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향기(香氣)♡
제목 : 악마는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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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민혁이 점점 별장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별장은 여전히 조용했다.
민혁은 조심스레 그리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별장을 주시하며 걷던 민혁의 눈에 무언가 들어온다.
별장의 대문으로 들어서자 1층 발코니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에 서 있는 한 까만 형체가 보였다.
민혁은 꽤 어두웠지만 그 물체를 제대로 보려 애쓰며 그 형체가 있는 곳으로 걷고 있었다.
긴 머리를 허리까지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자가 분명했다.
민혁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이와 비슷하게 심박수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검은 형체가 민혁을 본다.
뚫어져라 보는 듯 하더니 민혁을 향해 달려든다.
작은 몸으로 민혁의 품에 와락 안겨든다.
민혁은 별로 놀라는 기색없이 자신에게 안겨 자신의 어깨츰에 얼굴을 파묻은 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 늦어서 미안. "
민혁이 여자의 허리를 감싸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민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포근하고 다정한, 그런 목소리였다.
한참 그 자세를 유지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민혁을 바라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맷힌 세경이 민혁을 보고 있었다.
" 들어가자. 추워 "
그런 세경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민혁이 말했다.
세경은 민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함께 별장안으로 들어간다.
" 날도 쌀쌀한데 어딜 갔다 온거야? "
세경이 집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본 민규가 걱정스레 말한다.
그런 민규를 보며 세경은 조금 뻘줌한 듯 집 안으로 들어선다.
" 피곤할텐데 어ㄹ……. "
아무 말없는 세경에게 계속해서 말을 하던 민규가 말을 흐린다.
세경의 뒤로 들어오는 민혁의 모습에 민규는 놀란듯 했다.
" 뭐야. "
민규가 잔뜩 굳어버린 표정으로 세경과 민혁을 번갈아 보며 말한다.
그리곤 뒤이어 기가 찬 듯 허탈한 웃음을 내 뱉는다.
" … "
세경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민혁과 민규의 눈치를 번갈아 살핀다.
민혁은 아무말도 않고 민규를 보고 있었고 민규는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고 있었다.
" 여긴 어떻게 왔습니까. "
민규가 딱딱한 어투로 말을 건넨다.
민혁은 민규의 말에는 대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집 안을 살피고 있었다.
" 정민규라고 했나? "
민혁이 드디어 말을 꺼낸다.
민규의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 지, 민혁은 민규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민규는 그런 민혁의 말에 놀란 눈치였다.
민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다음에 나올 민혁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번 일은 고맙게 생각하지. 하지만 다음부턴 애 함부로 데리고 다니지마. "
민혁이 조금 화가 난 듯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 당신은 날 어디서 봤다고 지금 반말을 쓰는거지? "
민규는 그런 민혁의 말에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 난 원래 아무한테나 존대따위 안 써. 특히 너처럼 무책임하게 남의 여자 데리고 가는 놈한테는. "
민혁은 이렇게 말하며 민규를 지나쳐 터벅터벅 거실로 들어와 쇼파에 앉는다.
그런 민혁을 민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세경은 그런 민규의 눈치를 살피는 가 싶더니 민혁의 옆으로 간다.
" 앉아. "
민혁이 자신의 옆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경은 잠시 망설이는 가 싶더니 민혁의 옆에 조금의 거리를 두고 앉는다.
" 이봐. 당신! "
" 공민혁. "
민규가 화를 내려들며 당신이라며 민혁을 삿대질하자 민혁이 말했다.
" 그래. 공민혁. 여긴 내 별장인 걸로 알고 있는데. "
민규는 화가 난다는 듯 말했다.
" 오늘 밤만 신세 좀 지도록 하지. 내일 오후에 세경이랑 같이 나갈테니 걱정마. "
" 뭐? "
민혁의 아무렇지도 않는 대꾸에 민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 설마 하룻밤도 안된다는 건가? 그럼 돈이라도 주지. "
민혁은 그런 민규의 반응에 민규를 힐끗 보며 말한다.
" 이 자식이! "
민규는 그런 민혁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라 쇼파에 앉아 있던 민혁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 손 치워. "
민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한다.
" 이 자식! "
민규가 그런 민혁의 말에 멱살을 잡은 손을 더 치켜 올린다.
"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험한 꼴 보이고 싶진 않을 텐데. "
민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민규의 귓가에 중얼거린다.
이런 소리를 듣지 못한 세경은 민규의 행동에 놀라 일어난다.
" 민규야! "
세경이 민규의 이름을 부른다.
" 씨발. "
민규가 민혁의 멱살을 던지듯 내려 놓는다.
그리곤 머리를 헝클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물을 마시고 있는 듯 했다.
곧 꽝 하는 유리컵을 세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 나야 오빠. "
채은이 전의 그 호텔 로비에서 공중전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채은의 목소리는 의미심장하면서 부드러웠다.
" 한국은 어때?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
( 그래. 지금 각종 신문에서 그 기사를 특종으로 다루고 있어. )
수화기 너머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그래? 그 외에 다른건? "
( 아무리도 이미지하락이 심할 것 같다. )
조금은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린다.
" 그래. 알았어. 고마워 오빠. "
( 네 서방은 잘 해주니? )
남자의 무뚝뚝하면서도 채은을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채은의 귓가를 파고든다.
" 응 그럼. 당연히 잘해줘야지. 어디 다친덴 없지? "
채은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더니 묻는다.
( 나야 유일하게 잘하는 게 쌈질이랑 몸 건강한거 밖에 없는거 알잖아. )
남자는 걱정말라는 듯 말한다.
" 그거야 알지만…. 오빠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 알았어. 한국가면 연락할께. "
( 그래. 그래라. )
채은의 말에 이은 남자의 대답이 들리고 채은은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리곤 천천히 로비를 가로질러 걷는다.
[92]
" 말도 안돼요! 어떻게 나랑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
공회장의 양복 상의를 받아들며 그의 부인이 말한다.
공회장이 방금 말한 민혁이 독립할거란 말에 그녀는 말도 안된다는 듯 소리쳤다.
"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조치니까 걱정마. 그 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 "
공회장은 그런 그녀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걱정말라는 듯 말한다.
" 어떻게 걱정을 안해요! 그 애는 아직 미성년자에요. 학생이라구요! "
" 곧있음 그 아이도 성인이야. 자기 앞가림정도는 할 수 있을 나이라구. "
공회장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 난 반대에요. 당신 생각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
그녀는 공회장의 양복 상의를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 아무리 당신이 반대한다 한 들 소용없어. 이미 정해진 일이야. 벌써 오피스텔도 다 구해놨다구. "
" 여보! "
공회장의 말에 그녀는 소리를 친다.
" 이번 한 번만 당신도 민혁일 믿어봐. 그 애는 충분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아이야. "
공회장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포기했다는 듯,
체념한 말투로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말하곤 방을 나가버린다.
" 너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는 거냐? "
다음날 오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경이 깨기를 기다리며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는 민혁의 건너편 쇼파에 앉으며 민규가 묻는다.
" 뭐. "
민혁은 티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한다.
" 왜 여기 있는 거냐고. "
민규는 그런 민혁의 태도에 화가 나려 했지만 애써 참으며 물었다.
" 한세경이 여기 있으니까. "
민혁은 그런 민규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
그런 민혁의 말에 민규는 삐딱하게 비꼬듯이 말했다.
" 전에도 말했을텐데. 사귀는 사이라고. "
민혁은 아랑곳없이 대답한다.
" 여긴 내 별장이라고 말했을텐데. "
" 세경이만 일어나면 데리고 갈꺼니까 걱정마. "
민혁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무슨 자격으로 세경일 데리고 간다는 거야? "
민규가 말했다.
민혁은 그런 민규를 무시하는 듯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세경인 기사가 잠잠해질때까지 이곳에서 지낼꺼니까 너 혼자 돌아가도록 해. "
민규는 독기어린 말투로 말했다.
" 글쎄. "
민혁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민혁에 태도에 민규는 화가 났지만 애써 참고 있었다.
그때 민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민혁은 표정의 변화없이 휴대폰을 꺼내든다.
" 여보세요. "
( 어디냐? )
전화기너머로 공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버지가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민혁이 그런 공회장의 말에 대답한다.
( 네가 지낼 오피스텔을 구해놨다. 가구랑 가전제품도 전부 들여놓았으니 집에 와서 집 챙겨 가도록 해라. )
그러자 공회장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한 말투로 말을 꺼낸다.
" 네. "
민혁은 그런 공회장의 말에 짧게 대답한다.
( 이번 한 번 널 믿어보기로 한거니 실망시키지 않도록 해라. 회사는 다음주부터 나오는 걸로 하자꾸나. )
공회장은 단호하면서 인자한 말투로 말했다.
" 네. "
( 네 학교 생활에는 지장가지 않도록 최대로 배려해줄테니 핑계대며 빠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포기해라. )
공회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민혁에게 쇄기를 박으려는 듯 말한다.
" 그럴 생각 없었습니다. "
( 하긴, 네 녀석이 그런 잔꾀를 부릴리가 없지. 그럼 끊으마. )
공회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민혁은 휴대폰을 내려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회사에 나가 공회장밑에서 일을 배울 생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약속 한 일을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일어났어? "
한참 민혁이 한숨을 쉬며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민규의 목소리가 들린다.
민혁은 민규의 목소리에 민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본다.
잠에서 깼는 지 조금은 부시시한 몰골로 일어난 세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화장실로 들어간다.
물소리가 들리고 한참 뒤 세경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 밥 먹자. "
민규가 쇼파에서 일어나며 부엌으로 향한다.
세경은 그런 민규를 힐끗 보더니 쇼파에 앉은 민혁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민혁은 그런 세경을 힐끗 한 번 쳐다볼 뿐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 민혁의 행동에 세경은 부엌으로 가 식탁 앞에 앉는다.
" 한 번뿐인 신혼여행인데…. 미안해. "
한재가 짐을 챙기고 있는 채은의 어깨로 손을 얹으며 말했다.
" 괜찮아요. 할 수 없죠 뭐. 한재씨 일이 바쁜데…. "
채은은 그런 한재를 올려다보며 씽긋 웃으며 말하곤 트렁크에 옷가지를 넣는다.
" 다음에 시간나면 더 좋은 데로 여행가자. "
그런 채은이 기특한 듯 한재는 웃으며 채은에게 말했다.
" 그래요. "
채은은 방긋 웃으며 대답한다.
" 비행기시간까지 아직 좀 남았는데. 마지막으로 근사한 레스토랑이라도 갈까? "
짐을 다 싸고 일어나는 채은을 보며 한재가 말한다.
그런 한재의 말에 채은은 생긋 웃으며 한재의 팔에 매달린다.
" 정말요? 얼른 가요- "
[93]
" 한세경 갈꺼야? "
별장 현관.
민규가 세경에게 묻는다.
민규의 눈은 세경에게 가지 말라며 붙잡고 있었다.
민혁은 세경의 한 쪽 손을 잡고 있었고, 민규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세경을 보고 있었다.
" 미안해 민규야. "
잠시 생각하던 세경의 입이 말했다.
세경은 민규를 미안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 … "
민규는 아무말 없이 세경을 보며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민규의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세경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세경을 계속해서 잡으려 했지만 결국 세경의 선택은 민혁이었다.
" 나중에 보자. "
세경은 민규에게 이렇게 말하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신발을 신고 나간다.
민혁은 세경을 자신의 오토바이 앞으로 데리고 오더니 자신의 헬맷을 세경의 머리에 씌어준다.
그리곤 곧 세경을 뒤에 태운 채 민혁의 오토바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한다.
민규는 그런 세경의 모습을 거실 발코니 너머로 보고있었다.
민규는 오토바이가 사라지자 거실 쇼파에 털썩 앉아버린다.
" 어릴적부터 너만 봤는데. 어릴적부터 쭉 너였는데. 너한테 난 친구 이상은 안되는거냐. "
민규는 차마 세경앞에서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힘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세경은 자신을 거절할게 분명했기에.
그리고 자신이 세경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면 세경은 분명 자신을 불편해 할 걸 알았기 때문에.
민규는 이렇게라도 세경의 옆에 있고 싶었다.
설사 평생 세경의 가장 좋은 친구밖에 될 수 없다 해도.
한참을 달리던 민혁의 오토바이가 멈춘다.
민혁의 오토바이가 멈춘 곳은 오피스텔이 밀집해 모여있는 곳의 한 오피스텔건물이었다.
빌라형으로 생긴 오피스텔 앞에 오토바이를 세운 민혁이 먼저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세경은 그런 민혁을 따라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그리곤 머리에 씌워져 있던 답답한 헬멧을 벗는다.
민혁은 그런 세경의 손을 이끌고 아까 민혁의 아버지가 말해둔 호수를 찾아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간다.
302. 숫자가 적힌 문에 선 민혁은 현관 번호키에 번호 네개를 꾹꾹 누르곤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런 민혁의 뒤를 따라 세경이 들어서자 문이 닫히고 곧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긴다.
" 집엔 아직도 기자들이 깔려있을거야. 여기서 며칠만 지내. "
민혁이 말했다.
세경은 그런 민혁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집을 둘러본다.
그닥 좁지도 않은 그 집은 적어도 세명은 족히 살 정도로 혼자 살기엔 넓은 집이었다.
" 너 여기 살아? "
한참 현관에 서서 집을 둘러보던 세경이 말했다.
" 어. "
세경의 대답에 민혁이 대답했다.
민혁은 마치 몇년동안 이 집에서 지내왔다는 듯이 익숙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거실하나, 부엌하나, 방하나, 그리고 화장실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 언제부터? 너네 집은 따로 있지 않았어? "
세경은 여전히 현관에 서서 물었다.
"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꺼야. 들어와 앉아. "
민혁이 이렇게 말하며 겉옷을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민혁의 말에 세경은 그제서야 집으로 들어선다.
그리곤 거실 쇼파에 앉는다.
조금 낯설어하는 기색이 세경의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민혁의 집은 이미 가구는 물론 소소한 장식품부터 휴지까지 마치 얼마전까지 누가 살았던 것처럼 모든게 갖춰져 있었다.
민혁을 위한 공회장의 배려인듯 싶었다.
그 때 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 여보세요. "
거실로 나오며 민혁의 전화를 받았다.
( 나 서현민. )
전화기너머로 한 남자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혁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발걸음을 돌려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을 닫고는 침대위에 걸터앉는다.
" 어. "
민혁의 목소리가 굳어있었다.
( 혹시 신문 봤냐? )
" 봤어. "
현민의 목소리에 민혁이 짧게 대답했다.
한달여만의 현민과의 재회아닌 재회였음에도 민혁은 그닥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 세경이 행방 알아? )
" 그게 왜 궁금하냐. "
현민의 질문에 민혁은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민혁은 지금 세경과 현민이 사겼었던 사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민이 세경을 좋아했단 사실도….
물론 지금은 알 수 없었지만.
( 알긴 아는거냐? )
현민이 물었다.
현민의 목소리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민혁이 세경의 행방을 알거라는 걸.
처음 전화를 걸때부터 현민은 그럴꺼라고 믿고 있었다.
" 너 학교에서 너 짜른거 알긴 아냐? "
민혁은 그런 현민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사실 민혁은 현민이 걱정됐었다.
민혁과 현민은 세경만 아니었으면 지금도 아직까지 예전처럼 좋은 친구사이였을것이다.
( 지금 같이있냐? )
현민은 그런 민혁의 말에 움찔하는 듯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 그렇다면. "
민혁이 말했다.
( 어디야. )
현민의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 니가 세경일 왜 찾냐. "
( 내가 한세경 좋아하니까. )
현민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 지금 어디야. )
현민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민혁에게 물었다.
" …끊는다. "
민혁은 그런 현민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말하곤 전화를 끊어버린다.
곧 얼마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지만 민혁은 받지 않은 채 침대위에 내동당이 치듯 던져버린다.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작게 튕겨진 휴대폰은 다시 매트리스위로 떨어진다.
민혁은 그때 거실로 나서고 있었다.
여전히 쇼파위에 앉은 세경이 민혁을 본다.
" 배 안고파? 뭐 시켜먹자. "
민혁이 거실 테이블위에 놓인 집 전화기를 들며 말한다.
민혁의 손이 전화기 번호판을 누르고 있었다.
* 이제 곧 비행기가 이륙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
기내 안.
스튜디어스의 얇은 목소리가 울린다.
안전벨트를 맨 채은과 한재가 창가쪽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채은은 굉장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세경의 일부터 자신의 결혼까지.
현민만 제외하고 모든게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제 얼마지나지 않아 현민도 자신에게 돌아오겠지만.
채은의 생각은 확고했다.
현민이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걸 전혀 의심치않았다.
자신의 계획을 훼방놓았단 세경이 기사가 터져 정신 없을테니.
이제 자신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만 남았다고 채은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채은의 기분좋은 미소를 보며 한재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 싱긋거리며 웃는다.
채은이 자신과의 결혼에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는다 착각을 하며.
[94]
" 어디가? "
겉옷을 걸치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 세경을 보며 민혁이 말했다.
민혁의 손에는 물을 마시다 왔는 지 물컵이 들려있었다.
"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께. "
세경이 대답했다.
며칠 안되는 시간이긴 했지만 집에만 박혀있었던 세경은 그간 못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세경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민혁이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곧 겉옷을 걸치고 신발을 신는다.
" 어디가? "
이번엔 세경이 물었다.
" 길도 모르면서 혼자 어딜간다는거야. 같이가. "
민혁은 세경에게 대답하며 벌써 현관문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 어떻게 된거에요! 언니가 어디있는지 모른다니! "
세경의 집 안.
밖에는 여전히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민아는 어떻게 들어왔는 지 세경의 거실에 서있었다.
기자들의 수가 조금 줄었다는 것 밖에 세경의 집은 달라진게 없었다.
민아가 집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곧 이어 민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 민규랑 같이 나간건 확실한데. "
" 그럼 민규오빠한테 연락을 해보면 되잖아요! "
안절부절. 눈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라 당황해 하는 수연에게 민아가 소리쳤다.
" 진작에 해봤지. 처음엔 민규네 별장에서 같이 있었는데. 이틀전쯤에 세경이랑 애인사이라는 남자랑 같이 나갔대. "
수연은 그런 민아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는다.
" 언니랑 사귀는 사람이요? "
민아가 눈이 동그래져 묻는다.
민아는 어느새 흥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민아의 머릿속에서 민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민아는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는다.
" 공민혁…. 이랬나? 그 남자가 데리고 갔다는 데. "
수연이 애써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며 말한다.
" 뭐?! "
민아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외치듯 말한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던 민아가 간신히 옆 벽을 잡고 균형을 잡는다.
" 기사가 생각보터 너무 크게 터진거 같아.
세경이도 집에 오면 머리만 아프니까…. 그래서 머리도 식힐겸 간걸꺼야. 너무 걱정하지마. "
수연은 그런 민아가 세경의 걱정때문에 그러는 거라 착각했는 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다.
" 수소문해서 찾아보는게 좋겠어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
민아는 그런 수연에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한다.
민혁과 함께 있다면 물론 별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민아는 민혁도 민혁이지만 세경의 걱정이 더 앞섰다.
근처 공원.
날씨가 굉장히 맑았다. 하늘엔 구름 몇개가 떠 다니고 있었고 햇살이 공원 안으로 쏟아지듯 비추고 있었다.
세경과 민혁은 조금 떨어져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들에게선 서로 팔짱을 낀다거나, 혹은 손을 잡는다거니 하는 보통 연인들과 같은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공원 분수대 근처를 걷는 그들.
세경은 분수대와 잔디밭등을 보며 꽤 즐거워하고 있었다.
세경의 얼굴에는 간혹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세경을 민혁은 혹 무슨일이라도 생길 것같은 불안감에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 어머. 저기 좀 봐봐. "
그때 세경과 민혁의 근처에서 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여대생쯤 되보이는 옷차림과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 두명의 여대생 중 짧은 컷트 파마머리를 한 여자가 세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 어디 어디? "
그 여자의 친구인 듯한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 저기 저 남자 옆에 있는 여자말이야. 피아니스트 한세경아냐? "
짧은 컷트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 그 천재 피아니스트? "
그녀들은 음대생인듯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들의 어깨에는 바이올린인듯한 가방과 금관악기쯤 들었을 악기가방이 매져 있었다.
" 그래-. 그 이번에 대기업회장살인사건! "
짧은 컷트머리의 여자는 신나서 떠들어댄다.
세경에게 들릴까 걱정하는 마음조차 없는지, 목소리를 줄일 생각조차 안하고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간혹 지어지던 세경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꽤 풀어진 표정을 짓고있던 민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세경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가 싶더니 그 자리에 멈춰버린다.
" 불쌍해-. 친엄마도 죽었다며? "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세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 불쌍하긴. 솔직히 말해서 그 새엄마라는 사람이 더 불쌍하지.
오죽했으면 바람피고 남편까지 죽였겠어? 그 회장이란 남자랑 낳은 애도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며? "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내용을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세경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 어머 정말? "
" 그래. 그 꼬맹이 죽인게 바로 한세경이라잖아-. 맨날 때리고 다락방에 가두고 그랬다나봐 "
짧은 컷트머리의 여자는 뭘 그리 잘 아는 지 말이 술술 나왔다.
" 어머 너무했다-. "
지금쯤, 온갖 추측들과 거짓말들이 섞인 기사가 돌고 있을 것이다.
저 여대생들의 대화에서 그 사실을 철저히 느낄수 있었다.
" 귀 막아. "
멈춰서서 차마 여대생들을 쳐다보지조차 못하고 고개를 숙인 세경의 귓가에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경이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혁을 본다.
" 귀 막으라고. 내가 말하는 것만 들어. 내가 말해주는 게 진짜니까 내가 말하는 거 말고 다른 말은 믿지마. "
민혁의 말투는 조금 화가 난 듯 했다.
민혁은 세경에게 화난 게 아니었다.
그 여대생들의 대화가 화가 났다.
그리고 세경의 바보같은 태도에 더 짜증이 났다.
" 가자. "
민혁이 세경에게 손을 내민다.
세경은 그런 민혁의 손과 민혁의 얼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 바보같이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가자. "
민혁이 말했다.
세경이 민혁의 손을 잡았고 민혁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민혁이 세경의 손을 꽉 붙잡은 채 공원 입구로 향했다.
세경은 여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민혁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세경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고 세경은 혹시라도 누가 봤을 까 재빨리 닦아낸다.
민혁은 그런 세경의 모습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린다.
[95]
그 일이 있은 뒤, 며칠이 지나도 세경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제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답답할 만도 하건만, 세경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세경이 자는 것과 먹는 것 이외에 하는 일 이라곤 늘 멍하게 앉아 있거나 창밖을 내다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 세경이 답답해 민혁은 책도 사다봐주곤 했지만 세경은 영 흥미가 없는 지 손도 대지 않았다.
민혁은 그런 세경이 걱정되서라도 세경의 옆에 붙어있으려 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민혁은 학교에 나가야 했고 며칠전부터는 회사에도 나가야 했다.
매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곤 하지만 세경이 걱정되 한시간간격으로 집으로 전화를 해대곤 했다.
" 갔다올께. "
민혁이 세경에게 말했다.
세경은 그런 민혁을 힐끗 한 번 보고는 응. 이라고 대답했을 뿐, 다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세경의 행동에 민혁은 익숙하다는 듯 집을 나선다.
" 다녀오세요-. "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한 호화아파트.
그 아파트 10층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50평은 족히 넘어보이는 그 집 현관에서 채은은 한재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웃고 있었다.
" 이따 점심에 같이 밥이라도 먹자. 회사로 나와. "
그런 채은에게 한재가 말한다.
" 알았어요- 그럼 이따봐요. "
채은은 그런 한재의 말에 방긋 웃으며 말하곤 집을 나서는 한재를 배웅한다.
한재가 나가고 채은은 거실 쇼파에 앉는다.
채은과 한재의 신혼집은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딱 보기에도 굉장히 비싸보이는 엔틱풍의 가구들과 장식품들.
온갖 메이커들로 도배된 집 안.
채은은 그런 집 안을 둘러보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모든게 채은의 뜻대로 이루워져 있었다.
채은은 이 모든게 깨지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
아니 채은은 이런 행복이 깨어진다는 건 상상할수도 없었다.
오후시간.
민혁은 회사를 나오고 있었다.
그의 목을 옳아맨 넥타이를 헐거워지도록 손으로 잡아당기며 민혁은 차에 올랐다.
분명 그는 면허가 없긴 했지만 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그의 차는 은빛 스포츠카였다.
민혁은 이제 꽤 많이 해결된 세경의 사건에 굉장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이제 기자들은 세경의 기사를 쓰지 않았다.
아니, 신문에 실을수 없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공회장이 실리지 않도록 확실히 단속하고 있었으니까.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지만 아직 돈이라는 건 꽤 쓸모있는 권력이었다.
공회장뿐만아니라 민규의 쪽에서도 세경의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서인지 일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던 민혁의 차가 멈춘다.
횡단보도 앞에 선 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문득 거리로 시선을 돌린 민혁의 눈에 무언가 들어온다.
민혁은 거리에 작은 상자 몇개를 두고 앉아있는 한 아주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상자에는 온갖 색의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들어있었다.
달칵-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집 안.
문여는 소리가 그 적막을 무참히 깨 버린다.
곧 정장차림의 민혁이 집 안으로 들어선다.
민혁은 들어서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세경을 찾는다.
곧 민혁은 아침 자신이 나갈때 모습 그대로 창가에 앉아 있는 세경을 발견한다.
" 뭐해. "
민혁의 살짝 굳은 목소리가 세경의 귓속으로 파고든다.
세경이 여태 이러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난 듯 했다.
" 어. 왔어? "
그제서야 세경이 화들짝 놀라며 민혁을 돌아본다.
" 밥 먹었어? "
민혁이 물었다.
분명 세경은 아까 아침부터 한끼도 먹지 않았을게 분명했다.
" 입맛이 없어."
세경이 대답한다.
" 먹을 것 좀 사왔어. "
민혁이 세경의 손을 획 잡는다.
그러고보니 민혁의 손에는 쇼핑백 한개와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민혁이 거실 쇼파로 세경을 데려다 앉힌다.
쇼핑백과 상자가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진다.
민혁이 쇼핑백에서 잘 포장되어 있는 초밥을 꺼낸다.
부시럭.
그때 민혁이 올려놓은 상자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상자가 미세하게 움직인다.
세경의 시선이 상자를 향한다.
" 저건 뭐야? "
세경은 초밥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세경은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었다.
" 자. "
그런 세경의 말은 들은척도 않고 민혁이 세경에게 젓가락을 내민다.
" 밥 생각 없어. 저거 뭐냐니까? "
세경은 젓가락을 받을 생각은 않고 묻는다.
그 기사가 터진 이후 세경은 눈에 뛸 정도로 말라 있었다.
워낙 밥을 자주 거른데다 잠도 잘 자지 못하니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그 와중에도 상자는 들썩거리고 있었다.
" 먼저 밥부터 먹어. "
민혁은 그런 세경에게 계속해서 젓가락을 내밀며 말한다.
민혁의 말에 세경은 민혁을 얄밉다는 듯 째려본다.
그런 세경의 눈초리에도 아랑곳없이 민혁은 젓가락을 내밀고 있었다.
" 알았어- 먹을테니까 빨리 말해줘. "
세경은 체념했다는 투로 말했다.
" 열어봐. "
그런 세경의 말에 민혁이 체념한듯 말했다.
민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경의 손이 상자로 향한다.
" 우와- "
세경의 입에서 금새 탄성이 터져나온다.
상자속에서 꿈툴거리던 그것을 꺼내든다.
세경의 손에는 새하얀 고양이 한마리가 들려 있었다.
그 고양이는 터키쉬앙고라종으로 손바닥만한 아직 어린 새끼였다.
" 맨날 집에 혼자 있으려니 심심해하는 거 같아서. "
세경이 한껏 미소를 띤 채 민혁을 보자 민혁은 조금 민망한 듯 괜한 변명을 한다.
" 나 주는거야? "
세경이 물었다.
" 어. 이제 밥 먹어. "
민혁은 세경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젓가락을 쥐어준다.
그런 민혁이 고마운 듯 세경인 피식 웃더니 이내 젓가락을 받아 든다.
초밥을 먹는 내내 세경의 시선은 고양이에게서 떠날줄 몰랐다.
그런 세경의 모습에 민혁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눈치였다.
[96]
그로부터 정확히 한달 뒤.
" 옷 입고 준비해. "
여느때처럼 고양이에게 우유를 담아 주며 놀고 있는 세경을 보며 민혁이 말한다.
민혁의 말에 세경은 고개를 들어 민혁을 올려다 본다.
민혁은 어느새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민혁의 말에 세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고양이가 야옹거리며 세경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민혁이 고양이를 안아든다.
고양이는 민혁의 품에 안겨 야옹거린다.
얼마 뒤 옷을 갈아입은 세경이 나온다.
" 하모니! "
세경이 민혁의 품에 안긴 고양이를 부른다.
민혁의 품에 안겨있던 고양이를 덥썩 안는다.
그런 세경을 보며 픽 웃어버리곤 민혁이 현관쪽으로 걸음을 돌린다.
세경이 민혁의 뒤를 따라간다.
세경과 민혁이 은색 스포츠카에 오른다.
민혁은 차에 시동을 건 뒤 차를 출발시키려다 말고 세경을 보더니 세경에게 안전벨트를 매준다.
그리곤 세경을 멀뚱히 보던 민혁이 곧 자신의 윗옷을 벗어 세경의 위에 덮어준다.
세경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차가 출발하길 기다린다.
" 어디가는거야? "
한참 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을 대 세경이 물었다.
" 가보면 알아. "
민혁이 대답했다.
민혁의 말에 세경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차 안은 고양이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고양이는 추운 지 야옹거리며 세경의 품 안으로 파고든다.
" 축하드립니다. 4주되셨네요. "
흰색의 깔끔한 병원 작은 의사개인실 안.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채은의 맞은편에 앉아 말한다.
그 여자의 가슴에는 산부인과 박선희 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찰이 달려 있었다.
" 4주요? "
채은은 믿기지 않는 다는 눈치였다.
" 네. 지금이 한창 유산되기 쉬울때니까 조심하시구요. "
여자는 채은에게 웃는 얼굴로 걱정말라는 듯 말한다.
채은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채 정신없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곤 그곳을 빠져나온다.
병원을 나왔을 때 쯤에는 채은의 머릿속은 정리되어 있었다.
아기가 생겼으니 이제 채은은 한재의 부인으로써 자리잡은 격이었다.
안정된 방패막이 생겼달까.
설사 자신의 자리가 흔들리는 일이 생길지라도, 이제 자신의 아기가 그걸 지켜내 줄 것이다.
현민을 되찾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 세경아! "
세경의 집 안.
거실엔 수연을 비롯한 세경의 집 안 사람들이 세경을 맞고 있었다.
한달여 만에 본 세경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
수연이 세경의 손을 덥썩 잡으며 물었다.
그런 수연의 말에 세경은 대답대신 방긋 웃어버린다
" 누구야? "
한참 세경의 손을 붙들고 재잘대던 수연은 그제서야 민혁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속삭이듯 말한다.
그런 수연의 말을 들었는 지 민혁이 수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보인다.
세경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민혁을 본다.
" 푹 쉬어. 나중에 연락할께. "
민혁이 이렇게 말하곤 현관으로 향한다.
그리곤 곧 집 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런 민혁을 잠시 보더니 세경도 몸을 돌려 방으로 올라간다.
" 어머- 왠 고양이야? 귀엽다! "
수연은 여전히 세경의 옆에 붙어 재잘재잘 떠들어대고 있었다.
" 그동안 어떻게 된거야? "
세경의 방 안.
방에 들어서자마자 세경은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세경의 뒤를 쫓아들어오며 수연이 묻는다.
" 좀 쉬고 왔어. 학교는 어떻게 됐어? "
" 연락을 해놓긴했는데… 한달씩이나 안나오니까 자꾸 전화오더라. "
" 그냥 자퇴서내지. "
수연의 말에 세경이 딱 잘라 말한다.
" 안그래도 그럴려다가….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닌거 같아서. "
수연이 얼버무린다.
" 참. 정한재는? 신혼여행갔다 들어왔지? "
세경이 옷을 갈아입다말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 그럼- 언제 들어왔는데. "
" 알았어. 언니 고양이 우유 좀 줄래? 전자렌지에 뎁혀서 줘야돼. "
세경이 야옹거리며 세경을 쫓아 다니는 고양이를 보며 말한다.
" 그래 알았어. 좀 쉬어. "
그제야 수연은 고양이를 안고 방을 나간다.
[97]
" 언니가 왔다구요? "
세경의 집 거실.
조용했던 거실은 민아의 등장으로 다시금 소란스러워진다.
" 지금 자고 있어.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야. "
수연은 당장이라도 뛰어올라갈듯한 기세의 민아를 말리려는 듯 말했다.
" 아-. 어? 왠 고양이에요? "
수연의 말에 민아가 잠시 흥분이 가라 앉는 가 싶더니 수연의 품에 안긴 고양이를 보고 묻는다.
" 세경이꺼야. 이름이 하모니래. 이쁘지? "
" 우와-. "
수연의 말에 민아는 고양이에 한참 정신이 팔려버린다.
" 아 참, 내 정신 좀 봐. 진성이랑 만나기로 해놓고…. 언니 나 나중에 올께요! 언니 깨면 전화 좀 해줘요. "
민아는 수연에게 말하고는 급하게 나가버린다.
그런 민아를 보며 수연은 피식 웃어버린다.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민아는 참 밝고 명랑한 아이인 것 같고 느끼면서.
민아의 정신없는 그 성격으로 자신의 주위를 밝게 만드는 그런 아이라고 생각하며,
수연은 세경이 그런 민아를 닮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해본다.
" 너 또 만나기로한거 꺼먹고 있었지! "
진성이 헉헉대며 뛰어와 숨을 고르고 있는 민아를 보며 비웃듯 말한다.
" 아, 아니야! "
민아가 말을 더듬는가 싶더니 소리쳐 부정한다.
" 됐어. 니가 까먹는게 한두번이냐? "
진성은 피식 웃으며 민아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헝클어트린다.
" 하지마! "
민아는 울상지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진성을 노려본다.
노려보고는 있었지만 민아도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 밥 먹으러가자. "
그런 민아의 손을 덥썩 잡으며 진성이 말한다.
이제는 누가봐도 의심하지 않을 다정한 커플이 된 민아와 진성은 즐거워보였다.
하늘이 빨갛게 변해버린 시간.
민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걸음을 제촉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세경이 깨었을거란 생각에 진성을 뒤로하고 세경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제 저 골목만 돌면 세경의 집이었다.
민아는 이 생각에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엇다.
그때 민아의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민아완 달리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정장차림의 젊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민아는 그런 남자를 별 다른 생각없이 지나치려다 말고 놀라 멈춘다.
" …어? "
민아의 믿기지않는다는 탄성 비스무르한 목소리에 그 남자도 멈춰 민아를 돌아본다.
" 오빠…? "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민혁을 보며 순간 놀라 표정이 굳은 민아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민아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민혁은 그런 민아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혁의 표정또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 오랜만이야. "
민아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어. "
그런 민아의 말에 민혁은 짧게 대답한다.
" 언니 만나고 가는 길이야? "
민아가 물었다.
" 어. "
민혁은 여전히 짧게 대답한다.
" 아-. 그동안 언니랑 같이 있었다며? 언니 기사도 오빠가 해결한거라고 들었어. 고마워 정말로. "
민아가 말했다.
민아는 집사와 수연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세경의 기사건이 민규와 민혁- 제대로 말하면 공회장이지만 - 이 서로 겨루기라도 하듯 앞다퉈 해결한 일이라는 걸.
민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 그럼 나 갈께. 나도 언니 보러 가는 길이거든. "
민아는 손을 흔들어보이곤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간다.
민혁도 그런 민아의 인사에 그래. 라고 대답하곤 뒤돌아 걷는다
민아는 이제 민혁을 봐도 예전같지 않은 자신의 심장에 놀라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예전처럼 민혁이 세경을 만러 왔다는 사실을 알아도 가슴이 찢어질듯 아프다거나 하지 않았다.
민아는 자신의 달라진 심장에,
어느새 거의 식어버린 자신의 변덕스런 심장에 놀라고 있었다.
[98]
" 언니! "
세경의 방 문이 벌컥 열리고 민아가 들어온다.
뛰듯이 들어와 세경의 품에 와락 안기려하지만 세경은 옆으로 피해버린다.
세경의 품에는 고양이가 안겨있었다.
" 언니 그동안 어떻게 된거야! 얼마나 찾았는 지 알아? "
" 미안. 사정이 좀 있었어. "
세경이 고양이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말했다.
" 진아언니도 되게 걱정했단 말이야. "
민아는 쇼파에 털썩 앉으며 투덜거리듯 말한다.
" 언니가? 언니도 알아? "
세경이 놀라 눈이 동그래져서 묻는다.
" 그래- 내가 말했지뭐. 하루걸러 계속 전화했다구. 언니 어떻게 됐냐구. "
민아는 자신에게 다가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고양이를 안아들며 말했다.
" 쓸데없이 그런건 왜 말해. 공부하기도 바쁜 언니를…. "
" 그래두. 진아언니가 언니 좀 많이 도와주라고 그러더라. 진아언니도 뭐 노력한다던데? 뭔 노력을 한다는 건지 몰라. "
민아는 태평한듯한 말투로 쫑알거린다.
" 언니가? "
세경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묻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아의 말을 세경은 이해할 수 없었다.
뭘 노력한다는 건지.
" 아 참 언니. 나 있잖아. 진성이랑 사귄다? "
민아가 뜬금없이 말을 꺼낸다.
" 정말? "
세경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 응! 그게 있잖아- "
민아는 세경의 반응에 그럼 그렇지.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쫑알거리며 말을 시작한다.
그런 민아의 말을 세경은 지루한 기색 하나 없이 맞장구를 쳐주며 듣는다.
민아의 말이 그리 재밌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세경은 꽤 흥미있게 들어주었다.
아마 오랜만에 하는 민아와의 대화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세경은 아침일찍부터 정장차림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정장치마에 하얀 브라우스. 그리고 마이를 입은 세경의 모습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신문을 가지고 들어오던 수연은 그런 세경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 뭐야 너? 그 차림. "
수연이 놀라 경직된 얼굴로 물었다.
" 뭐긴. 출근하려구. "
세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앞에 놓인 토스트를 집어든다.
" 출근이라니. 학교는 어떻하구? "
수연은 기가막힌다는 듯 말했다.
평소와는 다른 세경의 모습에 놀란 듯 했다.
갑작스런 세경의 변화에, 아니 그 한달간의 부재 뒤의 세경의 변화에 수연은 혼란스러웠다.
" 역시 아침은 토스트보단 밥이 좋겠어. 아줌마 내일부턴 밥으로 부탁할께요. "
세경은 그런 수연의 질문은 들은체 만체 하며 말했다.
" 네 아가씨. "
그런 세경의 말에 주방에서 막 우유컵을 들고 나오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공손히 대답하곤 세경의 앞, 식탁위에 우유컵을 놓는다.
" 한세경! "
수연이 허리에 손을 얹고 세경의 반대편에서 세경을 노려본다.
" 말했잖아. 학교 자퇴서내라고. "
세경은 아주머니가 내려놓은 우유를 마시며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너 그 일때문에 그래? 학교 가기 창피해서 그런거야? "
세경의 무덤덤한 태도에 오히려 흥분하는 건 수연이었다.
" 무슨 소릴 하는거야. 원래 이렇게 됐어야 했어. 내 인생에서 고등학교졸업이라는 딱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
세경이 토스트위에 잼을 바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세경의 말에 수연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뭐해. 밥 안먹을꺼야? 신문도 좀 내려놔. 나 아침마다 신문 보는 거 알잖아. "
세경이 토스트를 한 입 물려다 말고 말한다.
회사의 회장이라는 직을 맡게 되면서. 세경은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있었다.
회사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지만 세경은 알게모르게 꽤 많은 시간을 회사의 일을 생각하는 데 쏟고 있었다.
" 아, 안녕하세요. "
세경의 등장에 놀란 비서는 회장실 앞 책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다말고 벌떡 일어서 꾸벅 인사를 한다.
젋은 여성인 그 여자는 세경의 등장에 굉장히 놀란 듯 싶었다.
세경의 뒤에는 수연이 걷고 있었다.
세경은 오랫동안 주인을 잃고 있던 회장실 안으로 들어선다.
회장실 안은 여전히 깨끗했다.
세경의 지시에 따라 한회장이 썼을때와는 가구의 배치도, 인테리어도 전혀 다르게 변한 것 뺴고는.
여느 대기업 회장실처럼 정갈하고 엄숙한 기운이 돌긴 했지만 더 밝은 분위기였고 갖가지 색상으로 디자인 되어 있었다.
세경은 책상 앞에 앉는다.
수연은 그런 세경의 옆에 서 있었다.
책상 앞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이상할 정도인 책상 위에는 종이 한 장 놓여 있지 않았다.
세경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들어온 비서가 세경의 책상 앞쪽에 서 있었다.
" 그간 쌓인 결제할 서류가 하나도 없나요? "
세경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세경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분명 평소의 세경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이었다.
" 수연씨가 대신 결제를 해 주셔서…. "
비서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에 세경이 수연을 본다.
수연은 그런 세경을 보며 빙긋 웃는다.
언제라도 세경이 돌아왔을 때 일이 밀려있지 않아 편하게 적응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연의 배려인 듯 했다.
" 앞으론 모든 지 내가 직접 하도록 하겠어요. "
" 네 회장님. "
세경의 말에 비서가 깍듯이 인사한다.
회장이라는 칭호가 뭔가 이상한 듯 세경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 그럼 나가봐도 될까요? "
비서는 아무말없는 세경을 보며 물었다.
비서는 이제 겨우 두번째 대하는 세경이 어색하기도 하고 이런 상황이 싫었던 모양이었다.
" 아, 그리고 하나 더. "
세경이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런 세경의 말에 비서는 다음 세경의 말을 기다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경을 바라본다.
" 우리 회사에서 K건설회사로 원조해주는 게 어느정도 되죠? "
" K건설 경영의 거의 40%가량을 원조하고 있습니다만. "
비서는 그런 세경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띄며 말했다.
한재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K건설.
아니, 이번 한재와 채은의 결혼을 계기로 한재가 물려받은 K 건설.
희영의 혈육이 하는 기업인 만큼 한회장이 굉장한 원조를 해주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 지금 이 시간 부로 K그룹에 대한 원조를 모두 끊도록 하세요. "
세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 하지만 그렇게 되면 K건설은…. "
비서가 놀라 말했다.
" 그리고. "
세경은 비서의 말을 짜르며 날카롭게 말을 잇는다.
" 앞으로 K그룹에게 원조를 하거나 거래를 하는 회사는 모두 우리 그룹과 모든 거래를 끊겠어요. "
세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서는 놀라고 당황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 이비서는 그렇게 아시고 이 사실을 각 기업별로 통보해주세요. "
세경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세경의 말에 수연도 놀란 눈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연은 이런 세경의 조치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경이 희영을, 그리고 한재를 싫어한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갑자기 이런 조치라니.
수연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세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세경이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99]
"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
한재가 주차장으로 향하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 없어요. )
전화기너머로 밝은 채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임신한 사실을 안 지 겨우 하루 됐을 뿐인데 한재는 채은을 눈에 띄게 챙기고 있었다.
" 그럼 내가 알아서 몇개 사 갈께. 지금 들어가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 "
( 알았어요-. )
한재의 말에 채은이 애교섞인 말투로 말한다.
한재는 전화를 끊고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아직 세경이 처한 조치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는 지,
퇴근시간에 딱 맞춰 퇴근하는 한재의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무렵, 한재가 퇴근하기 무섭게 K건설회사는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 삑-. 회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퇴근시간이 되었지만 아랑곳없이 업무를 보고 있는 세경.
까만 테의 안경까지 쓴 세경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세경의 일을 방해하는 소리에 세경은 짜증스레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는다.
" 누군데? "
세경은 하얀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며 물었다.
* 정설[貞設]그룹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전화기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세경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오늘 아침에 각 기업에 통보를 하라고 했으니 그에 대해 항의라도 하려온 모양이라고 세경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하루종일 처리한 일 중의 반이 오늘 아침 내린 지시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 안으로 모셔. "
세경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덜컥열린다.
세경은 열린 문을 볼 생각도 안하고 앞에 놓여있던 서류들을 정리해 한 쪽으로 몰아 넣는다.
그리곤 안경을 벗으며 그제서야 의자에서 일어나 방금 들어온 사람을 향한다.
" 어서오십시……. 정민규?! "
형식적인 인사를 하던 세경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놀라 말을 내뱉는다.
" 오랜만이야. 한세경회장님. "
민규는 장난스레 웃으며 농담조로 말한다.
" 오랜만이야. "
세경은 그런 민규에게로 다가서며 말했다.
" 그세 한달동안 얼굴이 더 좋아진거 같다? "
민규는 그런 세경에게 장난스레 말한다.
민규의 말처럼 민규의 집을 나갈때와 다르게 세경의 얼굴색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살은 더 빠져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밝아져 보였고 화색을 띄고 있는 듯 했다.
" 그땐 미안했어. "
세경은 그런 민규의 말에 지레 찔려 말한다.
" 됐어-. 어디 그런게 한두번이냐. 지금 바빠? "
민규가 말했다.
" 아니. 왜? 무슨 일 있어? "
" 일은-.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거지. 앞으로 경성그룹이랑 거래 많이 하려면 회장님한테 잘보여야 하지 않겠어? "
민규의 장난스런 농담에 세경이 손을 휙휙 휘저으며 하지 말라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그런 세경의 어깨에 자연스레 손을 올리며 민규는 회장실밖으로 세경을 이끈다.
" 내가 갈께. "
세경은 거북한 듯 민규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그런 세경의 행동에 민규는 민망한 듯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보인다.
" 일찍 왔네요 "
현관문을 열어 한재를 맞는 채은의 표정이 밝다.
" 너 혼자 집에 있는 거 빤히 아는 데 어떻게 늦게와. 별 일 없었지? "
한재는 그런 채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 없었어요. 참 아까 아버님한테 연락 왔었어요. 조만간 식사 한 번 하자고 하시네요. "
채은이 한재와 함께 침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 그래? 조만간 한 번 뵈러 가지 뭐. "
한재가 정장 마이를 벗으며 말했다.
" 주세요. "
그런 한재의 윗옷을 재빨리 받아들며 채은이 말했다.
" 됐어. 홀몸도 아니면서. 이런건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넌 몸조리 잘해. "
한재는 그런 채은에게서 윗옷을 뺏어들며 말했다.
" 겨우 4주밖에 안됐는 걸요. "
채은은 이렇게 말하지만 한재의 이런 대접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 자자자-. 당신은 쇼파에서 푹 쉬어. "
한재는 채은의 등을 밀며 거실로 향한다.
그리곤 쇼파에 채은을 앉히며 말한다.
채은은 그런 한재의 반응이 부담스러웠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그때 한재의 휴대폰이 울린다.
" 여보세요? "
( 사장님. 저 최비섭니다. )
전화기너머로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어. 최비서. 무슨일이야? "
( 큰일났습니다. 경성그룹에서 저희 회사로의 원조를 모두 끊은 모양입니다.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한재는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한재를 보며 채은은 아무것도 모른 채 쇼파에 앉아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 오늘부로 모든 원조를 끊겠다고 경성그룹측에서 통보가 왔습니다. )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린다.
" 뭐?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지. 이 일은 내일 회사에서 얘기하는게 좋겠어. "
한재는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옆에 채은이 있다는 사실에 다급히 말을 고친다.
(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
비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재는 전화를 끊는다.
" 왜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
채은은 여전히 배를 쓰다듬는 듯한 포즈로 앉아 한재에게 묻는다.
"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너 오늘 저녁은 뭐가 좋을까? "
한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채은에게 말한다.
채은은 그런 한재의 말에 생긋 웃으며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런 채은을 보는 한재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수심이 가득했다.
[100]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
다음날 아침 일찍.
부랴부랴 서둘러 출근한 한재는 사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소리치며 비서에게 묻는다.
그의 책상 위에는 그세 해결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 말 그대로 입니다. 경성그룹에선 더이상 저희 회사에 원조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
" 그게 무슨소리야?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린거지? "
비서의 차분해진말에 한재가 물었다.
걱정에 어제 밤잠까지 설친 한재는 다크서클이 진해져 있었다.
" 이유야 모르지만, 결론은 경성그룹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
비서가 말했다.
지금 비서의 생각은 경성그룹의 행동을 따지기보단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게 어젯밤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 경성그룹의 원조는 우리 기업 경영에 필요한 기금의 40%이상을 차지하는데.
그럼 우린 어쩌란 말이야?! 다른 기업에 연락은 해봤어? "
한재가 답답해진 듯 말했다.
" 네. 현재 진보그룹과 정설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그룹에 모두 연락이 간 상태입니다. "
비서는 차분하게 대답한다.
" 결과는? "
한재가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채 물었다.
" 모두 저희회사에게 원조를 해 줄 의향이 없는 듯 합니다. 그 외 여태 해오던 거래까지 모두 파기하겠다고…. "
비서는 절망적인 상황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 …정설그룹과 진보그룹은 내가 직접 찾아가지. 아, 그 전에 경성그룹회장부터 만나고. "
한재가 이렇게 말하며 방을 나선다.
비서는 그런 그의 뒤를 따른다.
회사안은 어수선한 가운데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 회사는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에 혼란스러웠다.
* 삑-. K건설의 정한재사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세경은 까만 테로 된 안경을 쓰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수연이 서 세경을 돕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은 하얀 전화기에서 삑 소리가 들리더니 작은 스피커 너머로 젋은 여비서의 목소리가 들린다.
" 안으로 모셔요. "
세경이 짧게 대답한다.
곧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세경이 일어선다.
" 앉으시죠. "
다급히 들어오는 한재와는 다르게 세경은 태연스레 앞에 놓인 쇼파에 자리를 권한다.
한재는 그런 세경을 힐끔 보더니 다급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쇼파에 앉는다.
세경도 쇼파에 앉고 그런 세경과 한재 옆을 수연과 한재의 비서가 지키고 선다.
" 차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
세경이 말했다.
세경의 말투는 평소 한재를 대하던 투가 아닌 딱딱하고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였다.
" 냉수로 하지. "
한재는 그런 세경에게 당장이라도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속이 타들어간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냉수를 청한다.
" 부탁해요. "
세경이 수연을 올려다 보며 말하고 수연은 알았다는 듯 잠시 회장실 밖을 나간다.
비서에게 무어라 말하는 가 싶더니 다시 들어와 수연의 옆에 반듯한 자세로 선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냉수 한 잔과 홍차 한 잔을 받쳐 들고 들어온다.
비서가 침착한 손놀림으로 잔을 내려놓고 쟁반을 든 채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자 한재가 흠흠 거리며 헛기침을 한다.
" 대체 무슨 생각이야. "
한재가 다짜고짜 내뱉었다.
" 무슨 말씀이신지…. "
세경은 홍차가 가득 담긴 잔을 손에 든 채 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물었다.
" 갑작스레 원조를 끊은 이유말이야. "
" 글쎄요. 딱히 이유라곤 없지만…. 그래도 이유를 원하시는 것 같으니 말씀드리죠. "
세경이 홍차를 한모금 마시는 가 싶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한재가 긴장한 표정으로 세경의 다음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전 저희 회사가 K건설에 원조를 해서 얻는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사업가로써 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
세경이 말했다.
" 하지만 네 아버지는…! "
" 그건 제 아버지가 경영하실때의 이야기죠.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이 회사의 경영자는 저이고 모든 판단은 제가 내립니다. "
다급히 변명하려하는 한재의 말을 가로막은 세경이 침착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 난 대체 네가 왜 이러는 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도대체…. "
한재가 당황스러움에 말문이 막힌다.
" 말이 짧으시군요. 여기는 회사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저는 더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
세경의 말은 날카롭고도 단호했다.
" 어떻게 네가 이럴수가 있니. 그래도 우리는 친척이 아니냐. "
한재는 조금은 기가막히다는 듯 했다.
" 친척?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군요. 당신과 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입니다. 예의를 지켜달라는 제 말은 들리지 않으십니까? "
세경이 말했다.
세경은 조금씩 한재의 태도에 화가 나는 듯 했다.
" …세경이 네가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다니! "
한재는 기가막혀 치를 떠는 듯 했다.
" 그만 나가주시죠. 좀 바쁜일이 있어서요. 그리고 다음부턴 미리 약속을 정하시고 오셨으면 좋겠네요. "
세경은 단호하게 말하며 한재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린 채 홍차를 마신다.
" …그럼 다음에 또 뵙죠 한세경 회장님. "
한재가 한글자 한글자에 힘을 줘 가며 말했다.
" 그리 달가운 말이 아니군요. "
세경은 그런 한재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한재의 말을 되받아친다.
한재는 그런 세경을 한 번 노려보는 가 싶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버린다.
한재가 나가고 얼마 뒤.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홍차를 마시고 있는 세경을 수연또한 부동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홍차잔의 홍차가 바닥이 날 즈음. 세경의 휴대폰이 요란스레 울린다.
세경은 그제서야 홍차잔을 내려놓고 책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책상 위의 올려져 있는 두개의 핸드폰 중 하나를 집어든다.
" 여보세요. "
세경의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린다.
( 전화 통화 한 번 하기 굉장히 힘드네. )
전화기 너머로 낯익은 여자이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은 앳된 여자의 목소리에 세경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 이희진? "
세경이 의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 그래도 친구라고 목소리는 알아보는구나. 오랜만이야. )
희진의 목소리가 세경의 귓가를 메운다.
" 응. 그러게. 오랜만이다. "
세경이 떨떠름하게 전화를 받는다.
세경은 아직도 희진과의 마지막 대화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결코 좋지만은 않았던 그 대화내용을.
( 전화번호 바꿨더라. 알아내느라 굉장히 고생했어. )
" 아-. 기자들때문에…. "
세경은 천천히 입을 떼 대답했다.
( 유명인은 힘들겠어. 안그래? 그 기사 나도 봤어. 힘들었겠더라.
하지만 지금은 뭐, 완전한 동정표를 샀으니. 오히려 더 잘된 일 아니겠니? )
희진이 말했다.
의도한 지는 모르겠지만 희진의 말투에서 약간 비꼬는 듯한 느낌이 풍겨져나왔다.
" ……용건이 뭐야? "
그런 희진의 태도에 세경은 자기방어적인 말투가 되어 말했다.
( 할 말이 있어. 한 번 만나자. )
희진은 특유의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언제…. "
( 빠를수록 좋아. 오늘 시간 되니? 난 기왕이면 오늘 만났으면 좋겠는데. )
세경의 말을 끊으며 희진이 말했다.
" 그럼 오늘 피카소에서 6시에 만나. "
희진의 말에 세경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희진은 알았다는 말을 끝으로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다.
희진과의 전화통화를 끝낸 세경의 표정이 뭔가 떨떠름하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세경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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