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경주마가 경주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경주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그의 생명은 그렇게 끊겨진 것입니다.
인간의 생도 경주마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요.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교육되어지고 경주선에 있지 못할 때는 결국 생의 레일에서 밀려납니다.
'누가 누구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가질 수 있을까?'
한파의 겨울을 견딘 목련 가지가 하얀 꽃을 피우기 전에 경주마처럼 허롭게 차가운 길바닥에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꽃샘추위가 잦아들고 봄햇살이 앉아 있는 밭을 바라봅니다.
예전에는 '남자는 하늘,여자는 땅'이라는 말을 들으면 발끈했었지만 이제는 그 말이 좋습니다. 어떤 이가 저를 가르켜 ‘대지의 여인’이 되었다나요.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 되자 추위의 보호막이었던 땅은 연초록의 풀들을 내어놓습니다. 역시 동면하고 있던 풀들이 이불을 걷어차고 얼굴을 쑤욱 내밀었습니다.
일년생, 이년생 냉이가, 어린 쑥들이 세상으로 나와 봄볕을 쏘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 땅이 척박하여 더 이상 자라지 못해 수확하지 않고 버려두었던 쪽파들이 얼어붙어 죽었던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파들이 쑤욱 자라고 있습니다. 삽과 곡괭이질에 잘려 죽었다고 생각했던 어성초가 밭갈이 된 밭에서 3엽 싹들이 듬성듬성 탐스럽게 나와 있었습니다.
땅이 생성된 이래 땅은 인간에 의해 그리도 험하게 다루어져 척박하기 그지없는데 생명을 보호하고 성장하게 하며, 죽음의 상처조차 치유하는 무위(無爲)의 생명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꽃샘추위도 끝났고 우리도 그 여유롭던 몸들이 바삐 움직이는 농번기일세"
농장 퇴비장에는 두 사람이 발효되고 있는 계분을 한 번 더 뒤엎어 주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20kg 퇴비를 안아들고 밭에 뿌리는 모습은 어미가 아이들을 안는 것처럼 익숙한 몸놀림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발효되지 않은 똥거름을 내고, 발효되어 가는 똥을 손으로 만지며 밥 익는 냄새로 여겨지는 후각을 가지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낮에는 시장에 가 찬거리를 사고,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학교 간 아이들을 기다리거나 문화센터에 가서 수영도 하는 여염집 여인네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이 희망했던 삶들은 애초부터 환상이었는지도, 아니면 순간의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들은 자신의 밭에서 일할 뿐만 아니라 남편과 자식을 위해 집안 일을 하고, 자식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품팔이로 나서기도 하는 그런 힘겨운 일상의 노동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던 농사꾼 아내의 삶. 그래서 자식에게는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농사꾼이 아닌 도회지 남자들에게 시집을 보내고 싶었던 엄마들의 간절함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리도 벗어나고픈 농사가 딸자식의 일이 되어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꽃을 꺾을 줄 알았지, 똥거름 내며 농사를 지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예요"
우리와 함께 농사를 짓기 전까지 품팔이, 행상도 해보았고, 공사판에서 허드렛일도 했었던 친구는 이렇게 말을 하곤 합니다. 39살 된 중학생 애엄마인 한 친구 또한 우리 농장에서 일하고 나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배우고 있다고 행복해합니다. 세대적 대물림으로 여기까지 온 친구들, 신용불량자가 되어 쫒기듯이 온 사람들, 여성 가장이 되어 먹고 살아가는 방법으로 어쩔 수없이 택하게 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각이한 개인사를 지닌 이들은 아예 경주마가 되기 위한 훈련조차 받을 수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경주마가 되었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하여 레일을 벗어났거나,경주마가 되었지만 다리가 잘려 생존의 벼랑으로 몰린 이들이 모인 곳이 우리 <자활영농사업단>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개인사를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나보다 더 징한 개인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우스게 소리로 하는 '집단농장'에서 징한 것보다 더 징한 것을 알게되고 덜 징한 사람이 더 징한 사람을 보듬어 주게 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가난'한 현재를 벗어나고픈 한가닥의 짚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잡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은지 1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 팀원들의 수장이 되어 '색부(色夫)들의 색부(嗇夫)되기'가 농사철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색부(嗇夫)들이란 하늘과 땅을 섬기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경야독하면서 농사를 처음 지어보았던 우리, 그것도 무농약,무화학비료,무제초제 3무를 모토로 친환경농사를 했던 우리는 배태랑급 친환경농군들 조차도 고추재배 방법을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고, 관행적으로 농사를 짓는 곳에서 교육을 받으러 오곤 합니다.
우리가 농사를 하는 것.
지식인들의 자족적인 농도 아니며, 전원생활의 귀족적인 농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나려는 농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통해 농의 상징들-'가난', '불편함', '벗어나고픈 일'은 농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우리 가난한 이들을 세상 밖으로 내모는 것처럼 강요된 편견이었음을, 그 편견에 뼛속 깊이 길들여져 우리 자신들을 더욱 옭아매는 생살(生殺)로 나아가고 있음을 체득해나가고 있습니다.
길이 없는 길을 나선 우리.
자연을 닮아가려는 농사가 전제되지 않으면 공장 대신 농장에 나가는 우리는 한낱 농업노동자일 뿐입니다. 우리, 색부들은 자연의 질서를 배우는 농을 통해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 종류의 삶>을 과대평가하고 그 종류의 삶의 노예로 나머지 생애를 보내지 않는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