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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말에 순종하는 잇대 / 사무엘하 15:19-23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하다보면, 팔로워(followers) 또는 팔로잉(following)이라는 단어에 익숙하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친구로 초대하면, 나는 그 사람을 팔로잉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 사람에게 나는 팔로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팔로워들의 숫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기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팔로워의 수가 많은 사람들은 대개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입니다. 누가 팔로워가 많은지 찾아보았더니 연예인중에서 최고로 많은 사람은 블랙핑크가 1-3위, BTS가 4-10위입니다. 정치인중에서는 유시민 전의원 1위인데, 아무리 인기있는 정치인도 연예인의 2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없던 수천년전에도, 수많은 팔로워를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20살도 안되는 어린 나이에 거인 골리앗과 싸워 이김으로써 갑자기 인기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곧 다윗의 팔로워가 갑자기 늘어난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당시 왕이었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장남으로써, 다음 왕이 될 자격을 갖고 있던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너무나 좋아하고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왕은 자신이 아니라 다윗이 되기를 바라며, 왕이 되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다윗의 인기를 가장 두려워한 사람은,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왕이었습니다. 사울은 그의 남은 인생을 오직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서, 10년여동안 도망을 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로워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2: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비록 다윗이 도망자신세가 되었지만, 그를 따르는 팔로워가 400명가량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를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이었습니다. 곧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마음이 원통한 사람 등, 약 400명이 다윗을 계속해서 따랐습니다. 그 이후에도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됩니다. 마침내 모든 유다족속들이 다윗을 따르며, 그를 유다족속의 왕으로 세우게 되고, 그 이후 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을 따르며, 그를 이스라엘의 통일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곧 모든 백성들이 다 다윗의 팔로워들이 된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다른 남자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았던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다윗에게 아주 충성스런 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밧세의 남편 우리아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방인 헷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게 된 개종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반란이 일어나자, 다윗은 또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옛날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에게 쫓겨다니며 도망자로 살았는데, 이제는 본인이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쫓겨다니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다윗을 따랐던 팔로워들 중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에 잇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다윗을 좋아하여 다윗의 친구가 되고, 다윗을 따르고 싶어하는 팔로워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로 잇대라는 사람도 이방인이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서 도피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인심이 이미 압살롬에게로 돌아간 현실에서, 다윗은 도피를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기보다는, 백성과 성읍이 피해를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스로 왕위를 버리는 길을 택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힘에 대해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포기하는 길로 가는 다윗을 보면서, 성도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이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본성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과 반대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에게 갈등을 일으킵니다. 옛사람과의 싸움을 일으키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성도가 고침 받으며, 믿음에 이끌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가 믿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자 하는 길과, 나의 옛사람이 가고자 하는 길은 분명 다릅니다. 길이 다르기에 갈등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에서 성도는 무엇이 자신이 가야할 길인가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성경이며,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성도가 가야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피할 때, 다윗을 따라 함께 도피하는 신하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다윗을 따라 도피하는 것은, 어쩌면 압살롬이 왕이 되면 다윗의 신하로 일했던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임을 알고, 할 수 없이 다윗과 함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다윗을 따른 것으로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모든 백성’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의 말처럼 이미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모든 백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지지하는 소수의 백성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다윗의 세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따르는 사람 가운데,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반역자를 만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육백 명이 다윗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들을 돌려보내고자 한 것입니다.
19-20절 “그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것을 보면 다윗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압살롬에 대해 힘으로 대항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드 사람은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로 와서, 다윗을 섬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과거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블레셋의 국경 지대에까지 가게 되었을 때, 그때 모여든 블레셋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다윗은 이들 이방인들이 도피하는 자신과 함께 하자,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방인이어서 돌려보내는 것이라면, 이들이 다윗에게 왔을 때 돌려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했으면서, 왜 그들이 필요한 지금에는 돌려보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더 이상 다윗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다윗은 나라를 잃어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처 없이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며, 도망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자신과 함께 한 가드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살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것은,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떠나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잇대의 입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도피하는 다윗과 계속 함께 하는 것과, 다윗의 말대로 다윗을 떠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살 길을 찾는 것, 어느 것이 더 이익이 되는 결정이겠습니까? 일단 이익을 따진다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쫓겨난 다윗은 백성에게 뭔가 해줄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다윗과 계속 함께 한다는 것은 고생만 자초할 뿐이고, 미래 역시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길일뿐입니다. 때문에 아마 대개의 사람이라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잇대는 전혀 뜻밖의 말을 합니다.
21절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우리 주 왕의 살아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이것이 잇대의 답입니다. 잇대의 이같은 선택이 과연 현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분명 세상의 손익계산 측면에서 볼 때, 잇대는 어리석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지는 해를 따르겠다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다윗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압살롬을 환영하고 압살롬의 부하가 되는 것이, 앞길에 대한 보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잇대는 그러한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돌아가지 않고 다윗을 따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세상은 소위 잘 나가는 사람 주위에, 사람들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쇠퇴의 길로 들어서면, 하루아침을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잇대가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 때문에 살든 죽든 다윗과 함께 하겠다는 것일까요? 그동안 자신들을 받아준 다윗에 대한 고마움과 신의 때문일까요?
잇대는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우리 주 왕의 살아계심으로 맹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잇대는 하나님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과 다윗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면 잇대는 다윗에 대한 의리로, 다윗과 함께하고자 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은 압살롬이 아닌 다윗에게 함께 하고 있음을 알고, 다윗과 함께 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에게 함께 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잇대에게는 살고 죽는 문제보다, 또한 자신이 편해지는 길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에 있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 길에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이 다윗의 말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고, 다윗과 함께 하겠다는 선택을 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잇대의 선택은 룻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을 모두 읽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방인인 두 자부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룻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오미와 함께 할 것을 말합니다. 그때 룻은 이런 말을 합니다. 룻 1:16- 17절 “룻이 이르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의 이러한 결정 역시 시어머니에 대한 신의나 효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룻이나 잇대의 선택의 중심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셨고, 그들의 선택은 압살롬과 같은 반역을 크게 책망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압살롬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지 않았기에, 다윗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선택받은 왕이라는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왕위에 대한 욕망으로만 행동한 것입니다.
잇대의 선택은 압살롬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역시 크게 책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잇대의 선택은 오늘 우리의 선택이 어떤 것인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압살롬과 같은 우리를 책망하며, 정신차리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신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알 것이고, 또 굳게 믿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영원히 사는 것임을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러한 믿음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과 동떨어진 삶이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성도의 목표는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성도의 삶의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가겠다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 길이,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당장 떠나고 싶을 정도로, 나의 모든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길을 좁은 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누가 가려고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고 해도, 예수님을 떠난 자라면 멸망일 수밖에 없음을 믿는 그들만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은 우리의 성공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성공을 향해 있습니다.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무엇이 복음인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나의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인가?’를 살피며 거기에만 몰두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복음을 등지는 것도 마다하지 아니할 사람들입니다. 곧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쓸모없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들을 과연 성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복음의 결과를 교회 성장으로 기대하는 것부터 버려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도피하는 다윗과 같습니다. 힘없고 도움도 안될 약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볼 때는 미련한 짓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잇대와 같은 사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유익이나 교회의 성장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만이 사는 것임을 믿고,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설령 죽음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오히려 죽는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봐야 별 볼일 없습니다. 믿음으로 좋은 대학가는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로 승진하는 것도 아니고, 사업이 번창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만을 바라보는 그들만이, 살아도 죽어도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피해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을 때, 자신들 역시 불이익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을 했지 않습니까? 이러한 그들이 나중에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는 길을 같습니다. 바로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의 길을 가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왜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오직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에게서 자신의 미래의 보장을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아들이시라는 그 이유만으로,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그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떠날 수 없다는 답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 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믿기에, 지금 당장 손해가 되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해도,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죽는 것도 두려움일 수 없는 것은,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담대하게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 복음인 줄 알면서도, 복음을 복음 그대로 증거하기를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외면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사람을 두려워 할 뿐입니다. 내 교회로 사람이 모여드는 것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모이는 것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말은, 모두 삭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유익이 될 만한 것만 골라, 복음으로 포장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잇대의 선택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진정으로 영생을 바라보고, 예수께 나오는 것인가를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내 마음 속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세상에서의 미래를 약속한 적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이 함께 한 성도입니다.
여러분, 현대 교회의 형편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타 교회를 가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들리는 이런 저런 말을 통해서, 대부분의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때로 여러분께도 옳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망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동행 하시는 길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발전과 성공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길이라면, 마지막은 결국 멸망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길을 가고자 합니까? 우리가 사는 길과 죽는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길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다면, 어떤 경우에서도 그 길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 길로 인해 불이익이 오고, 설사 그 길이 죽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그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생은 교회를 성장시킨 사람,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자 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오늘 잇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피고, 깊은 책망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도로서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