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에는 며칠에 걸쳐서 심재모와 염상진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가 분분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추려놓고 보면 결국 누가 이겼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심재모가 형편없이 진것으로 소문이 퍼졌다. 그러다가 율어에서 살아난 경찰관 네 명이 심재모에게 감사의 인사를 오게 됨으로써 소문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염상진네한테서 세 집에 은밀하게 전해준 사망소식이 번지면서부터 심재모의 명예는 회복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내린 판정은 '비겼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벌교, 조성, 보성을 제멋대로 넘나들고 오락가락한 연후에 그런 판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심재모는 그런 민심의 동향을 대충 감지하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소문에 신경쓰기에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연대본부에 사건보고와 아울러 병력충원을 요청해야 했고, 병력보충이 있을 때까지 고흥 주둔 병력의 일부를 조성으로 이동배치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청년단 문제가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유지라는 사람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염상구의 횡포를 법으로 처리하라고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무기로 공갈협박한 죄라는 것이었다. 만약 염상구를 처벌하지 않으면 유주상이 청년단장 자리에 앉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상부에 직접 보고해 염상구를 반드시 집어넣고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사실 청년단의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기로 예정했던 날이 벌써 며칠째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사령관님도 한분 생각혀보시씨요. 나도 요렇다께 붕알 두 쪽 단 사내새낀디, 내 밥그럭 뺏김스로 빙신맹키로 죽은 디끼 있어야 허겄소. 남자로 한평상 사는 것이 배짱놀음이고 오기놀음인디, 나가 그눔 눈구녕이고 가심이고 푹푹 쑤셔뿔지 않고 그만허니 끝낸 것은 참고 참고 또 참은 것이랑께요. 사령관님, 사령관님이 내 처지가 되얐으면 워쩌셨겄소. 그만헌 오기 잠 부린 것이 무슨 죄냐니께요."
염상구의 말이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 일이 단순하게 처리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지들은 자신들의 위신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고, 염상구는 만약 어떤 조치가 취해지면 정말 일을 저지르고 말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유지들 편을 들면 청년단이란 조직 속에 그나마 묶여 있던 염상구와 그 휘하의 주먹패들이 금방 불량패로 바뀔 위험이 컸고, 그렇다고 염상구의 편을 들면 소위 읍내의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어떤 일을 꾸며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간단할 수 없는 일의 현명한 해결이란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중립적 입장에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심재모는 골치를 앓고 있었다.
한편, 유주상은 안팎으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밖으로는,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유지들 이일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는 속마음 같아서는 그까짓 허울뿐인 감투를 팽겨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애초의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몰라도 이미 결정을 내린 일을 놓고 번복한다는 것은 염상구놈의 횡포에 굴복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당할 횡포 다 당한 마당에 그건 다시 스스로 체면을 깎는 일일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취할 태도는 속마음을 감추고 강한척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하나 난처한 일은 유지들이 내세우고 있는 해결책이었다.
그 강경일변도가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해서 밤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더라고 그렇게 몰아가다가 언제 어느 때 또 염상구놈한테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유지들이 그렇게 강경한 태도로 나가는 것은 다 자신의 위신을 찾아주는 위해서인데 피해당사자가 나서서 적당히 무마하고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주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에서 나날이 속만 타들어가 토끼똥을 쌀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또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안에 있었다. 꼭 거짓말처럼 그날 이후로 물건이 말을 안듣는 것이었다. 그놈 말대로 정말 그놈 칼에는 귀신이 붙은 것일까. 그놈이 괜한 소릴 씨부린 거라고, 귀신이 어디 있느냐고, 그놈이 겁주려고 한 소리라고, 무슨 귀신이 칼에 붙는 귀신이 다 있느냐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강조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하루 걸이로 부풀어올라 나무토막 같은 견고한 힘을 자랑하며 전신이 녹아 내리는 쾌감을 주던 그것에 정말 귀신이 붙어버렸는지 형편없이 풀이 죽어 오그라져 있었다. 아무리 색이 동할 기막힌 생각을 해줘도, 아무리 부드럽게 어루만져도, 아무리 아내의 샅에 비벼대도, 그것은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고 봉사였다. 안타깝다 못해 환장할 일이었다.
"당신워디 아프요?"
아내의 첫번째 물음이었다.
"당신 요새 요상허요?"
삼사 일이 지나자 기색이 조금 달라진 아내의 두번째 물음이었다. 아내가 그럴수록 그건 야속하게도 더 풀죽어들었다.
"당신 딴 지집 보고 있제라?"
표독스럽게 덤빈 아내의 세번째 물음이었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철퍽 갈기고 말았다. 그건 폭력행사가 아니라 그가 내던진 일차적인 말이었다. 그리고그는 2차적인 말로 속앓이해온 사연을 털어놓았다.
"굿얼 혀야제라, 굿얼. 귀신이 붙었으면 싸게 굿얼 허는 수밖에 웂당께요."
아내가 울먹이며 쏟아놓은 말이었다. 거기에 귀신이 붙어굿을 하다니, 참 어이없고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는 아내를 윽박질러 눌러놓았다. 그런데 그것은 말을 안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놈 말마따나 점점 썩어들어가는 것인지 갑자기 뜨끔거리는가 하면 짜릿거리고, 욱씬거리는가 하면 찌르르 당기고는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변소로 내달아 그것을 꺼내가지고 요모조모 찬찬히 살펴보고는 했다. 그때마다 픽 풀죽어 있는 자신의 물건이 그렇고 볼품없고 초라하고 한심스러울 수가 없어 남모르는 비감을 씹고는 했다. 그가 청년단장직을 이제나마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절절한 것은 염상구놈의 칼귀신을 떼쳐내고자 함이었다. 칼귀신을 물리쳐 자신의 물건이 옛날의 그 당당한 기운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공산당을 척결해야 한다는 적개심이나 장래를 위한 정치기반을 다지는 계획쯤은 얼마든지 뒤로 미룰 수가 있었다.
"사령관님, 제 생각입니다만, 서로 화해를 붙이는 게 어떨지요."
옆에서 보다 못한 서장이 심재모에게 조심스럽게 제의했다.
"무슨 묘안이 있나요?"
지금 상태에서 화해만큼 좋을 것이 없지만 무슨 수로 그걸 실현시킬 수 있을까 싶어 심재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양쪽에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나서면 그리 어려운 문제만도 아닐 겁니다. 김범우 선생이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 김범우 선생!"
심재모는 귀가 번쩍 뛰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음이 물러나앉고 말았다.
"이런 궂은 일에... 그분이 꺼리면 피차에 말을 꺼내지 않음만 못하잖겠소?"
"그렇기야 하지요. 허나, 이 문제가 확대되면 염상진이가 조성을 공격한 것만큼이나 복잡 하고 골치아픈 문제가 될 겁니다. 안될 때 안되더라도 부탁을 해봐야 되잖겠습니까.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니까요."
"그렇지요. 최선이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김 선생이 응할 것 같소?"
"읍을 위하는 일이니까요. 제가 먼저 찾아가 부탁을 할 테니, 사령관님이 다시 전화를 좀 거시지요."
"아닙니다, 전화로 그런 말 하는 것처럼 큰 결례가 없습니다. 나도 서장님과 동행하도록하지요."
"그러시면 더욱 좋지요."
"당장 찾아가게, 집에 있는지 전화를 좀 넣어보시죠."
김범우는 집에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일어섰다.
"우선, 금융조합장이란 사람이 청년단장 자리를 넘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군요. 스스로 극우임을 내세우고자 함인가요?"
사건 전말을 다 듣고 난 김범우가 혼잣말처럼 한 말이었다.
"공갈협박죄로 고소를 하려면 후딱 할 일이지, 그렇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공갈협박죄를 범하고 있군요. 제 생각으로는, 염상구가 금융조합장한테 정식으로 사과하는 선에서 일을 무마시켰으면 합니다."
김범우는 이렇게 해결 방법까지 밝히면서 궂은 일 맡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내색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젠체하는 기색도 없이 시종 신중한 김범우의 태도에 심재모는 친근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고 싹수머리웂는 새끼가 지 명대로 못 살고 황천길 갈라고 해필이면 요 염상구 밥그럭얼 채트렀는디, 성님, 성님도 남잔께 허는 말인디, 성님언 가만 있으셨겄소?"
염상구는 게거품을 무는 장광설을 이렇게 끝맺었다.
"가만 안 있지, 잘했네."
김범우가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워메 성님, 그 말 참말이다요? 워따메, 나 속 알아주는 사람은 역시 우리 성님뿐이시."
염상구는 천진스럽게도 좋아하고 있었다.
"상구, 그런데 말이야, 방법이 조금 잘못됐어."
"야? 방법이라고라?"
염상구의 좋아하던 얼굴이 그만 굳어졌다.
"자네 직책이 청년단장이지?"
"그렇제라."
"그러면 직책에 어울리게 좀 점잖은 방법으로 했어야지. 그럼 유주상이 콧대 꺾고, 자네체면 다 세우면서 이런 말썽이 안 났을 거 아닌가."
"참말로, 진작 잠 갤차주제라?"
"자네가 날 찾아왔어야 말이지."
"허기넌 그렇제라."
염상구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나간 얘기 다 소용없고, 기분내키는 대로 말하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 속마음을 말해봐."
"니기럴, 유지라는 것덜이 저 지랄얼 허고 뎀비는디, 깝깝허제라."
"갑갑하면, 내가 들어서 해결을 해볼까?"
"성님헌테 무슨 존 생각이 있소?"
염상구는 반색을 하고 들었다. 감투라는 것이 뭔지, 김범우는 피식 웃었다. 염상구의 반색이 공갈협박죄로 몰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됨으로써 청년단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김범우는 해석하고 있었다.
"내가 나서면 해결이 되지."
"아이고 성님, 지발 일 매듭 잠 풀어주씨요. 유지덜이 저 지랄발광을 헌께 속으로는 침이 보트요."
"내가 나설라면 자네가 날 도와야 하네."
"하먼이라, 무슨 일이고 시키는 대로 허제라."
"그럼 됐네. 유지들이나 유주상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는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네."
"고것이 먼디요?"
"유주상이한테 잘못됐다고 한마디 사과하는 일이야."
"물팍 꿇고 빌라 그 말이요?"
염상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아, 무릎은 무슨 무릎을 꿇어. 그냥 입으로 잘못했다고 한마디 하는 거야."
염상구를 밀어치듯 김범우도 언성을 높였다.
"알었구만요. 나넌 또 물팍 착 꿇고 엎디려 비는 것인지 알었제라. 그냥 입으로 허는 것임사 열 분 백 분도 허제라. 그 말 험스로 속으로는, 니미 붙어묵어라, 니 애비 좆이다, 욕을 혀도 지눔이 알 게 머요."
"더 심한 욕을 해도 그거야 자네 맘이야."
"되얐소, 성님. 성님 말씸대로 나가 점잔허니 사과헐 것잉께 일만 풀리게 혀주씨요."
김범우는 유주상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그는 차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더기, 마침내는 황당무계한 하소연가지 했다.
"아, 그건 이제 염려하실 게 없는 문젭니다. 귀신은 주술을 건 사람이 주술을 풀어야 하는거니까 염상구의 사과를 받아들여 화해를 하시면 깨끗하게 없어질 증상입니다."
김범우는 솟아오르는 웃음을 눌러가며 그럴 듯한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귀신은 무신 귀신이어라. 싸카쓰단에서 나헌테 칼던지기럴 갤차준 사부님이 써묵은 방법을 나도 써묵어본 것이제라. 그 사부님 말씸이, 사람이란 것이 원체 간사시럽고 요사시런 짐승이라 지헌테 해로운 소리에는 꼼짝을 못허게 되야 있다는구만요. 그려사 사부님은 오기부릴 사람이 생기먼 칼을 던지고나서 귀신을 폴아묵고 혔지라. 햐, 유주상이 자석, 자지가 말얼 안 들어 애께나 쎅엤겠다. 속이 씨이언하다! 근디 말이요, 성님. 성님은 워찌그리 후닥딱 둘러붙였습디여? 성님 그짓말허는 기술이 나보담 웃질인디요? 성님하고 둘이서 점쟁이나 나설께라?"
"예끼 이 사람, 싱겁긴."
김범우는 염상구의 어깻죽지를 철썩 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방 안에는 제철이 지난'귀국선'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시옷, 사셔서셔소쇼수슈스시, 이응,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지읒..."
하나로 어우러진 여럿의 목소리가 노랫가락처럼 추운 어둠 속에 퍼지고 있었다. 서민영이 운영하는 야학인 교회당이었다. 돌로 지어진 교회당 건물은 어둠에 묻혀 그 윤곽이 지워져 있었다. 밝은 때는 정면의 중앙 상단에 크게 음각된 '벌교 교회당'이란 글씨보다 먼저 눈에 띄는 윈쪽문 옆의'1939'라고 새긴 숫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가 탄생한 지 1939년째에 세워진 그 교회를 서민영은 야학으로 빌려쓰고 있었다. 가락을 이룬 여럿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흐린 불빛을 담은 창문들이 겨우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히읗, 하햐허혀호효후휴흐히."
하나로 합쳐져 흐르던 목소리들이 여기서 끝났다. 넓은 교회당 안에 문득 침묵이 가득 찼다.
"네에, 아주 잘들 했어요. 그렇게 잘들 왼 것처럼 손으로 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알겠어요?"
이지숙이 정다우면서도 엄한 느낌의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에-"
서른 명 가까운 학생들이 입을 모아 길게 대답했다. 남녀가 합해진 그들은 구구각색이었다. 빨간 댕기를 드리운 처녀가 있는가 하면 단발머리 소녀가 있었고, 상고머리 총각이 있는가 하면 빡빡머리 소년이 섞여 있었다. 그렇듯 나이가 서로 다른 그들이 읍내의 여러 동네서부터 추위를 무릅쓰고 와 한자리에 모여앉은 공통점은 글을 깨쳐 무식을 면하고자 함이었다.
"네에, 좋습니다. 그럼 추운 것을 조금만 더 참고, 이번에는 다 같이 구구법을 외어보도록하겠어요. 자아, 다 같이 시이이작!"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이 사 팔..." 모두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합해져 울리기 시작했다. 이지숙은 그 울림이 슬픔인 듯 서러움인 듯 가슴을 적셔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난이란 육신을 배고프게 할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의 굶주림을 모면할 길이 없는 빈한 속에서 배움을 얻을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봉건사회의 착취계층은 그 상관관계를 교활하게 이용함으로써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까지 대대로 향유할 수 있었다. 대중착취로 부를 축적함과 아울러 대중무지화로 사회의식이 잉태될 시부터 말살해나갔다. 대중의 무지는 개별적인 굴종과 기회주의만을 낳을 뿐이었다. 그 토양 위에 착취계급의 영속적 지배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은 응집력이 없는 모래와 같다. 모래밭을 응집력을 가진 흙으로 변화시키려면 끊임없이 물길을 대야 하는 것이다. 그 물길이 바로 가르침이고 일깨움이었다. 사회의식을 획득해가고, 확대해가는 대중의 응집력-그것은 혁명의 무한한 잠재력인 동시에 원동력이었다. 일제치하를 거치며 대중들은 일단 왕권의 절대신성이라는 허위를 깨닫고, 더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끔 되었다. 그런 의식의 변화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대중이 깨닫게 된 인식의 발전이었다.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봉건사회의 거부, 그 인식은 바로 그와 반대되는 정치, 사회구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래가 흙으로 변해가는 대중 응집력의 싹틈이었다. 그 상태에서 대중들이 맞이한 것이 해방이었다. 해방은 대중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세상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의 순박하고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따. 대중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이 반봉건적 정치, 사회적 혁명을 거쳐야만 이룩될 수 있다는 필연적 사실까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대중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제치하의 극렬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싹터오르는 대중의 응집력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바꿀 기회를 잃었던 것이고, 해방이 되자마자 그 기회를 잃었던 것만큼 더 열정적으로 대중의 힘을 혁명의 힘으로 불붙여나아가는 과정에서 미제국주의와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것은 제 2의 기회상실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어디까지나 건재하고 있었다. 다만 지하로 흐르는 물줄기로 일시적 침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지숙은 그 물줄기의 정의로움과 진실됨을 믿고 있었다. 안창민이 염상진과 함께 그 물줄기가 솟구치게 하는 길을 뚫고 있다면, 자신은 그 물줄기가 더 힘차게 솟구치도록 불을 때고 있음을 이지숙은 확신했다.
"...칠 오는 삼십에오, 칠 육은 사십에이, 칠 칠은 사십에구, 칠 팔은 오십에육..."
학생들은 두 자리 수로 넘어가면서 가락을 맞추느라고 어느덧 필요없는 말까지 끼워넣고 있었다. 이지숙은 혼자 웃음지었다. 학교에서나 야학에서나 그건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시켜도 그건 고쳐지지 않았다. 합창을 하게 되면 자연히 가락이생기고, 가락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에'자가 끼여들었다. 이지숙은 언제부턴가 우리가락의 그 자연스러움을 즐기게 되었다.
덧버선을 신었는데도 이지숙은 발이 시려움을 느꼈다. 석탄난로 하나로는 오십 평이 넘는 교회당 안의 추위를 녹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야학도 겨울방학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서민영 선생은 학교의 방학에 따라 야학도 방학을 하라고 했었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이니 조금더 견디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추위를 무릅써온 것이다. 학생들의 요구도 있기는 했지만 이지숙 자신으로서도 더 가르치고 싶은 숨겨진 욕심이 있었다. 그녀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국어와 산술이 아니라 그 공부를 마친 다음에 꼭 한 가지씩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였다. 그녀는 우리의 겻과 서양의 것을 번갈아가며 이야기했는데, 그것들은 건성으로 들으면 그야말로 옛날이야기나 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을 써서 들으면 하나같이 계급의식을 조장하고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입에 오르는 우리의 이야기로는 나무꾼과 선녀나 심청전 같은 것이 아니고 홍길동이나 임꺽정이었고, 서양 것으로는 엄마 찾아 삼만리나 왕자와 거지가 아니라 플란다스의 개와 성냥팔이 소녀였던 것이다.
"...구 팔은 칠십에이, 구 구는 팔십일!"
끝에 힘을 모으며 구구법 합창이 끝났다.
"좋아요, 아주 자알 했어요. 아까 말한 대로 오늘부터 겨울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운 것을 총 복습한 거에요. 여러분들은 오늘 복습한 것을 잊지 말아야만 글을 읽고 쓰게 되고, 수를 척척 계산할 수 있게 돼요. 방학중에도 매일 한번씩 외어 절대 잊지 않도록 해야 해요. 약속할 수 있죠!"
"네에엣!"
모두의 대답이 기운찼다.
"오늘은 방학날이고 날씨가 너무 추우니까 옛날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할까요?" 이지숙은 넌지시 묻고 있었다.
"안되는디요"
이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듯 했고,
"오늘 얼어죽게 추운디도 이약 못 듣는 것이 아까바 이리 왔당께요"
소녀의 목소리가 카랑하게 울렸고,
"하먼, 공부야 무신 재미가 있간디? 이약 듣는 재미에 그작저작 공부도 허는 것이제"
어느 총각의 굵은 음성이 퍼졌고, 그 체면 가리지 않은 말에 여자들 쪽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지숙은 호롱불의 흐린 불빛 속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피워올리고 있었다.
"좋아요, 학생 여러분들이 추위를 견딜 수만 있다면 난 얼마든지 얘길 하겠어요."
이지숙은 학생들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선상님, 이약 듣기 전에 한 가지 물을 말이 있는디요."
남자 쪽에서 손이 불쑥 올라왔다.
"와따, 워째 초치고 그런다냐"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고,
"통시깐에 가고 잡은 거 아녀어?"
뒤따라 나온 목소리였고, 여자들 쪽에서 다시 킥킥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모두 조용히들 하고, 다 같이 질문을 듣도록 해요."
이지숙이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무명목도리를 두른 빡빡머리가 주저하는 몸짓으로 일어섰다.
"저어... 이 말얼 물어야 될란지 워쩐지 모르겄는디요... 어런덜헌테 물어볼 수도 없고라, 생각허다허다가, 선상님이 몰르는 것은 무엇이고 간에 물으라고 허셔서 묻기로 헌 것인디 요."
"하 짜석, 밥 다 타뿔라고 사설도 질기도 질다."
누군가가 불뚱스럽게 내뱉았다.
"선상님, 다른 것이 아니고라, 율어럴 차지헌 그 사람덜이 쌀얼 골고로 노놔줘서 죽끓에 묵든 사람덜이 밥해 묵는다는 소문이 읍내에 쫘악 퍼졌는디, 고것이 참말일께라?"
빡빡머리의 말은 낮고도 조심스러웠다. 교회당 안에는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뒤덮여왔다.
이지숙은 잠시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건 사실이에요. 염상진 동무와 안창민 동무가 인민들을 위해 한 훌륭한 일예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고, 어린 학생이 질문을 할 정도가 된 것으로 그 효과는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학생의 입에서 '빨갱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라고 말이 나온 것이 이지숙의 가슴을 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요, 선생님도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그런데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일이니까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여러분도 모두 그런 소문을 들을 눈치 같은데, 나나 여러분들이나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더 두고 봐야 알게 될 거예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지숙의 말은 하등 법에 저촉될 데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두 가지 목적을 명백한 계산 아래 달성시키고 있었다. 자신도 그 소문을 들었다고 함으로써 소문을 알고 있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안심시켜 앞으로 더 퍼져나가게 하려는 것이었고, 서로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니까 더 두고 보자고 말함으로써 염상진네에게 계속적인 관심을 두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이지숙이 말을 끝냈는데도 학생들은 싸늘한 기운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녀는 해독하고 있었다. 그건 율어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고, 염상진네에 보내는 지지였으며, 혁명과업의 수행이 성공하고 있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슴 뻐근해오는 감동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나무 전설'을 이야기 해주기로 마음 정했다. 이런 분위기에 그 이야기는 안성마춤이었다.
"자아, 여러분! 그럼 선생님이 지금부터 얘길 시작하겠어요. 오늘 할 얘기는 무언가 하면, 대나무 전설이에요. 잘들 들어요, 시작하겠어요.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정님이와 순덕이는 베갯모에 수를 놓고 있었다. 수틀에 팽팽하게 끼워진 동그란 베갯모에는 한 마리 학이 날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학은 거꾸로 나는 모습이었다. 쪽 곧은 다리를 오른쪽으로 모아 뻗치고 큰 날개를 활짝 펼친 학은 긴 목을 왼쪽으로 휘어돌리고 있었다. 머리에 찍힌 핏빛 점이 흰 몸체 속에서 유난히도 선명하게 고와보였다. 학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검은 선의 형체뿐인 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래에는 위의 학과는 반대 모습을 한 학의 수본이 그려져 있었다. 두 마리의 학은 서로를 마주보는 모습으로 그 긴 부리가 곧 닿을 듯 말 듯 하니 가까웠다. 학은 일부일처로 새끼를 까고 기르며 오래도록 살아가는 수명이긴 새였다. 두 처녀의 수틀 위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한 마리씩의 학에는 그녀들이 색실을 꿴 바늘을 한 땀씩 뜰 때마다, 나도 좋은 낭군 만나 학 같은 금실로 오래오래 살도록 해주십소사, 하고 수수백번 되뇐 기원이 서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베갯모가 완성되어 둥그런 베개의 양쪽에 붙게 되면, 베개가 구르거나 놓인 위치에 따라 두 마리의 학은 위아래서도 서로를 사모하는 모습으로, 좌우에서도 서로를 사모하는 모습으로 부리를 댈락말락하고 있게 될 것이다.
두 처녀는 나머지 한 마리씩의 학을 수놓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날렵한 손놀림으로 그러나 세심하게 바탕천의 올을 살펴가며 한 땀씩 떠서 부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십자수에 비하면 몇 갑절 어렵고 정성이 드는 수놓기였다. 바탕천이 다르고, 바늘의 크기가 다르고, 색실의 배합이 다르고, 수놓는 방법이 달랐다. 십자수는 올이 굵은 광목에다가 일정한 간격을 맞춰 열십자를 만들어가며 수본에 표시된 대로 색실을 바꿔가면 되는 것이어서 바늘도 길고 굵었다. 그러나 조선 수는 올이 가는 비단에다가 실의 이음으로 실물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서 바늘 한 땀씩이 제각기 다른 자리를 찾아야 하는 변화를 보이는데다 색깔의 다양한 조화를 맞추려면 색실을 수시로 바꿔 꿰야 하는데 바늘마저 짧고 가늘었다. 그러나 역시 십자수는 조선 수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아름다움으로나 자연스러움으로나 점잖음으로나 무게감으로나 조선 수가 월등했던 것이다.
순덕이는 하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가녀린 한숨소리에 맞추듯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음마, 가시내! 또 한숨이시."
어느새 정님이가 알아듣고 잽싸게 말을 튕겼다. 순덕이는 찔끔 놀랐다.
"아아녀, 나 한숨 안 쉬었는디..."
순덕이는 얼결에 더듬거렸다. 어쩌자고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것인지, 그녀는 스스로의 마음이 야속스러웠다.
"워따 이눔에 가시내, 나럴 귀먹쟁이 빙신 맹글라고 허네이. 글먼, 그 하르르 떨리든 소리가 니 한숨이 아니고 문풍지 떨든 소리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릴끄나?"
정님이가 바늘을 든 손으로 동작을 멈춘 채 옆눈길로 순덕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덕이는 정님이의 그 매운 눈길에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얼른 눈을 수틀로 옮겼다.
"금메, 나도 몰르게 나온 한숨인디..."
순덕이는 얼버무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 금방 수심이 가득 찼다. 한 번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정님이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책장사를 하며 사람 눈치 알아채는 것 하나는 남다르게 익힌 그녀였다.
"니, 무신 일 있제?"
정님이가 수틀을 요 위에 팽개치듯 하며 야무지게 순덕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서슬에 순덕이는 주춤 물러나 앉았다.
"아녀, 암일도 없어, 가시내야."
순덕이는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그러나 그 얼굴에 그려진 어색스러운 웃음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요 멍청한 가시내야, 니 나가 을매나 눈치 빠른지 알지야? 이 시상 사람덜 눈 다 속혀도 내 눈만은 못 속힌다는 것 니 알겄제? 그라고, 니허고 나허고는 성제간보담도 더 가차운 사이란 걸 알아야 써. 전에도 니 맴이 쪼깐 요상시러우먼 나가 딱 알아맞쳐뿔고, 또 나 맴이 쪼깐 깔끄장허먼 니가 딱 알아묵어뿔고 안 혔냐? 긍께 무담씨 나 눈 속힐라 허덜 말고싸게 속맘 털어노라 그 말이여."
"금메, 암일도 아니랑께 워째 이리 사람 잡지고 그래쌓냐."
순덕이가 수틀을 던지며 짜증을 부렸다. 그 얼굴이 곧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정님이는 순덕이의 그런 얼굴을 힐끗거리며 더욱 자신에 찬 웃음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순덕이의 가슴에 감추어진 고민이 무엇인지 환히 잡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 병을 앓아본 사람일수록 쉽게 감지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알겄어, 알겄어. 근디 말이다, 순덕아."
정님이는 순덕이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니가 말 못허겄으먼 나가 대신 혀주랴?"
마치 어머니가 그러듯이 능청을 떨었다.
"아녀, 아녀. 암일도 아니라는 디 참말로 니 워째 이래쌓냐. 나 집에 갈란다."
좀체로 화를 내지 않는 순덕이가 얼굴빛을 달리하며 수틀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동시에 정님이의 손이 순덕이의 치마를 거머잡았다.
"가시내야, 니가 상사병 앓는지 누가 몰를지 아냐!"
정님이가 내쏘듯 한 말이었다.
"워쩌?"
순덕이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였고,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한껏 들이켠 그녀는 무너져내리듯 주저앉으며,
"요 귀신 겉은 가시내야, 니 워쩌크름 고것얼 알아부렀냐."
탄식하듯 말하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번져 있었다.
"멍텅구리 겉은 가시내, 나가 시방 그 병얼 앓고 있는디 니 맴 하나 못 알아묵을 성부르냐."
정님이가 애조 띤 음성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려, 니 눈 쉭일라고 헌 나가 멍텅구리제."
순덕이의 음성도 가라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요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두 개의 수틀에는 한 마리씩의 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근디... 니 가심에 들앉은 사람이 누구제?"
이윽고 정님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순덕이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이 지나도 대답이 없었다. 정님이는 순덕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고개를 숙인 순덕이는 색실만 쥐어뜯고 있었다. 그다지 활발한 편이 아닌 순덕이가 한번 물음에 대뜸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릴 리 없다고 짐작했던 정님이의 입가에 따스한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순덕아, 니허고 나하고 새에 감추고 덮고 할 일이 머시가 있냐. 우리찌리 허는 말이제만 다 큰 시악씨가 어떤 총각 가심에 두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니냐. 근디, 그 애타는 맴얼 부모헌테 말허겄냐, 성제간헌테 말허겄냐. 그러길래 동무가 있는 것이여. 동무헌테 말얼 혀서 맥힌 속도 풀고, 지가 못허는 일 동무가 새중간에 서서 돕기도 허는 것 아니겄냐. 나는 니가 가심에 품은 남자가 있다니께 똑 나 일맹키로 좋다. 숨키지 말고 얼렁 말해뿌러라."
정님이는 순덕이의 손을 감싸잡고 정겹게 말을 해나갔다.
"참말로 숭 안 볼 거여?"
순덕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항. 하나또 숭잽힐 일이 아니라니께."
"빙신, 워쩌다가 니헌테 들켜뿌렀는지 몰르겄다."
순덕이는 정님이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며 안타깝게 말했다. 도저히 그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누군지 밝히는 순간 정님이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놀릴감이 될 것만 같았던 것이다. 어쩌자고 그런 남자한테 마음이 쏠려가는 것인지 자신이 야속할 뿐이었다.
"순덕아, 니가 누구럴 좋아혀도 고것은 니 맴이고, 니 뜻대론께 숭잽히고 말고 헐 일이 아닌 것이여. 설사 소록도 문딩이럴 좋아헌다고 혀도 다 니 맴인 것이여. 나 말 그리고 못믿겄냐?"
"아녀, 믿기야 믿제."
"근디?"
"통 입이 안 떨어지니께 그렇제."
"문딩이, 니 가심에 품고 혼자 속낋에 봤자 약도 웂는 속병만 생긴다니께."
순덕이는 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쏟아버리고 나면 무언가 얹힌 듯 답답하고 꺼림칙한 가슴이시원해질 것도 같았던 것이다.
"그려, 말해뿔란다."
순덕이가 고개를 치켜들며 앉음새를 고쳤다.
"잉, 얼렁 말해뿌러라."
정님이도 바짝 다가앉았다.
"심 사령관이여."
순덕이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워쩔끄나!"
정님이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놀란 그녀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을 때는 이미 말이 쏟아져버린 다음이었다. 순덕이가 입에 올린 사람은 너무나 엉뚱하고 의외였던 것이다.
키가 큰 그 사람이 키처럼 긴 총을 메고 아침저녁으로 책방 앞을 오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했던, 활동사진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멀리있는 남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순덕이는 그 남자를 가슴에 품게 된 것이다. 순덕이도 자기네 가게에서 그 사람을 매일같이 보아왔을 것이다. 정님이는 비로소 그 남자가 벌교에서 몇 개월째 살고 있다는 현실감을 느낌과 아울러 젊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다. 언제나 군복차림으로 모자를 깊이 눌렀쓴 채 빠른 걸음으로 오가는 그 사람을 남자로 마음에 담을 수 있었던 순덕이가 놀랍기도 했고, 가당찮기도 했고, 정님이는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순덕아, 말얼 허고 난게 가심이 잠 풀리지야?"
순덕인는 느리게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허먼, 더 심헌 한숨이 터질 것 맨치로 속이 답답혀졌다는 것이여?"
정님이는 순덕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가 미친년이제? 올라가지도 못헐 나무 쳐다보고 있는 나가 영축웂이 미친년이제?"
순덕이가 시름겹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덕이는 지금, 자신이 너무 놀라 쏟아내버린 ‘워쩔끄나!’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정님이는 눈치챘다. 애당초 순덕이에게 말을 하라고 졸랐던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해주거나, 또 다른 신경을 태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정님이는 자신이 엉겁결에 뱉아버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덕아, 니넌 올라가지도 못헐 나무 쳐다본다는 말만 알았제, 열 분 찍어서 안 넘어갈 나무 웂다는 말얼 몰르냐? 그라고 말이다, 니가 올라가지 못헐 나무 쳐다보는 신세람사 나도 피차일반이랑께로. 니나 나나 소학교 포도시 나온디다가, 나넌 책방집 딸년에 니넌 과자점 딸년 신세로, 부잣집 아들인 대학생 정하섭이럴 가심에 담고 있는 나나, 읍내럴 쩌렁쩌렁 울리는 권세 가진 군인대장얼 맘속에 두고 있는 나나 똑겉은 신세가 아니고 머시냐."
정님이의 말에 순덕이는 귀가 번쩍 띄는 것 같았다.
"니 시방 머시라고 혔냐? 이적지 정하섭이 그 사람얼 가심에 담고 있다는 말, 니 참말이여?"
순덕이는 다잡듯이 묻고들었다. 울음을 머금은 듯한 얼굴로 정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덕이는 마침내 정님이가 여태까지 속마음을 감추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정하섭이가 티끌만큼도 마음에 없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독헌 가시내, 워찌 그리도 지독허니 맘얼 숨키고 살아지다야?"
순덕이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며 정님이가 더없이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금메... 그 삶이 서울로 공부허로 떠날 때꺼지만 혀도 암시랑 안혔는디, 요분 난리통에 좌익으로 떡허니 표식내고 읍내에 왔다 간담부텀은 수놓는 힘에 힘아리가 하나또 없고,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이, 나가 머 헐라고 요 수럴 놓고 있는고, 허는 생각얼 속으로 많이도 혔제."
정님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덕이는 비로소 가슴의 답답함이 걷혀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정님이는 단순한 동무가 아니고 그 이상의 어떤 느낌으로 마음을 채워오고 있었다.
"인자 니넌 워쩔 것이냐?"
"애만 타제 나가 워쩌겄냐. 니맹키로 아침저녁으로 얼굴이라도 귀경을 헐 수가 있냐, 워디있는지 알기럴 허니 찾어갈 방도가 있겄냐. 나헌테 비허자먼 니넌 수놀 힘이 펄펄 생기겄다."
"염병헌다, 가시내. 근디, 니나 나나 인자 워째야 쓸끄나?"
"금메, 찬찬히 생각혀봉게로 니허고 나허고 끈허게 동무 되기는 다 틀려묵었다."
"뜽금웂이 고것은 또 무신 소리여?"
"니 서방 심재모허고 내 서방 정하섭이허고 원수지간인디 니허고 나허고도 그리 되는 것아니겄냐?"
"음마, 문딩이. 누가 듣겄다!"
둘이는 마주 보고 눈을 흘기다가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만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줄기를 뻗고, 그 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건 산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강강수월래춤이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을 받들어올리고자 하는 산들의 어깨동무였다. 산들은 신비스러울 만치 확연한 동그라미를 그려내고는 그 안쪽에다 평평한 땅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그 전체적인 모양은 거대한 크기의 사발이었다. 어쩌면 조물주가 물사발로 한번 쓰고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재모는 생전 처음 대하는 그 신기한 지형을 정신없이 살피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지도를 참고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완벽한 작전을 짤 수가 없어 직접 지형정찰을 나온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상상했던 것보다 산은 훨씬 완벽하고 완상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보다는 지도가 한결 불확실했다. 지도에는 예사로운 등고선으로만 표시된 산들이 실제로는 놀랄 만큼 완전한 천연요새를 만들고 있었다. 산줄기가 끊겨 있는 곳이 보성 쪽으로 한 군데 있다고 했는데, 거리가 먼 탓인지 아니면 초행이라서 지형파악이 서툰 탓인지, 그곳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햐아, 정말 경치 한번 근사허네."
옆에서 들려온 경계병의 감탄이었다. 심재모는 재빨리 경계병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경계병은 총을 축 늘어뜨려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뭘 하는 거얏!"
심재모의 낮은 목소리가 강한 탄력으로 날아갔다. 경계병이 후닥닥 놀라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경계병을 꾸짖고서도 그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하늘로 옮겨갔다. 그는 하마터면 경계병과 똑같은 감탄을 할 뻔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 구름의 틈 사이사이로 햇살이 곧게 뻗어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것이 율어면 상공이었고, 햇살은 마치 무슨 축복인 것처럼 율어면에 뻗어내리고 있었다. 둥그렇게 에워싸인 산들의 기묘함과 그 가운데 이루어진 평지의 신기함에다가 몇 가닥의 햇살까지 뻗어내리고 있으니 그 경치의 아름다움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심재모는 다시 산줄기를 따라 천천히 눈길을 옮기며 지형을 정찰했다. 지형을 살필수록 마음은 착잡해져갔다. 현재의 병력으로 섬멸작전이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확실해졌다. 염상진 부대는 저 아래 율어면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에도 확인했고, 오늘도 확인한 사실이지만 염상진은 병력을 산줄기에 분산시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산재한 병력을 소탕하자면 율어면을 둘러싸고 있는 산 전체를 포위하는 것이 기본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건 사단병력이나 투입되어야 가능할 일이었다. 소탕이나 섬멸을 전제로 할 때 그 작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비행기로 폭탄을 투하해도, 포부대가 폭격을 가해도 될 일이 아니었다.
심재모는 지형을 직접 확인하고나서야 지난번에 보성의 병력을 율어에 투입시킨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던가를 가슴 섬뜩하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조성으로 병력이 몰렸기 때문에 율어의 방어가 허술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고,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이긴 했지만 지형적으로 볼 때 그건 포위당하기를 자초하는 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신이 전병력을 끌고 율어면으로 들어가 염상진과 전투를 벌인다고 가정할 경우 그 결과는 보나마나 빤한 것이었다. 자신의 부대는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봐, 경계병, 돌아간다."
심재모가 몸을 낮춘 채 재빠르게 움직였다. 두 명의 경계병이 같은 자세로 뒤따랐다.
심재모가 적의 경계를 피하기 위하여 지난번의 주리재 쪽을 버리고 광주로 넘어가는 석거리재로 우회했던 것이다. 그 거리는 지난번에 비해 배 이상 멀었다.
심재모는 율어의 북쪽과 서쪽이 산악지대로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섬멸이나 소탕을 우선으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그 산악쪽으로 몰아내는 퇴치작전도 고려해볼 일이었다. 첫째는 민간인 사이에 세포를 부식시키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둘째는 기습적이고 산발적인 전투를 끊임없이 전개해 적의 병력을 감소시키고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일이었다. 셋째는 적의 병력이 어느 정도 감소되었을 때 퇴치작전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미 벌교와 보성 쪽 길목에서는 율어의 고립작전을 위한 검문검색이 강화되어 있었다.
심재모는 어스름을 밟으며 경찰서에 도착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난감한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낮에 지주들이 모여, 음력설 전후해서 정하게 되어 있는 소작문제에 대한 의견을 통일했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고, 이번 반란사건에 가담했거나 연루된 사람들 집에는 일체소작을 내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권 서장의 요약된 보고였다.
"뭐라고요!"
심재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눈이 부릅뜨이는가 하자,
"도대체 그 자식들은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이야! 그 작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따위 결정이나 하고 자빠져 있어! 그것들 정말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구만."
구둣발로 닥치는 대로 책상을 걷어차며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권 서장 이하 네댓 명의 경찰은 꼼짝을 못하고 굳어져 있었다. 그들 모두는 그렇게 화가 난 심재모의 모습을 처음 보고 있었다.
"염상진 쪽에서 퍼져나온 소문으로 민심이 현혹되고 있는 판에 그에 맞서 쌀을 풀지는 못할망정 지주라는 작자들이 모여앉아 그따위 결정이나 하고 있으니. 바보 천치 같은 작자들, 해도해도 너무 하는군."
다소 진정을 한 심재모가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이었다.
"저어, 방이나 들어가셔서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시죠."
권 서장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럽시다."
심재모는 사령관실을 향해 앞서 걸어갔다. 그의 빳빳하게 세워진 뒷덜미에 아직 풀리지않은 화가 뭉쳐 있었다.
율어면 사람들이 쌀을 분배받았다는 소문을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벌교만이 아니라 조성, 보성 일대가 그 소문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다. 소문이 으레 그렇듯 그 소문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확대되고 과장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쌀을 받아 죽 세끼는 안 거르고 겨울 한철을 나게 되었다더라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죽을 끓이던 사람들이 전부 밥을 먹고 산다더라 하는 것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끼 밥을 다 찾아먹고 살게 되었는데 그게 전부 보리 하나 안 섞인 흰쌀밥이라더라 하고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소문은, 음력설에 떡을 하라고 또 쌀을 나눠준다더라 하는 것이었다.
나날이 변해가는 소문을 보고로 들으며 심재모는 속수무책이었다. 소문을 막을 수도,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찾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문은 마치 바람처럼, 안개처럼 떠도는 것이라서 분명 있으면서도 막상 잡히지는 않았다. 소문을 유포하는 자들을 찾아내는 일도마찬가지였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소문들은 다 알고 있었다.
소문이 나날이 변해가고 있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일 수가 없었다. 자기들도 쌀을 받고싶은 부러움에서, 쌀을 받지 못한 오기로 그러는 것이고, 제가짓것들이 그러다가 지치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염상진이란 존재가 없는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염상진이 부대를 이끌고 일정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한 그런 소문은 한쪽에는 유리하게, 다른 쪽에는 불리하게 작용되게 마련이었다. 그 소문이 날로 악성화되어가는 것도 염상진의 부대가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문의 악성화는 분명 민심의 동요인 동시에 이쪽에 대한 불만이나 불신감의 표현이었다.
심재모는 처음 그 소문을 보고받았을 때 염상진이가 결정적인 심리전을 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여파가 심상치 않으리란 생각과 함께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심리전에 맞서 싸우려면 이쪽에서도 쌀을 분배해야 했다. 그러나 그 누가 쌀을 내놓을 것인가. 전쟁이란 군대와 무기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일찍이 버마 전선에서 체험한 바였다. 민심의 동조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전쟁은 지게 마련이었다. 일본의 패배는 연합군의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국적을 달리하는 많은 민족들의 외면과 항쟁에 부딪쳐 일본은 필연적으로 패배하게 되어 있었다. 다만 연합군의 무력은 그 패배의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었다. 침략전쟁에서도 그러한데 사상전쟁에서 민심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인민의 세상을 이룩한다는 공산혁명을 앞세우고 있는 염상진은 쌀은 나눠줌으로써 그 실천을 보임과 동시에 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민심까지 얻어내려는 심리전을 꾸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지주들은 꼭 어린애들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심재모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일단 그 결정이 소문으로 퍼지기 전에 지주들을 설득해얄 겁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어렵더라도 할 때까지는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 방법밖에는 달리 무슨 방법이 없이니까..."
심재모는 한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그는 눈을 번히 뜬 채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고, 담배도 건성으로 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말이지요, 서장님하고 저하고 둘이서만 나서서 될까요?"
서장은 금방 심재모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도 심재모가 없는 동안에 이 문제를 놓고 여러 모로 생각하면서 협조자의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게 회의 참석자 명단입니다. 거기에 김범우 선생댁은 빠져 있습니다." 서장이 접혀진 종이를 펴서 심재모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김범우 선생댁에서 참석하지 않은 건, 그런 회의를 반대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댁 소작인들 중에는 이번 반란에 연관된 사람이 없기 때문인가요?"
심재모의 빈툼없는 물음에 권 서장은 주춤해졌다.
"그것까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연관된 사람이 전혀 없기는 어려울 겁니다."
심재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주들의 명단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김 선생이니, 면목없고 미안한 일이오. 서민영 선생한테도 협조를 부탁드리면 어떨까요?"
"물론 도움이 될 겁니다."
서민영의 생활방식을 지주들은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권 서장은 하지 않았다. 서민영의 영향력이 지주들에게 작용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회의는 내일 오전 열시에 여기서 열도록 합시다. 난 서민영 선생을 찾아뵐 테니 권 서장님은 김 선생을 만나도록 해주십시오."
"노력해보겠습니다."
심재모는 그 길로 서민영의 집을 찾아갔다. 서민영은 어둠침침한 방에서 무슨 글인가를 쓰고 있었는데, 초점을 맞추느라고 눈을 몇 번이나 껌벅거리고나서야 심재모를 알아보았다.
"어쩐 일이신가. 일하기 힘드시지?"
서민영이 몸을 꾸물거려 앉은뱅이책상에서 물러나앉으며 말했다.
"예, 할 만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건강하시구요?"
서민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는데, 그 눈길은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예에, 선생님을 찾아뵌 건 다름이 아니옵고..."
서민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심재모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심재모는 되도록 간단명료하게 이야기를 요약하려고 노력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서민영은 몸을 약간 꿈지럭거리더니 다시 바로 앉고는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은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쑥 한마디를 했다.
"그건 하지 않음만 못한 일일세."
그 말이 심재모의 머리를 쿵 쳤다. 심재모는 서민영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무릎 위에 올려진 주먹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 사람들은 지주고 자넨 군인이야.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사람들은 농사장수고 자넨 국책을 따라야 하는 몸이야. 장수는 이윤추구가 그 목적이고, 그 목적달성을 위해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네. 만약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는 장수가 있다면 그는 제대로 된 장수가 아니고, 결국 장사에 망하게 되지. 농사장수인 지주들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 내린 결정을 누구의 설득으로 번복할 것 같은가? 그건 어림없는 소리야. 그들이 그렇게 어설펐다면 어떻게 대대로 지주라는 자릴 지켜왔겠나. 그리고, 이건 자네와 직결되는 문젠데, 그 사람들의 행위에는 공산주의 척결이라는 국책에 부합하는 명분과 정당성까지 붙어있네. 그런데 자넨 그 국책을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자네가 만약 그들의 결정을 번복시키려 한다면, 그들은 자기들 결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파괴를 곧 자기네 이익의 파괴로 직결시키게 되네. 그때 그들은 무서운 결속력으로 뭉쳐지게 되지.
그 대목에서 잊어서는 안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네. 그들은 대부분 이번 사건에서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네. 그들이 이번 결정을 내리게 된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은데, 자네 행위는 그들의 보복감정까지 가로막는 것이 되는 셈이지. 그렇게되면 자네 입장은 어떻게 되지? 막다른 골목이네. 자넬 몰이하는 데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현실은 그들의 편이고... 어쨌든 그 일은 그만두는 게 좋겠네."
"선생님, 그렇지만 그들의 결정대로 소작을 뺏게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민심을 잃는 사회혼란의 원인이 되고, 따라서 그건 국책에..."
"아네, 아네. 내 어찌 자네 맘을 모르겠나."
서민영은 손가지 저으며, 격한 감정으로 이어지는 심재모의 말을 제지했다.
"자네가 날 찾아오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염상진과 대치하는 입장에서 자네 생각은 백번 옳아. 나도 자네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말야. 그러나, 또 다른 현실을 무시하거나 적대할 순 없는 일이지. 이건 자네더러 이 세상을 약삭빠르게 살라거나, 옳지 않은 일에 야합하라는 게 결코 아니네. 면전에는 할 얘기는 아니지만, 오늘같은 현실에서 자네 같은 젊은 군인은 귀한 존재야. 난 자네 개인이 아니라 자네 같은 존재들을 귀히 여기고 보호하고 싶은 사람이야."
"황송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 결정은 작은 일이 아니잖습니까."
서민영은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안은 불을 밝혀야 할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서민영이 잔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기다리시게. 어떤 해결책이 있긴 있을 것이니."
서민영의 입은 다시 다물려버렸다. 침묵했던 시간에 비해 너무 짧고도 막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심재모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서민영 선생의 말을 전체적으로 더듬어 내렸다. 그분의 말이 포괄하고 있는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선생님, 그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앉으시게, 저녁 먹고 가야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앉으시라니까. 밥때에 오신 손님이 밥을 먹지 않고 간대서야 말이 되는가. 화급한 공무만 없다면 들고 가시게."
"예, 별일 없습니다."
심재모는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밥때에 손님을 그냥 보내는 것도, 권하는 밥을 손님이 먹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니라던 할아버지의 말을 심재모는 떠올리고 있었다.
심재모가 경찰서로 돌아왔을 때 김범우를 찾아갔던 서장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예, 여러 말이 있었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김 선생이 나서는 건 어렵지 않은데 , 그 일 자체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문제니까 제고해얄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하, 이것 참!"
심재모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소리를 크게 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결론을 내린 두 사람에게 감탄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서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지주들한테는 연락했습니까?"
"김 선생 말이 그래서 사령관님을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잘됐습니다. 연락 안하셔도 됩니다."
심재모가 돌아섰다.
"아니, 저어..."
서장이 의아스런 얼굴로 주저했다.
"내일 회의는 취솝니다. 기다리십시다. 어떤 해결책이 있긴 있을 것이니."
심재모는 사령관실로 걸어가며 커다란 목소리로 서민영의 말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부터 지주들의 결정이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거친 바람이 되어 읍내를 뒤덮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