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씨앗
하희경
“시드볼트”란 곳이 있다. 세상의 모든 씨앗을 모아둔 곳을 말한다. 노아의 방주 같은 곳으로,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전제 아래 식물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든 장소다. 씨앗이란 씨앗은 모두 모아 둔 곳으로 전 세계에 두 개뿐인데, 그중 하나가 경북 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있다고 한다. 시드볼트는 분명 모든 씨앗을 모아두는 곳이라 했으니, 독이 있는 씨앗도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갑자기 우주 어딘가에 인간을 모아둔 시드볼트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망가졌을 때, 인간이라는 씨가 마르지 않게 보존하는 장소가 있을 것만 같은 엉뚱한 생각과 함께 악의 씨앗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최근 들어 대한민국은 ‘묻지 마 범죄’의 온상이 된 것 같다. 눈만 뜨면 흉악한 뉴스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친다. 넘치는 범죄들 중에서 한동안 나의 신경을 깔짝거리던 사건이 있다. 지난해 신림동 야산에서 여성을 무차별 폭행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단지 “강간하고 싶어서 그랬다”는 남자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있다. 이 뉴스가 유난히 마음에 걸렸던 건 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신림동이라는 지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내 집 마당은 신림동 산길이었다. 나는 관악산을 둘러싼 허름한 동네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판잣집에서 자랐다. 집 밖으로 난 삐뚤빼뚤한 계단을 몇 개 오르면 바로 산이어서, 지게지고 옹달샘에서 물 길어 나르던 기억이 쟁쟁하다. 어지간히 허기진 날들이었지만 아카시아 꽃 피는 계절에는 온 동네가 달달해지곤 했다. 그래서일까, 마디마디 옹이진 시간 속에서도 흑백사진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그렇게 나에게 특별한 장소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죽였다.
왜일까, 사람이란 존재는 근본적으로 동물에 속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남을 헤치지 않고, 도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동물이 아닌 식물에 속하는 걸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해서, 어린 시절 학대받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 과연 그들의 말대로 성장과정 때문일까. 살다보면 유난히 살기 품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틈만 나면 남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골라 하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해야 하는 사람.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런 사람은 대부분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정말 그래서라면, 어린 시절이 문제라면, 나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헤치게 되는 것일까.
인정할 수 없다. 강하게 부정하는 순간,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다. 나도 가슴에 비수를 품고 살았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날마다 숫돌에 간 것처럼 예리하고 번뜩이는 칼날을 품고 살았다. 피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잠들지 않았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모조리 부셔버리고 싶었고, 화산같이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숨을 헐떡이던 시간이 있었다. 수시로 내가 악의 씨앗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말이다.
작은 온기마저 느낄 수 없는 가정이 싫었다. 퀴퀴하고 어두운 집이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길 원했다.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을 안전한 집과 성실하게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 돌봐줘야 할 남동생이 아닌 평생 내 편이 되어 줄 오빠와 언니가 있었으면 싶었다. 멀쩡한 가족들이 없어지고 내 입맛에 맞는 새로운 가정을 원하는 것, 그건 살의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 상태에서 어떤 무언가가 나를 지켜주고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어쩌면 뉴스에 나오는 흉악범들 중에 나도 속했을지 모른다.
시드볼트에 씨앗을 보존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한다. 먼저 보존해야 할 씨앗을 선별해 불순물을 제거한 뒤 수분을 뺀다. 영하 20도의 시드볼트에서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게 하려면 수분을 5%만 이하로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X-선을 이용해 죽은 씨앗을 골라낸 다음 특수 제작한 병에 담아 저장한다. 시드볼트 얘기를 들으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사건 하나하나가 어쩌면, 인간으로 보존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우주 저 너머 먼 곳에 있는 인간 시드볼트에 저장되기 위해, 끊임없이 선별 당하고 피 말리는 고통을 이겨내면서, 살아있는 인간인지 죽은 인간인지를 시험 당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너무 엉뚱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 인간 시드볼트가 있다면, 부디 내 안에 있는 악의 씨앗은 보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