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기호의 고고학☆]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기호의 고고학]
김백겸 시집 / 광장시인선 001 / 도서출판 시인광장(2013.05.20) / 값 9,000원
================= =================
기호의 고고학
김백겸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다’는 문장처럼 말씀과 사물이 한 몸이었던 행복한 시대의 말이 있었다
에덴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던져진 말들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담의 몸처럼 썩고 부서지는 낙엽의 운명이 되었다
말들이 인간의 의식에서 태어났으나 대양으로 흐르는 시간의 강에 뜬 물살의 거품이었다
말들은 심연으로부터 솟구친 바위 같은 세계 풍경에 걸리며 인간의식에 굴곡과 무늬를 만들어 냈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회교사원처럼
사각형과 원이 중첩된 티벳만다라처럼
말과 말이 결승문자처럼 얽힌 만화경이 문명이었다
말의 역사 속에서 상징의 피라미드, 은유의 크레타 미궁, 이미지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졌다가 무너졌다
인간의 생각들이 말의 요람에서 태어나 말들의 무덤에서 죽었다
제도와 법률과 화례와 인간이 프로그램한 모든 도구들이 부장품처럼 묻혔다
인류의 의식은 흙의 잠속에서 도서관의 책들과 박물관의 미이라 같은 말의 꿈을 꾼다
죽은 생각들이 진시황의 병마총처럼 묻혀 드라큐라의 수혈 같은 재생의 시간을 갈구한다
나는 독자들을 비경秘境으로 안내하는 헤르메스처럼 지도와 랜턴을 준비해서 캄캄한 흙의 시간으로 내려가 문명의 모든 기억을 들여다 본다
고양이 눈 속의 고양이
김백겸
내 정신이 갇혀있는 형상과 이름의 숲을 향해 저녁산책을 나갔네
숲속 산책길에서 홀로 오던 고양이야
너는 나를 흘낏 보고
나 보다 앞서 오던 길로 달아난다
나는 호랑이처럼 성큼 성큼 걸어가는데
저만치 달아나다가
나를 다시 흘낏 본다
동무도 없이 가는 소롯 길에 바람이 으스스 불고
벚나무 낙엽은 오그라져서 발 빠른 쥐처럼 움직인다
갈색 등털에 목덜미가 흰 고양이야
너는 왜 나를 자꾸 쳐다보는가
검은 눈은 공포와 연민이 불꽃처럼 일고
황혼의 해를 받아 더욱 빛이 난다
황금쟁반처럼 떨어지는 태양은 까마귀울음과 풀벌레소리 속으로 떨어진다
가시철망 울타리가 나타나고
너는 개구멍을 지나 명부의 어둠 같은 숲으로 사라진다
너와 나는 그렇게 작별했지
이상한 연인의 비상한 감정으로 헤어졌지
저녁이 오자 캄캄해진 숲
길들이 모두 어둠에 지워져 함정이 된 숲
버드나무 줄기들이 뱀의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는 숲을 지나 왔네
나는 내가 걸어간 먼 길을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네
검은 구름사이로 저녁 흰 달이 고양이 눈처럼 나를 바라보자
나는 알아차렸네
고양이 눈 속에서 나는 고양이였음을
고양이는 내가 죽으면 다음 세상으로 안내할 영혼의 친구였음을
불안과 행복 사이
김백겸
쑥부쟁이가 여기저기 피었는데
꽃들이 연구소에 파견 된 러시아 기능공들의 말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비명처럼 주장하고 있는데
플라타너스 가지에 앉았던 멧새들은 날개자국을 허공에 남기고 사라졌는데
딱정벌레와 사마귀들이 목숨의 무지개다리를 지나 어디로인가 가고 있었는데
하늘에는 검고 낮은 구름들이 오고 사방은 조용해서 마음은 관속에 누운 시체였는데
구름 사이로 드러난 태양이 술 취한 중독자처럼 검붉은 얼굴을 했는데
이 신호들이 실재實在의 상징인데도 내 영혼이 무지한 것만 같아서 마음이 공연히 불안하기만 하였는데
쑥부쟁이 뿌리와 줄기로 저녁의 어둠이 물줄기처럼 스며들고 있었는데
억새풀들이 귀신들의 노래 한 자락 같은 바람소리에 매달리고 있었는데
장수풍뎅이가 하늘을 향해 배를 뒤집고 호랑나비가 울타리 너머로 날아갔는데
내 몸의 오장육부에 두꺼비처럼 웅크리고 앉은 전생의 기억들이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보여 주었는데
하늘엔 황혼이 남아있는 양떼구름이 떠오르는 파란 달빛에 물들고 있었는데
나는 무한시간의 놀이터에서 그네에 앉은 늙은 아이처럼 마음이 참혹했는데
참나무 숲 그늘 아래서 어둠이 빛나는 침묵의 눈을 뜨고 내 생각을 감시카메라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선물게임
김백겸
성공한 자는 부귀공명의 선물을 받는다고 책들이 말했네
오십이 되도록 한 가지의 선물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나는 태중의 어머니에게 내 성공을 예언한 동네 점쟁이의 예언을 비웃었네
선물은 다른 친구들의 인생에 바리바리 도착했고 내 인생에는 지나가는 배달 차의 바퀴소리만 시끄러웠네
그토록 자식의 금의환향을 바랐던 어머니는 내 성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네
체념을 요로 깔아 창가의 달 밝은 밤하늘을 쳐다 본 어느 날, 죽음보다 더 어두운 태초의 어둠이 나에게 뱀 눈을 뜨고 말했네
금도끼와 은도끼가 부러우냐
너에게 금강석보다 더 빛나는 선물, 네 심장이 뛰는 목숨과 시와 음악과 철학으로 온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감수성을 주었다
불만이면 반납하지 그래
죽음보다 더 어두운 태초의 어둠에게 나도 흰 눈을 뜨고 복싱선수처럼 맞받아 쳤네
구슬 아흔 아홉 개 모은 아이가 백 개를 채우고 싶어서 그러지
천궁도천궁도를 걸어가는 인생 놀이에서 구슬 하나가 구슬 아흔 아홉 개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는 선물게임을 당신이 시작했잖아
견본담채絹本淡彩의 눈으로 바라본 서울
김백겸
겸재의 금강전도金剛全圖에는 일만 이천 봉에 이르는 산의 숲이 아마존의 밀림처럼 빽빽하게 있지요
이 그림은 부감법俯鑑法으로 전체구도를 잡고 뾰족한 암봉은 수직준법垂直峻法으로 묘사하고
나무숲이 우거진 토산은 미점준법米點峻法으로 찍어낸 비단 천에 엷은 수묵으로 그린 채색화입니다
화가들은 견본담채絹本淡彩라는 말로 표현하지만요
바위산은 공룡의 등뼈처럼 삐죽삐죽 서 있고 소나무숲은 산신령의 대머리처럼 듬성듬성 서 있는 호쾌한 산세가 화면에 가득하지요
구도자와 은자와 방사와 술사들이 화강암의 기운으로 한 소식을 이루고자 벌떼처럼 몰려간 엘도라도의 열풍이 느껴지는 진경산수입니다
서울의 소공동은 재벌과 금융본사들이 뉴욕의 맨하탄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자본의 심장이지요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보면 레고 조각 같은 빌딩블록과 거미줄 같은 도로망 위로 자동차들이 흰개미떼처럼 몰려갑니다
도시계획전문가들은 문명의 활력이 넘치는 첨단융복합공간이라고 말하지만요
이곳에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慶貞공주의 궁이 있어 사람들이 작은공주골로 부르던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공동小公洞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가이아의 암 조직인 도시 속에서 서울 쥐들이 먹이와 번식을 위해 미로를 헤매다가 공원묘지의 납골당 같은 아파트에서 뼈를 묻는 현실공간입니다
말하는 나무
김백겸
높이와 넓이의 한계가 없는 에덴에 사는 생명나무가 지상으로 몸을 내민 가죽나무의 입을 빌어 나에게 말했다.
마루에 누워 하늘의 구름을 보는 아이야, 너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
나는 이웃집 도지사관사의 주인처럼 부와 권력을 달라고 말했으나 가죽나무는 침묵을 했다
말씀이 없었으므로 부와 권력은 내 앞을 지나가 다른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높이와 넓이의 한계가 없는 모든 상징의 원본인 생명나무가 빛과 어둠의 지혜를 수액과 피처럼 흘려보내면서 가죽나무의 입을 빌어서 말했다
심장에 힘이 넘치는 청년아, 네가 원하는 꿈이 무엇이냐
나는 엘로이즈를 얻은 아벨라르처럼 사랑에 성공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가죽나무는 침묵을 했다
말씀이 없었으므로 사랑은 내 앞을 지나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갔다
명상에 잡긴 나에게 생명나무가 천둥 같은 경고의 말씀을 했다
높이와 넓이의 한계가 없는 모든 상징의 원본인 생명나무가 있었다
너의 꿈과 욕망이 내 마음의 파문이자 그림자임을 모르겠느냐
나는 시작과 끝의 나무이며 하늘과 땅을 나눈 나무이다
너의 정신은 증류를 통해 나의 마음에 다다르는 임계농도를 넘어야 한다
쇠는 죽음과 부활의 용광로를 지나 황금이 되어야 한다
높이와 넓이의 한계가 없는 생명나무 아래 번개가 치면서 시간의 꿈에서 미로 학습을 하고 있는 내 영혼의 방황이 드러났다
오백 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학
김백겸
논산군 부적면 탑정호수에 저녁황혼이 내렸는데 미루나무 이파리가 뒤집어진다
잠깐씩 죽음의 얼굴을 보여 준다
그 얼굴이 하얀 분을 바른 저승사자의 아이콘이려니 잠깐 생각하였는데, 호수가 고래 배때기처럼 뒤집어지면서 큰 어둠을 파도처럼 밀어 붙인다
데이트를 나온 남자가 황혼이 내린 연인의 얼굴을 다지털카메라로 찍는다
뒤집힌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슬픔이었나
뒤집힌 죽음의 표정들이 기쁨이었나
미루나무 숲에 내린 저녁황혼이 이상한 순간을 잠깐 뒤집는다
호수에 비친 계룡산 연천봉의 그림자가 잠깐 동안 검은 죽음을 보여주고 다시 환한 삶을 보여 준다
검은 메모리 같은 기억에서 바람에 날리는 연인의 스카프가 순간적으로 영생을 얻었을 때
세계는 오백 원짜리 동전에 새겨진 학처럼 빛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김백겸
카메라 셔터를 누른 내 심장이 겨울 느티나무 숲은 찍어 왔네
고인도에서 ‘신의 품’으로 불렸던 검은 나뭇가지들의 ‘무드라’였는데
몇 십 년 동안에 표현 하나가 이루어지는 목숨의 춤이었네
바람이 불자 겨울 느티나무 가지들은 일제히 침묵의 춤을 추고 은빛 오로라가 가지에서 촛불처럼 타오르네
태국 무희들이 손가락과 함께 춤을 추는 한 장면을 칼로 자르듯
겨울 벌판의 느티나무는 푸른 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무드라 동작의 사바춤을 불립문자처럼 보여주제
현빈玄嬪에 대한 생각
김백겸
미인의 몸은 삼차원의 스튜디오에서 사진작가의 예술감각으로 표현되지만 내 상상은 사차원의 업보에 대한 지옥도를 그린다
달기妲己여, 주지육림의 향연 속의 미혹이여
네 기쁨이 극치에 올라 숯불로 벌겋게 달아올랐을 때
포락砲烙에서 살이 타는 냄새는 사향처럼 침실까지 스며드는구나
충신의 살로 젖을 담고 육포를 떠서
쾌락은 그 별미를 주방의 단지에 가득 채웠구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은 모두 잘리고
연못에는 보름달이 붉은 등불로 떠서 핏빛을 흘리는구나
미인의 성적 매력은 물고기와 새와 여우와 침팬지의 종족 욕망을 모두 합성했다는 생각
미인의 검은 눈의 매력은 아귀와 아수라와 여신의 정신이 모두 합쳐진 결과라는 생각
내 안의 검은 아니마인 깔리 여신의 검은 에너지가 내 환상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는 생각
시네마 천국
김백겸
목숨들은 수수께끼에 도달하기 위해 먼 길을 가는 순례자이며 유전자 디자이너는 생명의 퍼즐을 즐기는 표현주의자입니다
유전자에는 생명이야기가 무지개 뱀처럼 꼬아져 있습니다
나는 천일야화의 한 페이지를 넘겨 인간의 스토리를 읽는 남자
유전자사슬에는 삼십억 년의 생명시나리오가 강물처럼 흐릅니다
고사리가 되거나 은행나무로 자라거나 수국으로 피거나, 금붕어가 되거나 독수리가 되거나 코끼리가 된 아려야식阿黎耶識은 새 시나리오를 쓰고 몸은 새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에로와 스릴러 영화 수억 편을 본 내 몸이 지금 생에 출연했습니다
지구는 목숨의 양초 불로 도배를 한 장엄미사가 한창인 사원, 캠브리아기에는 삼 억종의 양초가 불을 밝혔다고 전합니다
삼엽충 뼈와 고사리 잎맥들의 불꽃 목숨이 얼어붙은 화석을 보고 나는 영생환상에 중독됩니다
종이책처럼 낡지도 않고 청동거울처럼 녹슬지도 않는 유전자지도는 타임캡슐을 탄 황금 책입니다
천일야화의 대하스토리를 읽는 나는 세하라자드의 이야기에 취한 남자, 문명의 도끼자루가 썩어도 생명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에밀레종의 환상
김백겸
종의 상부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가 36개나 박혀있었고 종의 몸통에는 연화좌蓮華坐에 앉은 비천상飛天像이 선녀의 하늘 옷을 불꽃처럼 나부끼며 사면으로 둘러져 있었습니다
타종을 하는 곳인 연꽃무늬 당좌撞座를 보며 내가 범종梵鐘의 소리에 깨어나는 십만 팔천리 밖의 아귀와 아수라와 지옥도를 연상한 것은 내 무의속의 환상이었을까요
명문銘文에는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神鐘을 달아 진리의 둥근 소리를 듣게 하셨다’라는 연꽃향기의 법문法文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에밀레~~~~~~
에밀레~~~~~~
아기의 비명인 종소리의 침묵이 중생의 육식六識을 깨우고 오온五蘊에 쌓인 억겁 인연을 흔들고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석가는 “일월이 땅에 떨어지고 조수의 간만이 없어지고 꽃이 여름에 열매를 얻지 못할지라도 나무묘법연화경을 부르는 여인이 영산정토靈山淨土에서 그리운 자식을 만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 소식消息이 과연 목숨을 가진 자의 눈물을 만파식적萬波息笛처럼 잠재울 수 있을까요
연화꽃밭
김백겸
어머니의 자궁에서 난자가 수정한 순간, 아뢰야식에 기록된 기억은 나방처럼 생명의 불꽃에 이끌려 육체를 얻으면서 인간 나비가 되었다.
어머니의 산도를 지나 배꼽에 탯줄을 달고 나왔으나 빛과 소리가 사방에서 칼끝처럼 일어서는 도산刀山지옥이었으니 때는 녹음방초의 세상이었다.
검은 혼돈의 육체에서 색성촉미향色聲觸味香의 아홉구멍이 터지면서 외부의 감각이 들어 왔다
인간나비의 의식은 거북이 껍질처럼 단단해져서 반들반들한 거울이 되었다 만화경萬花鏡에 비친 세상의 모든 파문과 그림자가 홀로그램이었다 희로애락의 고해를 건너가는 일엽고주一葉孤舟처럼 인간나비는 시간의 숲속을 날아가야 했다
판도라행성의 새 영웅이 되어 부귀공명을 누리는 프로그램을 인간나비가 꿈꾸었다.
신들이 선물했다는 판도라행성은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가 가득한 지구였다
희망만이 밤바다의 등대처럼 빛나는 상징의 숲.
그러나 꿈 해몽가의 밝은 눈으로 보면 판도라행성은 인간 마음아래 자리한 아수라와 아귀의 다른 표현이었다
땅과 하늘의 마야 인연들이 모여 칠색무지개를 이룬 엘도라도가 연화꽃밭처럼 펼쳐졌다
노아의 방주
김백겸
인간은 눈을 뜨고 검은 세상의 현실을 보았다
이 세상 너머 태초의 시간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어두운 에너지의 홍수가 흘러 들어왔다
눈을 태우는 태양 속에 검은 태양이 뜨고 천개의 눈을 가진 괴물처럼 은하수가 지상을 내려다보는 현실 속에 인간은 있었다
인간이 발 디딘 지구는 검푸른 세월의 바다를 건너가는 배
초목금수들이 만달라 문양으로 목숨을 수놓고 있는 정원이었다
인간은 이끼와 낙엽처럼 마르는 운명을 벗어나고자 사막에 피라미드를 새우고 시간을 건너가는 문명의 배를 띄웠으나
문명은 노아의 방주인 지구 안에 세운 또 하나의 노아의 방주였고
목숨들은 최종 기착지를 모르는 채 수수께끼의 항해를 계속했다
신생대의 캄브리아기에 삼천만종으로 분화된 생명들이 가이아의 몸속에서 기생충과 바이러스처럼 생태계를 이루고 살았다
가이아는 인간들이 개미떼처럼 불어나 하늘을 익룡처럼 날아다니고 심해바다를 고래처럼 돌아다니는 기계의 꿈을 시간의 잠 속에서 보았다
가이아는 마음을 괴롭히는 인간벌레들의 번식에 관한 악몽을 지우기 위해 천지개벽을 생각하기도 했다
하늘에 별들이 모두 일직선으로 모여드는 그 때
마야력 제 5 태양의 시간이 끝나 지축이 뒤집어지는 그 때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가이아의 잠재의식이 삼십 억년 동안 꿈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한 환상이었다
세포도시
김백겸
고해상도 현미경으로 찍은 세포를 들여다 보면 세포는 하나의 도시국가입니다
3만개의 단백질 교환센터가 에너지와 물질을 풀어 고도질서의 세포 도시를 운영합니다
중앙에 세포핵이 성전처럼 있고 핵산에는 생명체의 시원인 DNA가 이스라엘의 성괘처럼 모셔져 있군요
질소염기 AGCT의 알파벳으로 쓰여진 유전암호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생명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인간의 염색체 23쌍은 500면 4000권의 장서로 채워진 도서관과 같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은 100조 세포도시가 모여 복잡계의 질서를 이룬 은하성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구생태계는 약 3천만 종으로 분류된 생명연합의 다중우주이군요
그러나 이 모두는 세포라는 문법으로 쓴 생명의 책들
플라타너스의 잎맥과 당신의 정맥은 수액과 혈액을 운반하는 상동相同기관입니다
몸속의 DNA의 총길이는 약 2000억km
야곱의 사다리처럼 지상에서 하늘까지 늘어선 생명의 나무입니다
5억 년 전 캄브리아기에 생명의 폭발이 일어나 생명의 에덴동산이 지구에 펼쳐졌습니다
1만 년 전 인간의 의식이 문자로 기록되면서 문명의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21세기는 지식이 매 2년마다 배증하는 정보 폭발의 시대
뇌 안의 가상세계가 현실의 시공간을 지나 풍선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뇌세포도 DNA가 쓴 문법이므로 인간의 의식이란 생명장生命場 스스로의 생각일까요
식물들의 오라와 페로몬도 식물들의 의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의 답을 품고 있는 생명은 번식의 춤을 추느라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해바라기는 태양 아래 꽃을 피우고 공작새는 채색 무늬의 꽁지깃을 부채처럼 펼쳤습니다
당신은 연인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대지의 열락悅樂
김백겸
지상으로 올라간 백일홍 줄기는 사면상四面像의 브라흐마처럼 팔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나와 세계의 구분이 없는 에덴, 플레로마의 황금시간에서 백일홍은 검은 무의식의 대양에서 꿈을 꾸고 있다
몇 만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처럼 돋아난 푸른 이파리들이 태양과 구름과 바람의 풍경을 의식 안으로 끌어 들인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밝아진 백일홍의 의식은 세상의 모든 나무가 태어나는 이유와 비밀을 담아 카발라의 생명나무처럼 꽃을 피우고 떨어뜨리는 놀이를 계속한다
백일홍의 꽃들은 교향곡의 대위代位와 화음 속의 악기처럼 빛의 음악을 연주한다
산실에서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눈을 맞추고 있다
데메테르가 옥수수처녀 페르세포네의 몸을 통해 세상에 드러낸 목숨의 행복을 아기는 어머니와 한 몸이라는 꿈을 통해 경험한다
‘행복하도다.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하세계로 떠나기 전에 엘레시우스의 비의秘義를 보는 자여! 그는 생명의 끝과 그 시작을 안다. 이 기쁨을 본 자는 세 배로 행복하며 참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영혼은 기억도 없고 생기도 잃은 슬픈 그림자로 남지 않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의「데메테르 찬가」는 아기와 백일홍의 목숨이 세계의 꿈이며 비슈누의 꿈임을 암시한다
검은 세상의 시간은 자신의 꼬리를 먹고 있는 우로보스의 뱀처럼 둥근 모양으로 말려져 있다
* 플레로마Pleroma: 충만과 완전한 상태, 물질계의 한계를 초월한 영역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
* 엘레시우스Elesius: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신자들이 죽음을 초월하는 생명을 위해 비교의식을 행한 장소.
에로스, 그 심연의 비밀
김백겸
플라톤의『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기원을 말한다.
‘옛날에는 자웅동성의 인간이 있었고 둥그런 등과 원형의 옆구리에 네 개의 팔과 다리가 있었네. 둥그런 목에 두 얼굴이 반대방향으로 보는 머리가 있었으며 성기도 둘이라네. 원모양으로 굴러가기도 했던 이들은 대단한 힘과 능력으로 신들까지 공격했다네. 인간의 오만함을 참을 수 없어 제우스는 마가목 열매를 자르는 사람처럼 또는 달걀을 말총으로 나누는 사람처럼 인간을 둘로 나누고 두 다리로 걷도록 했네. 인간은 자신의 다른 반쪽을 갈망하면서 팔로 상대방을 껴안고 얼싸안으며 한 몸이 되기를 원하며 굶주림 또는 무기력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네. 반쪽이 죽으면 살아남은 반쪽은 남녀를 불문한 다른 반쪽과 결합하려는 욕망 때문에 인간이 멸종할 지경에 이르렀다네. 자웅동체일 때는 성기가 바깥으로 향했기 때문에 인간은 매미처럼 땅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았으나 제우스는 인간의 성기를 앞으로 향하게 해서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결합하여 자식을 낳게 했다네. 인간의 서로에 대한 사랑은 태초부터 인간의 본성 속에 있었는데 둘을 하나로 하는 결합이 인간의 상처받은 본성을 치료했다네.’
지혜와 공성空性이 하나임을 성취하기 위해 수행자의 쿤달리니는 차크라를 열고 상승하여야 한다
쿤달리니는 샥티의 요니yoni로 시바의 링가linga를 덮은 곳에서 뱀의 에너지로 잠자고 있다
요니의 수축과 압박에 의해 시바의 쿤달리니가 눈을 뜬다
용의 기운으로 승천한 쿤달리니는 수행자의 정수리에서 남성과 여성의 연금鍊金을 이룬다.
최고의 지복인 불이不二를 향해 딴뜨라의 시는 노래한다
‘그대 연꽃yoni과 나의 다이아몬드linga가 나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나니 이는 그대 연꽃yoni과 나의 다이아몬드linga가 만남으로서만 가능한 것. 여기, 그대를 그리는 내가 있나니, 나에게 안겨오는 그대가 있나니, 남자와 여자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비밀이 여기 있나니, 너와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비밀이 여기 있나니, 옴 마니 반메 훔, 연꽃 속의 보석이여. 이 완전한 성취여.
* 석지현의 밀교密敎를 참고로 함.
.♣.
=================
■ 自序
인간의 목숨이 실체가 없다는 것과 인간의 존재자체가 균열위에 세워졌다는 현인들의 생각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존재들의 순환과 회귀를 바라보면서 생명의 커다란 환상을 찢고 초월하는 길은 없을까 참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기록들입니다
검은 애벌레가 고치를 벗고 호랑나비로 날아갑니다
전생의 죽음이었으며
미래의 사랑이며
현재의 찔레꽃에게ㅐ
2013. 晩春
地山 김백겸
=============== == = == ===============
김백겸 詩集 [※기호의 고고학※]
[자선 산문] -
염라대왕Yama의 에이젠트
김백겸
혼백魂魄
생명이 대표적으로 의존하는 에너지가 태양과 물이다. 양자는 자연의 실재계에 있고 인간은 태양과 바다를 보면서 생명의 고향이라는 느낌을 간직한다. 이 에너지의 원천이 자연/죽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자연/죽음의 자궁 안에서 숨쉬는 아기와 같다. 한의학은 이 음양陰陽의 두 에너지가 인체 내에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의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삼십억 년 전의 원시 유전자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약 삼천만 종으로 추정되는 복잡계의 질서를 이룬 현 생태계가 창발創發했는지 분자생물학과 진화론이 그 얼개를 설명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세포 하나 자체도 하나의 소우주처럼 복잡한 질서와 패턴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유기체가 이 복잡한 질서인 세포를 총괄해서 생명이라는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본능과 감정과 의식이라는 정보 질서가 관여한다. 이 모두를 뭉뚱그리면 생명이란 물질에너지와 정보의 융합이 만들어내는 몸/정신의 복잡계 시스템이다.
현대의학은 유기체의 죽음을 원소물질의 해체로 간주하지만 유기체의 형성에 관여했던 에너지 형태의 정보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 동양 사유는 정보 질서의 혼魂은 하늘天이라는 초월 공간에, 육체의 백魄은 땅地이라는 현실 공간에 돌아가는데, 양자의 만남과 해체가 생사의 순환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역시 얼개이지만 이 사유모델이 더 전체 모습에 가깝다.
밤이 낮의 다른 얼굴인 것처럼 죽음은 생명의 다른 얼굴이다. 생만이 현실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죽음은 비현실이 되는데 사실은 현자들의 생각은 그 반대이다. 죽음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본 현상이며 전체로서의 일자一者는 죽음의 힘과 생명의 힘을 동시에 가진 자다. 인생을 꿈으로 비유하는 현자들의 생각으로는 죽음/실재계가 참이며 우리가 집착하는 생이 비현실이다.
인간의 신화는 죽음의 힘을 염라대왕Yama과 하데스Hases로 형상화했다. 하데스는 로마에서는 플루토Pluto(부富)라고도 불렀다. 지하의 부를 지상에 가져다주는 자라는 뜻이다. 생명이 죽음의 선물이라는 입장은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염라대왕의 입장에서는 인간이란 죽음의 자원(시간 물질 에너지 정보)을 투입해 생生이라는 무대에 파견한 에이젠트이다. 염라대왕은 기업 실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사원(영혼)을 사후 평가로 재배치해서 우주 기업의 효율화를 꾀하고자하는 초월 질서의 인격화이다.
염라대왕 야마Yama와 나치케타스Nachiketas와의 대화
나치케타스: 죽은 사람에 대해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존재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소서, 그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야마: 쉽게 알 수 없고 오묘한 것이 이 법칙이다. 다른 소원을 선택하라. 나치케타스. 그 소원에 나를 묶지 말라. 가계가 대대손손 이어지고, 수많은 소와 코끼리와 금과 말들을 갖는 소원은 어떠냐. 부유함과 장수는 어떠냐.
나치케타스: 내일이면 이런 덧없는 것들도 분명 존재의 활력을 무디게 만들겠지요. 생애 전체조차도 짧은 것. 부유함으로 인간이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을 뵈었는데 우리가 부유함을 택하겠습니까? 당신이 주인인데 우리가 생명을 바라겠습니까?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바, 거대한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말해 주십시오. 신비에 근접하는 이 소원, 나치케타스는 오직 이 소원만을 택합니다.
야마: 오 나치케타스여, 그대는 정말, 오랜 세월 갈구되어 온 이 소중하고 진실한 욕망에 대해 사색하면서 이미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었도다. 많은 사람이 이 부유함의 방식에 빠져들었건만 그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거대한 그 너머는 소유의 망상으로 길을 잃은 어린아이한테는 빛을 발하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이며 다른 것은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그렇게 나의 지배 속으로 추락하고 또 추락한다. 나치케타스, 그대는 진리에 굳건하다. 그대처럼 질문을 던지는 자가 우리에게 오기를.
인도의 카타 우파니샤드Katha Upanishad의 전승은 물질적 죽음의 신 야마Yama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영혼의 본질에 대해 다시 말한다.
태어나지도 않고, 영원하며, 사람의 기억에 없는 먼 옛날ㄹ의 것은 몸이 살해당할 때 살해당하지 않는다. 작은 것보다 더 작고 큰 것보다 더 큰 이 ‘자아atman, sprit'는 인간의 마음에 숨겨져 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현자는 비탄에 빠지지 않는다. 형체 속에 형체가 없으며…불안정한 것 가운데 안정되는…이것은 죽음의 아가리에서 놓여난다.
헤르메스Hermes 문헌
고대문명의 ‘영원불멸학’이었던 헤르메스 문헌은 AD2세기경에 알랙산드리아에서 편찬되었는데 그 중 일부가 전해졌다.
대지의 만물은 실재하지 않는다. 환영은 실재實在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 오 이집트, 이집트. 그대의 종교 중 텅 빈 이야기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장래 그대의 자녀들은 믿지 않으리라. 새겨진 글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로지 돌들만이 그대의 신앙심을 전하리라. 그리고 그날에 사람들은 삶을 지겨워하고, 또 그들은 우주가 외경과 숭배에 값한다고 생각하기를 그치리라…아무도 눈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않으리라. 영혼에 관해, 그것이 본질적으로 영원불멸하다는, 혹은 영원불멸에 달할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해…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비웃고 또 심지어 그것이 거짓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리라.
그렇게 신들이 인류를 떠날 것이다. 오로지 악의 천사들만이 남아, 인간과 뒤섞이고, 또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온갖 방식의 무분별한 죄악, 전쟁과 약탈, 그리고 사기와, 영혼의 본질에 적대적인 온갖 것들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때 지상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하늘의 별들을 그 궤도 속에 있게 하지 않고, 별 또한 하늘 속 그들의 변함없는 경로를 밟지 아니할 것이다. 이 방식을 따라 노년이 세계를 덮칠 것이다. 종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ㅓ. 만물이 혼돈되고 정도를 벗어날 것이다. 온갖 선善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가 닥쳤을 그 때, 신은 벌어진 것을 쳐다보고 또 당신 의지의 반작용으로 그 무질서를 견딜 것이다. 그가 한 때는 홍수로 쓸어내고, 그가 한 때는 가장 강력한 불로 태우고, 또 어떤 때는 전쟁과 역병으로 격퇴하면서 세계에서 악을 정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그의 세계를 이전 상태로 되돌릴 것이고, 우주Kosmos가 다시 한 번 숭배와 경외에 값하는 것으로 여겨 질 것이다.
우주의 탄생이란 이런 것이며, 그것은 만물을 다시 좋게 만드는 것이고, 자연 일체의 성스럽고 두려운 복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영원한 의지에 의해 시간의 경과 속에서 만들어진다.
(여기서 ‘신’의 개념은 만물 속의 일자一者로서 우주의 초월 질서인 ‘어떤 정신sprit’의 자기 현신, 인간의 의식에 비추어진 존재로 이해해야 원뜻에 가깝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Braman이 사물의 탄생과 유지와 죽음을 관장하는 신 ‘브라마brama, 비슈느Visnu, 칼리Kali의 화신avata으로 나타난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불교에서는 비로자나불Vairocana(大日如來)로 부르는 법신불法身佛의 개념에 대응한다. 법dharma이란 가상에 불과한 현상세계의 진실된 모습이며 현실과 대조되는 의미로서의 진여眞如이다. 법신불은 이 법을 인격화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에 영원불멸로 존재하고 줄거나 늘어나지 않고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로 본다)
바르도 퇴돌Bardo Thodol
힌두인들의 사고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사는 삶이란 미망에 사로잡힌 것이며 죽음이란 정신적인 해방이며 미망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딴드라적 사고체계는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에게 이어져 티벳밀교로 이어진다.
파드마삼바바는 ‘티벳 사자의 서’로 알려진『바르도 퇴돌Bardo Thodol』을 썼는데 이 책은 3부로 구성된다. 제1부 ‘치카이 바르도’는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정신적인 현상’을, 제2부 ‘초에니 바르도’는 ‘사후에 일어나는 꿈의 상태와 카르마의 환영’을, 제3부 ‘시드파 바르도’는 ‘환생을 갈구하는 영가靈駕의 본능과 환생 직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죽은 후의 영가에게 나타나는 환영의 성격을 이해시키고 영가를 현혹하는 망상들로부터 주의력을 영원한 자유에 붙들어 매는 데 있다. 이 책의 어려운 점은 영가靈駕에게 나타나는 환상들이 생각의 투영물이며 동시에 실재하는 현상이기도 하다는 이율배반적인 설명이다. 이런 생각은 유식唯識사상처럼 모든 사물이 마음의 식견識見이 원인이라는 불교 심리학의 관점을 받아들여야 성립한다.
아려야식alya vijnana
불교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적 기관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앞의 다섯 가지를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을 제6의 식識으로 부른다. 전5식은 자체로서 판단· 유추 · 비판의 능력이 있을 수 없다. 전5식은 제6의 식識에 의하여 통괄된다. 제6 의식은 인간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현상인데 의식意識, 마나스식Manas拭, 아려야식阿黎耶識으로 구분된다. 현대심리학으로 보면 제6식은 의식의 세계에, 마나스식은 무의식에, 아려야식은 심층의식의 세계에 비유된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마음이 생기고 소멸함이란 여래장에 의해 생기고 소멸함이 있게 되니 이른바 생기지 않거나 소멸하지 않는 것이, 생기고 소멸하는 것으로 더불어 화합하여 하나로 볼 수 없고 다르다 볼 수 없는 것을 아려야식阿黎耶識이라 한다’고 말한다. 아려야식이란 과거의 인식· 행위· 경험· 학습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의 잠재력, 종자種字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육체가 멸해도 아려야식은 멸하지 않고 세세연년 유전하면서 다음 세대의 사물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양자적 세계관과 정신의 해석
원자 스케일의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은 미립자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으로 확정할 수 없고 미립자운동과 과거와 미래를 측정할 수 없다고 본다. 미립자의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순간에 각인되어있지 않으며 관찰자의 측정에 의해 확률로서의 위치와 속도를 보여준다. 뒤집으면 양자적 우주quantum universe는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구미호처럼 수천 개의 몸을 드러낼 수 있다.
가장 낮은 스케일quantum scale에서 정신은 원자와 전자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의 기술과 해석
에 간섭한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의 해석을 빌리면 ‘인간의 의식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사건들의 수동적인 현상이 아니라 분자적 사건을 이루는 양자상태와 양자상태에서 틀frame 혹은 패턴pattern을 선택하는 능동적인 작인作因’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모든 전자에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질서가 내재하며 인간의식의 과정도 전자가 양자상태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우연의 사건으로 나타난다고 가정한다. 불교의 일체유심조一體唯心調 생각과 비슷하지만 거시 스케일을 보는 인간의 에고ego가 아니라 미시세계에서 작동하는 어떤 정신sprit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우주의 모든 운동과 상황을 만들어내는 초월질서의 자기현시라는 개념에 연결된다.
정신과 의식의 창발과 흐름이 인간의 두뇌 안에 갇혀있는 폐쇄회로인지 환경과 자연 나아가 우주 전체와 관계하는 열린회로인지 그 실제 모습에 따라 삶과 죽음의 범주와 형상의 해석 모델이 달라진다.
시인으로서의 내 직관은 생명이란 다차원의 시공에 ‘접혀 있는 질서’인 죽음에서, ‘드러난 질서’인 생으로 표현된 한 떨기 꽃이란 생각이다. 금강경金剛經은 이런 생명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다.
생의 모든 현상은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반짝이는 이슬 같고, 번갯불 같으니, 그대는 마땅히 그와 같이 명상해야 하리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 = ==
[자선 시론] -
시poesie의‘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
김백겸
시poesie의 사영射影
수학의 기하학은 점, 직선, 평면을 원소로 해서 도형의 집합이 되는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연구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B.C 3세기에 유클리드가 고대 그리스 수학을 집대성한『기하학 원론』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구를 평평하다고 본 고대세계의 공간관념을 반영한다.
19세기에 가우스 등이 시작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유클리드기하학 제5공준을 부정하고 ‘평면상의 두 직선은 모두 만난다’는 공리를 세워 다른 체계의 기하학을 세운다. 지구가 타원체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평행선은 모두 만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 공간에 관한 성질은 파스칼 등의 수학자에 의해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으로 확대되고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기하학의 공간은 사영기하공간의 특수 사례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과 공자의 ‘사무사思無邪’이론 이래 시학은 문화패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정의되어 왔다. 수학적 해석이 시공간의 지평을 넓힌 것처럼 당대의 천재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 시론을 정립하고 시의 전체적인 모습에 해석 하나를 보태왔다. 시대마다 다른 문화패턴의 시각으로 투시된 시는 각각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영기하학은 점, 직선, 평면을 기초로 하는 사영변환 공간 내에서 불변하는 도형의 성질을 대상으로 연구한다. 마찬가지로 시학詩學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불변하는 시의 실체나 영원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포에지poesie의 실체가 시인각자의 투시에 의해 드러난 사영射影의 모습이 모든 시의 현 주소이다. 이 시의 모습을 놓고 사람마다 시의 명암과 형태를 달리해서 설명한다. 그 설명이 당대의 독자에게 마음에 들 수도 안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일반에 관한 규칙과 해석을 고민하다 보면 언어라는 형식에 의존하는 시의 얼개가 대충 드러난다.
언어의『철학적 탐구』
비트겐 슈타인의『논리철학 논고』의 요점은 ‘언어의 기능은 세계를 묘사하거나 모사模寫하는 것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사실 또는 실재가 있는가에 관한 것 뿐이다. 사실 또는 실재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말할 수가 없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는 생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능을 세계를 반영하는 그림에 비유한다, 그는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는 그림의 언어명제는 참이며 경험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그림의 언어명제는 거짓으로 보았다. 이때 ‘신’이나 ‘존재’ 진선미의 등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말할 수 없는(그림을 그릴 수 없는)것이므로 침묵해야 한다고 해서 선불교의 언어도단言語道斷같은 신비주의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실상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종교적 입장의 철학을 세우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수학과 논리학을 철학의 기초로 삼아 투명하고 명확한 언어명제로 세계를 기술하고자하는 야심가였다. 비트겐슈타인도 수학적 사유를 좋아했던 러셀처럼 초기에는 일상 언어들이 마치 안개와 같은 다의적 의미로 실제세계를 가리고 있다고 본 까닭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저작인『철학적 탐구』에서는 엄밀한 사유의 건축물에서 철학을 해방하고 있다. 한 사람의 철학자로서 언어를 즐기기도 하고 색깔을 비롯한 감각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도 하며 철학적 규칙을 선포하기보다 역설과 우화로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언어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 전기철학의 주장을 철회하고 개별적인 언어현상에 본질이라고 할 만한 공통성질은 없다고 수정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명제에 있어 문제가 되는 언어가 일상적인 문맥에서 어떻게 쓰이는 지를 고찰해서 철학적 문제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언어 놀이’의 개념이 등장한다. 단어의 의미는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참여하는 삶의 형식에 따라 문맥이 달라진다고 보았다. 정치가들이나 시인들이 사용하는 애매모호하고 다의적인 언어들은 현실세계의 필요에 의해 사용된다. 이 언어들의 규칙은 수학과 같은 정교한 명제의 인공언어들의 체계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는 더 이상 사물의 복사본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며 언어의미는 실제세계와 관계를 맺고 삶의 다양한 형식에서 발생한다. 은유와 상징의 언어는 그 나름의 규칙과 게임으로 세계상을 더 풍부하고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의 삶에 관여한다.
소라게
주위에 소라게를 애완으로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 소라게는 자신의 보호를 위해 고둥류의 껍질을 사용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관심이 생겨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라게의 대부분의 종은 길고 나선형의 복부를 가지고 있고 매우 부드럽다. 연약한 복부를 포식자에게 보호하기 위해 빈 복족류를 이용한다. 대부분의 소라게가 고둥류의 껍데기를 집으로 사용한다.(몇몇의 소라게는 공간이 있는 나무나 돌을 집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소라게가 복부를 고정하기 위해 고둥류의 중축을 강하게 붙잡는다. 소라게가 성장하면 점차 큰 껍데기를 찾으며 그전의 껍데기는 버린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Hermit crab(은둔자 게)로 불린다. 몇몇의 소라게들은 껍데기가 없이 지내는데 이것은 새로운 껍데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큰 소라게가 새로운 껍데기를 찾기 위해 전에 사용하던 껍데기를 버리면 조금 작은 소라게가 그 껍데기를 이용한다. 소라게는 자라면서 점점 더 큰 껍데기를 필요로 한다. 때때로 적당한 껍데기의 수가 부족한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 각각의 소라게가 껍데기를 차지하기 위해서 격렬히 경쟁한다. 빈 껍데기의 수는 고둥류와 소라게의 수에 비례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소라게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듯이 인간도 언어와 관습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산다. 언어는 일종의 생존도구인 셈이다. 인간의 사유도 바위틈의 꿀을 꺼내고자 막대기를 든 유인원이나 바위 칼이나 돌도끼를 든 원시인간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바위틈의 꿀을 꺼내기 전에 바위틈의 모양과 깊이, 나뭇가지의 길이 등을 머릿속에서 계산한 후에 실행에 옮긴다. 사유는 추상적인 도구의 역할simulation을 하며 인간은 이를 언어표현을 통해서 동료에게 자신의 의사, 즉 생각과 감정을 전달한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철학자들은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의미를 생각했으나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에 고정된 언어의 의미나 본질은 없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말을 배우듯 개인은 문화의 언어게임에 참여함으로써 게임에 내재된 규칙을 배우고 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언어게임에는 도덕, 법, 관습 등의 사회규범과 일반 문화 등의 복합 언어규칙을 포함한다. 이는 마치 소라게가 자신을 보호하는 껍질을 취하고 환경과 조건이 변하면 버리듯이 언어의 의미는 상황과 문화관습의 차이에 의해 달라진다.
여기에서 언어의 의미란 신호등의 표지판과 같이 기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표지판에 반응하도록 훈련된 문화의 규칙과 기술에 적응한 인간의 참여에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마야의 상형문자에 반응하도록 훈련되지 않은 현대인은 마야문자를 보고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 기호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세계상을 반영하지 않는다(낯선 기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의미작용은 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도 생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주자는 인간의 앎을 위한 사유의 틀(格物)을 인식의 필요조건으로 보았다. 인간은 언어라는 문화형식frame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훈련되었고 ‘앎(致知)’을 의존한다. 문화형식frame은 소라게의 껍질처럼 세계로부터의 시야를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기호학의 야심
언어를 기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도들이 있다. 기호학은 언어를 과학적 경험주의나 논리실증의 관점에서 언어의 규칙과 체계를 연구한다.
인간들은 문자를 포함한 상징symbol과 도상icon, 지표index로써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 의사를 소통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행위를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semiosis이라 한다. 기호학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 기호 작용에 관한 학문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e)그리고 기호 자체로 구성된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의이고, 꽃집에서 산 장미꽃은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 곧 기표가 된다. 곧 기의가 기표와 결합하여 사랑을 표현하는 기호를 만들어낸 것이다. 장미꽃을 받아 든 사람은 그것을 선물한 사람의 의도를 해석한다. 이때 발생하는 현상을 의미 작용이라고 한다. 기표로써 기의를 표현하는 쪽뿐만 아니라 기표를 대할 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쪽에서도 의미 작용이 일어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호학은 인간의 문화 정신생활 전반을 모두 기호체계로 해석하고 인간은 기호의 요람에서 태어나 기호의 무덤에서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호학은 언어사용으로서의 파롤parole이 언어사용의 저변에 깔린 묵시적 차이와 결합법칙으로서의 랑그langue의 부분집합으로 생각한다. 기호학자들은 인간이 랑그langue의 잠재적 언어체계 내에 갇혀 있고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세계내의 삼라만상을 기호학의 체계에 가두고자 한다.
기호체계로서의 주역周易
세계운동과 현상을 기호의 체계로 가두고자 시도한 것이 동양의 역易이다. 주역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하夏의 연산역連山易, 은殷의 귀장역歸藏易은 일찍이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주역周易의 기호체계이다.
한대漢代의 학자 정현鄭玄은 “역에는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이간易簡이 첫째요, 변역變易이 둘째요, 불역不易이 셋째다”라 하였고, 송대의 주희도 “교역交易 · 변역의 뜻이 있으므로 역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이간이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미쳐 만물을 생성케 하는 이법理法은 실로 단순하며, 그래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쉽다는 뜻이다. 변역이란 천지간의 현상, 인간 사회의 모든 사행事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뜻이고, 불역이란 이런 중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줄기가 있으니 예컨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해와 달이 갈마들어 밝히고 부모는 자애를 베풀고 자식은 그를 받들어 모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주희의 교역이란 천지와 상하 사방이 대대對待함을 이르는 것이고, 변역은 음양과 주야의 유행流行을 뜻하는 것이라 하였다. ≪설문說文≫에는 역이라는 글자를 도마뱀[易, 守宮]이라 풀이하고 있다. 말하자면, 易자는 그 상형으로 日은 머리 부분이고 아래쪽 勿은 발과 꼬리를 나타내고 있다. 도마뱀은 하루에도 12번이나 몸의 빛깔을 변하기 때문에 역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역은 일월日月을 가리키는 것이고 음양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상 여러 설을 종합해 보면 역이란 도마뱀의 상형으로 전변만화하는 자연 · 인사人事의 사상事象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역은 우주본체(태극)를 음양의 운동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태양太陽, 소양少陽, 소음少陰, 태음太陰의 사상四象으로 구분한다. 사상四象에 다시 음양을 곱해 팔괘八卦의 변화를 만들었는데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이다. 이와 같은 체계는 우주만물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가는 유기적 변화의 구조이고, 현상세계는 모두 상대적 음과 양의 대극對極으로 존재하며, 존재와 변화는 사상四象, 팔괘八卦, 육십사괘六十四卦의 형식으로 존재와 변환을 거친다는 형식논리로 출발한다.
과거에 주역을 공부했던 고대의 학자들은 이 기호형식이 세계내의 모든 문제를 설명한다고 믿었다. 현실에서 공명을 얻지 못했던 공자는 운명의 이치를 찾아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 주역을 참구해서 지천명知天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공부라면 둘째가로서는 섭섭한 다산 정약용 선생도 만년에『주역사전周易四錢』을 썼는데 공간의 변화에 시간의 변화를 더한 사차원의 입장에서 주역을 해석한 책이다.
주역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이 기호형식이 세계의 모든 현상과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만 현대물리학은 이보다 더 복잡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미립자들의 운동과 원소주기율표상의 원자들의 조합과 해체, 화학물질들의 반응, 거시천문학의 별들의 운동은 현대 물리의 다차원 수리방정식으로도 충분히 기술할 수가 없다.
기호란 세계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자의적 사유내의 도구일 뿐 세계전체를 드러낼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어떤 의미로는 자연법칙을 언표 한다는 점에서 기호학자이기도하다. 그러나 한 시대의 지배적이었던 과학적 해석들이 무너지고 다른 패러다임이 드러나는 과학의 역사가 인간이 파악한 기호체계의 불완전함을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의 ‘말할 수 있는 것(기호체계의 명제로 세울 수 있는 것)’에 한해 철학의 한계를 정하고자 했던 겸손한 시도가 오히려 의미가 있다.
사고 형식의 집합
비트겐 슈타인은 신과 존재 진선미 같은 형이상학의 개념들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정리하고 철학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종교와 예술등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런 명제들은 인간의 삶의 실천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는 당대의 재벌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모두 형제들에 나누어주고 본인은 수도승 같은 생활로 자발적 가난을 실천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 세계의 ‘참모습’은 석가가 새벽의 보리수 나무아래서 각성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석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전한다 ‘내가 깨달은 이 법法은 참으로 증득하기 어렵다. 참으로 심오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애욕에 빠져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생하고 인연에 의해 멸한다”라는 이치나 모든 애욕이 없어지고 번뇌가 없어진 열반의 경지를 알릴 수 있을 것이랴. 이 법法을 설한다고 해도 그들은 깨달을 수 없을 것이고 나는 그저 피로를 더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민했다. 석가는 수행에 의해 깨달은 미묘한 법法의 언표가능성을 회의했고 실제로 임종 시에 자신은 한마디의 법法도 설한바가 없다고 하여 방편方便으로서의 설법을 행했을 뿐, 법法의 언표가능성을 부정했다.
현실세계의 본성과 실재實在에 다한 물음은 플라톤 이래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해 온 문제이다. 플라톤은 현상의 종합적 통일을 넘어서 감관과 지성으로서도 파악이 불가능한 ‘이데아Idea'라는 관념을 설정했다. 플라톤은 세계질서의 자연현상을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mimesis로 봄으로써 이데아를 정점으로 하는 건축이미지의 세계질서를 가정했다. 이런 생각은 아우구스투스의 중세철학과 버클리의 사유, 헤겔의 ’절대정신‘과 칸트의 ’물자체‘라는 관념론까지 이어진다.
일반서민들은 경험하는 지각세계와 진리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석가와 같은 종교적 천재나 플라톤 같은 사유의 천재들이 양자를 구분하고 경험세계를 넘어선 형이상학의 질서를 전제한다. 형이상학에 대한 판단으로서의 철학자들의 해석은 형식만 다를 뿐 모두 우주자체의 본성에 관한 질문을 공통점으로 한다. 헤겔의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자기전개로서의 세계운동을 물질의 변증법적 자기운동으로 바꾼 마르크스의 철학도 사고형식의 차이이다. 석가의 법法을 필두로 해서 모두 세계자체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추구한 것이다. 사영기하학의 도형처럼 광원光源의 물체는 동일한데 좌표의 차이에 의해 도형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개인마다 추상하는 방법과 스타일의 ‘차이difference’가 사고형식의 차이를 만들고 있다.
과학과 종교와 예술의 형식
일반 언어의 문법에서 더 나아간 고급상징으로서의 문법체계가 과학과 예술과 종교가 있다. 모두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언어 형식체계가 다른데 다른 말로 하면 상징체계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질서와 규칙을 표현하기위한 개념이자 상징이며, 예술은 인간의 사유와 정서를 미적형식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며 종교는 인간이 세계를 종교적 진리 형식으로 파악한 상징체계를 사용한다.
과학에서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언어상징이 과학의 지평이 넓어짐에 따라 시대마다 다르게 의미변화를 겪어 왔다. 미와 종교적 상징의 의미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문화적 의미를 인간에게 제공한다. 이런 생각은 언어형식으로서의 문법이 문화적사고의 살아있는 표현으로서 기능하는데 결국 인간의 삶이 자연환경에 반응하는 형식의 하나라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정신 및 언어문법이 과학과 예술과 종교형식으로 다양하게 드러남은 인간의 내면과 의미작용이 그만큼 복잡하다는 애기다. 뇌 과학은 인간의 사고체계가 본능과 욕망을 담당하는 뇌간腦幹과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와 기억과 추상을 담당하는 신피질로 구성되는 모델을 제공한다. 이 세 기관은 인간의 감각자료를 독자적인 회로방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해석을 통합 공유한다. 마치 과학과 예술과 종교가 다른 문법체계를 사용해서 인간에게 풍부한 인식의 세계모델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과학과 예술과 종교의 상징형식이 다르다고 해서 대상인 세계의 실제가 다른 것일까. 인간은 자신이 포함된 유니버스Universe가 연속체로서의 단일한 실재임을 직관한다. 현대 물리학은 플랑크상수로 구성된 시공간의 ‘끈string’들이 약력과 강력, 전자기력과 증력의 네 가지 힘의 형식으로 물리우주를 디자인한 모델을 제공한다. 현대 천문학은 우리태양계가 포함된 약 1250억의 은하계가 빛의 속도로 팽창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모델을 제공한다. 이러한 세계의 본질을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의 일자一者로 직관하고 과학자들은 에너지와 힘의 질서로 구성된 상징모델을 제공한다. 전문분야의 발화주체가 모두 같은 실체를 대상으로 다른 언어상징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의 형식
오늘 날의 시가 전통서정시에서 포스트모던의 해체시들 까지 다양한 모습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인식지평이 넒어짐과 관계가 있다. 수학의 역사를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혔지만 여전히 일상생활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을 적용하고 특수한 건축이나 복잡한 기능을 제어하는 시스템 설계 등에 위상기하를 적용하는 형식의 복잡함과 닮아있다.
위상기하topology는 진흙의 집합이 공이나 막대기의 위상으로 드러난다 하더라도 모두 진흙물질의 불변하는 성질을 공유하는 집합으로 간주한다. 다른 예로 커피 잔의 손잡이 구멍과 던킨 도너츠의 구멍은 구멍이라는 불변하는 속성을 공유하는 한 위상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시를 위상기하학의 전개모델을 빌려 설명할 때 전통서정시로부터 해체시에 이르는 현대시의 형식모델에서 불변하는 공유속성을 전제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시의 근본형식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이런 형이상학의 문제들은 언어명제로 드러낼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 문제를 발터 벤야민의 예술철학을 빌려 설명해보자.
발터벤야민은 비트겐슈타인과는 달리 ‘진리의 언어’를 가정한다. 구약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나라....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라는 문장에서 시작한다. 이 하나님을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나라’라고 언명한다. 양자를 종합하면 ‘하나님(조물주)=말씀’이니 태초에는 신성한 언어가 세상을 창조한 셈이 된다. 이 신성한 언어는 그리스의 로고스logos와 성리학의 ‘리理’와 도교의 ‘무극無極’과 불교의 ‘법法’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사물의 근본 질서로서의 본성本性에 해당한다.
벤야민의 생각으로는 언어의 본질은 신의 말씀처럼 존재를 있게 하는 창조의 기능이며, 아담이 에덴의 사물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사물의 모습을 현전現前시키는데 있다. ‘바벨의 언어’ 이전의 ‘말씀’은 모든 사물을 존재케 하는 근원적 힘이 있는 ‘말씀’이었으나 바벨사건 이후 언어는 타락해서 이러한 힘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언어에 대한 이 알레고리는 인구가 늘고 인간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언어가 ‘사물언어’에서 ‘표상언어’로 이행하였음을 드러낸다. 언어는 사물의 참모습을 개시하는 힘을 잃어버리고 단지 인간의 자의적 지시기능을 수행하는 도구와 기호에 불과해졌다는 생각이다.
벤야민은 예술과 시의 언어에 ‘아담의 언어’가 아직 살아있다고 본다. 예술은 사물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언어는 ‘이름도 없고 음향도 없는 언어들이며 동시에 사물로 된 언어들’이다. ‘예술형식의 인식은 이 사물언어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고, 그것들과 사물언어들의 연관을 찾는 시도’ 라고 벤야민은 정의한다.
위상기하학이 도형의 변환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위상의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처럼 시도 벤야민의 생각에 의하면 그 형식과 표현의 자유로움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언어’ 즉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진리개시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하이데거가 예술의 기능을 진리개시로서의 ‘존재의 탈은폐’를 말한 개념과도 유사하다.
시인의 길, 신인의 길
예술 일반이 그렇지만 시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시는 시경詩經의 풍風, 아雅, 송頌부터 현대의 해체산문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형식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시poesie라는 광원光源의 투사이다. 시poesie는 시대의 스크린에 의해 다르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영감에 의해 단숨에 쓰는 수도 있지만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수정과 퇴고를 한다. 시인이 생각하기에 보다 완전한 시poesie의 모습에 다가가기 위해서다.
현대시의 자유시 형식이 시경詩經보다 더 형식의 발전을 이룬 것일까. 시가 소설이나 희곡의 장르보다 형식의 우월이 있는 것일까. 고전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면 형식에 상관없이 드러난 표현과 주제는 모두 시poesie의 광원光源을 향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영射影된 작품은 광원의 무한한 밝음과 투영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독자는 작품들이 얼마만큼 미묘한 명도와 채도의 대조로 시poesie를 드러냈는가의 기준으로 시의 감동과 심미審美를 향유한다.
인간의 문화에서 세계의 본질이나 실재實在를 드러내는 상징형식도 시대마다 유행을 타는 것 같다. 그리스 시대는 예술이 중세에는 종교가 근대에는 철학이 주름잡더니 근세에는 과학기술이 실재實在의 모습을 더 잘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죽하면 수학의 방법론으로 언어를 분석해서 인간사유의 그림을 검증하겠다고 나선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발흥을 가져왔을까.
현대 미학은 인쇄술과 사진과 영화의 의한 기호의 대량복사가 예술품의 사본을 매우 싼값으로 유통시킨 이후 원본의 아우라는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이 이데아 모사인 현실을 또 모사한 예술작품을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경멸을 담아 이야기한 예술작품들이 인터넷에서 무수한 카피로 돌아다닌다. '시뮬라크르'의 '시뮬라크르'가 투사하는 이중거울의 이미지들이 중중무한重重無限의 늘어선 가상세계의 화엄華嚴에 현대인은 살고 있다.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시들이 인터넷에서 즐비하기에 시집은 팔리지 않고 시 한편의 가치는 감소했다. 장르가 다른 예술작품의 생산이 다양하기에 시형식의 장르의 희귀함도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둔갑시킨 마르셀 뒤상의 ‘샘’ 이후로 개념만 붙일 수 있으면 백화점에 산더미처럼 쌓인 상품이 모두 예술품의 지위를 획득하는 시대가 됐다.
현대의 신인들이 시뮬라크르의 미학이 유행이나 창작태도를 지금의 사조와 맞추겠다면 그 역시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시의 복제는 상품의 복제와 영상의 복제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지금의 시는 이미 서점에서 밀려난 시집처럼 상품시장에서 파산선고를 받고 경매처분을 기다리는 중이다. 시인들이 시의 새로운 형식과 철학적 가능성을 발견해야 하는 이유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 신의 ‘형상금지’를 시킨 이유처럼 예술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시poesie’는 어떤 의미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예술작품 및 시들이 ‘시poesie’의 파편과 부분으로서 제작된다. 개별 작품에는 작가의 심혼을 통해 드러난 ‘시poesie’라는 실재의 모습이 부분으로 들어가 있다. 한편의 시는 시poesie의 광원光源을 기준선으로 작품을 투사선으로 하는 홀로그램hologram의 시야에 의해 전체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뮬라크로simulacre’ 의 세계는 실재實在라는 광원의 불빛이 없으면 한 순간에 어둠으로 환원된다.◑
※ 참고도서
• 레이몽크,『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웅진 지식하우스, 2007
• 진중권,『현대미학 강의』아트북스, 2010
• 김석진,『대산주역 강의』한길사, 1999
• 랴마찬드란,『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시공사, 2012
• 다비드 할베르트,『기하학과 상상력』살림, 2012
.♣.
=================
◆ 표사의 글 ◆
김백겸 시인은 심산계곡에서 자생한 산야초처럼 순수하며 결강한 시인이다. 그의 언어가 지닌 가장 놀라운 면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어떤 감정도 다양한 방법으로 - 저마다 다 다르게, 또 때로는 아주 모순된 방식으로 -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고 있고 그의 시는 세상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 ‘고독의 길’에 이르는 문에 당도해, 마음속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과 덕성, 그리고 순결함이 담긴 언어의 잔을 잘 안 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그 숨겨진 잔 속에 두 손 모아 만든 언어의 액체. 영혼을 세상의 사물에 따라 부으면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른거렸던 언어를 읽다가 나는 감성에 형식을 부여하고 있는 그의 시가 그리고 있는 세상을 시인으로서 존중한다. 이 시집이 우리에게 준 차가운 삶의 액체!
- 조정권(시인)
관찰과 사색으로 시의 과학을 비끄러매는 김백겸의 ‘도서관’에는 우주적 깨달음을 담고 있는 오래된 서책들로 그득하다. 책장을 넘기면 ‘세포’ 마다 새겨진 ‘DNA’로, 생명의 사다리를 타고 수억 년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수많은 환생들이 어른거린다. 우리는 모두 “대지의 검은 한 뿌리”에서 솟아오른 ‘황금꽃’의 얼굴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으로 육박해오는 전생의 “어두운 매듭”을 풀려고 죽음의 늪을 건너가고 있다. 그러니 그의 서책에는 “검은 무의식의 대양”에서 솟구쳐 올라, “태양과 구름과 바람”의 풍속으로 윤회의 실마리를 포착하려는 의식의 기투들로 가득하다. 만상이 서로의 배역을 바꾸어 천 겹 순환을 포개는 순간의 고통과 아름다움, 깊이 침윤해오는 시적 에너지의 넓이와 깊이를 안고 가는 그의 노래의 끝은 어딜까 아마도 숙명의 매듭이 풀려 고스란히 나로 노정되는 까닭이 드러나는 자리일 것이다. 현생의 환상을 찢고 형상과 명명의 하늘로 날아가는 호랑나비 한 마리, 어딘가 아득한 슬픔이 정주하는 그곳까지, 그의 시가 쉼 없이 전진해 가길 바란다.
- 김명인(시인)
.♣.
=================
▶김백겸 시인∥
∙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나 1983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했다.
∙ 시집으로『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가슴에 앉힌 山 하나』『북소리』『비밀 방』『비밀정원』 등이 있다.
∙ 시론집으로『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라는 광원』이 있으며
∙ 웹진『시인광장』및 계간『시와 표현』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 e-mail : finance8@naver.com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