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종대왕 묵죽도의 목판(왼쪽) 및 채색인본(彩色印本). 대나무는 단단하고 곧으며 비어있고 매듭이 있어 선비의 표상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선비들이 대나무를 차군(此君) 즉 친구로 여겼다. 혹여 세자 또한 김인후와 대나무와 같은 묵계를 맺었을지 모른다. 훗날 나주에서 인종의 묵죽도를 목판에 새겼으며, 인종의 능침인 효릉(孝陵)의 재실에는 인본을 걸었다 남간공이 하서의 시에 차운한 奉次河西金先生題仁宗大王墨/畵/竹軸韻
奉次河西金先生題仁宗大王墨/畵/竹軸韻(봉차하서금선생제인종대왕묵/화/죽축운)/하서 김선생이 인종대왕 묵/화/죽축에 쓴 시를 삼가 차운하다.
글/南磵 羅海鳳 재벌번역/羅千洙
械石孤根刮妙微(계석고근괄묘미)/돌 틈에 낀 외로운 뿌리 깎아낸 듯 미묘한데 令人解帶錯爲圍(영인해대착위위)/사람들은 허리띠를 풀어 번갈아 에워싸 보네. 早知筆法由心畵(조지필법유심화)/일찍이 필법이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에서 비롯됨을 알겠는데 拜手當年道罔違(배수당년도망위)/두 손을 들어 마주잡고 절을 하는 당년에는 도리에 어긋남이 없겠네.
<해설>
◯남간집에는 畵竹인데, 실재 인종대왕이 그렸다는 그림제목은 墨竹이었다.
墨竹은 먹으로 그린 대나무, 畵竹은 대나무를 그리다,
◯心畵(심화)는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이라는 뜻으로, 문자(文字)나 필적(筆跡) 등을 이르는 말.
◯시의 음미 아마 대나무 뿌리가 바위틈에 낀 듯한 巨木이니,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허리띠를 풀어 둘레를 재어보는 것 같다. 비록 그림이지만 그림 속에 인종대왕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임금을 뵌 듯, 두 손 모아 절을 올리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네 란 시이다.
河西의 原韻 글/河西 金麟厚 번역/羅千洙
根枝節葉盡精微(근지절엽진정미)/뿌리와 가지와 마디와 잎이 정미함이 다하는데 石友精神在範圍(석우정신재범위)/金石처럼 情誼가 굳건한 벗의 정신이 이 그림 틀 안에 있네. 始覺聖神侔造化(시각성신모조화)/성스럽고 신령스러운 분은 우주와 조화를 같이 할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겠노니 一團天地不能違(일단천지불능위)/하늘과 땅이 하나의 덩어리이니 어긋날 수가 없겠구나.
<해설>
◯石友(석우)는 금석(金石)처럼 정의(情誼)가 굳건한 벗이라는 뜻, 금석처럼 굳게 사귄 친구, 의역하여 벼루 ◯聖神(성신)은 성스럽고 신령스러운 분, 여기서는 仁宗을 말한 것임. ◯하서전집(河西全集) > 河西先生全集卷之六 > 七言絶句 >에는 제목이 應製題睿畫墨竹癸卯(임금의 명에 의해 시문을 지은 李睿의 먹으로 그린 그림, 1543년 계묘년)라 하였다. 李睿가 인종의 본명인 듯하다. 이 시문의 지은 시기는 1543년 계묘년이고, 南磵이 차운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河西 金麟厚는 1510-1560년대 인물이고 남간은 1584-1638년대 인물이니 살아생전에는 만났을 수 없다. 인종대왕이 세자시절에 그렸다는 묵죽도를 河西 金麟厚에게 내렸다 하니, 혹여 河西가 머무는 장성의 어느 精舍에서 南磵은 이 墨竹圖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
인종의 동궁 시절 하서는 시강원 설서가 되어 세자를 가르쳤다. 이 때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덕행에 깊이 감동해 「주자대권」과 함께 손수 묵죽도 한 폭을 그려 하사했다. 바위 주위에 위태롭게 솟아 있는 대나무 그림이었다. 하서는 이어 그림에 맞게 시를 지어 화답했다.
뿌리와 가지, 마디 잎사귀는 빈틈없이 촘촘하고
돌을 벗삼은 정갈한 뜻은 그림 한 폭에 가득하네
이제야 알겠네, 성스러운 솜씨의 조화를
어김없이 하늘과 땅이 한덩이로 뭉치셨음을
각별한 애정을 담은 군신 간의 아름다운 합작품이다. 인종이 묵죽도를 하사한 것은 장차 하서를 크게 쓰려는 깊은 뜻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인종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 7월 갑자기 승하했다. 소식을 들은 하서는 문을 닫아 걸고 몇날 며칠을 대성통곡했다. 그리고는 병을 칭탁하고는 향리로 낙향했다. 세상을 등진 채 거기에서 평생을 학문을 닦으면서 보냈다.
해마다 7월 1일 인종의 기일이 되면 집앞 난산에 올라 해가 질 때까지 음주, 통곡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에게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 교리를 제수했다.
하서는 두어 섬의 술을 싣고 마지못해 서울로 떠났다. 가다가 대나무 숲이나 꽃이 핀 곳이 있으면 대나무숲, 꽃과 마주앉아 술을 마셨다. 그만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애틋한 인종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더는 갈 수가 없었다. 인종을 위해 그는 이렇게 절의를 지켰다.
하서는 인종을 그리워한 시를 짓기도 했다.
임의 연세 바야흐로 삼십이요
내 나이도 3기(1기는 12년)가 되려는데
새 정이 미흡하여 이별함이 화살 같도다
내 마음은 변할 줄 모르는데
세상일은 동편으로 흐르는 물이로다
젊은 나이에 해로할 짝을 잃었으니
눈은 어둡고 머리털과 이빨도 쇠했는데
덧없이 살기 무릇 몇해던가
지금까지 아직껏 죽지 않았네
잣나무 배는 강 한가운데에 있고
남산에는 고사리도 나지 않았네
도리어 부럽도다 주나라 왕비는
살아 이별하여 권이장을 노래한 것이
필암서원 사당에 특별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경장각이다. 이 곳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 하서에게 ‘주자대전’ 한 질과 함께 손수 그려 하사한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다. 이후 묵죽도는 훗날 하서의 높은 절의를 표상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정조는 하서의 덕행과 절의를 높게 평가했다. 정조가 하서를 문묘에 배향할 때, 장성으로 파발을 보내 선왕이었던 인종께서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필암 서원에 경장각을 세웠다. 하서 종가에서 소중히 간직해 온 묵죽도를 경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게 한 것이다.
경장각 편액 글씨는 정조 임금이 초서로 쓴 친필이다. ‘경장각’은 ‘왕가 조상의 유묵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종대왕의 묵죽도’는 인종, 하서, 정조의 세 인물의 고매한 인품과 애틋한 마음이 서려있는 후세의 귀감이 되는 한폭의 그림이자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이야기
첫댓글 필암서원도 답사 해야 되는데...
肅宗 9卷, 6年(1680 庚申 / 6月 19日(丙子) 실록에 보면
영의정 김수항이 선대의 좋은 글과 말을 따라 학문함에 대하여 논하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김인후(金麟厚)가 겸설서(兼說書)로서 입직(入直)했었는데, 어느날 저녁에는 인종(仁宗)께서 친히 입직소(入直所)에 나오셨다가 어필(御筆)로 묵죽(墨竹) 한 떨기를 그리시고,
김인후에게 시를 짓도록 하시어 김인후가 칠언(七言) 1절(絶)을 지어 그 종이에다 썼습니다.
그 화본(畵本)이 김인후의 본가에 있어 자손이 보배로 여겨 간직하고 있는데, 신이 남쪽으로 유배갔을 때에 그 화본을 볼 기회가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