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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
권43. 조세가(趙世家) 성후(成侯)
成侯元年, 公子勝與成侯争立, 為亂. 二年六月, 雨雪. 三年, 太戊午1)為相. 伐衛, 取郷邑七十三. 魏敗我藺.2) 四年, 與秦戦高安,3) 敗之. 五年, 伐斉于鄄.4) 魏敗我懐. 攻鄭, 敗之, 以與韓, 韓與我長子.5) 六年, 中山築長城. 伐魏, 敗■沢,6) 囲魏恵王. 七年, 侵斉, 至長城.7) 與韓攻周. 八年, 與韓分周以為両.8) 九年, 與斉戦阿下.9) 十年, 攻衛, 取甄. 十一年, 秦攻魏, 趙救之石阿.10) 十二年, 秦攻魏少梁,11) 趙救之. 十三年, 秦献公使庶長国伐魏少梁, 虜其太子、痤. 魏敗我澮, 取皮牢.12) 成侯與韓昭侯遇上党. 十四年, 與韓攻秦. 十五年, 助魏攻斉.
성후 원년, 공자(公子) 조승(趙勝)이 성후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켰다. 2년 6월, 큰 눈이 내렸다. 3년, 태무우(太戊牛)가 재상이 되었으며, 위(衛)나라를 공격해 73개의 향읍(鄕邑)을 빼앗았다. 위(魏)나라는 인(藺)에서 조나라의 군대를 무찔렀다. 4년, 진(秦)나라와 고안(高安)에서 싸워 진나라를 무찔렀다. 5년, 견(鄄)에서 제나라를 공격했으며, 위(魏)나라가 회(懷)에서 조나라를 무찔렀다. 정(鄭)나라를 공격해 무찌르고 그 땅을 한(韓)나라에게 주니 한나라는 장자(長子)를 조나라에 주었다. 6년, 중산국이 장성(長城)을 쌓았다. 위(魏)나라를 공격해 탁택(涿澤)에서 패배시키고 위 혜왕(魏惠王)을 포위했다.
7년, 제나라를 침공해 장성까지 이르렀다. 한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했다. 8년, 한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양분(兩分)했다. 9년, 제나라와 아성(阿城) 아래에서 교전했다. 10년, 위(衛)나라를 공격해 견(甄)을 차지했다. 11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하니 조나라가 석아(石阿)로 가서 위나라를 구원했다. 12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소량(小梁)을 공격하니 조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했다. 13년, 진 헌공(秦獻公)이 서장(庶長) 국(國)을 보내 위나라의 소량을 공격해 태자와 좌(痤)를 포로로 잡아갔다. 위(魏)나라가 회수(澮水)에서 조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피뢰(皮牢)를 빼앗았다. 성후는 한 소후(韓昭侯)와 상당(上黨)에서 만났다. 14년, 한나라와 연합해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15년, 위(魏)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했다.
十六年, 與韓、魏分晉, 封晉君以端氏.13)
16년, 한(韓), 위(魏) 나라와 더불어 진(晉)나라를 나누어 가지고 진군(晉君)을 단지(端氏)에 봉했다.
十七年, 成侯與魏恵王遇葛孽.14) 十九年, 與斉、宋会平陸,15) 與燕会阿.16) 二十年, 魏献栄椽, 因以為檀台.17) 二十一年, 魏囲我邯鄲. 二十二年, 魏恵王抜我邯鄲, 斉亦敗魏於桂陵.18) 二十四年, 魏帰我邯鄲, 與魏盟漳水上. 秦攻我藺. 二十五年, 成侯卒. 公子■與太子粛侯19)争立, ■敗, 亡奔韓.
17년, 성후는 위 혜왕(魏惠王)과 갈얼(葛孽)에서 만났다. 19년, 제(齊), 송(宋) 나라와 평륙(平陸)에서 회합하고, 연(燕)나라와 아(阿)에서 회합했다. 20년, 위(魏)나라가 최고급 목재(木材)로 만든 서까래를 헌상해 이것으로 단대(檀臺)를 건조했다. 21년, 위(魏)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했다. 22년, 위 혜왕이 조나라 한단을 함락시키고 제나라 역시 계릉(桂陵)에서 위(魏)나라를 무찔렀다. 24년, 위(魏)나라가 조나라에게 한단을 돌려주어 위(魏)나라 왕과 장수(漳水)가에서 회맹했다.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인(藺) 땅을 공격했다. 25년, 성후가 죽었다. 공자 설(緤)과 태자 숙후(肅侯)가 지위를 다투다가 조설이 패해 한(韓)나라로 도망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戊, 一作『成』.」
2 正義地理志云属西河郡也.
3 正義蓋在河東.
4 正義濮州鄄城県是也.
5 集解地理志曰上党有長子県.
6 正義■音濁. 徐広云長杜有濁沢, 非也. 括地志云:「濁水源出蒲州解県東北平地.」爾時魏都安邑, 韓、趙伐魏, 豈河南至長杜也? 解県濁水近於魏都, 當是也.
7 正義斉長城西頭在済州平陰県. 太山記云:「太山西北有長城, 縁河経太山千余里, 瑯邪入海.」括地志云:「所侵処在密州南三十里.」
8 集解徐広曰:「顕王二年. 周紀無此.」 正義括地志云:「史記周顕二年, 西周恵公封少子子班於鞏, 為東周. 其子武公為秦所滅. 郭縁生述征記云鞏県本周鞏伯邑.」
9 集解徐広曰:「戦, 一作『会』也.」 正義阿, 東阿也, 今済州東阿県也.
10 正義蓋在石、隰等州界也.
11 正義少梁故城在同州韓城県南二十二里, 古少梁国也.
12 集解徐広曰:「魏年表曰取趙皮牢.」 正義括地志云:「澮水県在絳州翼城県東南二十五里.」按:皮牢當在澮之側.
13 集解徐広曰:「在平陽.」 正義端氏, 沢州県也.
14 集解徐広曰:「在馬丘. 年表曰十八年趙孟如斉.」
15 正義兗州県也. 平陸城(與)即古厥国.
16 正義括地志云:「故葛城一名依城, 又名西阿城, 在瀛州高陽県西北五十里. 以徐、(兗)[滱]二水並過其西, 又徂経其北. 曲曰阿, 以斉有東阿, 故曰西阿城. 地理志云瀛州属河閒, 趙分也.」按:燕会趙即此地.
17 集解徐広曰:「襄国県有檀台.」 索隠劉氏云「栄椽蓋地名, 其中有一高処, 可以為台」, 非也. 按:栄椽是良材, 可為椽, 斲飾有光栄, 所以魏献之, 故趙因用之以為檀台. 正義鄭玄云:「栄, 屋翼也.」説文云:「椽, 榱也. 屋梠之両頭起者為栄也.」括地志云:「檀台在洺州臨洺県北二里.」
18 正義括地志云:「故桂城在曹州乗氏県東北二十一里, 故老云此即桂陵也.」
19 索隠系本云名語.
권43. 조세가(趙世家) 숙후(粛侯)
粛侯元年, 奪晉君端氏, 徙処屯留.1) 二年, 與魏恵王遇於陰晉.2) 三年, 公子范襲邯鄲, 不勝而死. 四年, 朝天子. 六年, 攻斉, 抜高唐. 七年, 公子刻攻魏首垣.3) 十一年, 秦孝公使商君伐魏, 虜其将公子卬. 趙伐魏. 十二年, 秦孝公卒, 商君死. 十五年, 起寿陵.4) 魏恵王卒.
숙후 원년, 진군(晉君)의 단씨현을 빼앗고 그를 둔류(屯留)로 이주시켰다. 2년, 위 혜왕과 음진(陰晉)에서 만났다. 3년, 공자 조범(趙范)이 한단을 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4년, 주(周) 천자를 조현(朝見)했다. 6년, 제나라를 공격해 고당(高唐)을 빼앗았다. 7년, 공자 조각(趙刻)이 위(魏)나라의 수원(首垣)을 공격했다. 11년, 진 효공(秦孝公)이 상군(商君)을 시켜 위(魏)나라를 정벌하게 해 장군인 공자 앙(卬)을 포로로 잡았다. 조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12년, 진 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상군도 죽었다. 15년, 수릉(壽陵)을 축조했다. 위 혜왕이 죽었다.
十六年, 粛侯游大陵,5) 出於鹿門,6) 大戊午扣馬7)曰:「耕事方急, 一日不作, 百日不食.」粛侯下車謝.
16년, 숙후가 대릉(大陵)을 유람하고 녹문(鹿門)을 나섰다. 대무오(大戊午)가 말고삐를 잡고서 “지금은 농사 일이 급한 때입니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백일 동안 먹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숙후는 말에서 내려 사죄했다.
十七年, 囲魏黄, 不克.8) 築長城.9)
17년, 위(魏)나라의 황성(黃城)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성(長城)을 쌓았다.
十八年, 斉、魏伐我, 我決河水潅之, 兵去. 二十二年, 張儀相秦. 趙疵與秦戦, 敗, 秦殺疵河西, 取我藺、離石. 二十三年, 韓挙10)與斉、魏戦, 死于桑丘.11)
18년, 제나라와 위(魏)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황하의 물을 끌어대어 적들에게 부어대니 적병은 도망갔다. 22년,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조자(趙疵)가 진(秦)나라와 싸워 패하니 진나라 군사는 하서(河西)에서 조자를 죽이고 조나라의 인(藺)과 이석(離石) 지방을 빼앗았다. 23년, 한거(韓擧)가 제나라, 위(魏)나라와 싸우다 상구(桑丘)에서 전사했다.
二十四年, 粛侯卒. 秦、楚、燕、斉、魏出鋭師各萬人來会葬. 子武霊王立.12)
24년, 숙후가 죽었다. 진(秦), 초(楚), 연(燕), 제(齊), 위(魏) 각 나라가 정예 병사 만 명씩을 보내 장례에 참석했다. 아들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했다.
각주
1 正義括地志云:「屯留故城在潞州長子県東北三十里, 本漢屯留県城也.」
2 正義地理志云華陰県, 魏之陰晉, 秦恵文王更名寧秦, 高帝更名華陰. 今属華州.
3 正義蓋在河北也.
4 正義徐広云:「在常山.」
5 集解徐広曰:「太原有大陵県, 亦曰陸.」 正義括地志云:「大陵城在并州文水県北十三里, 漢大陵県城.」
6 正義并州盂県西有白鹿泓, 源出白鹿山南渚, 蓋鹿門在北山水之側也.
7 集解呂忱曰:「扣, 牽馬.」
8 集解地理志曰山陽有黄県. 正義黄城在魏州, 前抜之, 卻為魏, 今趙囲之矣.
9 正義劉伯荘云「蓋従雲中以北至代」. 按:趙長城従蔚州北西至嵐州北, 尽趙界. 又疑此長城在(潭)[漳]水之北, 趙南界.
10 集解徐広曰:「韓将.」
11 集解地理志云泰山有桑丘県. 正義括地志云:「桑丘城在易州遂城県界.」或云在泰山, 非也. 此時斉伐燕桑丘, 三晉皆來救之, 不得在泰山(有)[之]桑丘県, 此説甚誤也.
12 索隠名雍.
권43. 조세가(趙世家) 무령왕(武霊王)
武霊王元年,1) 陽文君趙豹相. 梁襄王與太子嗣, 韓宣王與太子倉來朝信宮.2) 武霊王少, 未能聴政, 博聞師三人, 左右司過三人. 及聴政, 先問先王貴臣肥義, 加其秩;国三老年八十, 月致其礼.
무령왕 원년, 양문군(陽文君) 조표(趙豹)가 재상이 되었다. 양 양왕(梁襄王)과 태자 사(嗣), 그리고 한 선왕(韓宣王)과 태자 창(倉)이 신궁(信宮)에 와서 조하(朝賀)했다. 무령왕이 어려서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식한 관리 세 사람과 좌우 사과(司過) 세 사람이 보좌했다.
정무를 처리하게 되었을 때에 먼저 선왕 때의 현신(賢臣)인 비의(肥義)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그의 봉록을 높여주었으며, 나라 안의 80세 이상 되는 덕망 높은 노인에게 매월 선물을 보냈다.
三年, 城鄗. 四年, 與韓会于区鼠.3) 五年, 娶韓女為夫人.
3년, 호(鄗)에 성을 건축했다. 4년, 한나라와 우서(區鼠)에서 회합했다. 5년, 한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八年, 韓撃秦, 不勝而去. 五国相王, 趙独否, 曰:「無其実, 敢処其名乎!」令国人謂已曰「君」.
8년, 한나라가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섯 나라가 서로 ‘왕(王)’을 칭했으나, 조나라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실질적인 알맹이도 없으면서 어찌 허황된 명분에 안주하겠는가?”라고 말하고서는 나라 사람들에게 자기를 ‘군(君)’이라고 부르도록 명령했다.
九年, 與韓、魏共撃秦, 秦敗我, 斬首八萬級. 斉敗我観沢.4) 十年, 秦取我中都及西陽.5) 斉破燕. 燕相子之為君, 君反為臣. 十一年, 王召公子職於韓, 立以為燕王,6) 使樂池送之.7) 十三年, 秦抜我藺, 虜将軍趙荘.8) 楚、魏王來, 過邯鄲. 十四年, 趙何攻魏.
9년, 한나라, 위(魏)나라와 더불어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는 세 나라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8만 명의 목을 베어갔다. 제나라가 관택(觀澤)에서 조나라를 무찔렀다. 10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중도(中都)와 서양(西陽)을 빼앗았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무찔렀다. 연나라 재상 자지(子之)가 군주가 되고 군주는 반대로 신하가 되었다. 11년, 무령왕이 공자(公子) 직(職)을 한나라에서 불러들여 연왕(燕王)으로 세우고 악지(樂池)를 시켜 호위하게 했다. 13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인(藺) 지방을 함락시키고 장군 조장(趙莊)을 포로로 잡아갔다. 초 나라와 위(魏)나라의 왕이 한단을 방문했다. 14년, 조하(趙何)가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十六年, 秦恵王卒. 王遊大陵. 他日, 王夢見処女鼓琴而歌詩曰:「美人熒熒兮, 顔若苕之栄.9) 命乎命乎, 曾無我嬴!」10)異日, 王飲酒樂, 數言所夢, 想見其状. 呉広聞之, 因夫人而内其女娃嬴.11) 孟姚也.12) 孟姚甚有寵於王, 是為恵后.
16년, 진 혜왕(秦惠王)이 죽었다. 무령왕이 대릉(大陵)을 유람했다. 어느 날 왕이 꿈속에서 처녀가 거문고를 타며 시 한 수를 노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미인이여! 광채가 눈부시도다. 그 모습 농염한 능소화(凌霄花) 같아라. 운명이여! 내 가련한 운명이여, 뜻밖에 이 왜영(娃嬴)을 몰라주다니.”라는 것이었다. 다른 날 왕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몇 번이나 꿈 이야기를 하며 꿈에 보았던 미인의 용모를 상상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오광(吳廣)이 부인을 통해 그의 딸 왜영을 궁중에 들여보냈는데, 이가 바로 맹요(孟姚)이다. 맹요는 왕의 총애를 듬뿍 받았으니 그녀가 바로 혜후(惠后)이다.
十七年, 王出九門,13) 為野台,14) 以望斉、中山之境.
17년, 왕이 구문(九門)을 나와 조망대를 만들어 제나라와 중산국의 경내를 살피었다.
十八年, 秦武王與孟説挙竜文赤鼎, 絶臏15)而死. 趙王使代相趙固迎公子稷於燕, 送帰, 立為秦王, 是為昭王.
18년, 진 무왕(秦武王)이 맹열(孟說)과 용 무늬의 적색 정(鼎)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져 죽었다. 무령왕은 대(代)의 재상 조고(趙固)를 시켜 공자 직(稷)을 연나라에서 영접해 진(秦)나라로 호송하고 진왕(秦王)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소왕(昭王)이다.
十九年春正月, 大朝信宮. 召肥義與議天下, 五日而畢. 王北略中山之地, 至於房子,16) 遂之代, 北至無窮, 西至河, 登黄華之上.17) 召樓緩謀曰:「我先王因世之変, 以長南藩之地, 属阻漳、滏之険, 立長城, 又取藺、郭狼, 敗林人18)於荏, 而功未遂. 今中山在我腹心, 北有燕,19) 東有胡,20) 西有林胡、樓煩、秦、韓之邊,21) 而無彊兵之救, 是亡社稷, 柰何? 夫有高世之名, 必有遺俗之累. 吾欲胡服.」樓緩曰:「善.」群臣皆不欲.
19년 봄 정월, 신궁(信宮)에서 성대한 조회를 개최했다. 비의(肥義)를 불러 천하 대사를 의논했는데 5일 후에야 끝마쳤다. 왕은 북쪽으로 중산국의 영토를 공략하고 방자(房子) 지역에 이르러 대(代) 땅으로 갔으며, 북상해 무궁(無窮)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러 황화산(黃華山) 꼭대기에 올랐다. 누완(樓緩)을 불러 의논하기를 “나의 선왕은 세사의 변화에 따라 남방 속국의 우두머리를 하시고 장수(漳水)와 부수(滏水)의 험난한 지세를 연결해 장성을 쌓으셨으며, 인(藺)과 곽랑(郭狼)을 탈취하시고 임(荏)에서 임호(林胡)를 무찌르셨으나 대업은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지금 중산국은 우리나라의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연나라, 동쪽으로는 동호(東胡), 서쪽으로는 임호, 누번(樓煩), 진(秦)나라, 한나라의 국경과 접하고 있지만, 강력한 병력의 보호가 없어 이러다가는 사직이 망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習俗)을 위배했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니, 나는 호복(胡服)을 입고자 한다.”라고 하자, 누완은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모두 이를 원하지 않았다.
於是肥義侍, 王曰:「簡、襄主之烈, 計胡、翟之利. 為人臣者, 寵有孝弟長幼順明之節, 通有補民益主之業,22) 此両者臣之分也. 今吾欲継襄主之跡, 開於胡、翟之郷, 而卒世不見也.23) 為敵弱,24) 用力少而功多, 可以毋尽百姓之勞, 而序往古之勳.25) 夫有高世之功者, 負遺俗之累;26)有独智之慮者, 任驁民之怨.27) 今吾将胡服騎射以教百姓, 而世必議寡人, 柰何?」肥義曰:「臣聞疑事無功, 疑行無名. 王既定負遺俗之慮, 殆無顧天下之議矣. 夫論至徳者不和於俗, 成大功者不謀於衆. 昔者舜舞有苗, 禹袒裸国, 非以養欲而樂志也, 務以論徳而約功也. 愚者闇成事, 智者睹未形, 則王何疑焉.」王曰:「吾不疑胡服也, 吾恐天下笑我也. 狂夫之樂, 智者哀焉;愚者所笑, 賢者察焉. 世有順我者, 胡服之功未可知也. 雖駆世以笑我, 胡地中山吾必有之.」於是遂胡服矣.
이때 비의가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간자와 양자 두 주군의 업적은 호(胡)와 적(狄)에 대해 이로움을 꾀한 데 있소. 신하된 자로서, 총애를 받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장유(長幼)를 알며 명리(明理)에 순종하는 절조가 있어야 하고, 현달했을 때에는 백성을 돕고 군주에게 이롭게 하는 업적이 있어야 하니, 이 두 가지가 신하의 본분이오. 이제 나는 양자의 업적을 계승해 호와 적의 영토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죽을 때까지 그러한 현신(賢臣)을 만나지 못할 것 같소. (내가 호복을 입는 것은) 적을 약하게 해 힘은 적게 들이고 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으니,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고서도 순리적으로 간자와 양자 두 선왕의 업적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이오.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며, 심오한 지략(智略)을 지니고 있는 자는 오만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 마련이오. 이제 나는 앞으로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세상에서는 틀림없이 과인에 대해 의론이 분분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라 했다.
그러자 비의가 “신이 듣기에 일을 하려고 할 때 머뭇거리면 성공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에 주저하면 명예를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왕께서 기왕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시려고 결심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의 의론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최고의 덕행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적인 것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큰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범부(凡夫)와 모의하지 않는 법입니다.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의 춤을 추어 그들을 감화시켰고 우임금은 나국(裸國)에서 옷을 벗었는데, 이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정을 선양해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이미 성사된 뒤에도 그 연유를 모르지만 현명한 자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거늘 왕께서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라 했다.
왕이 “나는 호복을 입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고 천하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나 않을까 그것이 두렵소. 무지한 자의 즐거움은 현명한 자의 슬픔이며, 어리석은 자가 비웃은 일은 어진 자가 통찰하고 있는 일이오. 세상에서 나를 따르는 자가 호복의 효능을 이루 다 짐작할 수가 없을 것이니, 설사 세상 사람들이 이 일로 나를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오랑캐 땅과 중산국은 내가 꼭 차지할 것이오.”라 했다. 이때부터 왕은 마침내 호복을 입었다.
使王■告公子成曰:「寡人胡服, 将以朝也, 亦欲叔服之. 家聴於親而国聴於君, 古今之公行也. 子不反親, 臣不逆君, 兄弟之通義也.28) 今寡人作教易服而叔不服, 吾恐天下議之也. 制国有常, 利民為本;従政有経, 令行為上. 明徳先論於賎, 而行政先信於貴. 今胡服之意, 非以養欲而樂志也;事有所止而功有所出,29) 事成功立, 然后善也. 今寡人恐叔之逆従政之経, 以輔叔之議. 且寡人聞之, 事利国者行無邪, 因貴戚者名不累, 故願慕公叔之義, 以成胡服之功. 使■謁之叔,30) 請服焉.」公子成再拝稽首曰:「臣固聞王之胡服也. 臣不佞, 寝疾, 未能趨走以滋進也. 王命之, 臣敢対, 因竭其愚忠. 曰:臣聞中国者, 蓋聡明徇智之所居也,31) 萬物財用之所聚也, 賢聖之所教也, 仁義之所施也, 詩書礼樂之所用也, 異敏技能之所試也, 遠方之所観赴也, 蛮夷之所義行也. 今王舎此而襲遠方之服, 変古之教, 易古人道, 逆人之心, 而怫学者, 離中国, 故臣願王図之也.」使者以報. 王曰:「吾固聞叔之疾也, 我将自往請之.」
왕은 왕설(王緤)을 파견해 공자(公子) 성(成)에게 “과인이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할 것이니 숙부께서도 입으시기 바라오. 집 안에서는 부모의 말씀에 따라야 하고 나라 안에서는 군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고금의 공인된 행동원칙이오. 아들은 부모에게 반대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군주를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하간의 통념이오. 지금 과인이 교지(敎旨)를 내려 복장을 바꾸어 입게 했는데 숙부께서 입지 않으시면, 천하 사람들이 비난할까 두렵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상도(常道)가 있으니 백성을 이롭게 함이 그 근본이며, 정치에 참여하는 데 원칙이 있으니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덕정(德政)을 펴려면 먼저 평민 백성들을 이해시켜야 하며, 정령(政令)을 시행하려면 먼저 귀족들에게서 신임을 얻어야 하오.
지금 호복을 입는 목적은 욕망을 만족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일을 하는 데에는 목적한 바에 도달해야 공적이 이루어지며, 일이 완성되어 공적을 이룬 후에야 비로소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소. 지금 과인은 숙부께서 정치참여의 원칙에 어긋나게 행동해 세상의 비난을 자초할까 두렵소. 아울러 과인이 듣기에 국익에 관련된 일은 행함에 사악함이 없고, 귀척(貴戚)에 의지하면 명예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고 하니, 나는 숙부의 위엄과 명망을 빌려서 호복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하오. 왕설을 시켜 숙부를 뵙도록 하오니 호복을 입어주시오.”라 했다.
공자 성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은 본래 이미 왕께서 호복을 입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재주도 없고 병들어 누워 있는 몸이라 조정에 나가 자주 진언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명령하시니 신이 감히 이에 응대함으로써 저의 우매한 충정을 다하고자 합니다. 신이 듣건대 중국은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만물과 재화가 모이는 곳이며, 성현이 교화를 행한 곳이고, 인의가 베풀어진 곳이며, 『시(詩)』, 『서(書)』와 예악(禮樂)이 쓰이는 곳이고, 특이하고 우수한 기능이 시험되는 곳이며, 먼 곳의 사람들이 관람하러 오는 곳이고, 만이(蠻夷)가 모범으로 삼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를 버리시고 먼 나라의 복장을 입으시니 이것은 고대의 교화를 개변함이요, 고대의 도를 바꿈이며,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고, 학자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며, 중국의 풍속과는 동떨어진 것이니, 신은 왕께서 이 일을 신중히 고려하시기를 바랍니다.”라 했다. 사자가 이 말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내가 원래 숙부께서 병이 드셨다고 들었는데 친히 가서 부탁드려야겠다.”라 했다.
王遂往之公子成家, 因自請之, 曰:「夫服者, 所以便用也;礼者, 所以便事也. 聖人観郷而順宜, 因事而制礼, 所以利其民而厚其国也. 夫翦髪文身, 錯臂左衽,32) 甌越之民也.33) 黒歯雕題,34) 卻冠秫絀,35) 大呉之国也. 故礼服莫同, 其便一也. 郷異而用変, 事異而礼易. 是以聖人果可以利其国, 不一其用;果可以便其事, 不同其礼. 儒者一師而俗異, 中国同礼而教離, 況於山谷之便乎? 故去就之変, 智者不能一;遠近之服, 賢聖不能同. 窮郷多異, 曲学多辯. 不知而不疑, 異於己而不非者, 公焉而衆求尽善也. 今叔之所言者俗也, 吾所言者所以制俗也. 吾国東有河、薄洛之水,36) 與斉、中山同之,37) 無舟楫之用. 自常山以至代、上党,38) 東有燕、東胡之境, 而西有樓煩、秦、韓之邊, 今無騎射之備. 故寡人無舟楫之用, 夾水居之民, 将何以守河、薄洛之水;変服騎射, 以備燕、三胡、39)秦、韓之邊. 且昔者簡主不塞晉陽以及上党, 而襄主并戎取代以攘諸胡, 此愚智所明也. 先時中山負斉之彊兵, 侵暴吾地, 係累40)吾民, 引水囲鄗, 微社稷之神霊, 則鄗幾於不守也. 先王醜之, 而怨未能報也. 今騎射之備, 近可以便上党之形, 而遠可以報中山之怨. 而叔順中国之俗以逆簡、襄之意, 悪変服之名以忘鄗事之醜, 非寡人之所望也.」公字成再拝稽首曰:「臣愚, 不達於王之義, 敢道世俗之聞, 臣之罪也. 今王将継簡、襄之意以順先王之志, 臣敢不聴命乎!」再拝稽首. 乃賜胡服. 明日, 服而朝. 於是始出胡服令也.
왕은 이윽고 공자 성의 집에 친히 찾아가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무릇 의복이란 입기에 편리하기 위한 것이고 예의란 일을 도모하는 데 편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인은 지방의 풍속을 관찰해 그에 적합하게 행동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예의를 제정하니 이는 국민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팔에 무늬를 아로새기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은 구월(甌越) 일대 백성들의 습관입니다. 이를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어피(魚皮)로 만든 모자를 쓰고 조악하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것은 오(吳)나라의 풍습입니다. 그러므로 예법이나 복장은 같지 않으나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방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함에 변화가 있고 일이 다르기 때문에 예법도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그 방법을 일치시킬 필요가 없으며, 정말로 일하는데 편리하다면 그 예법을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유자(儒者)는 동일한 스승에게서 전수받지만 예속(禮俗)은 천차만별이며, 중국에도 예의는 동일하나 교화가 서로 차별이 있는데, 하물며 산간벽지의 편리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세에 따른 취사선택의 변화에서는 총명한 사람도 억지로 일치함을 요구할 수 없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의복에 대해는 성인도 일치됨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궁벽한 벽촌은 다른 풍속이 많으며 천박한 견해에는 궤변이 많은 법입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 의견과 달라도 비난하지 않는 것은, 공개적으로 널리 중지를 모아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숙부께서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고 제가 말하는 것은 풍속을 조성하는 이치입니다.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황하와 장수(漳水)가 있어 제나라, 중산국과 공유하고 있으나 선박 시설이 없습니다. 상산(常山)에서부터 대(代), 상당(上黨)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연나라, 동호(東胡)와의 변경이 있고 서쪽으로는 누번, 진(秦)나라, 한나라와의 변경이 있거늘, 지금 기병(騎兵)과 사수(射手)의 방비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인은 선박 시설도 없는데 물가에 사는 주민들이 장차 어떻게 황하와 장수를 지킬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복장을 바꾸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배워 연나라 삼호(三胡), 진(秦)나라, 한나라의 변경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전에 간자께서는 진양에서부터 상당에 이르는 요충지를 두절하지 않으셨고, 양자께서는 융(戎)을 병합하고 대(代)를 점거해 오랑캐 각 부족을 물리치셨으니 이는 어리석은 자나 총명한 자나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력한 병력을 믿고 우리 땅을 침범해 짓밟았으며,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대어 호성(鄗城)을 포위했는데, 만약 사직의 신령이 보우하지 않았더라면 호성은 거의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셨으나, 이 원한은 아직 보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기병과 사수로써 방비하면 가까이는 상당의 지형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고 멀리는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부께서는 풍속에 순종하느라 간자, 양자 두 분의 유지를 어기고 있으니 복장을 개변했다는 평판을 싫어해 호성의 수치를 망각하는 것은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자 공자 성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이 어리석어 왕의 깊은 뜻을 모르고 감히 세속의 견문을 아뢰었으니 이는 신의 잘못입니다. 지금 왕께서 간자, 양자의 유지를 계승하고 선왕의 뜻에 따른다고 하시니 신이 감히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다시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왕은 이에 호복을 하사했다. 다음날 공자 성이 호복을 입고 조회에 나가니 그제에서야 호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공포했다.
趙文、趙造、周秘、41)趙俊皆諫止王毋胡服, 如故法便. 王曰:「先王不同俗, 何古之法? 帝王不相襲, 何礼之循? 虙戯、神農教而不誅, 黄帝、尭、舜誅而不怒. 及至三王, 随時制法, 因事制礼. 法度制令各順其宜, 衣服器械各便其用. 故礼也不必一道, 而便国不必古. 聖人之興也不相襲而王, 夏、殷之衰也不易礼而滅. 然則反古未可非, 而循礼未足多也. 且服奇者志淫, 則是鄒、魯無奇行也;42)俗辟者民易, 則是呉、越無秀士也.43) 且聖人利身謂之服, 便事謂之礼. 夫進退之節, 衣服之制者, 所以斉常民也, 非所以論賢者也. 故斉民與俗流, 賢者與変倶. 故諺曰『以書御者不尽馬之情, 以古制今者不達事之変』. 循法之功, 不足以高世;法古之学, 不足以制今. 子不及也.」遂胡服招騎射.
조문(趙文), 조조(趙造), 주소(周祒), 조준(趙俊)은 모두 왕에게 호복을 입지 말고 옛날 방식이 편하다고 간언하며 말렸다. 그러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왕들의 풍속이 같지 않은데 어떤 옛 방식을 본받을 것인가? 제왕들이 서로 답습하지 않는데 어떤 예법을 따를 것인가?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은 교화에 치중하고 형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황제(黃帝)와 요(堯), 순(舜)은 형벌을 사용하되 잔혹하지 않았소. 삼왕(三王)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법규를 제정했으며 실제 상황에 따라 예법을 규정했소. 법령과 제도가 각각 실제 필요에 부합되었고, 의복과 기계는 각각 그 쓰임에 편리했소. 그러므로 예법 또한 꼭 한 가지 방식일 필요가 없고 국가의 편의를 추구하는 데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할 필요는 없소. 성인이 나타나자 서로 답습하지 않았는데도 왕이 되었으며, 하나라와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예법을 바꾸지 않았는데도 멸망했소. 그렇다면 옛 것을 위반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으며, 옛날의 예법을 따랐다고 해서 찬양할 것도 없소.
만약 기이한 의복을 입는 자는 마음이 음탕하다고 한다면 추(鄒)나라와 노(魯)나라에는 기행(奇行)이 없을 것이며, 풍속이 바르지 못한 곳에서는 백성이 경솔해진다면 오나라, 월나라에는 덕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가 없을 것이오. 하물며 성인께서는 신체에 편리한 것을 의복이라고 하셨고, 일할 때에는 편리한 것을 예법이라고 하셨소. 무릇 진퇴(進退)의 예절과 의복의 제도는 일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지, 현자(賢者)를 논평하기 위한 것이 아니오. 그러므로 평민은 세속과 어울리고 현인은 변혁과 함께 하는 것이오. 옛 속담에 “책 속의 지식으로 말을 모는 자는 말의 속성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옛날 법도로 지금을 다스리는 자는 사리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라고 했으니, 옛날 법도만을 따라가지고는 세속을 초월하기 어렵고, 옛날 학문만을 본받아가지고는 지금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오. 그대들은 이런 점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오.”
마침내 호복을 보급하고 기병과 사수를 모집했다.
二十年, 王略中山地, 至寧葭;44)西略胡地, 至楡中.45) 林胡王献馬. 帰, 使樓緩之秦, 仇液之韓, 王賁之楚, 富丁之魏, 趙爵之斉. 代相趙固主胡, 致其兵.
20년, 왕은 중산국의 영토를 공략해 영가(寧葭)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호(胡) 땅을 침략해 유중(楡中)에 이르렀다. 임호(林胡)의 왕은 말을 헌상했다. 돌아와서 누완(樓緩)을 진(秦)나라에, 구액(仇液)을 초 나라에, 부정(富丁)을 위(魏)나라에, 조작(趙爵)을 제나라에 각각 사신으로 보냈다. 대(代) 땅의 재상 조고(趙固)가 호(胡) 땅에 주둔해 관리하며 호병(胡兵)을 모집했다.
二十一年, 攻中山. 趙秘為右軍, 許鈞為左軍, 公子章為中軍, 王并将之. 牛翦将車騎, 趙希并将胡、代. 趙與之陘,46) 合軍曲陽,47) 攻取丹丘、48)華陽、49)鴟之塞.50) 王軍取鄗、石邑、51)封竜、52)東垣. 中山献四邑和, 王許之, 罷兵. 二十三年, 攻中山. 二十五年, 恵后卒.53) 使周秘胡服傅王子何. 二十六年, 复攻中山, 攘地北至燕、代, 西至雲中、九原.
21년, 중산국을 공격했다. 조소가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허균(許鈞)이 좌군(左軍)을 거느리며, 공자 장(章)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왕이 그들을 통괄해 지휘했다. 우전(牛翦)이 전차와 기병을 이끌고, 조희(趙希)는 호와 대의 병사를 통괄해 거느렸다. 조희는 여러 군사와 더불어 골짜기를 지나 곡양(曲陽)에서 합류해 단구(丹丘), 화양(華陽), 그리고 치(鴟)의 요새를 공격해 점령했다. 무령왕의 군대는 호(鄗), 석읍(石邑), 봉룡(封龍), 동원(東垣) 등지를 점령했다. 중산국이 4개의 성읍을 바치며 강화하기를 원하자, 왕은 이를 허락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23년, 다시 중산국을 공격했다. 25년, 혜후(惠后)가 죽었다. 주소로 하여금 호복을 입고 왕자 조하(趙何)를 훈도하게 했다. 26년, 다시 중산국을 공격했다. 이로써 탈취한 땅이 북쪽으로는 연(燕)과 대(代)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까지 이르렀다.
二十七年五月戊申, 大朝於東宮, 傳国, 立王子何以為王. 王廟見礼畢, 出臨朝. 大夫悉為臣, 肥義為相国, 并傅王. 是為恵文王. 恵文王, 恵后呉娃子也. 武霊王自号為主父.
27년 5월 무신일(戊申日), 동궁에서 성대한 조회를 거행하고 무령왕은 왕자 하(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새 왕은 묘현(廟見)의 예를 마치고 조정에 들어 정사를 처리했다. 대부들은 모두 신하로서 복종하고, 비의는 재상이 되었으며 아울러 새 왕의 사부가 되었다. 그가 바로 혜문왕(惠文王)이다. 혜문왕은 혜후 오왜(吳娃)의 아들이다. 무령왕은 주부(主父)로 자칭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年表云魏敗我趙護.」
2 正義在洺州臨洺県也.
3 正義蓋在河北.
4 正義括地志云:「観沢故城在魏州頓丘県東十八里也.」
5 集解徐広曰:「年表云『秦取中都、西陽、安邑. 十一年, 秦敗我将軍英』. 太原有中都県, 西河有中陽県.」
6 集解徐広曰:「紀年亦云爾.」
7 集解按燕世家, 子之死後, 燕人共立太子平, 是為燕昭王, 無趙送公子職為燕王之事, 當是趙聞燕亂, 遥立職為燕王, 雖使樂池送之, 竟不能就. 索隠燕系家無其事, 蓋是疏也. 今此云「使樂池送之」, 必是憑旧史為説. 且紀年之書, 其説又同, 則裴駰之解得其旨矣.
8 正義本一作「芘」, 音疋婢反.
9 集解綦毋邃曰:「陵苕之草其華紫.」 正義苕音条. 毛詩疏云:「苕, 饒也. 幽州謂之翹饒. 蔓似■豆而細, 葉似蒺■而青, 其華細綠色, 可生食, 味如小豆藿也.」又本草経云:「陵苕生下溼水中, 七八月生, 華紫, 草可以染帛, 煮沐頭, 髪即黒也.」
10 集解綦毋邃曰:「言有命祿, 生遇其時, 人莫知己貴盛盈満也.」 正義按:命, 名也. 嬴, 姓嬴也. 言世衆名其美好, 曾無我好嬴也. 重言「名乎」者, 以談説衆也.
11 集解方言曰:「娃, 美也. 呉有館娃之宮.」
12 集解徐広曰;「古史考云内其女曰娃.」 索隠孟姚, 呉広女也. 広, 舜之後, 故上文云「余思虞舜之勳, 故命其冑女孟姚以配而七代之孫」是已. 然舜後封虞, 在河東大陽山西上虞城是, 亦曰呉城. 虞呉音相近, 故舜後亦姓呉, 非独太伯、虞仲之裔.
13 集解徐広曰:「在常山.」 正義本戦国時趙邑. 戦国策云:「本有宮室而居, 趙武霊王改為九門.」
14 集解徐広曰:「野, 一作『望』.」 正義括地志云:「野台一名義台, 在定州新樂県西南六十三里.」
15 集解徐広曰:「一作『絶瞑』. 音亡丁反.」
16 正義趙州県也.
17 正義黄華蓋西河側之山名也.
18 正義即林胡也.
19 正義地理志云趙分晉, 北有信都、中山, 又得涿郡之高陽、鄚州郷;東有清河、河閒, 又得渤海郡東平舒等七県. 在河以北, 故言「北有燕」.
20 正義趙東有瀛州之東北. 営州之境即東胡、烏丸之地. 服虔云:「東胡, 烏丸之先, 後為鮮卑也.」
21 正義林胡、樓煩即嵐、勝之北也. 嵐、勝以南石州、離石、藺等, 七国時趙邊邑也. 秦隔河也. 晉、洺、潞、沢等州皆七国時韓地, 為並趙西境也.
22 正義寵, 貴寵也. 通, 達理也. 凡為人臣, 有孝弟長幼順明之節制者, 得貴寵也;有補民益主之功業者, 為達理也.
23 正義卒, 子律反, 尽也. 言尽世閒不見補民益主之忠臣也.
24 正義我為胡服, 敵人必困弱也.
25 正義厚, 重也. 往古謂趙簡子、襄子也.
26 正義負, 留也. 言古周公、孔子留衣冠礼義之俗, 今変為胡服, 是負留風俗之譴累也.
27 正義言世有独計智之思慮者, 必任隠逸敖慢之民怨望也.
28 集解徐広曰:「兄弟, 一作『元夷』. 元, 始也;夷, 平也.」
29 正義鄭玄云:「止, 至也. 為人君止於仁, 為人臣止於敬, 為人子止於孝, 為人父止於慈, 與国人交止於信.」按:出猶成也.
30 索隠為句.
31 集解徐広曰:「五帝本紀云幼而徇斉.」
32 索隠錯臂亦文身, 謂以丹青錯畫其臂. 孔衍作「右臂左衽」, 謂右袒其臂也.
33 索隠劉氏云:「今珠崖、儋耳謂之甌人, 是有甌越.」 正義按:属南越, 故言甌越也. 輿地志云「交阯, 周時為駱越, 秦時曰西甌, 文身断髪避竜」. 則西甌駱又在番吾之西. 南越及甌駱皆羋姓也. 世本云「越, 羋姓也, 與楚同祖」是也.
34 集解劉逵曰:「以草染歯, 用白作黒.」鄭玄曰:「雕文謂刻其肌, 以青丹涅之.」
35 集解徐広曰:「戦国策作『秫縫』, 絀亦縫紩之別名也. 秫者, 綦鍼也. 古字多仮借, 故作『秫絀』耳. 此蓋言其女功鍼縷之麤拙也. 又一本作『鮭冠黎■』也.」
36 集解徐広曰:「安平経県西有漳水, 津名薄洛津.」 正義按:安平県属定州也.
37 正義爾時斉與中山相親, 中山、趙共薄洛水, 故言「與斉、中山同之」, 須有舟楫之備.
38 集解徐広曰:「一云『自常山以下, 代、上党以東』.」
39 索隠林胡, 樓煩, 東胡, 是三胡也.
40 正義上音計, 下力追反.
41 集解徐広曰:「戦国策作『紹』. 秘音紹.」
42 索隠按:鄒、魯好長纓, 是奇服, 非其志皆淫僻也, 而有孔門顔、冉之属, 豈是無奇行哉!
43 索隠言方俗僻処山谷, 而人皆改易不通大化, 則是呉、越無秀士, 何得有延州來及大夫種之属哉!
44 索隠一作「蔓葭」, 県名, 在中山.
45 正義勝州北河北岸也.
46 集解徐広曰:「一作『陸』, 又作『陘』. 或宜言『趙與之陘』. 陘者山絶之名. 常山有井陘, 中山有苦陘, 上党有閼與.」 正義與音與. 陘音荊. 陘, 陘山也, 在并州陘県東南十八里. 然趙希并将代、趙之兵, 與諸軍向井陘之側, 共出定州上曲陽県, 合軍攻取丹丘、華陽、鴟上之関.
47 集解徐広曰:「上曲陽在常山, 下曲陽在鉅鹿.」 正義括地志云:「上曲陽故城在定州曲陽県西五里.」按:合軍曲陽, 即上曲陽也, 以在常山郡也.
48 正義蓋邢州丹丘県也.
49 集解徐広曰:「華, 一作『爽』.」 正義括地志云:「北岳有五別名, 一曰蘭台府, 二曰列女宮, 三曰華陽台, 四曰紫台, 五曰太一宮.」按:北岳恆山在定州恆陽県北百四十里.
50 集解徐広曰:「鴟, 一作『鴻』.」 正義上昌之反, 下先代反. 徐広曰「鴟, 一作『鴻』」, 鴻上故関今名汝城, 在定州唐県東北六十里, 本晉鴻上関城也. 又有鴻上水, 源出唐県北葛洪山, 接北岳恆山, 與鴻上塞皆在定州. 然一本作「鳴」字, 誤也.
51 集解徐広曰:「在常山.」 正義括地志云:「石邑故城在恆州鹿泉県南三十五里, 六国時旧邑.」
52 正義括地志云:「封竜山一名飛竜山, 在恆州鹿泉県南四十五里. 邑因山為名.」
53 索隠按:謂武霊王之前后, 太子章之母, 恵文王之嫡母也. 恵后卒後, 呉娃始當正室, 至孝成二年称「恵文后卒」是也. 而下文又云「孟姚卒後, 何寵衰, 欲并立」, 亦誤也.
권43. 조세가(趙世家) 혜문왕(恵文王)
主父欲令子主治国, 而身胡服将士大夫西北略胡地, 而欲従雲中、九原直南襲秦, 於是詐自為使者入秦. 秦昭王不知, 已而怪其状甚偉, 非人臣之度, 使人逐之, 而主父馳已脱関矣. 審問之, 乃主父也. 秦人大驚. 主父所以入秦者, 欲自略地形, 因観秦王之為人也.
주부는 아들에게 국정을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호복을 입고 대부들을 거느려서 서북 방면의 호(胡) 땅을 공략했다. 운중과 구원에서 곧바로 진(秦)나라를 습격하고자, 자신이 거짓으로 사자로 위장해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 소왕(秦昭王)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나, 얼마 후 그의 모습이 매우 위풍당당해 신하된 자의 풍채가 아니었음을 수상히 여기고 사람을 보내 추적하게 했다. 그러나 주부는 말을 달려 이미 진나라의 관문을 벗어났다. 자세히 조사한 후에야 그가 주부라는 것을 알고서, 진나라 사람들은 매우 경악했다. 주부가 진(秦)나라에 잠입한 이유는 친히 지형을 관찰하고 아울러 진왕(秦王)의 사람됨을 살펴보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恵文王1)二年, 主父行新地, 遂出代, 西遇樓煩王於西河而致其兵.
혜문왕 2년, 주부가 새로 확장한 땅을 순시하다가 곧 대(代) 땅을 떠나 서쪽으로 향해 서하(西河)에서 누번왕(樓煩王)을 만나 그의 병사를 징발했다.
三年, 滅中山, 遷其王於膚施.2) 起霊寿,3) 北地方従, 代道大通. 還帰, 行賞, 大赦, 置酒酺五日, 封長子章為代安陽君.4) 章素侈, 心不服其弟所立. 主父又使田不礼相章也.
3년, 중산국을 멸하고 그 왕을 부시(膚施)로 이주시켰다. 영수궁(靈壽宮)을 지었으며 이로부터 북방 지역이 조나라에 귀속되어 대 땅으로 향하는 길이 막힘없이 잘 통하게 되었다. 돌아와서는 논공행상을 하고 대사면을 행했으며, 5일 동안 주연을 베풀고 장자(長子) 장(章)을 대 땅의 안양군(安陽君)으로 봉했다. 장은 본래 사치스러웠고 내심으로 그 동생이 왕위에 오른 것에 불복했다. 주부는 또 전불례(田不禮)를 보내 장을 보좌하게 했다.
李兌謂肥義曰:「公子章彊壮而志驕, 党衆而欲大, 殆有私乎? 田不礼之為人也, 忍殺而驕. 二人相得, 必有謀陰賊起, 一出身徼幸. 夫小人有欲, 軽慮浅謀, 徒見其利而不顧其害, 同類相推, 倶入禍門. 以吾観之, 必不久矣. 子任重而勢大, 亂之所始, 禍之所集也, 子必先患. 仁者愛萬物而智者備禍於未形, 不仁不智, 何以為国? 子奚不称疾毋出, 傳政於公子成? 毋為怨府, 毋為禍梯.」肥義曰:「不可, 昔者主父以王属義也, 曰:『毋変而度, 毋異而慮, 堅守一心, 以歿而世.』義再拝受命而籍之.5) 今畏不礼之難而忘吾籍, 変孰大焉. 進受厳命, 退而不全, 負孰甚焉. 変負之臣, 不容於刑. 諺曰『死者复生, 生者不愧』.6) 吾言已在前矣, 吾欲全吾言, 安得全吾身! 且夫貞臣也難至而節見, 忠臣也累至而行明. 子則有賜而忠我矣, 雖然, 吾有語在前者也, 終不敢失.」李兌曰:「諾, 子勉之矣! 吾見子已今年耳.」涕泣而出. 李兌數見公子成, 以備田不礼之事.
이태(李兌)가 비의에게 “공자 장은 신체가 건장하고 마음이 교만하며 따르는 무리가 많고 야심이 크니, 아마도 사심(私心)이 있겠지요? 또 전불례의 사람됨은 잔인하고 오만합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 틀림없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일단 일을 벌이면 요행을 바랄 것입니다. 무릇 소인에게 야심이 있으면 생각이 경솔하고 책략이 천박해, 단지 그 이익만을 생각할 뿐 그 재난은 고려하지 않으니 유유상종해 서로 부추김으로써 함께 재해의 심연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그럴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책임이 막중하고 권세가 크므로 변란이 당신에게서 시작되어 화가 당신에게로 모여들 것이니, 당신은 틀림없이 제일 먼저 해를 입을 것입니다. 인자(仁者)는 만물을 두루 사랑하고 지자(智者)는 재해가 아직 형성되기 전에 방비하나니, 인자하지도 않고 총명하지도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어찌해 병을 핑계삼고 두문불출해 정사를 공자 성(成)에게 맡기지 않습니까? 원망의 집합지가 되지도 말고 재앙의 전달자가 되지도 마십시오.”라 했다.
그러자 비의는 “안 되오. 당초 주부께서 왕을 나에게 부탁하시면서 ‘너의 법도를 바꾸지 말고 너의 생각을 달리하지 말며 한마음을 굳게 지키면서 너의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라고 하셨을 때, 나는 재배해 명을 받고 기록해 두었소. 이제 전불례의 난을 두려워해 나의 기록을 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변절이 어디 있겠소? 조정에 나가 엄숙한 사명을 받고, 물러나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심한 배신이 어디 있겠소? 변절하고 배신한 신하는 형벌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속담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산자는 그에 대해서 결코 부끄럽지 않다’라는 말이 있소. 내가 이미 말한 이상에는 나의 언약을 완전히 이루고자 하니, 어찌 일신의 안전을 구하겠소? 하물며 지조 있는 신하는 재난이 닥쳐야 절조가 나타나고 충신은 재앙에 연루되어야 행위가 분명해진다고 했소. 당신은 이미 나에게 가르침을 베풀었고 충고도 했지만, 나는 이미 내가 한 말에 끝까지 거스르지 않는 행동을 할 것이오.”라 했다.
이태가 “좋습니다. 최선을 다하십시오. 제가 당신을 볼 수 있는 것도 올해뿐이겠군요.”라고 말하고는 흐느끼며 나갔다. 이태는 여러 차례 공자 성을 만남으로써 전불례의 반란에 방비했다.
異日肥義謂信期7)曰:「公子與田不礼甚可憂也. 其於義也声善而実悪, 此為人也不子不臣. 吾聞之也, 姦臣在朝, 国之残也;讒臣在中, 主之蠹也. 此人貪而欲大, 内得主而外為暴. 矯令為慢, 以擅一旦之命, 不難為也, 禍且逮国. 今吾憂之, 夜而忘寐, 飢而忘食. 盗賊出入不可不備. 自今以來, 若有召王者必見吾面, 我将先以身當之, 無故而王乃入.」信期曰:「善哉, 吾得聞此也!」
다른 날, 비의가 신기(信期)에게 “공자 장과 전불례는 정말 우환거리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사실은 악독하니, 그들의 사람됨은 자식으로서는 불효하고 신하로서는 불충합니다. 제가 듣기에 간신이 조정에 있으면 국가의 재앙이요, 참신(讒臣)이 궁중에 있으면 군주의 좀벌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야심이 크며 안에서는 군주의 총애를 얻으면서 밖에서는 잔악하고 포악합니다.
그들에게는 왕명을 사칭하며 오만무례하게 굴다가 갑작스러운 명령을 마음대로 내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재난이 장차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는 이 일이 걱정되어 밤이 되어도 잘 것을 잊고 배가 고파도 먹는 것을 잊고 삽니다. 도적이 출몰하고 있으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왕을 뵙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먼저 저를 만나도록 할 것입니다. 저가 먼저 몸으로써 그를 막아보고 변고가 없으면 왕께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신기가 “좋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어서요.”라 했다.
四年, 朝群臣, 安陽君亦來朝. 主父令王聴朝, 而自従旁観窺群臣宗室之礼. 見其長子章■然也, 反北面為臣, 詘於其弟, 心憐之, 於是乃欲分趙而王章於代, 計未決而輟.
4년, 조회를 열어 신하들을 부르니 안양군(安陽君)도 와서 조현했다. 주부가 왕에게 정사를 처리하게 하면서 자신은 옆에서 신하와 왕실 종친들의 예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장자 장이 의기소침해 오히려 신하로서 북면(北面)하고 동생의 아래에 굴신(屈身)한 것을 보고서는 마음속으로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조나라를 양분해 장을 대(代)의 왕으로 봉하려고 했으나, 이 계획은 결정도 되지 않은 채 중지되었다.
主父及王游沙丘, 異宮,8) 公子章即以其徒與田不礼作亂, 詐以主父令召王. 肥義先入, 殺之. 高信即與王戦. 公子成與李兌自国至, 乃起四邑之兵入距難, 殺公子章及田不礼, 滅其党賊而定王室. 公子成為相, 号安平君, 李兌為司冦. 公子章之敗, 往走主父, 主主開之,9) 成、兌因囲主父宮. 公子章死, 公子成、李兌謀曰:「以章故囲主父, 即解兵, 吾属夷矣.」乃遂囲主父. 令宮中人「後出者夷」, 宮中人悉出. 主父欲出不得, 又不得食, 探爵鷇而食之,10) 三月余而餓死沙丘宮.11) 主父定死, 乃発喪赴諸侯.
주부가 왕과 함께 사구(沙丘)에 유람을 갔을 때 서로 다른 궁에 묵었는데, 공자 장이 그의 도당과 전불례를 믿고 난을 일으켜 주부의 명이라고 사칭해 왕을 불렀다. 먼저 들어간 비의가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자, 고신(高信)은 즉시 왕과 함께 공자 장의 병사에 대응해 전투를 했다. 도성에서 달려온 공자 성과 이태가 네 개 읍의 병사를 일으켜 변란에 대항해, 공자 장과 전불례를 죽이고 그들의 도당을 멸해 왕실을 안정시켰다.
공자 성은 재상이 되어 안평군(安平君)이라고 불리고, 이태는 사구(司寇)가 되었다. 이에 앞서 공자 장이 패해 주부가 있는 곳으로 달아나자 주부가 그를 받아들이니, 공자 성과 이태는 주부의 궁을 포위했다. 결국 공자 장이 죽자, 공자 성과 이태는 “공자 장 때문에 주부를 포위했는데 만약 군대를 철수시킨다면 우리는 멸족을 당할 것이다.”라고 의논하고는 여전히 주부를 포위했다. 궁중 사람들에게 “궁에서 늦게 나오는 자는 멸족시키겠다.”라고 명을 내리니 궁중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주부는 나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또한 먹을 것이 없어서 참새 새끼를 구해 먹다가 석 달여 후에 사구궁(沙丘宮)에서 죽었다. 주부가 죽은 것이 확실해지자, 비로소 발상(發喪)하고 제후들에게 부음을 전했다.
是時王少, 成、兌専政, 畏誅, 故囲主父. 主父初以長子章為太子, 後得呉娃, 愛之, 為不出者數歳, 生子何, 乃廃太子章而立何為王. 呉娃死, 愛弛, 憐故太子, 欲両王之, 猶予未決, 故亂起, 以至父子倶死, 為天下笑, 豈不痛乎!12)
그 당시에 혜문왕이 어렸던 관계로, 공자 성과 이태가 대권을 장악하고 주살될 것이 두려워 주부를 포위했던 것이다. 주부는 원래 장자 장을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오왜를 얻자 그녀를 총애했다. 그래서 몇 년을 그녀의 궁에서 떠나지 않다가 아들 하(何)를 낳자, 태자 장을 폐위시키고 하를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오왜가 죽자, 하에 대한 사랑이 식고 원래의 태자를 불쌍히 여겨, 두 사람을 모두 왕으로 삼으려다가 우물쭈물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난이 일어나서 부자가 모두 죽는 지경에 이르러,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主父死恵文王立立)五年, 與燕鄚、易.13) 八年, 城南行唐.14) 九年, 趙梁将, 與斉合軍攻韓, 至魯関下.15) 及十年, 秦自置為西帝. 十一年, 董叔與魏氏伐宋, 得河陽於魏. 秦取梗陽.16) 十二年, 趙梁将攻斉. 十三年, 韓徐為将, 攻斉. 公主死.17) 十四年, 相国樂毅将趙、秦、韓、魏、燕攻斉,18) 取霊丘.19) 與秦会中陽.20) 十五年, 燕昭王來見. 趙與韓、魏、秦共撃斉, 斉王敗走, 燕独深入, 取臨菑.
5년, 막(鄚)과 역(易)을 연나라에게 주었다. 8년, 남행당(南行唐)에 성을 쌓았다. 9년, 조량(趙梁)이 장군이 되어 제나라 군사와 연합, 한나라를 공격해 노관(魯關) 아래까지 이르렀다. 10년이 되자, 진(秦)나라는 스스로 서제(西帝)로 자칭했다. 11년, 동숙(董叔)은 위씨(魏氏)와 송나라를 정벌해, 위(魏)나라에게서 하양(河陽)을 얻었다. 진(秦)나라가 경양(梗陽)을 탈취했다. 12년, 조량이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했다. 13년, 한서(韓徐)는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공주(公主)가 죽었다. 14년, 재상 악의(樂毅)가 조(趙), 진(秦), 한(韓), 위(魏), 연(燕) 나라의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해 영구(靈丘)를 빼앗았다. 진(秦)나라와 중양(中陽)에서 회합했다. 15년, 연 소왕(燕昭王)이 와서 회견했다. 조나라는 한(韓), 위(魏), 진(秦) 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해 제나라가 패퇴했다. 연나라 군대는 단독으로 깊숙이 진공해 임치(臨菑)를 점령했다.
十六年, 秦复與趙數撃斉, 斉人患之. 蘇厲為斉遺趙王書曰:
16년, 진(秦)나라가 다시 조나라와 여러 차례 제나라를 공격하니, 제나라 사람들이 매우 걱정했다. 소려(蘇厲)가 제나라를 위해 조나라 왕에게 서신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臣聞古之賢君, 其徳行非布於海内也, 教順非洽於民人也, 祭祀時享非數常於鬼神也. 甘露降, 時雨至, 年谷豊孰, 民不疾疫, 衆人善之, 然而賢主図之.
“신이 듣건대, 고대의 현군(賢君)은 그의 덕행이 천하에 퍼지지도 않았고, 교화가 모든 백성에게 널리 베풀어지지도 않았으며, 사시사철의 제사 공품(供品)도 항상 조상에게 바쳐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감로(甘露)가 내리고 때에 알맞게 비가 오며 오곡이 풍성하고 백성들은 역질에 걸리지 않아, 모든 사람이 이를 찬양했지만, 오히려 현명한 군주는 더욱더 분발했다고 합니다.
今足下之賢行功力, 非數加於秦也;怨毒積怒, 非素深於斉也. 秦趙與国, 以彊徴兵於韓, 秦誠愛趙乎? 其実憎斉乎? 物之甚者, 賢主察之. 秦非愛趙而憎斉也, 欲亡韓而呑二周, 故以斉餤天下. 恐事之不合, 故出兵以劫魏、趙. 恐天下畏己也, 故出質以為信. 恐天下亟反也, 故徴兵於韓以威之. 声以徳與国,21) 実而伐空韓, 臣以秦計為必出於此. 夫物固有勢異而患同者, 楚久伐而中山亡, 今斉久伐而韓必亡. 破斉, 王與六国分其利也. 亡韓, 秦独擅之. 収二周, 西取祭器, 秦独私之. 賦田計功, 王之獲利孰與秦多?
지금 물론 대왕에게는 선행과 공로가 있습니다만 그것들이 은혜로서 항상 진(秦)나라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진나라도 제나라에 대해서 원래 그렇게 심한 원망이나 쌓인 분노가 특별히 심한 것은 아닙니다. 진(秦), 조(趙) 양국은 서로 연합해 강제로 한(韓)나라에 출병하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이 진나라가 진실로 조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진나라가 정말로 제나라를 증오하는 것입니까? 일이 너무 도에 지나치다면 현명한 군주는 냉정하게 관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나라는 결코 조나라를 사랑하거나 제나라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고, 한나라를 멸망시켜 동주(東周), 서주(西周)의 두 소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제나라를 미끼로 삼아 천하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군대를 동원해 위(魏)나라와 조나라를 협박하고 있으며, 천하의 제후들이 자기를 경외할까 걱정되자 인질을 보내 신임을 얻고, 또 천하의 제후들이 금방 반기를 들까 두려워서 한나라에서 군사를 징집해 위협했습니다. 겉으로는 우방(友邦)에 덕을 베푼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력이 비어 있는 한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니, 신은 진(秦)나라의 계책이 틀림없이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세상일은 본래 형세가 다르면서도 우환은 같은 법입니다. 초 나라가 오랫동안 공격을 당했으나 중산국이 멸망했는데, 이제 제나라가 오랫동안 공격을 당하니 한나라는 틀림없이 멸망할 것입니다. 제나라를 무찌르면 왕께서는 여섯 나라와 그 이익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라를 멸망시키면 진(秦)나라에서 그것을 독점할 것이며, 또 동주와 서주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주(周) 왕실의 제기(祭器)를 빼앗으면 진나라가 혼자 그것을 소유할 것입니다. 전지(田地)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라도 그 효과를 따지는 법이거늘, 왕께서 얻는 이익은 진(秦)나라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많겠습니까?
説士之計曰:「韓亡三川,22) 魏亡晉国,23) 市朝未変而禍已及矣.」燕尽斉之北地, 去沙丘、鉅鹿斂三百里,24) 韓之上党去邯鄲百里, 燕、秦謀王之河山, 閒三百里而通矣. 秦之上郡25)近挺関, 至於楡中者千五百里, 秦以三郡攻王之上党,26) 羊腸之西,27) 句注之南,28) 非王有已. 踰句注, 斬常山而守之, 三百里而通於燕, 代馬胡犬不東下,29) 昆山之玉不出, 此三宝者亦非王有已. 王久伐斉, 従彊秦攻韓, 其禍必至於此. 願王孰慮之.
유사(游士)의 분석에 의하면 “한나라가 삼천(三川)을 잃고 위(魏)나라가 원래 진(秦)나라 땅이었던 지역을 잃으면, 얼마 안 있어 재앙이 이미 조나라에 미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연나라가 제나라의 북부 지역을 모두 점령하면, 조나라의 사구(沙丘), 거록(鉅鹿)까지는 3백 리도 되지 않으며, 한나라의 상당(上黨)에서 조나라의 한단까지는 1백 리입니다. 연나라와 진(秦)나라가 왕의 영토를 빼앗으려 한다면 지름길로 3백 리이면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秦)나라의 상군(上郡)은 정관(挺關)에서 가까우며, 유중(楡中)까지는 1천 5백리이니 진나라가 삼군(三郡)의 병력으로써 왕의 상당(上黨)을 공격한다면 양장(羊腸) 서쪽과 구주산(句注山) 남쪽의 땅은 왕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구주산을 넘어 상산을 차단하고 그곳에 주둔한다면 3백 리 거리로 연나라와 직통할 수 있으며 대 땅의 준마와 호 땅의 양견(良犬)은 더 이상 동쪽 조나라로 내려오지 못하고, 곤산(昆山)의 옥 또한 조나라로 운반되어 나오지 못할 것이니, 이 세 가지 보물도 역시 왕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오랫동안 제나라를 정벌하셨고 강력한 진(秦)나라를 따라 한나라를 공격했으니 그 화가 틀림없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且斉之所以伐者, 以事王也;30)天下属行,31) 以謀王也. 燕秦之約成而兵出有日矣. 五国三分王之地,32) 斉倍五国之約而殉王之患,33) 西兵以禁彊秦, 秦廃帝請服,34) 反高平、根柔於魏,35) 反巠分、36)先兪於趙.37) 斉之事王, 宜為上佼,38) 而今乃抵罪,39) 臣恐天下後事王者之不敢自必也. 願王孰計之也.
하물며 제나라가 정벌을 당한 이유는 (제나라가) 대왕을 섬겼기 때문이며, 천하의 제후들이 연합해 군대를 일으킨 것은 대왕을 도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연나라와 진(秦)나라가 맹약해 출병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머잖아 다섯 나라가 대왕의 토지를 삼분(三分)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나라는 다섯 나라의 맹약을 어기고 대왕의 우환을 없애드리기 위해서 희생하겠습니다. 즉 서쪽으로 출병해 강한 진(秦)나라를 제압하고, 진나라로 하여금 제호(帝號)를 폐지하게 하고 고평(高平)과 근유(根柔)를 위(魏)나라에 돌려주도록 하며 경분(巠分)과 선유(先兪)를 조나라에 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제나라는 대왕을 섬기는 것이 최상의 친교(親交)가 틀림없는데, 지금 대왕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치죄하시니 신은 후에 대왕을 섬기려는 천하 사람들이 자신 있게 실행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
今王毋與天下攻斉, 天下必以王為義. 斉抱社稷而厚事王, 天下必尽重王義. 王以天下善秦, 秦暴, 王以天下禁之, 是一世之名寵制於王也.
於是趙乃輟, 謝秦不撃斉.
이제 대왕께서 천하 제후들과 더불어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으신다면, 천하는 틀림없이 대왕께서 정의롭다고 여길 것입니다. 제나라는 사직을 보존했기에 더욱더 충실히 대왕을 받들 것이며, 천하 제후들은 틀림없이 대왕의 정의로우심을 존중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천하의 제후를 거느리고서 진(秦)나라와 우호를 다지실 수 있으며, 만약 진나라가 포악하게 굴면 천하의 제후들을 거느리고서 그 나라를 제지하실 수도 있으니, 이는 일대의 영예와 영광이 모두 대왕께서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조나라는 군대를 철수시키고, 진(秦)나라의 제의를 거절해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王與燕王遇. 廉頗将, 攻斉昔陽,40) 取之.41)
조나라 왕은 연나라 왕과 만났다. 염파(廉頗)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석양(昔陽)을 공격해 탈취했다.
十七年, 樂毅将趙師攻魏伯陽.42) 而秦怨趙不與己撃斉, 伐趙, 抜我両城. 十八年, 秦抜我石城.43) 王再之衛東陽, 決河水,44) 伐魏氏. 大潦, 漳水出. 魏冉來相趙. 十九年, 秦(敗)[取]我二城. 趙與魏伯陽. 趙奢将, 攻斉麦丘, 取之.
17년, 악의가 조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위(魏)나라의 백양(伯陽)을 공격했다. 진(秦)나라는 조나라가 자기 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원망해 조나라를 공격하고 두개의 성을 빼앗았다. 18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석성(石城)을 빼앗았다. 조나라 왕은 다시 위(衛)나라의 동양(東陽)으로 가서 황하의 물줄기를 터서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큰 비가 내려 장수(漳水)가 범람했다. 진(秦)나라의 위염(魏冉)이 와서 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19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두 성을 탈취했다. 조나라가 백양을 위(魏)나라에게 돌려주었다. 조사(趙奢)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맥구(麥丘)를 공격해 점령했다.
二十年, 廉頗将, 攻斉. 王與秦昭王遇西河外.45)
20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왕은 진 소왕(秦昭王)과 서하(西河)에서 만났다.
二十一年, 趙徙漳水武平西.46) 二十二年, 大疫. 置公子丹為太子.
21년, 조나라는 장수의 물줄기를 바꾸어 무평(武平) 서쪽으로 흐르게 했다. 22년, 역질이 크게 유행했다. 공자 단(丹)을 태자로 삼았다.
二十三年, 樓昌将, 攻魏幾,47) 不能取. 十二月, 廉頗将, 攻幾, 取之. 二十四年, 廉頗将, 攻魏房子,48) 抜之, 因城而還. 又攻安陽, 取之. 二十五年, 燕周49)将, 攻昌城、50)高唐, 取之. 與魏共撃秦. 秦将白起破我華陽,51) 得一将軍. 二十六年, 取東胡欧代地.52)
23년, 누창(樓昌)이 장수가 되어 위(魏)나라의 기(幾)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12월, 염파가 장수가 되어 기를 공격해 점령했다. 24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위(魏)나라의 방자(房子)를 공격해 빼앗고 거기에 성을 쌓은 다음 돌아왔다. 또 안양(安陽)을 공격해 점령했다. 25년, 연주(燕周)가 장수가 되어 제나라의 창성(昌城)과 고당(高唐)을 공격해 탈취했다. 위(魏)나라와 함께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진(秦)나라의 장수 백기(白起)는 조나라 군사를 화양(華陽)에서 쳐부수고 장수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26년, 동호(東胡)에게 점령당했던 대(代) 땅을 도로 빼앗았다.
二十七年, 徙漳水武平南. 封趙豹為平陽君.53) 河水出, 大潦.
27년, 장수의 물줄기를 바꾸어 무평의 남쪽으로 흐르게 했다. 조표(趙豹)를 평양군(平陽君)으로 봉했다. 황하가 범람해 큰 홍수가 났다.
二十八年, 藺相如伐斉, 至平邑.54) 罷城北九門大城.55) 燕将成安君公孫操弑其王.56) 二十九年, 秦、韓相攻, 而囲閼與.57) 趙使趙奢将, 撃秦, 大破秦軍閼與下, 賜号為馬服君.58)
28년, 인상여(藺相如)가 제나라를 공격해 평읍(平邑)에 이르더니, 행진을 멈추고는 북쪽 구문(九門)에 큰 성을 쌓았다. 연나라 장수 성안군(成安君) 공손조(公孫操)가 그의 왕을 시해했다. 29년, 진(秦)나라와 한나라가 연합해 조나라를 공격해 연여(閼與)를 포위했다. 조나라는 조사를 장수로 삼아 진(秦)나라를 공격해 연여성 아래에서 진나라 군사를 대파하니 왕은 조사에게 마복군(馬服君)이라는 호를 하사했다.
三十三年, 恵文王卒, 太子丹立, 是為孝成王.
33년, 혜문왕이 죽고 태자 단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효성왕(孝成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