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일주일동안 제주도에 머물며 관찰하듯 바라본 시간들의 기록입니다. 조금 느리고 불편함을 자처한 이 여행에선 약간의 호기심과 운, 그리고 체력과 용기가 필요했어요.
:: 여행일: 2019년 9월 말 ::
이틀이 지났습니다. 낯설기만 했던 제주의 지리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습니다. 끊임없이 걸으며, 목적지 간 이동을 위해 기다림이 필요한 이 여행 방식에도 적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건 제주도의 변화무쌍한 날씨였어요. 일기예보는 하루의 날씨를 대략적으로만 알려줄 뿐 시시각각 변하는 이곳의 날씨를 빠르게 캐치해 주진 못했습니다.
이날은 고대했던 숲길을 걷는 날이었어요. 서울에서도 종종 산의 둘레길을 걸으며 자연이 주는 상쾌함을 누리곤 했는데 이곳에 와서도 장소만 바뀌었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냈습니다. 그나저나 하늘이 심상치 않네요. 버스가 지나는 중산간도로는 어두컴컴했고 짙은 안개로 뒤덮였습니다. 전날처럼 갑자기 맑게 개길 바라보지만 그런 제 기대를 비웃듯 하늘은 더욱 으르렁거립니다.
셋째 날 기록: 사려니숲길 걷기
붉은 오름 정류장에서 하차했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사려니숲 입구엔 아무도 없었고, 서울에서 보던 것과 다른 숲 풍경에 들어가길 주저했습니다. 가뜩이나 어두운 하늘에 빽빽이 들어선 큰 나무들이 이룬 숲은 음산했고, 깊게 내려앉은 안개와 입구에서 본 ‘뱀 주의’ 표지판은 제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몇 번이나 입구에 발을 들였다 떼기를 반복하며 내적 갈등을 겪었어요. 크게 숨을 내쉬고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어 봅니다. 땅은 축축했고 나뭇가지 사이로 수많은 거미줄이 얽혀 있으며, 잎사귀 대부분이 충해를 입은 듯 상해 있었습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듯했어요. 적막감이 감도는 숲 속에서 괜히 예민해져 푸드득 날아가는 까마귀에 놀라고, 나무에 맺힌 이슬이 떨어지는 것에도 놀라고, 혹여 뱀이나 다른 무언가 튀어나올까 조마조마했습니다.
점차 풍경에 익숙해졌고, 그제야 울창한 숲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삼나무 숲을 지나면 소나무, 편백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청록색의 단조로운 풍경, 어떻게 보면 지루한 숲길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드문드문 보이는 낯선 식물들을 관찰하면서 천천히 걸었어요. 습한 공기 속에 실려오는 숲 향기가 참 좋았습니다.
이 식물은 천남성인데요. 숲 곳곳에 이런 독성이 강한 식물들이 있어 주의 표지판이 있습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색채, 질감, 그리고 명암. 도심과 다른 풍경 속에 걷고 있으니 문득 하루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사려니숲(붉은 오름 입구)에서 물찻오름 입구까지 왕복하면 두시간 반에서 세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붉은 오름 입구로 되돌아와서 다시 한 번 삼나무 숲을 눈에 담습니다. 눈 덮인 겨울이나 노을 질 때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았어요.
다음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잔뜩 긴장하며 숲길을 걸었더니 온 몸이 뻐근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먹구름 가득했던 하늘이 참았던 빗줄기를 쏟아붓네요. 참 기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창 밖으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습니다.
셋째 날 기록: 아름다운 제주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같은 풍경과 비슷한 하루를 보내다가 낯선 곳에 와서 ‘오늘은 어디를 가지?’, ‘무엇을 할까?’ 평소와 다른 신나는 고민을 하며, 삶에 새로움을 불어넣습니다. 저는 지금 제주 동쪽 끝 언저리에 있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정신없이 새 숙소를 찾아 들어와 이곳 풍경을 볼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은 거짓말처럼 맑게 갠 하늘과 무지개가 반겨주네요.
① 아침,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풍경
제주 동쪽은 차를 타고 곧장 배로 들어가 우도에 간 적 밖에 없어서 이곳은 사실상 처음 와 보는 곳이나 다름없었어요. 주변 풍경은 어떨지, 뭐가 있을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어 설레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습니다. 기온은 그리 높지 않았는데 습식사우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푹푹 찝니다. 9월 말, 제주도에서 가을을 느끼기엔 아직 이른가 봅니다. 높은 건물들이 거의 없어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보니 제 마음도 뻥 뚫리는 듯했어요. 사진으로만 보던 성산일출봉은 실제로 보니 훨씬 더 거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광치기 해변을 잠시 거닐다 지나가는 버스에 즉흥적으로 올라탔습니다.
② 도로 옆 푸른 초원, 마방목지 [제주마(제주 조랑말): 천연기념물 제347호]
버스는 이차선의 좁은 도로를 달렸습니다. 오른쪽으로 범상치 않은 언덕들이 보였고 저건 분명 ‘오름’일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제주에서만 할 수 있는 생각이지요. 지도 앱을 켜 보니 예상대로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이었어요. 두 곳 모두 가고 싶었던 장소들이라 잠시 내릴까 고민했지만, 차들이 쌩쌩 달리며 나무가 우거진 어두운 도로에 차마 내릴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분명 둘째 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흐린 날씨 때문일까요? 용기가 절반쯤 줄어든 것 같습니다.
목적지 없이 창 밖을 보며 계속해서 타고 가다가 ‘마방목지’를 지나는 순간 급히 하차 벨을 누르고 내렸습니다. 푸른 초원에서 평화롭게 노니는 말들을 향해 홀린 듯 다가갔어요. 이곳에서 처음 본 제주마는 자그마하고 복실복실 윤기나는 털을 가진 귀여운 말들이었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람처럼 말들의 성격이 보이는 듯해서 웃음이 났습니다. 평범하게 풀을 뜯고 있는 대부분의 말들 사이로 촐랑촐랑 뛰어다니며 싸우듯 장난치는 말들이 시선을 끕니다. 자고 있는지 혼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말도 있었고, 이로 서로의 등을 긁어주는 말들도 보입니다. 갑자기 어떤 신호에 따라 우르르 달려서 이동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③ 두번째 오름, 백약이 오름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하는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으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정류장에서 내리자 마자 곧장 오를 수 있는 백약이오름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고 하여 백약이오름[百藥岳]이라 불립니다. 곧 비가 올 것만 같아서 서둘러 올라갔습니다. 흐린 날 풍경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맑은 날엔 또 얼마나 멋진 풍경을 보여줄까요? 정상에 오르면 주변에 수많은 오름들이 보이는데 자라난 나무에 따라 여러 옷을 입은 듯한 모습이 다채로웠습니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1
안개가 짙게 내려앉더니 잠시 후 이 주변의 모든 곳이 뿌옇게 변했습니다. 오후만 되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가야 했지만, 어쩐지 뿌듯하고 기쁜 하루였습니다. 아침에 해변에서 산책도 하고 제주도 조랑말도 실컷 보았으며, 백약이 오름에도 올랐고, 궁금했던 고기국수도 맛보았습니다. 내일은 느긋하게 성산일출봉을 비롯한 제주 동쪽마을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이 넓은 제주도에서 여전히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다음을 위해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