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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베트남의 바가지
벤츠는 어느 참 달랏 시내를 벗어나 나트랑을 향하고 있다. 인구 30만의 달랏이니 단 10분쯤 지나자 이내 인적 드문 산길이다. 앞서 달랏을 서부고원지대로 묘사했는데 나트랑의 입장에서 보면 서쪽이 맞다. 해안선을 중심으로 발달한 그들의 도시를 기준 한다면 한참 내륙인 달랏이다. 원래 베트남 여행은 해안선을 따라 느릿느릿 가는 기차를 타야 제 맛이라고 했다. 내일 나트랑 공항까지 쓰기로 하고 우리가 벤츠 차를 빌리는데 들어간 돈은 30만원, 보통 달랏에서 나트랑까지 가는 데만 택시로 가면 80달러라고 하니 택시 두 대가 필요한 우리에게는 이것저것 합하면 훨씬 싼 것이다.
우리의 기사 먼 아저씨는 54세, 여정이 걱정 돼 물으면 그는 알아들어서인지 짐작인지 오케이를 해댄다. 아마도 나트랑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벤츠 16인승은 단체관광을 말하는 것이고 당연 이를 모는 사람이라면 전문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출발을 할 때 보험이야기를 하며 뭔가를 쓰라고 해 썼는데 그가 속한 여행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전적으로 후에라는 젊은 친구가 알아서 한 것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입장이다. 영어를 조금 한다기에 믿었는데 그것은 아닌 듯싶고 얼굴로 봐서는 아주 착한 믿음이 가는 먼 아저씨다. 동쪽을 내리막으로 가는 벤츠차, 주변 볼 것도 없는 차에 어제 밤 잠을 설치고 꼭두새벽 일어나 시장을 들러서인지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뒷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3시간 걸린다는 나트랑, 1시간은 그렇게 가자 한 것인데 그런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잠들만 하면 여지없이 차가 요동을 친다. 길이 무척 험하다. 조심스럽게 험한 산세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내려 달리는 벤츠차. 낙랑장송이 가지를 늘어뜨린 그 길은 마치 강원도 준령을 넘어 내리는 아리랑 길 같다. 여러 겹의 산들로 둘러싸인 길하며 낯익은 수종들, 그리고 결국은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는 길이다. 3시간 중 적어도 1시간은 산길을 굽이굽이 돈 격이니 시속 40킬로로 잡아도 꽤 긴 산악구간이다. 인가도 거의 없는 천연림이 울창한 곳, 베트남은 아직 개발 시작도 안 했다.
가는 어디 쯤 분명 나트랑의 해양성 더운 기류가 몰려와 산중의 서늘함과 마주쳐 큰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개가 자욱하여 5미터 앞도 안 보인다. 버섯재배로는 최고의 땅이 여기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캄보디아 티엔립에서 산 영지버섯은 가격이 우리의 반에 반도 아닌 아주 싼 값이었다. 호치민 시장에서 본 수많은 버섯들, 잘 알기만 한다면 대박이 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또 드는 생각, 이 깊은 산 속에 소수민족이 살고 있지 않을까. 사실 이는 무턱대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랑비앙처럼 2천이 넘는 산이 즐비한 이곳 어딘가에 쓩뜨라는 곳이 있고 산이 차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들었다. 그들 또한 고산족이 아닐까.
그리고 달랏에서 굽이굽이 돌아 응오안묵 고개를 넘다보면 나짱과 판랑으로 이동하는 길목이 나온다 했다. 판랑은 나짱에서 얼마 안 떨어진 해변가로 지금은 바람과 함께 사는 윈드 써핑 동네가 되었지만 그곳은 이웃한 깜란(Cam Ranh)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아픈 기억으로 남는 곳이다. 나짱에서 한 20여 km 떨어진 동보 계곡(Suoi Dong Bo)이 있는 꺼우힌 산(Nui Cau Hin)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 군대가 베트콩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었다. 1965년 청룡부대가 상륙하여 주둔하고 이어 백마부대와 제2해병여단이 상륙한 항구도시 깜란(Cam Ranh)이 바로 근처에 있다. 판랑은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의 제2해병여단 제2대대가 미군이 건설하고 있는 비행장 경계에 투입되었던 지역이고, 1965년 11월에는 인근 까두산(Nui Ca Du)에서 전투도 했던 곳이다.
그곳에는 정말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1969년 10월 14일 남부 해안가에 있는 판랑 지역의 절 린선(Linh Son)사에서 한국군 한명이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하여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AFP 통신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것으로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고, 이어서 달아나는 여자 보살에게도 총을 쏜 후 시체를 모두 불태웠다. 마을에서 돌아온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이 시신탈취에 대한 불안으로 시신을 인근 절로 옮겼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판랑 지역 전 학교가 휴학을 결의하고 일제히 봉기에 나섰다. 12일이 지나서 시신을 화장할 수 있었고 절은 폐허가 되었다. 1998년에 새로 지어진 이 절에는 당시 죽음을 당한 스님들의 유골이 모셔진 3층탑이 있다고 들었다.
사실 이 응오안묵고개 너머 판랑에는 내가 주목하는 옛 유적이 있다. 내가 다음 여행 때 가기로 한 미썬이라는 곳도 이 유적과 관련이 있다. 참파왕국, 그들은 과연 베트남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그러니까 고개 넘어 논스톱으로 바로 해안가로 향하면 판랑이 나오는데 판랑을 지난 후 잠시 1번 국도를 벗어나 지방도로를 기웃거리면 만날 수 있는 것이 포클롱 가라이 유적지라는 곳이다. 포클롱은 한때 지금의 베트남 중부를 지배하던 참파왕국이 남긴 유적으로 지금 남겨진 것으로는 가장 남쪽에 위치한 유적이라 한다. 동남아 힌두화의 대표 문명이 바로 힌두-크메르(앙코르 왕조), 힌두-참파(베트남 중부), 힌두-자바(인도네시아)로 요약되는 3대 문명이다.
베트남에 그들의 대표적인 유적지는 70여 사원이 위치하며 힌두문명의 성지로 불리는 미선(美山)유적지, 뀌년항을 배후로 하고 있는 빈딘지역, 한국군 참전지역이었던 나짱에 포 나가르 사원 그리고 참파의 멸망기에 남아있던 판랑(판두랑가)지역에 호아라이, 포클롱 가라이, 포로메, 포담, 포하이 사원을 들 수 있다. 마침 나짱을 향하니 포 나가르 사원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향하는 나짱, 남중국해의 에머럴드 베트남 최고의 해변으로 일컬어지는 나짱인데 나트랑(Nhatrang)으로 발음하면 귀에 익은 지명이다. 나짱은 한국군 지원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이다. 나짱은 미군에게도 해변 휴양지로 이용되던 곳이기도 했다.
까마득히 길고긴 베트남의 동부 해안선에서 나짱은 유독 손에 꼽히는 해변이다. 1600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선을 가진 베트남에게 이만한 해변이 흔하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여하튼 나짱은 6킬로미터에 달하는 천연의 백사장이 깔린 완만한 해안과 주변에 적당히 널린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에메랄드 빛으로 투명한 바다로 훌륭한 휴양지임에는 분명하다. 낚시와 스노클링,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기 좋은 곳이며 섬들을 돌아다니다 적당한 곳에서 수영을 즐기도록 하는 보트 트립과 보트 패러글라이딩, 마사지 등 해변 휴양지로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구비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아주 주의할 것이 있다. 넓은 국토에 분포되어 있는 다양한 볼거리 뛰어난 자연경관과 현대사에 있어서의 뚜렷한 세계사적 족적으로 베트남의 관광산업은 잠재적으로 높은 성장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평이 그렇다. 책에도 적힐 정도니 그 실태는 알 만 하다.
어느 여행가의 글,
<베트남을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배를 타고 짜우덕으로 입국하였었다. 그 날의 목적지였던 칸터로 가기 위해서는 선착장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를 뭔가를 타고 가야했었다. GPS로 방향을 대략 가늠하고 지나가던 인력거를 탔다. 그런데 자전거인력거가 예상했던 반대방향으로 간다. 이상하다하면서도 알아서 데려다 주겠지, 그러다가 인력거가 멈췄는데 보니 합승버스(봉고, Van 같은 작은 버스)가 간판에 그려진 매표소 앞이었다. 칸터까지의 표를 물으니 매표소 여직원이 12만동이고 차가 바로 있단다. 돈을 지불하니 그 여직원이 표를 내게 주는 게 아니라 앞에 서성이던 사내한테 준다. 그 사내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내게 와서는 배낭을 달라는 손짓을 한다.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사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 그 사내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게 됐고 오토바이는 지금까지 왔던 반대방향으로 달려 시가를 벗어나 한동안 달리더니 멈춘다. 보니 진짜로 버스정류장이다. Can Tho행이라고 써진 푯말아래 가격이 5만동으로 적혀있다.
제기랄, 이게 뭐야.
선착장에서 버스정류장은 동남동 쪽으로 2.5km, 시내의 버스 매표소는 반대방향인 서북서 쪽으로 ~0.7km. 즉, 그 인력거꾼은 반대방향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매표소에서는 5만동짜리 표를 12만동에 팔았었고. 매표소에서 버스정류장까지의 오토바이 비를 고려해도 이는 ~2만동 정도의 거리이니 5만동을 더, 즉 배를 받은 셈이었다. 이 연놈들은, 맞다, 이 ‘연놈들’, 협잡을 벌인 것이었다. 인력거꾼은 지리를 모르는 관광객을 시내매표소로 물어다 주고 매표소는 바가지를 쒸우고, 매표소에 서성이는 오토바이꾼 은 그 사이에서 일감을 얻고.짜우덕에서 어처구니없는 바가지로 인해 내 의식 속에는 베트남의 바가지에 대한 경계태세가 발동되었다. 하지만 막상 물건을 살 때는 차마 50% 선의 가격을 입밖에 내지를 못했다. 하지만 ‘에그… 또 바가지였구나’를 거듭해가면서 내 마음 속에는 독심이 쌓여져 가기 시작했다.
하노이에서. 아침에 시간이 없어 미처 간식/점심 용 빵을 사지 못한 채 숙소를 나왔는데 마침 길가에 자전거로 빵을 파는 할머니가 있다. 가격을 물으니 만동. 크기는 좀 차이가 있지만 베트남 중부인 훼에서 샀을 때의 가격에 비해 매우 비싼 가격이다. 왜 그러나? 하지만 상대가 할머니라는 생각에 하노이의 물가가 비싸기 때문인가 하면서 값을 깎을 생각을 전혀 안하고 단지 네 개 사려던 생각을 바꾸어 두 개만 샀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할머니도 역시 바가지였다. 적정가는 두 개에 6천동. 즉 이 할머니는 무려 두 배의 바가지를 씌워 세배의 가격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가지는 베트남 북서부인 라오까이에서 싸파로 가는 버스요금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라오까이 기차역에서 호객군이 와서 싸파까지 버스가 3만동이며 곧 출발한단다. 미리 조사됐던 가격이 2.5만동이고 역 광장에서 주변을 둘러볼 때 들렸던 요금 역시 3만동이었기에 그러자고 하면서 ‘곧’이 10분내냐 했더니 그렇단다. 하지만 버스는 내가 타고서도 30~40여분이 지나서야 출발했었다. 이 정도의 지연은 베트남에서 10여일을 보낸 나로서는 넘어갈 정도가 되었다. 창밖의 경치를 보다, 졸다가를 반복하다 싸파에 거의 다 오게 되었고 차장은 버스비를 걷기 시작했다. 3만동을 꺼내 차장한테 건네니 앞자리에 있던 녀석이 차장한테 뭐라고 하더니만 내게 요금이 3만동이 아니라 30만동이란다.
‘30만동!?’, ‘이게 뭐야.’
‘역에서 3만동에 합의를 보았는데 무슨 30만동?’ 내 말에 그 사내는 ‘아니다. 3만동이 아니라 30만동이다’하면서 10만동 화폐를 석장을 꺼내 흔들어 댄다. 내 지갑에 30만동이 있기나 하나? 분명 3만동에 합의를 본 기억인데… 역에서 이야기할 때 잘못들었나 하는 사전에 적어두었던 가격을 확인하려고 생각에 수첩을 꺼내 뒤적였다. 이 사이에 내 옆자리까지 온 그 사내는 수첩에서 Lao CaiàSa Pa 30KD라고 써져 있는 것을 보고는
“봐라, 네 수첩에도 30만동이라고 적혀있지 않느냐?”
“인석아, K는 천이란 의미로 내가 적은 것이다. 그래 30만동이 아니라 3만동이다”
실갱이가 어느 정도 더 반복되다 이 사내 왈
“너 Lao Cai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거냐”라며 협박조로 나온다.
그래 난,“경찰서로 가자”라고 했는데, 이 사내 ‘여기 경찰서 없다”하면서 기억에 이 때부터 기가 꺾였던 것 같다. 그리고는 이윽고 ‘그래 3만동이다.’ 그러더니만 10만동짜리인가 하는 지폐 몇 장을 꺼내서는 나한테 팁이라면서 받으란다. 이런 황당한 자식이 있나. 이건 바가지가 아니라 완전히 사기고, 협잡이다.이 사내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앞자리서 3만동이 아니라 30만동이라고 떠들어댈 때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밖에도 셀 수없이 사례가 많다.
<다낭에서 테이블에 있기에 그냥 주는 줄 알았던 이 빵이 알고 봤더니 돈 받는 거였다.>
<택시는 비나선(VINASUN) = 흰색, 마이린(MAILNH) = 초록색 이 두개만 타라.>
<하노이 동쑤언 시장, 왠 아저씨가 들어오라 그러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아줌마 사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고 옆에 공안들도 식사하고 있는지라 바가지에 대한 의심 하나도 없이 들어가 앉았다. 기껏해야 10만동 예상, 그런데 35만동 = 17500원. 한국에서도 이 정도 받을 등급이 아닌데. 그런데 다니면서 본 여러 물가를 종합해보고 마친 인증 샷 해놓은 게 있어서 현지 대학생에게 물어보니 기껏해야 10만동 = 5천 원 정도.>
<후에의 특산품 중 하나인 `후다 맥주(Fuda beer)`는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술 중 하나다. 구멍가게에선 30센트(360원)에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3달러(3600원). 어쩔 수 있나. 낼 수밖에.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접하는 바가지 상혼이라 생각키로 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앉은 유럽 여성에게는 똑같은 맥주를 7천200원 받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기가 뭣해서 조용히 주인을 불러 물었다. “맥주 한 병에 7200원이라니 너무 비싼 것 아닌가?” 돌아온 대답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너희들은 부자 나라에서 왔잖아. 그리고 저 여자에게 얼마를 받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
졸지어 달리는 오토바이는 이제 그들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
그러기에 베트남은 외국인에게 있어서는 여행하기 수월한 나라가 아니다. 이런 어려움은 베트남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관광정책 때문이다. 관광판 도이모이라고 할 수 있는 베트남의 관광정책은 당사자인 외국인들에게 너무도 피곤하고 괴로운 경험을 강요하고 있다. 공식적인 이중 가격제는 그 중의 하나이다. 내국인에게는 5000동을 외국인에게는 열배가 넘는 5만5000동을 입장료로 받는 사적지에서는 누구라도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쉽지 않다. 입장료뿐만 아니라 항공운임과 열차운임, 호텔숙박료 등에서 이중 가격제는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이중가격이 적용되는 분야 외에도 콜라에서 사탕에 이르기까지 비공식적인 이중가격제가 상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비공식적인 이중가격은 말이 좋아 이중가격이지 사실은 사기에 가까운 것이다. 1000동짜리 삶은 옥수수를 1만동을 요구해 받아내는 노점상에게 이중가격이란 개념이 있을 리 만무하다. 당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게 되어 있다. 이와 함께 외국인에 대한 불친절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관광수입의 증대에는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단지 관광객이 겪는 어려움의 일단일 뿐이지만 나는 이것이 베트남 도이모이와 베트남 사회주의 정권의 현주소라는데 참 안타까움을 갖는다.
베트남이 외국인들에 대해 이중 가격제를 적용하는 것은 단지 관광객의 불만을 사는 것으로 그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도이모이에 적용되고 있는 당과 인민,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중의 잣대는 위험한 도박이 아닐까. 베트남 사회주의 정권은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죽의 빗장을 열어젖히고 도이모이의 길로 나섰을 것이다. 그 변화의 물결에서 변화를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사회주의 정권이 참호 안에 틀어박혀 안주하고 있다면 우기(雨期)에 그 물결이 참호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혹여 수십 년 동안 불란서, 일본,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지내오면서 그들한테 외국인은 자기들한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가고 해를 끼치기만 하는 존재, 그래서 이들은 우리들한테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바가지는 당연히 우리가 받아야 할 빚을 받아내는 것이기에 기회만 되면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사고 또는 이와 유사한 사고가 형성된 것은 아닐까. <“너희들은 부자 나라에서 왔잖아. 그리고 저 여자에게 얼마를 받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인데.> 이 말이 자꾸 목구멍에 걸린다.
난민촌 같은 집단 촌락 (소수민족을 모아놓은 것은 아닐까.)
가는 중간 나는 우연히 집단 촌락을 보았다. 소수민족들이 산속에서 혹시 내려온 것은 아닐까하여 사진을 찍어두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배가 출출해진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편한 것은 없다. 그런데 기사는 조금만 참으라 하며 자기 의도대로 달린다. 그러다가 만난 음식점, 어느 샛강 오르막에 제법 큰 규모로 지은 음식점이다. 우리로 치면 휴게소 같은 곳. 점심을 시켰다. 그리 비싼 집은 아니었다. 기사는 손님을 데리고 왔다고 식사가 공짜라 했다. 패키지 여행에서 흔히 보는 그런 상황이다. 또 다시 떠오르는 바가지. 입장료는 물론이고 교통비까지도 2배에서 5배의 비싼 요금을 지불하는 베트남, 그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것이 외국인 전용 '투어리스트 버스'다.
일부 여행사들이 외국인요금을 무는 것에 비해, 더 싼 가격에 더 질 좋은 버스를 내놓은 것이다. 투어리스트 버스를 타는 순간 여행자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터미널까지 나갈 필요도, 굳이 호텔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어진다. 버스는 '도어 투 도어'. 즉, 호텔 문 앞에서 호텔 문 앞까지 데려다 준다. 게다가 내려주는 호텔도 싸고 무난한 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런 '안락한' 조건을 마다하고 '로컬버스'를 타는 '바보'는 흔치 않다. 그리하여 여행자들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호텔에서 자고, 같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베트남 땅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이 생겨난 것이다. 아마 지금 우리도 그 선상에 있을 것이다. 주차장에 보이는 관광버스나 벤츠가 이를 대변한다. 그 바람 바가지 대신 어느 면 편안히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 때 묻어나는 진짜를 보고 겪지 못한다는 그런 허전함이 남지 않을까. '선' 안에서 만나게 되는 현지인은 여행자에게 닳고 닳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베트남과 그들이 웃고 돌아선 자리에는 왠지 씁쓸함이 자리 할 것만 같다.
베트남은 자존심으로 독립에 이른 나라다. 일곱 번 사로잡히면서도 항복을 입에 담지 않았던 맹획의 자존심, 해방의 원했던 국민들의 힘을 모아낸 호치민의 자존심, 마주선 총구 앞에서도 당당했던 열일곱 소녀 `보 티 사우`의 자존심이 세운 나라가 베트남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돈 앞에 자존심을 버리고, 여행자를 상처 입히는 일부 베트남 장사꾼을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민족적 자존심`과 `바가지 상혼`의 불안한 동거. 어울리는 않는 이 두 단어는 그 나라를 떠나는 날까지 투어리스트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다. 하노이 배낭 때도 경계에 경게를 늦추 지 읺았는데 다음 번에 계획한 다낭 배낭여행이 은근히 걱정이 되는 터다. 어느 새 나트랑 시내로 접어드는 차, 도시 풍경이 달랏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서는 어느 여정이 펼쳐지려나.
Devo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