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출정식 出征式
기원전 210년 (시황:始皇 7년)
전국시대 戰國時代의 어지러운 중원 中原을 통일 統一시킨 진시황, 끝없는 인간의 욕심은 또 다른 탐욕을 낳았다.
불로장생 不老長生의 영생 永生을 얻고자 불사약을 찾아 노심초사 勞心焦思하던 진시황이 갑자기 죽자 천하는 혼란 속으로 빠졌다.
“왕후장상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라며 반란을 일으킨 진승. 오광의 난이 시발점이 되어 중원에는 영웅호걸들이 우후죽순 雨後竹筍처럼 일어났다.
패현에서 서안까지 만리장성을 축조할 죄수들을 호송하다, 우기 雨期로 인하여 약속 일정을 맞추지 못할 위기에 몰리게 되자, 오히려 죄수들과 의기 통합하여 진왕조 秦王朝에 반기를 든 유방.
고향 패현에서 동이족 東夷族의 대영웅 大英雄 군신 軍神 치우천황 蚩尤天皇의 사당에 경건히 제 祭를 올리고 출정식을 거행한다.
*제치우 祭蚩尤
祭蚩尤於沛庭 제치우어패정
유방은 패현의 뜰에서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 사기 고조본기. 史記 高祖本紀
황제 헌원을 시조로 모시는 하화 夏華족의 유방이 왜 이민족 異民族인 동이족 東夷族의 영웅 치우천황을 모시는 사당에서 제를 올리고 출정식을 거행했을까?
첫째 이유는 치우천황은 전쟁의 신 戰爭之神이기 때문이다.
10여 년간 황제 헌원과 크고 작은 전투 72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사기 史記에는 황제 헌원이 마지막에는 치우천황을 물리치고 중원을 평정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실은 헌원은 치우의 적수가 되질 못 하였다.
마지막까지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두 영웅의 사후 死後에 조성된 무덤이 이를 증명한다.
치우천황의 무덤은 평지의 요충지 5곳에 나누어 매장되어있다.
그런데 황제 헌원의 무덤은 가파른 산, 언덕 위에 외로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춘추필법 春秋筆法의 주요한 한 대목이다.
한 고조 유방이 치우천황의 사당에 제를 올린 것은 이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서 史書와 실제는 다르다는 것을 방증 傍證한 것이다.
이러니 유방도 이민족이지만 전투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전쟁의 신, 병법의 시조인 치우천황에게 출정식을 고하고 가는 것이 마음 편했으리라.
두 번째는 조선국에 대해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신들 동이족의 영웅인 치우천황에게 제를 올려 예를 차리니, 항우나 다른 무리를 견제해주고 뛰어난 제철 기술과 기마술로 나를 도와 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천하의 지략가 장량도 동이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니, 장량의 계책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는 유방 자신이 동이족이라는 학설이 있다.
동이족인 진 秦 왕조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의 조카라는 설도 있다.
초한지의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항우는 진 왕조의 무장들에게 무력을 행사하여 힘들고 어렵게 굴복 屈伏 시키는데 반하여, 유방은 항우에 비하여 군세 軍勢가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진 왕조의 인물들과 큰 전투 없이 항복을 받아내고 있다.
그리고 진 왕조 출신 인물들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있다.
중국의 사서에는 동두철액 銅頭鐵額이라고 치우천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동으로 된 머리와 철로 된 이마란 뜻인데, 이는 구식 재래무기로서는 공략 불가능한 첨단 제철 기술을 전쟁에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선 철기제조 기술로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병장기들을 만들어 공격하는 치우 군단을 겨우 나무막대기와 무겁고도 무른 청동제의 조잡한 무기로 어떻게 상대한다는 말인가?
특이한 건 하화족들은 역대로 자신들의 시조 始祖를 황제 헌원 黃帝 軒轅으로 추존 推尊하고 유일신처럼 추앙하여왔었다. 그러더니,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는지 20세기에 들어 문화혁명 전후로는 동이족이라 알려진 염제 신농씨 神農氏를 황제 헌원 옆에 세우더니, 이마저 역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아니하자 드디어, 동북공정 東北工程을 시도하였다.
이는 이미 지나온 역사에 현재의 정치력이 어거지로 개입한 것이다.
이후로는 치우천황 蚩尤天皇까지 황제 헌원 옆에 추가시켜, 지금은 중국인들의 시조 始祖가 3분(황제 헌원, 염제 신농씨, 치우천황)이나 된다.
그들은 ‘시조’ 始祖란 그 의미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시조란 말 그대로 '처음 시작된 조상'이란 뜻이다.
시조는 오직,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오직 한 분인 고귀 高貴한 분을 ‘비빔밥’으로 만들어 놓았다.
‘시조’ 始祖를
이것저것 온갖 재료를 다 섞어 놓은 짬뽕이나, 잡채 雜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왜?
시조가 비빔밥이나 잡채가 되어버렸나?
왜, 그런가?
고대사에서 치우천황을 도외시하고 역사 서술을 하자니, 앞뒤가 맞질 않는다.
역사적으로 동이족 전체를 선사 先史시대의 연대에서 무시하거나 빼버리면, 하화족 입장에서 보면, 겉모양은 천의무봉 天衣無縫처럼 매끈하게 보일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먼저 영토가 축소된다.
현재의 영토보다 엄청나게 그 영역이 좁아진다.
동이족을 제외한 고대 하화족의 영역은 관중 關中지역(함양과 낙양)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 함양지역에서 출발한 진 秦은 그 뿌리가 동이족에 속한 이종족 異種族이다.
그런데 이는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의 역사를 배제하고 동북아의 역사를 쓴다는 것인데, 이것은 노른자 없는 달걀이다. 아무리 역사를 왜곡시키고 자신들의 역사를 침소봉대 針小棒大해 보아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유치한 수준이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지금까지 무시하고 배척해왔던 치우천황을 동북공정을 통하여 중국인들의 시조로 추가하여 모시고 있다.
지금까지 무시하고 배척했다는 증거는?
이름부터 그렇다.
치우(蚩尤) : 어리석을 치(蚩), 어리석을, 떨어질 우(尤) 즉, '어리석고도 모자란 자'란 뜻이다.
이처럼 대놓고 무시하고 욕을 보이고서는 필요하니까, 지금에 와서는 자기네들 시조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실 行實이다.
이러한 사례만 보아도,
하화족들은 자신들의 고대 역사가 침소봉대로 針小棒大로 날조, 왜곡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 自認하는 결과다.
왜곡된 역사를 털어 버리고 새롭게 바루지 아니하고, 기초가 허물어져 이미 기울어진 건물, 그 옆에 가대기를 덧대어 겉만 새로이 포장한다.
하여튼 포장기술 하나는 세계 제일이다.
치우천황은 환단고기에서는 '자오지 천황'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하화족의 시조 헌원이 동이족 치우천황에게 패퇴한 사실이 거슬린다.
역사 패권주의 覇權主義가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한 가지는 승리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면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자신들이 승리자의 자손 子孫이 되는 방법이 있다.
그들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는 할아버지나 어머니도 언제든지 바꾸거나 교체할 수 있다.
마치, 자동차 부품처럼….
참으로 편리한 사고 思考방식이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유방의 상대 적장인 항우도 출정식 때 치우사당에서 제를 올리고 출정하였다.
항우의 작은 아버지 항량은 초나라의 명문대가 집안으로 묘족 출신이다.
따라서 묘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치우천황에게 제를 올리는 것이 당연지사였으리라.
그 와중에 뭇 호걸들을 통합평정 統合平正하면서 드디어 조우 遭遇한 항우와 유방 두 영웅.
둘 다, 한족의 시조라는 황제 헌원에게 승운 勝運을 빌지 않고, 동이족인 치우천황에게 출정식 제를 올리고 중원에서 초한쟁패 楚漢爭霸를 벌인다.
이는 역대 사학자들은 치우천황을 동이족 출신이라고 그 명성을 깎아내리고 헐뜯기에 바쁘지만, 당시의 일반인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 反證하는 중요한 일례 一例다.
초한 楚漢 전쟁은 우여곡절 迂餘曲折 끝에 유방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한 고조 7년(漢高祖 7年 : 기원전 200년)
중원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은 북방 흉노의 침입이 계속되자, 드디어 흉노를 직접 정벌하려 출정하였다.
- 2. 원보
첫댓글 자신들은 부풀리고 남들은 미개한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중화사상을 염두에 두고 역사를 대하는 모습, 앞으로 많은 기대를 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