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604]圃隱先生7율-과주(瓜州)
원문=圃隱先生文集卷之一 [詩]
瓜州 壬子四月 - 포은정몽주 과주 임자년(1372, 공민왕21) 4월〔瓜州 壬子四月〕
泊舟登岸待潮生。 楊子津南第一程。 楚岸鴈聲還北去。 海門帆影尙西行。 石幢始認金山寺。 粉堞相望鐵甕城。 隱約鍾山來入望。 五雲深處卽神京。 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밀물을 기다리니 / 泊舟登岸待潮生 양자진 남쪽으로의 첫 번째 노정이라네 / 楊子津南第一程 초나라 언덕엔 기러기가 북으로 울며 가고 / 楚岸雁聲還北去 바다 어귀에는 돛단배가 서쪽으로 떠가네 / 海門帆影尙西行 석당이 솟아 비로소 금산사임을 알겠고 / 石幢始認金山寺 분첩이 희어 멀리 철옹성이 바라보이네 / 粉堞相望鐵甕城 아득히 보이는 종산이 시야에 들어오니 / 隱約鍾山來入望 오색구름 깊은 저곳이 바로 신경이로세 / 五雲深處卽神京
[주-D001] 과주(瓜州) : 중국 강소성 한강현(邗江縣) 남부의 대운하가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진(鎭)의 이름이다. 과주(瓜洲) 혹은 과부주(瓜埠洲)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양자강 건너 맞은편이 바로 진강(鎭江)이다.
[주-D002] 석당(石幢)이 …… 바라보이네 : 석당은 돌로 기둥처럼 길게 만들어 우뚝 세운 당(幢)이고, 분첩(粉堞)은 석회를 바른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금산사는 강소성 진강시 금산호(金山湖) 안의 금산(金山) 위에 있는 절이다. 철옹성은 강소성 진강시 북고산(北固山)에 있었던 성이다.
[주-D003] 오색구름 …… 신경(神京)이로세 : 오색구름은 다섯 빛깔의 상서로운 구름으로 제왕의 처소를 말하고, 신경은 신성한 서울로, 여기서는 남경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18 포은의 명나라 사행 1368년(공민왕17) 명 태조 주원장이 남경을 수도로 삼아 명나라를 건국한 뒤, 그 해 12월 설사(偰斯)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왔다. 이에 공민왕이 1369년 홍상재(洪尙載)를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고려와 명나라 사이의 공식적인 외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1차 사행:1372년 3월에 이루어진다. 서장관으로 지밀직사사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남경에 가서 촉 땅을 평정한 일을 축하하고 아울러 자제의 입학을 청하는 소임이었다. 돌아올 때에 해중(海中)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폭풍을 만나 홍사범은 익사하고 포은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말다래를 베어 먹으며 13일이나 견디다가 명나라의 구조를 받아 다시 남경으로 돌아갔고, 이듬해 7월 고려로 돌아와서 황제의 명을 선포하였다. 이때 지은 시 한 수를 보기로 한다.
과주(瓜州) 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밀물을 기다리니 / 泊舟登岸待潮生 양자진 남쪽으로의 첫 번째 노정이라네 / 楊子津南第一程 초나라 언덕엔 기러기가 북으로 울며 가고 / 楚岸雁聲還北去 바다 어귀에는 돛단배가 서쪽으로 떠가네 / 海門帆影尙西行 석당이 솟아 비로소 금산사임을 알겠고 / 石幢始認金山寺 분첩이 희어 멀리 철옹성이 바라보이네 / 粉堞相望鐵甕城 아득히 보이는 종산이 시야에 들어오니 / 隱約鍾山來入望 오색구름 깊은 저곳이 바로 신경이로세 / 五雲深處卽神京
1372년 4월에 지은 시이다. 과주는 중국 강소성 한강현(邗江縣) 남부의 대운하가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진(鎭)의 이름이다. 3월 예성강을 출발한 사행단이 바다를 건너 4월 과주에 도착하여 남경으로의 출발을 기다리게 된다. 포은이 강 건너로 보이는 금산사와 철옹성의 경물을 읊고 오색구름이 짙은 저 종산 아래, 곧 남경을 아득히 바라보며 기대에 찬 회포를 토로한 것이다. 포은이 이렇게 명나라 사행에서 남긴 시가 《포은시고》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귀국길의 해난 사고가 있은 뒤로 고려 사신단의 사행 노선이 바뀌게 된다. 예성강에서 출발하여 해로와 수로로 남경에 이르던 왕복 노선이 돌아올 때에는 남경에서 강소(江蘇) 수로를 통하여 회안(淮安)에 이르고 회안에서 육로로 봉래(蓬萊)에 이르렀다가 발해를 건너 요양을 거쳐서 고려로 들어오는 노선으로 바뀌었다. 이는 사행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내려진 조치로, 이후의 남경 사행길은 모두 이 변경된 노선을 이용하였다.
2차 사행:1382년(우왕8) 4월 주족금은진공사(輳足金銀進貢使)로서 남경으로 가다가 요동에서 입경(入境)이 허락되지 않아 돌아왔다.
3차 사행:1382년 11월 청시사(請謚使)로서 남경길에 올랐으나 이듬해 1월 요동에서 또 입경이 허락되지 않아 돌아왔다.
4차 사행:1384년 7월 하성절사(賀聖節使)로 출발하여 이듬해 4월에 돌아왔다. 당시에 명나라와의 마찰로 인하여 홍무제가 크게 노하여 출병까지 하려 하였고 또 사신을 장류(杖流)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사신으로 가기를 모두 피하였다. 우왕이 포은을 불러 의향을 물자, 포은이 대답하기를 “군부의 명은 물과 불도 오히려 피하지 않거늘, 하물며 천자를 뵙는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다만 남경까지는 90일의 노정인데, 성절까지 겨우 60일뿐이니, 이것이 한스러운 바입니다.”라고 하고 그날로 길에 올라 날짜에 맞추어 표문을 올렸다. 홍무제가 표문에 적힌 날짜를 헤아려 보고 치하하며 또 지난번 난파 사고를 기억하여 특별히 후대하였고, 장류한 사신을 풀어 주는 등의 호의를 베풀어 포은이 사행의 소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때 함께한 서장관은 정도전(鄭道傳)이다. 4차 사행에 관한 내용은 〈본전〉, 〈행장〉, 〈연보고이〉에 소상하게 실려 있다.
5차 사행:1386년(우왕12) 2월 임금의 편복 및 배신(陪臣)의 조복과 편복을 청하고 또 세공의 견감을 청하기 위하여 남경으로 간 사행이다. 함께한 서장관은 한상질(韓尙質)이다. 포은의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명확하여 5년 동안 미납한 공물과 늘려서 정했던 세공의 상수(常數)를 면제받고 7월에 고려로 돌아와서 황제의 명을 선포하였다.
6차 사행:1387년 12월에 조빙을 통하기를 청하는 소임을 갖고 남경으로 가다가 이듬해 1월에 요동에서 입경이 허락되지 않아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