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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폄하(?)' 유시민만 했나?
강만길· 고종석· 김근태· 김훈· 문성근· 정연주· 진중권· 홍세화가 말한 기독교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의 기독교 관련 발언이 정치 쟁점화될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본보(<복음과상황>)에 연재된 ‘지유철의 선택과 옹호’ 시리즈가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이 코너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건강교회운동본부장과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을 역임한 지강유철 전 본보 기자가 2000년 7월호("DJ D.O.C')부터 2003년 12월까지 연재한 인터뷰 기획으로, 유 내정자는 2002년 9월호의 주인공이었다.
이 코너에서 지강 전 기자가 접촉한 인사는 현 대통령인 노무현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을 포함, 시민·사회·학계·언론계·예술계 인사 등을 두루 망라한다. 지강 전 기자가 선별한 인터뷰 대상자들은 당대 '시대정신을 이끄는 인물'들로 분석된다.
본보는 이 중 주요 인사들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 부분을 모아 묶었다. 내용 중에는 우리 시대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된 배경이 담겨있다.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당시 시사평론가, 2001년 1월호)
“베를린 와서 교회 자랑하던 김선도 목사 설교에 기겁했다”
-내친김에 신앙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죠.
제도교회하고 잘 안 맞기는 합니다만 제게도 영성은 있습니다. 종교가 있으려면 제도교회는 있어야 되거든요. 종교가 제도화되면 거기엔 나름대로의 부패와 탈선이 불가피하고요. 영성이 있다고 제도교회를 버리고 사이비 종교를 만들 수도 없지 않습니까(웃음). 오랫동안 교회에 안 나가다가 지금은 엄마 따라 주일에 한 번씩 가서 앉아 있다가 옵니다. 나가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에 제 아이는 계속 교회 보낼 생각이고요. 시편 23편을 좋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찬송가 중에는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라는 찬송을 못 잊고요. 아버지가 사고의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면서 우울증에 빠졌었거든요. 몸이 안 좋으시니 믿음도 약해지더라고요. 식사 때마다 그 찬송을 불렀지요. 지금도 그 찬송을 하면 옛날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납니다. 어려서 성경을 배웠다는 게 저는 참 다행스럽습니다. 구약의 이야기들은 스케일이 다르죠. 스토리가 끝내주잖아요. 유학을 해보니까 단순히 성서를 읽은 사람하고 배운 사람하곤 많이 틀리더군요. 저는 어려서 하도 많이 들어 가지고 좔좔 외우거든요. 서양철학이 기본적으로 기독교하고 연관이 있으니까 철학을 공부하면서 유리했죠. 기독교 신앙 때문에 서양문화의 멘탈리티를 파악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요.
-아버지가 어떤 사고를…
아버지가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공항동에서 개척교회를 하셨는데 교회 다 지어놓고 정식으로 봉급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지 않아 연탄가스를 마셨습니다. 후유증으로 가족들을 2년간 들들 볶으시다가 돌아가셨죠. 봉급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피아노 학원을 하시며 돈을 버시던 엄마가 굉장히 허탈해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나는 건 고생했던 거밖에 없어요. 지겨웠죠. 집안에 강대상이나 헌금 바구니 같은 이상한 물건이 있고, 다른 애들 집과는 달리 우리 집엔 교회 간판이 붙어 있었어요. 굉장히 창피했습니다. 중학생이 되니 모든 생활이 다 교회중심이었습니다. 주일 아침·저녁예배·수요일 예배에 토요일 학생 예배까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거기서 해방이 됐죠!
-교회 봉사는 어떻게 하십니까?
목사님께서 일을 시키시는데 뺀질뺀질 도망 다닙니다. 코드가 잘 안 맞아요. 일상적인 활동, 예컨대 제 전공을 살리는 어떤 일을 맡겼으면 좋겠는데, 교회에선 제 전공을 할 게 없잖아요.
-교회가 기독교 세계관으로 성도들을 훈련시키지 못했군요(웃음).
전 큰 교회는 안 나갑니다. 정서적으로 안 맞습니다. 교회가 클 수는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조그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라는 게 원래는 종교적 현상이자 문화적 현상이거든요. 중세 때도 교회가 못된 짓만 한 게 아니라, 문화 전체를 다 가지고 오거든요. 고딕성당을 남겼고, 로마네스크 성당을 남겼고, 수많은 성화들과 성상들, 그리고 위대한 음악을 남겼거든요. 그걸 살려야 합니다. 성가대는 사람들의 예술성을 발견하거나 쌓을 수 있게 만드는 몇 안 되는 가능성 중에 하나죠. 건축도 제발 그놈의 합리성만 따질게 아니라, 분위기 같은 걸 잘 살려야 하겠지요. 교회건축이라는 게 ‘공동체 속에서 하나의 문화다’라는 생각이 중요한 거죠. 다른 건축은 이윤 동기를 배제하기 어렵겠지만 교회는 어느 정도 돈도 생겼는데 사회의 문화에 아주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식들도 좀 가져야 되는 거 아닙니까. 요즘은 절에 가도 염불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옵니다. 금속성 스피커! 목탁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거죠. 절 건물이 얼마나 예쁩니까. 그런데 시뻘건 글씨의 현수막이 웬 말입니까!
-어떤 형태로든 특권과 계급이 있는 교회는 병든 교회거나 교회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한국 교회 내의 파시즘적 요소 내지 권위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쎄요. 교회를 열심히 나가는 편이 아니라서… 조그만 교회에 있다 보니까 피해가 덜한 편인 듯합니다. 옛날에 광림교회의 김선도 목사가 베를린 와서 설교를 하는데 정말 못 듣겠더라고요. 끔찍해서. 우리 교회의 헌금이 얼만데, 그 중에 얼마를 아프리카에 뭐를 짓는데 썼다는 둥, 자기 자랑을 막 하는 거예요. 조그만 교회 와 가지고 말이지. 엄청 열 받았죠. 하나님 돈인데 왜 김선도 목사가 자랑을 하죠? 대단치도 않은 사람을 큰 교회 목사라고 불러다가 설교시킨 주최 측도 짜증 납니다. 조그만 교회에도 좋은 목사님 많잖아요. 큰 교회 목사님들 설교는 만날 그거거든요. 완전히 남대문 장사꾼들처럼 정형화된 패턴. 목소리도 정형화되어 있고요. 완전 상품이거든요. 도올 김용옥과 크게 안 달라요. 저는 그런 게 굉장히 끔찍합니다. 제발 설교에서는 성경말씀만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자꾸 이상한 해석들을 붙이는 것도 화납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노아의 아들 야벳은 흑인이 되었다고 하면서, 스포츠 정도나 잘 할 수 있는 사람들로 저주를 받았다더군요! 이건 인종주의거든요. 이런 몰상식하고 완전히 파시즘적인 설교가 한국 교회 내에선 막 튀어나옵니다. 일상적인 영역에선 교회출입이 잦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대형교회는 정말 문젭니다. 서울에서만 목회하려는 것도 그렇고요. 왜 촌에 안 가려는 거죠?
-담임 목사직 세습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십니까?
말도 안 되죠. 북한입니까? 김일성 왕조에요? 그런 게 가능하다는 자체가 목사가 하나님이 되는 거잖아요. 재림 예수가 되는 거죠. 그건 불경죕니다! 목사님의 권한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위임받은 건데 벗어나는 권한 행사는 안 되죠. 절대로 써서는 안 됩니다. 왜 자기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를까요? 목사라고 잘난 게 아니거든요. 능력이니 뭐니 웃기는 얘기거든요. 소위 잘 나가는 목사님들도 저쪽 낙도에 갖다 놓으면 별 볼일 있겠어요?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 교회가 너무 공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점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지…
교회 팻말을 붙여 놓았는데, 왜 다른 교회 전단을 들여보냅니까? 뭐 하는 짓거리들인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가는 것은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죠. 자꾸 길바닥에 나와서 확성기 틀고 시끄럽게 만드는 것도 짜증납니다. 선교가 거리를 시끄럽게 하면서 공중도덕 깨는 거 아니잖아요? 잘살고 있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이상의 선교가 어디 있습니까? 파리의 뽕삐두 센터 같은 데서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손 율동을 하더라고요. 얼마나 유치해요. 피해를 주는 거거든요. 강요하는 것 이고요. 옆집에 절이 생겼는데 없어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 않나! 아, 정말 스트레스 받습니다.(웃음)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2001년 5월호)
“기독교는 좋아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중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녔다. 대학 다닐 때 교회를 좀 다니면서 청년회 활동도 좀 했다. 그때도 날라리 신자였다(웃음).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천이 아니다. 지식으로서의 기독교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를 하지만. 버트란트 러셀처럼 ‘기독교는 좋아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버트란트 러셀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기독교를 지키지 않으면 모두 다 악한 사람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지켜온 사람들이 대개 매우 악했습니다”-편집자 주) 함석헌 선생 같은 무교회주의 자를 존경한다.
-왜 교회를 떠났는가.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고, 교회 자체에 대한 불만이 너무 컸다. 운동권 교회였는데도 대사회적인 발언에 대한 보수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자기 유지를 위한 보수성을 드러내는 일에서도 일반 교회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여러 행동들을 보면서 나는 교회를 등졌다.
-어떤 모습이 가장 싫었나.
글쎄다. 신도 확보를 위해서 시장 논리에 의존하는 게 제일 맘에 들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위하여 신도의 확보가 불가피하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그것이 굉장히 맹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도 결국은 저렇게 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점들이 안타까웠다.
-교회의 담임 목사직 세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다른 복잡한 말이 필요 없다. 당사자들이 뭐라 변명을 하든, 교회에 돈과 권력이 없다면 세습은 일어날 수도, 일어날 필요도 없다. 세습이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세습이 부자교회에서 무리하게 강행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타락상의 노출이라 생각한다. 교회의 막강한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를 위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아들 밖에 없다는 논리가 세습이다. 때문에 나는 칼럼을 통해 이북의 권력 세습과 재벌의 권력 세습, 그리고 교회의 담임 목사직 세습이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논리가 똑같다. 가장 잘 알고 있고, 충분한 수련을 쌓았고 선배의 업적을 그대로 계승할 수 있는 적임자이기 때문에 세습한 것이지 아들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논리야말로 북한의 논리이자 기업의 논리 아니던가.
▲ 홍성담 화가 (2001년 7월호)
“기독교 신앙은 없다. 그래서 굉장히 자유롭다”
-대형 교회의 세습을 어떻게 보나
교회가 지 것인가, 예수 것이지. 신의 것이고 신의 아들의 것이지. 교회를 소유의 개념으로 보기 때문이지. 한국 교회는 성장한 만큼 타락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이고 그분과 만나는 자리 아니가.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런 교회가 어떻게 개인의 재산이 될 수가 있나. 이런 환장할 노릇이 어디 있는가. 대형 교회의 세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진다.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손님으로 들어와서 못된 짓거리를 많이 했다. 기독교의 덩치가 엄청나게 커져 이젠 정치도 어찌 못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놓고 국민운동을 전개할 수 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한국 기독교가 살려면 스스로가 자성하여 이 땅에서 저질렀던 해악들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설자리가 없다. 갈수록 그럴 것이다.
-신앙이 있는가
없다. 그래서 굉장히 자유스럽다.
▲ 김규항 컬럼니스트 (2000년 8월호, 2001년 9월호)
“지금 한국교회는 유대교에 가까운가, 예수에 가까운가"
-조갑제 씨와 지만원 씨가 요즘 보수적인 기독교인에게 총궐기를 부추기고 있다.
조갑제 씨가 기독교인인가? 하긴 극우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긴 하다. 우리나라 극우 세력은 조갑제 씨를 빼면 아무도 없다. 전부 미친놈들뿐이다.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한국논단>의 이도형 씨 같은 사람을 보면 어우, 할 말을 잃는다. 조갑제 씨는 정신병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지만 뚝심도 있고 전략 전술을 구사할 줄도 알고 신념에 가득 차 있다. 보수 기독교 쪽으로의 진출은 아주 탁월한 선택인 것 같다. <국민일보>의 조희준 씨가 검찰에 불려 다니고 있으니까 어떤 신자들은 교회가 핍박받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갑제 씨나 지만원 씨에 휘둘려야 하는 보수 교단에 몸을 담고 있는 게 서글프다
솔직히 보수적인 기독교권 안에 과연 진정한 영적 진정성이 있는가. <뉴스앤조이>나 일련의 복음주의권의 개혁적인 분들을 빼고 난 나머지 분들의 정신이 예수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가. 이러한 교회들은 잘못된 교회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라는 게 내 입장이다. 교회라고 상징되는 건물이 있고, 십자가 달고, 스테인 글라스하고, 꽃꽂이하고, 성가대 하면 교회가 되는가? 그렇게 되묻는다면 그 사람들조차도 아니라고 그럴 것이다. 예수가 구원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이단자들, 유태교 내에서 도무지 인간적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 저것은 진정한 하나님을 섬기는 놈들이 아니라 지탄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었다. 예수도 갈릴리 출신이기 때문에 의심을 받았던 것 아닌가. 물론 예수님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고 이것이 종교적인 테두리 밖에 있는 여러 가지 진실한 노력이나 사람의 선행에 대해서 폄하하거나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본 것인가. 그런 노력들을 마귀의 책략이라고 비난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임무는 사랑의 정신으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지, 마귀새끼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정신이란 대립되었을 때 종국적으로 자기가 말없이 죽어주는 데 있다. 사람을 때려죽여서라도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행태 앞에서 나는 대단한 분노를 느낀다. 이런 한국 교회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뿐이다.
-삶이 빠져있는 이 땅의 보수적 신앙의 행태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실천이나 운동 자체가 신앙이 아님도 명백하지 않은가.
신앙인가 아닌가가 사회 참여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준식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신앙이냐 아니냐는 은총, 섭리와 같은 것들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좌우된다. 은총과 섭리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신앙적 실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것 또한 나름대로의 생각이니까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은총이나 섭리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것을 인정하는 자세가 부족한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가깝게 만드는 여러 실천적 행동이나 노력들이 부족한가. 내 생각으론 후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한국 기독교가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는 것이다. 보다 큰 문제는 한국 기독교가 이웃과 사회를 위한 실천적인 행동들을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는 듯이 은근히(또는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교회와 당시의 교회를 대입시켜보면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당시의 유대교 쪽에 가까운가 아니면 예수 쪽에 가까운가. 이렇게 생각을 하면 문제가 대단히 명료해지지 않나. 종교에서 이탈될까봐 자꾸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이것은 한 번의 자기의 신앙적인 맹세와 정신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실천을 한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속에 교회가 있고 하나님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 김근태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 2001년 12월호)
“왜 우리나라 신부나 목사들은 예수를 서양 사람으로 묘사하나”
동남아시아의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베트남을 생각할 때 묘한 우월감을 느끼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될 때 나는 분노하고 좌절한다. 옛날 어렸을 때 미군들에게 '헬로 기브 미' 하면 츄잉껌이나 우유나 콜라를 받아 마셨다. 그걸 받아먹으면서 느꼈던 맛있다는 느낌과 함께 부끄럽고, 가슴 어딘가에 흠이 나는 느낌이었는데 우리가 동남아나 베트남 사람들에게 그런 느낌을 던져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때야말로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절대자에게 고백하는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야 나의 구원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인간이 다 정화하고 완성이 되는 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죄와 부족한 것을 짊어지고 가면서 자신을 뒤돌아보다가 주저앉고, 또 다시 일어나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아니겠나.
(중략)
나는 종교도 문화적 현상이라고 본다. 평소 가까운 스님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한다. 왜 부처님은 인도사람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겸재 정선이 그림에서 관악산이나 인왕산이나 금강산을 그렸듯이 오늘날 한국 사람의 희로애락을 그리는 탱화(幀畵)는 왜 등장할 수가 없는 것인가? 역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을 만나도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 예수는 꼭 서양 사람이어야 하는가? 혹시 신부님이나 목사님들께서 예수가 서양 사람이라고 가르치거나 그렇게 그림을 그림으로써 종교 전문가들이 갖는 신비함을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서 종교 지도자들의 몫을 계속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덮어놓고 우리 것을 고집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것을 새롭게 해석도 하고 오늘에 적용을 할 때만이 세계 문화를 풍부하게 할 수 있고, 세계 문화와 진정한 만남이 있을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다.
▲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당시 문학과지성 상임고문, 2002년 1월호)
“과거에는 기독교의 본질 때문에, 지금은 신자들 때문에 신앙 갖기를 주저한다”
-선생의 가정과 받은 영향이 궁금하다.
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전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를 보냈다. 원래 고향은 경북 상주다. 장남이었던 부친은 농사로는 살기가 힘겨우니까 3살 때 대전으로 나오셔서 장사와 사업을 하셨다. 형이 6·25때 전사를 하셨고, 철들고 자랄 때는 집이 그럭저럭 살만하게 되어 6·25와 대학시절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그 때만이 아니라 부모님께서는 내 뒷바라지를 끝까지 해 주셨다는 게 정확한 고백일 것이다. 신문 기자를 한다, 출판사를 한다고 돌아다니는 내가 부모님 보시기에 미덥지 못했던 지 나중엔 건물도 하나 만들어 주셨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부자인 적도 없었지만 가난한 적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3년 동안 교회를 상당히 열심히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종교적인 번뇌 같은 것이 있었다. 학생이었지만 실존주의라든가 전위적인 분위기 속에 끌려들어 갔었던 것이다. 대학 2학년 4월쯤으로 기억되는 데, "더 이상 교회를 나갈 수 없다"고 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맨 처음 한 일이 담배를 사들이는 일이었다(웃음).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기독교 신자가 담배를 태운다는 것은 배교 행위처럼 여겨질 때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끊을 생각하지 않고 담배를 태워왔다. 신을 버렸을 때 처음으로 오는 게 허무주의였다. 그 다음엔 탐미주의에 빠졌다. 그때 친구의 여동생을 사귀었었는데 내 자신에 대한 자학에 젖어 그 여자를 심리적으로 학대를 했던 것 같다. 그 여자가 눈물을 보이면서 울었다. 휴가 때 생긴 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부대로 돌아가면서 내게 타인을 울릴만한 권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며칠 동안 끊임없이 그 문제에 대한 자문을 했다. 대답은 권리가 없다는 자명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정서적인 공감에 이르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전방 부대의 햇빛이 환하게 비추는 파란 하늘 아래서 문뜩 타인을 괴롭힐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계기로 실존적인 어떤 허무감이나 고통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학 3학년 때인가 읽었던 칼 뢰비트의 『역사의 의미』라는 책에서 읽은 종말론이란 단어는 이후의 내 삶에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김병익 선생은 대학교때 기독교를 버렸다. 그러나 그는 어느 글에선가, 기독교를 버리고 난 후에도 내면 깊숙이에 가라앉아 있는 기독교의 가치체계까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고, 아니 기독교의 가치체계는 아직도 세계를 바라보고 논의하는 숨은 골격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한국 교회에 대한 실망이 교회를 떠나게 했나.
청소년 시절, 그러니까 5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신의 존재를 실체로 믿는다든가 부활을 문자 액면 그래도 믿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서 비기독교적인 사유들을 접촉하게 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요즘 와서는 기독교 본질과 관계없이 교회의 타락, 신자들의 독선에 대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증오감을 느낀다. 신을 믿고 안 믿고는 그 자체로 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한 인간을 평가하고, 교회를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로 죄인과 의인으로 구분할 수 있겠나. 인하대학의 강의를 위해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 타려고 하면 어떤 한 분이 인천행 수원행 표지판을 들고 승객들에게 "인천행입니다, 수원행입니다"라고 외친다.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 마디도 안 하지만 인천행 수원행 팻말 한 귀퉁이에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이 적혀 있다. 신자는 이런 사람이 아닐까. 유럽의 사람들은 예의와 양보와 희생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하기보다는 한 인간의 도리와 양식으로서 한다. 이에 반해 우리 한국 기독교는 하느님이라든가 예수라든가 교회란 말을 숱하게 외치는 데 정작 사회를 향한 그러한 미덕이나 양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전에는 기독교의 본질 때문에 교회를 포기했지만 지금은 한국 교회와 그 신자들의 못마땅한 행태 때문에 신뢰감을 못 가지고 있다.
-아직도 실존주의와 더불어 기독교가 선생에게 영향을 준다고 고백했는데.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각이나 태도가 내게 있다면 기독교적인 데서 온 것일 것이다. '회개하라'는 말씀의 적용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과의 관계나 일에서 내가 먼저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종말론이라는 말을 신학에서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받아들인 종말론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후회 없이 현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다. 내게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지금 내가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 문성근 영화배우 (당시 '노무현을 좋아하는 문화예술인의 모임' 대표, 2002년 2월호)
“교회 생활 거의 안 한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문목의 방북 목적은 김 주석을 가슴으로 만나 보겠다는 것이었다. 열정적인 설득에 김 주석은 따라와 주었지만 아버지의 방북을 두고 보수적인 기독교 교단에서는 굉장히 심한 비난을 했다. 문목은 그런 반응에 무심했지만. 6.15 선언의 첫 보도를 나도 새벽 1시 30분경에 들었다. 다음날 아무리 보도를 주의 깊게 살펴도 6.15 선언의 배경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1971년부터 준비해 온 것의 결실이 6.15 선언이기 때문에 김 대통령의 공적이 분명하고,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방송사가 6.15 선언의 배경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방송 3사와 CBS, 그리고 <한겨레>에 전화를 했었다. 한겨레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문목이 89년 방북하여 김 주석을 만나 설득한 내용이 있다. 고려연방제에 보면 남북 각각이 별도 정부를 두되 외교와 국방은 합친다는 내용이 있다. 문목은 "우리가 45년 동안 총칼을 맞대고 살고 있고, 전쟁까지 치렀는데 외교는 몰라도 어떻게 국방까지 합치냐? 그건 안 하자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니 전 단계를 두자"는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한 5초 동안 가만히 있던 김 주석이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라고 응수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91년도 연두 교시에 고려 연방제의 전 단계를 둘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된다. 김 주석을 설득한 후 허담 위원장과 합의서를 썼는데 거기에는 "단번에 할 수도 있고 단계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김 주석의 91년도 연두 교시는 6.15 선언에서 "남쪽의 통일방안과 북쪽의 고려 연방제의 초기 단계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라는 표현으로 진전된다. 당시, 국회에서 김대중 의원이 이홍구 통일원장관한테, "문 목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 주석이 노태우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처음 썼고, 사전 단계를 두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데 왜 이야기를 잡아서 진전시키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했었다. 이홍구 장관은 "불법 행위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는 없으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중요한 진전이었다고 본다."는 답변을 한다. 국회 속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감옥을 다녀 온 문익환 목사의 이후 삶이 많이 달라졌다던 데
76년 수감전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운동을 해 나갔다면 그 이후엔 이것을 축제로 바꾼 부분이 큰 차이점이다. 종교인의 삶이라는 게 결국 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라면 죽으러 가는 길은 차라리 종교인으로서는 행복한 길이라고 문목은 생각하셨던 것 같다. 때문에 그 고통스런 길에서도 즐겁게 고통을 견뎌내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목은 통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제나 "통일은 다 되었어" 라는 표현을 썼다. 당시 그걸 듣는 사람들은 무슨 잠꼬대냐고 했을지 모른다. 와야 될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여서 확신을 갖는 자세와 어법. 김형수 시인은 그게 예언자의 삶의 방식 아니냐고 반문한다. 아버지가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선지자에 비유한 적이 없었지만. 89년 방북 직전에 쓰신 시를 보면 "역사를 산다는 것은 말이야, 벽을 문이라고 찾고 나가는 거야" 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구약의 예언자의 삶에서 배운 시적 통찰력이 아니었겠나. 나는 야단을 참 많이 맞았다. 두 번째 감옥 갔다 오시고 난 후 이런 말씀을 드렸었다. "박대통령이 너무 건강하고 젊다. 이 체제가 굉장히 오래 갈 것 같다." 그랬더니 몹시 화를 내셨다. "젊은 놈이 왜 그렇게 패기가 없느냐"고 말이다. 그런 삶의 태도가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정 안에서도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실천을 하셨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민주 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우린 어려서부터 설거지는 당연히 남자가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 삶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감당이 안 되고 해석이 불가능한 규모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어떤 영향을 받았다, 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요즘, 우리의 사회의 대단히 절망적인 분위기를 보면서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달랐을 것이란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 사회를 어떻게 하셨을 것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만큼은 그렇게 패배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살지 않으셨을 것 같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나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될 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희망을 일구어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내 삶은 그렇게 긍정적이진 못하다. 자신은 낙관적이지 못하면서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양립이 불가능한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오해와 불이익을 감수하고 노무현 씨를 지지한 것 자체가 그 암울함 속에서도 희망을 말하던 아버지의 영향이다.
-한국 교회가 큰 교회 작은 교회를 떠나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신앙생활은 어떤가.
교회 생활을 거의 안 하고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하면서 옳고 그름이라는 것에 대한 판단 근거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우리 사회 전체가 결국 이렇게 변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세습을 비롯한 교회의 여러 문제들도 결국 이기주의 때문이 아니겠나. 이럴 때는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나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기 위해 모든 부문 운동이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버지께서 여성 운동하시는 분들에게 "여성 운동 좋다, 하지만 여성 운동이 여성 운동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 반독재 투쟁을 성공 시켜야 여성 운동도 큰 진전을 보게 될 것이다"란 이야길 많이 했다고 한다. 국민의 정부 이후에 여성 운동이 제도적으로 얼마나 발전을 했나. 영화계 또한 지난 10 여 년 동안의 투쟁이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서 급격히 호전되었다. 결국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영되느냐에 따라서 부문 운동들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해소될 것이다.
▲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인 (당시 <한겨레> 기획위원, 2002년 3월호)
“시대는 21세기를 넘었으나, 한국교회 신자들의 이성은 기원전에 있다”
-조선일보의 반대를 포함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일상,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겠는가.
참 어렵다. 우리의 교육만 하더라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아동을 그렇게 학대할 수 있는 사회는 있을 수 없는 사회다. 한마디로 광란이다, 광란! 온 사회가 병들어 있다. 모든 게 상업적 가치로 판단 규정된다. 인간적 가치는 거기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고 내면적 성찰이 완전히 상실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게 사실 시소 같은 것이어서 굉장히 절망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흐름이 움직여지기 시작하면 또 쉽게 움직여진다. 절망적으로 본 것 중 하나가 한국의 개신교 현상이다. 프랑스에서는 가톨릭이 보수적이었고, 최근까지 사회 투쟁의 극복 내지 상대방이었다. 요즘은 어느 정도 균형 잡힌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톨릭의 기본적인 입장이 이웃 사랑이다. 바로 예수님 말씀이다. 합리주의자·이성주의자의 판단이지만 구약과 신약의(상식적으로 들었지만) 어법이 다른 것은 그 당시의 이성의 성숙 단계에 맞춘 것이다. 구약은 유아기니까 어린아이에게 하듯 쓰인 것이고 예수님이 오신 때는 이성의 성숙 단계가 청소년기에 왔기 때문에 이웃 사랑 산상수훈 등으로 쓰인 것이라 들었다. 이것이 이성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구약과 신약의 말법 차이에 대한 해석이다. 그것을 한국 사회에 가져왔을 때 개신교 현상은 한국 사회의 이성의 성숙 단계가 신약 시대 이전은 분명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하드웨어는 그야말로 21세기를 달리고 있지만 이성은 신약 시대 이전이다. 어쩌면 유아기에도 더 못 미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전래의 기복성과 합쳐져서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주 공격적으로 표현되는 곳이 한국의 개신교다. 그러면서 또 굉장히 물질적이다. 한국 사회의 병든 모습이 개신교 속에서도 반영된 것 같다.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실존적 자아로서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정말 어렵다.
-우리 사회의 뻔뻔스러움을 극복하는 데 신앙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 달라는 것이다. 넘쳐나는 빨간 네온사인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이 아닐까 싶은 데, 그렇다면 이웃사랑이 넘쳐나야 하는 데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굉장히 이기적인 가족중심주의와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만인에 대한 투쟁만 느껴질 뿐이다. 다음 프랑스와 견주어서 하나 파악되는 것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 때 가톨릭은 반드레퓌스 편에 섰었다. 드레퓌스 파가 승리하고 정의와 진실이 승리하던 1901년에 시민 단체법이 생긴다. 그런데 그 법에 대해 교회(가톨릭)만 그 법을 불법으로 여겼다. 대단히 웃기는 이야기였다. 지금 프랑스에는 70만개의 시민단체가 있다. 스포츠도 하고 이웃도 돕고 엠네스티 활동도 한다. 성인의 반이 기부금을 내거나 직접 참여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 살면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런 표현의 본능적 욕구를 개신교는 잘못된 방향에서 충족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거기에 기복성이 합쳐져서 교회의 융성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너무 잘못된 지적인가. 어떤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건강한 시민 사회의 발전을 부정적 본능적 욕망으로 대체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교회가 장례나 결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적 표현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여 신도들을 이기주의적인 기복성과 이분법 속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김훈 소설가 (2002년 4월호)
“회개가 가장 불가능한 사람들은 종교인이다”
언론사의 편집국장을 지낸 선생으로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종교인들처럼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회개가 가장 불가능한 사람들이 종교집단이다. 도그마 때문일 것이다. 저들은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남들은 악이라고 본다. 회개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변선환 목사의 파동의 바탕에도 아마 자기가 선일 뿐 아니라 남을 악이라고 보는 도그마가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 내부에서 벌어진 변선환 목사 파동을 보면서 한국 기독교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독교가 이래 가지고는 민족의 미래에 무슨 희망을 주겠나. 우리 시대의 종교인이란 현실 인간의 사회 속에서 공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도그마가 이해관계와 직결되었을 때 더욱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교리와 도그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것을 남을 위해 희생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그것일 것이다. 남을 위해서 양보할 만한 선의가 인간 속에 살아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확인해야 할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다.
▲ 고종석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 (당시 현직, 2002년 12월호)
“한국교회 신자들, 너무 부자하고만 어울린다”
-한국 기독교에 관해서 몇 편의 글을 썼다.
별로 할 말이 없다. 비신자로서도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고 종교 또는 종교인들에 대해 불편하다. 종교란 믿음체가 배타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기는 정말 어렵겠지만 최소한 자기 종교 말고 다른 종교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아무 종교도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전도는 의무도 있겠지만, 지옥불의 구덩이로 떨어질 사람들을 구해주기 위해서 너무 애를 쓰시는데, 종교인들이 자기 내면에 보다 귀를 기울이면 세상이 좀 더 평안해질 것이다. 상투적인 이야기겠지만 예수님이 평생 어울린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창녀들이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너무 부자들하고만 어울리는 것 같다. 이것도 밖에 있는 사람의 생각일 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느낌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교회들은 그렇게도 많고 또 커지기만 하는지…
▲ 정연주 KBS 사장 (당시 <한겨레> 논설주간, 2003년 1월호)
“‘빈민 찾지 말고 전도하라’라는 한경직 목사 설교 듣고 실망해 교회 옮겼다”
굉장히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컸다. 배냇 신자였고 어려서부터 정말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가장 친한 친구와 만들던 학생회 신문에 강원룡 목사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우리 교회는 그 때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헌금 강요가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금 할당을 하고 매주 주보에 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란을 떨면서 헌금을 한 부자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더 높게 평가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헌금을 강요할 수 있는가에 대해 친구와 나는 분개했었다. 바로 그 때 강원룡 목사가 한국 기독교의 부패에 대해 썼던 것이다. 우린 강원룡 목사가 누군지도 몰았었다. 그 일로 교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장로님이셨던 아버님은 어느 날 새벽기도회를 다녀오시더니 막 야단을 치셨다. 당장 그 신문을 회수하라고 했다. 그 일로 나는 교회에서 치리를 당했다. 그 친구는 교회를 떠났고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울에 와서는 영락교회를 다녔다. 대학교 3학년 때 회의가 많이 왔다. 이건 답이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그 일 가지고 한경직 목사께서 설교에서 신랄하게 비난을 했다. '대학생들이 전도는 안 하고 무슨 빈민가 조사냐'는 것. 그렇게 비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 즉시 영락교회를 그만 두었다. 교회를 안 다니다가 그 뒤 안병무 박사를 만나게 됐고, 향린교회를 나가면서 성서를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그 때가 1969년이다. 향린교회에서 출석하고 난 1년 뒤 대학부 학생 10명이 영락교회를 탈출했다. 그 때 탈출한 친구 중 하나는 작년인가 올해에 향린교회 장로가 되었다. 안병무 박사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다. 열심히 성경강좌를 들었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나는 그 분에게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문제,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배웠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 언론의 자유를 압살한 정치권력의 불의,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게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을 배웠다. 기독교는 나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전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서 너무도 편협하고 교조적인 모습으로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고, 그 때문에 다른 종교들에 대해 완전히 개방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형님께 야단을 많이 맞는다. (웃음) 그러나 나는 그게 예수의 가르침이라 믿고 있다. (중략) 나는 살아오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셨을까 (중략) 생각하며 흐트러진 자세를 다졌다.
▲ 강만길 상지대 총장 (2003년 2월호)
“분단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반공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역할을 상당히 했다”
-20세기 우리 역사에서 종교나 종교인들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나는 종교를 잘 모른다. 불행하게도 종교를 못 가졌다. 나는 다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내가 역사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사이에 별 차이를 못 느낀다. 그래서 자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 이후, 이 땅의 종교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할은 상당히 크게 평가해도 좋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일제 강점기에도 (종교인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저항의 주도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분단시대에 들어와서는 기독교가 반공주의에 빠져 가지고 부정적인 역할을 상당히 했다. 나는 일제 강점기 때는 한반도에 있었던 기독교보다는 오히려 만주의 간도 지방의 기독교의 전통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군사 독재 정권 아래서도 기독교는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민주화 과정, 심지어 남북 관계 속에서도 큰 역할을 감당했다. 지금도 북에 가는 남쪽 사람들 중 제일 많은 사람들은 실업인들 이고 다음이 종교인들이 아닐까 싶다. 포교를 위한 목적도 있겠으나 어떻든 동족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노력을 제일 많이 한 것이 기독교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톨릭은 구한말에는 일정한 역할을 하다가 일제 강점기 때는 별로 역할을 못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신교 구교를 따질 것 없이 부정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 그러다 군사 독재 아래서의 민주화 과정에서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떤 성당에서 역사가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역사가 가야하는 길, 아니 역사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길과 하느님의 나라하고 다른 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별로 없다고 하더라(웃음).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를 읽으면서 총장의 사관이 대단히 기독교적이라고 느꼈다.
(반갑게) 아, 그런가! 이제까지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해 쓴 책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이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이다.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다. 참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카의 시대는 1950년대였다. 그때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볼 때 역사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할 때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위한 대화이냐는 것이다. 종교의 신심이나 역사가 어디로 가야한다고 믿고 그것을 실천하는 마음이 크게 다를 게 없다는 말은 어쩌면 그런 가운데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다. 역사를 공부하고 생활하고 연구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 김형태 변호사 (2003년 4월호)
“옳고 그름만 따지는 종교의 종착점은 전쟁이다”
-신앙은 인권을 옹호하는 김형태 변호사의 일에 어떻게 반영이 되었는가.
지금까지는 눈앞에 잘못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왔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우리의 심각한 과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다양성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풀어 나가야 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고, 나도 개인적으로도 생각이 그렇게 바뀌었다. 거기엔 철학의 문제가 따른다. 결국 자기를 털어버리는 게 사랑이고 자비 아닌가. 언젠가 이돈명 변호사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다. “변호사님은 행복하십니다. 과거엔 ‘독재’ 하면 ‘반대’하면 되었으니까요. 우리 시대는 벌써 노동 문제만 해도 복잡해졌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 다양한 세상 속에서 함께 갈 것인가의 문제를 풀다보면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어려운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자네 말이 옳다”라고 하시더라. 그런 점에서 모두가 자기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남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게 오늘의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아닐까 싶다. 정치나 사회나 종교가 그런 쪽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옳고 그름만 따지다보면 부시처럼 전쟁만 일으키려고 하지 않겠나. 뚜렷한 답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가져온 곳 : 카페 >가랑신학회|
글쓴이 : 빛과 소금|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