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를 묻지 마시오.)
尊俎雍容歡意足 傍人莫問主兼賓
(한 집에 의관 갖춘 두 나라 신하/ 지역은 달라도 의리와 식은 균일 하도다./
정성껏 접대함에 긴장 풀리고 환대에 족하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를 묻지 마시오.)
국경을 초월한 학자들의 우정이 서려있는 시다. 이 시비(詩碑)의 건립동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은 유향(儒鄕)인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덕행과 훈업(勳業)이 청사에 빛나는 도학자이다. 대과에 급제하여 청관(淸官)을 두루 거친 선생은 1590년에 조선국통신사로 한일양국의 선린우호를 위한 국가외교와 문화사절로 일본국을 향한 행사(行使) 길에 올랐다. 대마도에 들려 선위사 현소(玄蘇) 승(僧)의 영접을 받고 객관인 서산사(西山寺)에 체류하는 동안 두 분은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 서산사와 사연(事緣)이 깊은 시를 골라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기리 전하고자 한다.>
한글로 새겨진 김성일의 업적과 시비를 세운 이유에 대한 국한문 혼용체의 글이다. 다음은 일본어로 된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맥락은 한글 부분과 같으나 뉘앙스에 다소 차이가 있다.
<유학자인 김성일(號 학봉) 선생은 대한민국 안동에서 태어나서 1590년(天正 18) 조선국 통신사로서 우리나라(일본)에 내방할 당시 세이잔지(西山寺)를 거점으로 활약한 외교 승 '게이테쓰 겐소 선사(景轍 玄蘇禪師)와 친교가 두텁고, 그 교류의 서간(書簡) 시문은 오늘까지 많이 남아 있다. 절(寺)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세이잔지의 산호(山號)인 학익산은 학봉 선생의 시문에 의해 명명됐다고 한다. 그러한 양인의 교류와 한일양국 국민의 영원한 선린우호에 기여하고, 학봉 선생의 시문을 기억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한다.>
학봉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하지만, 그는1590년 황윤길(黃允吉)의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됐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대한 정황을 다르게 보고해서 국가의 위기를 초래했다. 요즈음으로 치면 출장 보고를 잘못한 셈이다. 역사는 동인과 서인이 벌인 당파 싸움의 산물로도 기록하고 있다. 인기 소설을 빌어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본다.
<왜란: 소설 징비록> 속으로...
<"일본이 과연 쳐들어올 것 같소?"
선조가 정사(正使) 황윤길에게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분명 쳐들어 올 것입니다."
황윤길은 일본 내에 파다하게 퍼진 조선과 명나라에 대한 침공 소문, 노련한 강병으로 단련된 일본군의 실태, 일본 고관들의 언동, 일본 조야에 알려진 풍신수길의 위력과 그의 인생역정들을 세세히 보고 했다.
"전하. 기필코 만전의 대비책을 강구토록 하옵소서."
"부사(副使)의 소견은 어떻소?"
선조가 부사 김성일을 쳐다봤다.
"신이 보기에는 풍신수길이란 자는 미친놈이 틀림없사옵니다."
"미친놈이라? 허어, 어째서 그렇소?"
"그의 거동은 전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인 사신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아이가 귀엽다고 안고 왔다 갔다 하며 방정맞게 수선을 떠는 놈이었습니다...지략도 포부도 없는 괴수에 불과하옵니다. 조선이고 명나라고, 쳐들어간다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일본국서의 요지(要旨)도 풍신수길이 호언장담으로 우리를 겁주자는 데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개의치 마시옵소서."
(......)
쓰시마 세이잔지의 높은 담-많은 이끼가 자라있다.-이 곳에서도 조선과의 전쟁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까? |
경상좌수사 박홍의 급보 장계가 조정에 들이 닥쳤다.
"부산에 왜적의 배 수 백 척이 당도하여..."
"도대체 어, 어쩌다 일이 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오?"
임금은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몸이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떨고 있기는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성일 이 노-옴! 모두들 쳐들어온다고 하는데 혼자 잘난 체 안 들어온다고 떠들었지? 이놈을 당장 잡아오너라. 내 친히 국문하리라.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찮을 노-옴.">
물론 소설 속 이야기다. 역사적 현실과 다를 수 있으나 정황으로 봐서 그럴 듯하다. 문제는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는 과거의 일이기도 하나 현대를 살고 있는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테이안(以酊庵)과 겐소 스님
겐소 스님이 세운 이테이안 건물의 전경 |
세이잔지에 붙어 있는 오래된 목조 건물이 하나 있다. '이테이안(以酊庵)'이라는 이름의 건물이다. 건물에서 풍기는 역사의 내음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 앞에 서있는 나무들도 노령(老齡)이다.
일본은 조선·중국의 외교를 위해서는 기초 교양인 한문이 절실했고, 한문이나 한시 능력이 뛰어난 스님이 필요했다. 쓰시마주(對馬島主) '소 요시시게'는 후쿠오카(聖福寺)·교토(慶福寺) 등의 주지를 지낸 '게이테쓰 겐소(景轍 玄蘇, 1537-1611)'를 초청해서 조선과의 외교를 맡게 했다.
특히, 임진왜란의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를 받아 명나라와의 교섭을 하기도 했다.
겐소는 그 시절 쓰시마에 사찰을 지었는데, 자신이 태어난 정유(丁酉, 1537년)년의 의미를 담아 '이테이안(以酊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732년 대화재로 본당이 소실돼 건물의 일부가 현재의 세이잔지로 이전됐다. 겐소는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양국의 전쟁을 막아보려고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양국 사이에 끼어서 고통 받는 쓰시마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고심한 사람이다.
"히데요시(秀吉)가 쳐들어와도 선비의 도리만 내세우고 있을지 어디 두고 봅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전쟁을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겐소가 조선의 관리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그러나, 그는 후일 전쟁터(임진왜란)에서 일본의 척후병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았다.
갖가지 사연들을 안고 잠들어 있는 세이잔지의 묘지들- |
필자는 남겨 논 궁금증을 하나를 들고 세이잔지 지배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주 4·3 사건 때 희생당한 유체(遺體)가 이곳 쓰시마에 많이 흘러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세이잔지에서 거두어 이곳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아! 그런 것 없습니다. 없습니다....선생이 부탁하신 팩스가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문의가 있어서 귀찮았을까. 필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지배인은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필자는 물러서지 않고 세이잔지 옆 묘지로 올라갔다. 아무리 낮이라고 해도 묘지는 묘지였다. 으스스한 생각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싫다는 데 고집을 피우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
필자가 멈칫거리는 순간 바다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노란 은행잎들이 무리지어 나비처럼 날았다. 역사의 이끼와 함께 숨쉬고 있는 세이잔지의 가을은 이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