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血緣) & 인연(因緣)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은 물론 가족의 안위마저 뒤로한 채
의로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남겨진 가족은 오랫동안 가난과 멸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훗날 그의 아들 안준생의 심정을 빗대어 전해지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지만 가족에게는 영웅이었습니다.”
이 문장은 실제 안준생의 육성으로 확인된 기록은 아니지만,
한 시대가 남긴 비극과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인생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가족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가족을 넘어 더 큰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세상을 바꾸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공동체를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공자는 ‘인(仁)’을 가족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천하로 확장하였고,
맹자는 “노인을 내 부모처럼 공경하고
남의 노인도 내 부모처럼 공경하라 (老吾老以及人之老)”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고,
부처는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를 설하였습니다.
동양과 서양, 종교와 철학은 서로 달랐지만 결국 한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사랑은 가족에서 시작하지만, 가족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
형제자매를 아끼고 배우자를 위하는 마음 역시 자연스러운 인간의 정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은 특별한 덕목이라기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도리이다."
그러나 가족만을 사랑하는 삶은 때로 이기적인 가족주의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내 자식만 잘되면 되고, 내 가족만 편안하면 된다는 생각은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반복되는 특혜와 청탁, 혈연 중심의 연고주의와 세습,
부정부패의 상당 부분도 가족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족은 소중하지만, 가족만을 위한 삶은 사회를 좁게 만들고,
타인을 경쟁자로 바라보게 합니다.
반대로 가족을 넘어 세상을 향해 열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더 크게 확장합니다.
그들은 친구를 가족처럼 아끼고, 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며,
어려운 이웃을 형제처럼 돌봅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맺어진 관계를 더욱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한 사람의 곁에는 평생 함께하는 ‘벗’이 있고, ‘은인’이 있으며, ‘의인’이 있습니다.
부모는 ‘운명’으로 만나고 형제는 하늘이 맺어 줍니다.
그러나 친구는 ‘선택’으로 만납니다.
배우자도 선택이며, 스승도 선택이고, 평생의 동지도 선택입니다.
자신이 선택하여 맺어진 ‘인연’은 ‘혈연’보다 더욱 깊은 신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부모는 있습니다.
누구나 자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목숨을 맡길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평생 존경하는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 신의를 쌓고
덕을 베풀며 살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동서양의 성인들이 말한 사랑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가족이라는 작은 원을 출발하여 세상이라는 큰 원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재산의 크기로 평가합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는가, 얼마나 큰 집을 가졌는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를 따집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에서 사람들은 다른 것을 돌아봅니다.
내가 평생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줄 친구는 몇 사람이나 되는가.
내가 떠난 뒤에도 나를 그리워해 줄 사람은 누구인가.
재산은 상속되지만, 신의는 상속되지 않습니다.
명예는 사라질 수 있지만 은혜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 남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는 있어도 친구를 살 수는 없습니다.
권력으로 ‘충성’을 얻을 수는 있어도 ‘존경’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남겼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가족은 태어나면서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은인’은 살아가면서 만들게 됩니다.
‘의인’은 함께 걸으며 만납니다.
‘귀인’은 자신의 인품이 불러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혈연’이 아니라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좋은 인연은 우연히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믿고, 먼저 베풀고, 먼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기다리는 사람보다 찾아가는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계산하는 사람보다 진심을 내어주는 사람이 더 깊은 관계를 얻게 됩니다.
사람의 품격은 가족을 어떻게 사랑했는가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게 품었는가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자식을 자기의 자식처럼 사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닌 노인을 자기의 부모처럼 공경하는 일은 덕을 쌓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산과 마음을 기꺼이 내어놓는 것은
인격이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한 사람입나다.
그의 가족은 집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의 가족은 친구가 되고, 제자가 되고, 이웃이 되며, 함께 울고 웃었던 모든 사람들이 됩니다.
인생은 결국 ‘사람을 남기는 일’입니다.
재산을 남기는 것은 ‘삶의 결과’일 수 있지만, 사람을 남기는 것은 ‘삶의 가치’를 남기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