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안시성 그리고 서번트 리더십

지난 22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서 연휴기간 꼭 보고 싶었던 영화 두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명당”과 “안시성”이었습니다.
영화의 제목 자체에서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임에도
설교자로서 두편의 영화를 보고 싶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뻔한(?) 내용을 관객들에게 어떻게 풀어나갈까 라는 영화의
전개 방식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두 편을 관람한 후, 관객 동원 측면에서 안시성이 명당을
근 2백만명 이상의 차이를(9월 29일 기준) 내는 이유가
초반 접근 방식과 흡입력 차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영화 명당이 정적(靜寂)인 장면이 주를 이룬다면, 영화 안시성은 동적(動的)인
장면이 많은 것이 두 영화의 또 다른 차이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시성을 보면서,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사료에는 성주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함,
중앙일보 9월 30일 기사에서)의 리더십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일 먼저 인상 깊었던 장면은 성주가 직접 성 밖에서 적의 동향을 탐지하는 장면입니다.
성주로서 척후를 보내어 동향을 파악 할 수도 있겠지만 책임자가 현장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강구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성문이 뚫렸을 때를 대비하여 차단막을 매달았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가두는 장치를 성민들과 함께 작업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지휘관들의 불문율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유사시에 부하들에게 앞으로 돌격이라 명령하기보다, 나를 따르라며
지휘관이 앞장서기에 전투에서 승리하는 요인이라는 어느 분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당 태종 이세민이 20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려 할때 5천명의 성안 군사들에게 마지막 짧은 연설을 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물러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무릎 꿇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며,
성안의 가족들을 상기시킨 후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기에
우리는 싸워야 한다.”며 40배 이상의 당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이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영화 안시성”의 성주를 보면서 오버랩 되는 성경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느헤미야라는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당대 최강국인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간 인물이었지만,
왕의 신임을 얻어 일신의 영달을 추구 할 수 있었음에도
그의 관심은 조국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무너진 고국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총독의 신분으로 귀환합니다.
지도자 느헤미야가 피폐한 조국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기 위하여
사람과 물질을 모은다는 소문이 주변국들에게 들리자 그들의 방해 공작이 시작됩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앞에 지도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의 형편을 조용히 시찰한 다음
백성들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질 것을 호소합니다.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 3:14)
나아가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허리에는 칼을 차고 노동함으로 유사시에는
언제든지 군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결국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한 지도자로 기록됩니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지도력을 요즘말로 하면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사료에 의하면 안시성 전투는 최소 40일간 동안 있었습니다.
안시성의 성주가 양만춘이든 또는 무명의 인물이든,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안시성의 성주는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닌 백성과 더불어 호흡하는 인물이었기에
압도적 전력차이에도 굴복하지 않고 성과 성민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안시성”을 보면서 진정으로 백성을 아끼고 섬기는 지도자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일까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