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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뉴질랜드가 역사적으로 세계 최초로 여성참정권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1893년에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여성의 권위가 신장되어 있습니다.
유럽 선교의 역사에도 남성이 주도되어 선교하고 있지만 그 복음의 역사는 여성에 의해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빌립보 교회의 설립과 유럽 선교에 귀하게 쓰임 받은 한 여성을 소개했습니다. 바로 자주장수 루디아입니다. 그녀는 예배의 처소를 지키고, 자신의 집을 전도자들에게 제공하므로 쓰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한 여성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여자는 오늘 본문 16절에 소개하고 있듯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입니다. 이 여종으로 인해서 18절에 보면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귀신 들린 여종으로 인해서 괴로워했습니다. 여기서 ‘괴로워하다’는 말은 속으로 좋으면서 겉으로 아닌 척, 괴로워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깊은 내부에서부터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왜 괴로워했습니까?
17-18절에 보면, 바울을 며칠 동안 따라 다니면서 외치는 여인의 말 때문입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의 외침이 바울은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외치는 소리는 바울 일행에 대하여 아주 바르게 증거하지 않습니까?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평가를 합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나친 칭찬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찬을 받겠습니까? 이 칭찬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써 아주 요긴하고, 전도자로써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영 다릅니다. 바울은 자기를 칭찬하며 따라 다니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만 아무나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기쁘고, 기분이 좋고, 내게 유익하겠습니까? 어떤 손가락질 받는 저질스러운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다닌다고 해 보십시오. 오히려 그 사람의 칭찬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인의 칭찬에 괴로워합니다. 그것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누구입니까? 16절에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이 여자는 누구입니까? 이름도 성도 알 수 없습니다. 이름도 성도 알 수 없지만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그녀가 얼마나 아름답다든지, 나이가 얼마인지, 그의 인격이 어떤지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여자에 대하여 세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먼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이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정신으로 온전한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수단이 되어서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였습니다.
둘째로는 이 여자의 신분이 여종이라는 것입니다. 노예입니다. 주인이 하라고 하면 해야 하고, 하지 마라고 하면 자기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노예입니다. 주인의 도구입니다. 이 여자는 이중적인 노예입니다. 영적으로는 귀신의 종이요, 육신적으로는 주인의 종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한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날을 점치는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귀신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갔을 때에 제가 복음을 받고 자랐던 동네에 가보았습니다. 특별히 다른 동네와는 차별된 것이 있다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당집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무당집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점을 보고 굿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교회가 더 필요하고 성도들이 더 열정적으로 전도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우리들 가운데, 한국에 나가면 점집에 가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에 와서 ‘목사님, 목사님, 하는 교인들 가운데, 새해가 되면 무당집에 가서 점을 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점을 보러 가니, 점쟁이들이 내 과거를 흔히 들어다 보고, 나의 앞날을 말하더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당황스럽더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신비스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사람의 과거나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에는 영계가 있다는 것, 영의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귀신이 여러분의 과거를 모르겠습니까? 우리의 며칠을 내다보지 못하겠습니까? 귀신이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 그래서 미래가 어떻게 될까 싶어서 돈을 바치면서 점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점쟁이에게 가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장 하는 말이 ‘그럼 목사님께서 저의 미래를 말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목사를 교회 점쟁이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런 의외로 이런 교인들이 많아 교회에서 점을 봐주는 교회가 성업 중이라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미래가 아무리 궁금해도 점쟁이를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앞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일러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나아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으므로 하루하루를 살라고 하십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귀신이 왜 여종에게 점치는 능력을 주었을까요? 이 여종이 불쌍해서 잘 살고 잘 먹고 살기 위해서 했을까요? 아닙니다. 미래가 궁금해서 이 여자를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수하에 넣기 위해서입니다. 이 신비한 능력을 통해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점점 더 자기의 깊은 구덩이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꼼짝달싹 못하는 자기의 종으로 삼기 위해서 이 여종에게 능력을 빌려 주었던 것입니다.
이 신통한 능력을 가진 점쟁이 여인이 바울 일행에게 칭찬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칭찬에 근본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하였습니다.
왜 입니까? 바울은 점쟁이 여인의 칭찬의 출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귀신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칭찬에 바울은 놀아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들어온 귀신을 내어 좇았습니다. 이때에 귀신들이 나가면서 외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41). 여기서 보면, 귀신은 영적 존재이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줄은 가장 먼저 알아봤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귀신들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마음껏 농락하다가 예수님의 말씀과 권세 앞에 쫓겨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굳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외치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귀신에게 당장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도 허락치 아니하셨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단은 교묘히 그것을 알고서 예수님을 방해할 의도로 사단은 소리 질렸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보십시오. 귀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믿지를 않았고 방해하기 위해서 외쳤습니다. 귀신 들린 여인도 바울이 누구인가를 외쳤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귀신 들린 점쟁이의 칭찬에 괴로워했습니다.
저와 아내를 연결시켜 주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저를 귀하게 여겨서 제가 청년 목사일때에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김 목사님, 칭찬을 독으로 아세요”라고… 칭찬에 우쭐거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정진하는 목사가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칭찬이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거참, 거짓말인 줄 알지만 듣기가 괞찮네요. 계속해 보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도움이 되는 충고나 잘못을 지적해 줄 때에는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릴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자신이 빌립보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9-10)라고 했습니다. 선악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 가운데서 최선의 것을 분별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찾아오는 형통과 칭찬과 행운에 손을 내밀어 붙잡기 전에 그 출처를 분별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명예의 자리를 내어 줄 때에, 누가 나에게 칭찬할 때에, 나에게 확 다가오는 행운이 있을 때에 그 출처를 분별해야 합니다.
지난 주중에 아내가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사건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돌아오는데, 한 늙은 선지자가 자신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기 집에 가서 떡도 먹고 물을 마시라고 강권하여 젊은 선지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젊은 선지자는 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어 뜯기어 죽습니다. 왜 젊은 선지자가 사자에게 뜯겨 죽어야 하는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제가 이야기하기를 “한번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해서 영원히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돌아가지 말고, 거기서 음식과 물도 마시지 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데,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넘어갔다. 젊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했고, 그 상황에서 분별력이 필요했다” 요지의 말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통한가, 내가 얼마나 이 땅에서 행복한가가 아닙니다. 과연 내 앞에 있는 행복과 형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내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호의를 가지고, 그냥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언제나 함정을 가지고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귀신 들린 여자 점쟁이가 바울을 두고 한 칭찬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은 사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뒷부분에는 교묘한 꼼수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구절에서 ‘구원의 길’이 단수‘a way of salvation’ 이지만 원어상에는 복수로 ‘구원의 길들’‘ways of salvation’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귀신 들린 여자가 며칠 동안 따라 다니면서 외친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은 종이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길이 아닌, 여러 개의 구원의 길 가운데 하나를 너희에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압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내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길이요. 하나 밖에 없는 진리요,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도 길이고, 우리도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따라가도 되지만 우리를 따라와도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교묘한 작전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네가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거야”라고 사탕발린 유혹을 했습니다. 여기에 하와가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인간타락의 출발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사단, 예수님을 시험했던 사단이 바로 바울과 실라와 그 일행을 유혹했습니다. 바로 그 사단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혹하고 있습니다.
어제, 잠시 동안 한국 TV의 [궁금한 이야기]라는 프로를 보았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께서 ‘복음과 경제 연구소’를 차리고 성도들에게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투자를 유도했습니다. 평소에 목사님이 인자하고 겸손하시니, 목사님이 투자하라고 하니, 부자가되고 싶은 심정에 의심없이 투자했습니다. 성도들이 200억원 정도를 투자했습니다. 결국은 사기였습니다. 성도님들이 올바른 분별력과 상식의 개념이 없어서 결국은 사기를 당하고 믿음의 큰손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돈, 돈을 내세우고 돈이 따라다닙니다. 무조건 돈을 벌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되세요’라는 것이 최고의 칭찬이고 덕담입니다. 그래야 백세시대에 노후가 보장된다고 합니다. 돈의 신 맘몬에 순종할 것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즐기라고 외칩니다. ‘남는 게 무엇이 있겠느냐? 인생은 젊을 때에 즐겨야 한다. 지금 즐겨야지, 늙으면 못논다’고 아우성 칩니다.
그래서 사단은 세상으로 돈과 쾌락의 우상에 따라가도록 줄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길이 열리고,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사단이 제공하는 아름답게 보이는 길은 멀지 않아 결국은 멸망의 길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귀신 들린 점쟁이의 칭찬과 증언에 심히 괴로워하며 어떻게 합니까? 마지막 18절입니다.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케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주간도 나를 움직이고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돈과 쾌락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내 삶의 기쁨, 나의 생명, 나의 원동력이 되어서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따라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