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낡은 종교는 역사의 박물관에 걸어라!
 
 
 
카페 게시글
기독교라는 동굴에서 벗어나 세상과 소통하라! 스크랩 `예`와 `아니요`로 이 시대를 분간하라
발람의 나귀 추천 0 조회 67 14.01.05 2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침묵과 자기 검열의 시대에 요구되는 종교인과 지성인의 책임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안타까운 일의 하나는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분간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두고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의식적으로 눈감아 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언어생활로도 쉽게 나타납니다. '예'와 '아니요'를 제대로 말하지 않고 '인 것 같다'라는 말로 현상을 얼버무립니다. 이 말은 자기 판단을 유보하는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다', '아니다'를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음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질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로도 보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런 점과 관련해서 몇 가지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37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의 번역식으로 말하면 '예'를 '예'라 하고, '아니요'는 '아니요'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씀이 야고보서(5:12)에도 있습니다.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피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4~5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의 추이는 제대로 보고 읽을 줄 아는데, 인간 사회의 인문 사회적 현상은 분간하지 않으려 하느냐, 인간 사회의 동태와 추이에 대해서는 옳고 그른 잣대를 대어 왜 판단하지 않으려고 하느냐는 말씀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날씨는 분간하면서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냐"

누가복음의 그 말씀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도 비슷하게 보입니다. "너희가 날짜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합니다. 여기서도 천기나 자연현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움직임 즉 인간 사회의 현상과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언급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는 말씀이나, 마태복음에서 언급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는 말씀은 같은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위 본문들은 자기 시대를 정확하게 통찰하고 판단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 식민 치하의 유대에서 행해진 말씀이라는 점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로마 치하의 엄혹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대의 식민지적 현실에 대해서 냉철한 통찰력을 가지라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이것은 반대로 자기 시대를 외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인양 자기 변명적인 태도를 질책?심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 시대의 복잡하고 위험한 상황 때문에 자기 시대에 대한 통찰과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역사의식을 분명히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나아가 자기 시대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으로 확대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사회 현실에 관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해묵은 논쟁도 더 이상 쟁점이 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해묵은 논쟁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했고, 시대와 역사 앞에서 행동하지 않는 지성의 나약함을 변명하거나 합리화해 왔습니까. 이 말씀은, 용기가 없어 사회문제 발언을 외면해 왔던 우리들의 나약한 자세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음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시대 분간 아닌 침묵과 자기 검열하는 시대

오늘 제 말씀은, 누가복음의 "시대를 분간하라"는 말씀이나 마태복음의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말씀을, 마태복음 5장 37절의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라는 이 말씀과 연관시켜 살펴보자는 데에 있습니다.

이 시대의 놀랄 만한 병리 현상의 하나는,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것을 꺼려하거나,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종북 논쟁으로 확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지성인들조차 자기 검열을 강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세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자기 검열을 강화시켜 선악 간에 판단을 유보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말자는 식으로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 단적인 예가 지난번 현 교육부 장관의 인사 청문회에서 보였습니다. 그 뒤 입장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가 장관 내정자로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5·16 등 과거사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예, 아니요를 분명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의원이 "5·16을 군사 정변으로 보느냐, 혁명으로 보느냐"고 묻자, 장관 후보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답을 드리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장관 후보자로서 5.16쿠테타에 대해서 '예' '아니요'를 분명히 하지 못했습니다. 야당 의원들의 질책과 추궁이 잇따르자 그는 "그 내용에 대해 제 생각이 왜 없겠는가. 헌법 정신이나 민주주의 가치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고만 밝혔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으로 전통이 내려온 김영삼 정권이 이미 5·16을 군사 정변으로 정의했고, 그에 따라 국사 교과서에서까지 명기한 사실을, 그 교과서로 후진 양성의 책임을 진 교육수장 후보자는 시인할 것을 제대로 시인하지 않고, 윗선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와 '아니요'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려는 분위기이고 보니, 더 많은 이상한 현상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얼버무리고 시류와 이해관계에 따른 증언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찌라시' 언론들이 난무하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 그런 언론들은 대중의 판단을 흐리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된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난무하고 있는 종북 논쟁도 어쩌면 그런 류의 하나일 것입니다. 김영삼 정권 때부터 정부의 합법적인 허가를 받아 북한을 도와 온 그리스도교 단체의 책임자가 종북으로 몰리는 이런 현상은 종북 논쟁이 무분별하게 확대 재생산된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확대 재생산된 종북 현상은 허상에 가깝습니다.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판단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보면서 구약성경 열왕기상 22장에 보이는 미가야 선지자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합 왕 앞에 선 400명의 선지자들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한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미가야는 그들과 대척점에 섰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을 꼬드겨 그 전에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려고 했습니다.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제의합니다. 이때 아합 왕의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전국의 선지자 400명은 이구동성 여출일구로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승리를 취하라고 예언합니다. 일종의 관제 여론이요, 사이비 언론들입니다. 그중 시드기야라는 자의 아첨은 오늘날 관제 여론을 조성, 주도하는 최첨단 사이비 언론을 보는 듯합니다. 아니 오늘날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북을 외치면서 종북 논쟁을 확대 재생산시키기에 앞장서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억지로 끌려 나오다시피한 미가야 선지는, 전과 같이, 아합 왕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예언자적 지성은, 400명의 가짜 선지자들과 같은 승리의 열창이 아니라 아합 왕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의 유리방황을 내다봤습니다. 미가야는 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거짓된 영을 퍼뜨려 소위 선지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예언은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 보낸 거짓 영들에 의해서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과 정책이 '선지자'라는 이름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얼마든지 지지받을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 줍니다. 400대 1의 미가야 선지의 고군분투는 이 시대의 사이비 언론 앞에 정론이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현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성장군들이 국가정보원, 국방부, 대통령 경호를 맡고, 공안 검사 출신들이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비서실, 국무총리와 법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치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보이는 Big Brothers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유신의 포악한 그늘이 어른거리는 듯합니다. 최근에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의 상영과 관련하여 일어난 일련의 방해 공작은, 그것이 '침묵'과 진정한 '소통'에 관해 다룬 영화인데도, 우리 사회가 진실 문제에 접근하거나 소통하지 못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소통이란 것이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면, 강요받는 비겁한 침묵은 소통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찌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느냐, 왜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나 지성인들은 옳고 그른 것을 밝혀야 할 시대적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시비를 가리고 곡직을 밝혀야 할 시점에 지성인들은 침묵의 행렬에 의도적으로 자기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왜곡 못지않는 병리 현상입니다. 지성인들의 벙어리 현상은 이 땅에 귀머거리 대중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예'를 '예'라 하지 못하고, '아니요'를 '아니요'라고 말 못 하는 현상은 급기야 우리 사회의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습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쳤던 함석헌이 1950년대 이승만의 시대를 향해 외쳤던 것이 바로 지금의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지난 대선에서 개표에 부정 의혹이 있다는 것이 일부 전문가들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습니다. 전산 개표기를 사용함으로써 그걸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선거법을 어겼습니다. 이것은 선관위가 주도하고 여야가 동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여야가 동의했더라도 선거법을 어긴 것은 사실입니다. 또 개표의 주 수단이 되어야 할 '수개표'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개표 상황표에 기록된 시간대별 개표 상황이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백서에 의하면 전국 90% 이상이 수개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법을 어긴 처사로서 선거무효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금년 1월 4일에 제기된 소송단의 소송을 선거법상 재판 개시 의무 기일인 6개월의 시점이 지났는데도 재판 기일조차 잡지 않고 있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개표 상황표에 의해 수개표를 하지 않은 지역 선관위들을 골라 고발해도 검찰은 불기소 처분을 내리기에 급급합니다. 정치권과 언론은 침묵의 대연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로 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시대를 분간하라"고 하십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예, 아니요를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켜야 합니까.



옳고 그름 밝혀야 할 종교인과 지성인의 책임

옳은 것을 옳다고 적극적으로 소리 내지 못하는 세태가 되고 보니, 옳다는 확신은 점차 사라지고 의도적인 회의론자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옳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힘을 받지 못하고 동력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옳다는 사람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고 옳다는 신념하에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할 사람들이 힘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반대로 그른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아니요'라는 판단에 의해 거부되어야 하고 청산되어야 할 사회적 병리 현상들이 종식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벌써 몇 달간 계속되고 있는 국정원 사태는 이런 시대적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저지른 불법적 대선 개입이 검찰에 의해 밝혀져 가는 것과 동시에 이를 규탄하고 그 개혁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이 올해 6월 5일 시민사회단체들의 선언을 시작으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나서게 되었고, 심지어 고등학생들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국정원 청사 앞을 대담하게 시위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 무렵부터 시작된 촛불도 아직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집단적인 시국 성명 발표만 해도 벌써 150여회가 넘었습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트의 개인 성명을 합치면 그 수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과 정부 여당이 보이는 행태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정도를 지나서,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이 되었습니다.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입니다. 처벌을 받아야 할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들고 무고한 사람에게 대고 설치는 격입니다.

국정원은 자신들의 선거 개입을 호도하려고 다른 엉뚱한 짓거리로 국민의 초점을 흐리는가 하면, 국정조사로 그 실상을 파헤쳐 보라는 국민의 엄숙한 명령에는 갖은 술책으로 회피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또 그걸 덮으려고 NLL 문제를 끄집어 내어 자파 진영의 편익을 위해 국익마저 내팽개치는 꼴도 보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듯, 검찰총장을 파렴치한으로 몰아 찍어 내더니, 이제는 수사팀장마저 경질해 버렸습니다. 이 즈음해서는 국방부에서도 선거부정 의혹이 터졌습니다. '도둑의 집에도 법이 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현상은 '도둑질을 하고도 사모(紗帽) 바람에 거들먹거린다'는 조롱의 소리가 어울릴 듯한 형편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대를 분간하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최근에 모 언론은 MD(미사일방어) 체제에 한국이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 언론은 사설을 통해 "아무리 중국이 반발하더라도 우리의 안전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도입하는 게 당연하다"며 미국 요구대로 MD에 가입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이 언론은 중국이 한국의 미국 MD 가입을 강력 반대할 것이라고 하면서, MD 가입은 북한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국방장관은 MD 가입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지만, 이런 주장을 들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시대를 분간하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말씀이 어디까지 확대해 갈 것인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 다시 전시 작전권 문제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게 되면, 주한 미군이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곧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과 관련시킬 것이고, 그걸 빌미로 한반도에 상륙할 명분도 얻게 될 것입니다. 한국이 지금과 같이 전시 작전권 환수를 계속 미루게 되면, MD 문제에서나 집단 자위권 문제에서 한국군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고 일본 군대의 한국 상륙은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예', '아니요'를 선택하라는 명령과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말씀이 우리에게 오불관언의 태도를 취하게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 중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한 것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 중립을 지킨다면서 아무런 의사 표시를 않고 보신에 급급한 세대를 향해서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개표 부정 의혹이나 국정원의 선거 개입 같은 불법 상황을 보고서도 거기에 대해 '예', '아니요'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 정도로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용기 없음의 자기 고백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님의 엄숙한 명령에 대한 자기 속임수입니다.

그릇된 것을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 못지않게 옳은 것을 보고 '예'라고 말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때 그릇된 것을 향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됨 직합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예'로 화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예'로 말하라는 말씀은 진리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확신하느냐, 그러면 그 진리라는 '옳은 것'에 대해서 '옳다'고 하고, '예'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강력한 '예'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릇된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를 강력하게 외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강력한 확신인 '예'가 없다면, 어떻게 '그릇된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아니요'를 외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예, 아니요를 구분해야 할 것이 많은 데도 그렇지 않은 듯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모 출판사 국사 교과서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 교과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채용한 역사관의 문제에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은 국사학계의 소수의 견해입니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보편적(다수적)인 견해를 실어야 할 교과서에 그대로 올려놓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교육이라는 견지에서 보더라도 식민지 시대의 일제의 만행은 숨기고 선전성이 농후한 업적을 소개하는 것이 과연 교과서로서의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도 없지 않습니다. 거기에다 이 교과서는 사실 내용을 기술하는 데서도 많은 오류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치명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와 '아니요'의 잣대를 대면 의당 합격 취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방면 전문가들은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를 봅시다. 대형 교회의 세습 등 교회의 사유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교회를 사유화하는 것은 결코 '예'라고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회자들은 이같은 '아니요'의 현상에 대해 '아니요'라는 분명한 입장을 개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9월 몇몇 장로회 총회에서 기습적으로 '아니요'를 의결하기는 했습니다만, 대부분의 교단들은 의식하지도 않고, 총회의 안건으로 등장시켰는데도 그걸 부결시켜 버렸습니다. 이 또한 한국교회 안에 스며든, 시대를 분간하는 능력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또한 '예'와 '아니요'를 분명하게 하지 못한 사례라고 봅니다.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빠지지 않고 드러난 것이 금권 선거였습니다. 올해도 몇몇 교단에서 금권 선거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00만 원의 벌금형만 선고되어도 의원직을 상실하는 판인데 한국교회는 교단장 선거에서 금전이 난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아니요'의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 대의원들의 의식 수준이 비그리스도인의 수준을 훨씬 밑돌고 있고, 교단 선거의 수준도 세속 선거의 지난 세기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이게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의 자화상이라면, 시대를 분간하는 능력은커녕 시대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비판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와 '아니요'의 가치관은 이렇게 교회 밖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최근 일어난 한 사건은 '예'와 '아니요'를 크리스천 지성인 사회에서 먼저 확립해야 할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목회자의 논문 표절 사건입니다. 당자는 계속 버티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전체를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 못지않게 우려되는 것은 이 표절 사건을 보고 있는 일부 목회자와 신학 교수들의 태도입니다. 표절을 감싸고 변호한다는 것입니다. 신학 교수들이 그것을 변호하고 감싸는 것은 지성의 마비를 의미합니다.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와 '아니요' 말 못 하는 이유

그런데 '예'와 '아니요'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F. 베이컨은 진리의 인식을 방해하는 요건으로서 네 가지 선입적 유견(謬見)인 우상(이돌라)의 제거를 요구한 바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선입적 오류를 재래하고 있는 우상에는 종족의 우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하는 선입견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동굴의 우상을 들었습니다. 개개의 인간에 부수된 선입견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시장의 우상을 들었는데 이는 사회생활을 통하여 생겨나는 선입견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을 들었습니다. 이는 학파나 체계에 부수된 선입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족의 우상이든 동굴의 우상이든, 시장의 우상이든 극장의 우상이든, 이런 우상들 즉 선입견 때문이라는 것이 베이컨의 견해였습니다.

베이컨이 시장의 우상이나 극장의 우상에서 지적한 바는 한마디로 진영 논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의하면, '강 이편'과 '강 저편'이라는 진영 논리로 둔갑합니다. '강 이편'에 있기 때문에 '강 저편'을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강 이편과 저편은 바로 혈연이나 지연, 학연, 또 이해관계에 의해 편 가름 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이해관계라는 진영입니다. 진영 논리에 서게 되면 자기 앞에 옳은 것이 보여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고,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없다면 우리가 진영 논리에 서 있지 않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경북 포항이 갖는 지역적 진영 논리에 매몰된 적이 없습니까.

진리에 대한 강한 신념은, 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분간하게 만들고,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에 의해서 행동하게 합니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 운동에 몸바친 백범 김구는 해방 후 그의 통일 평화 운동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비록 구절양장(九折羊腸)일지라도 그 길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 하는 것이오, 우리가 망명 생활을 30여 년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시대를 분간하고 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말씀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예'와 '아니요'를 제대로 말하면서 자기 신념을 행동화한 적이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와 '아니요'를 분명하게 하면서 '예'에 대해서 생명을 걸어 본 적이 있고 '아니요'에 대해 결사 항전한 적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 투쟁 때와 1960~70년대의 인권 민주화 운동 때입니다.

신사참배 반대 투쟁 때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는 확신 위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투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해 '예', '아니요'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참배에 적극적 혹은 암묵적으로 참배했습니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아니요를 외치며 옥중 투쟁과 순교를 불사했습니다.

특히 군사정권 하에서는 소수의 크리스천만이 그들의 반인권 반민주에 침묵하지 않고 '아니요'를 외치며 저항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는 오늘의 인권 민주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역사 앞에서 강하게 '노'를 부르짖었던 한국 교회의 전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니요'의 결단으로 주어진 인권과 민주화의 열매를 누리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아니요'를 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보수화된 체질을 더 드러내면서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특히 대형 교회를 중심한 근본주의적 보수성은 한국교회의 '아니요'의 전통을 갉아먹으면서, 하나님나라의 진전마저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28절에는,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시대의 상황을 보지도 못하고 이 시대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며, 또 과거 암울한 시대와 폭력적이고 사악한 정권의 오만 횡포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준엄하게 따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엘리야의 외침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우리 신앙인들은 어쩌면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상대로 갈멜산에 나아간 엘리야와 같은 심정으로 오늘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진리와 정도를 생각하지 않고,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면서 어느 것이 이익이 되는가, 어느 것이 현실적인가 주판알을 굴리는 백성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고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쪽저쪽 눈치를 봐야 하는 백성은 말 한마디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그때도 물질적 풍요와 이익을 약속해 주는 바알 신과 세속적 향락을 약속해 주는 아세라 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가치로 생각하고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울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약아빠진 세상 사람들의 진영 논리를 격파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세울 책임을 우리 크리스천 지성인들은 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날마다 부활하여 나를 쳐서 복종하는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이 거대한 권력과 사악한 세속을 두고 세대를 분간하지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도,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예와 아니요, 옳은 것을 옳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예'와 '아니요'는 그 나름대로 역사를 발전, 변화시킨 두 강력한 동력입니다. '옳은 것'을 확신하고 '예'라고 동의함으로써 강력한 힘을 축적하여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그릇된 것'에 대한 결연한 '아니요'는 역사에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습니다. 세계사에 나타나는 변화와 개혁, 각종 형태의 혁명은 바로 이 '아니요'를 동력화한 결과입니다.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세계사적 혁명이나 우리나라의 4월혁명, 6월혁명은 이 '아니요'의 산물입니다. 때로는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이 '예'로 표현될 수 있다면, 불의한 현상에 대한 변화와 개혁은 '아니요'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예'와 '아니요'는 역사를 발전, 변화시키는 두 강력한 동력입니다. '예'와 '아니요'는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이 서로 보완, 긴장 관계를 이룩해야만 역사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여와 야가 있듯이, 어떤 공동체에도 견해를 달리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때로는 옳은 것과 그릇된 것으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예'와 '아니요'’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관계가 적절히 긴장 관계를 유지할 때에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있습니다. 독재가 나타나거나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한쪽이 무시되거나 적절한 긴장 관계가 지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분간하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는 말씀은 거시적으로는 세계와 한국의 현실을, 미시적으로는 우리 공동체의 현실을 조명하는 데에도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은 '아니요'가 빠져 버린, 그리하여 건강한 긴장 관계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프레임을 깨뜨려야 할 크리스천 지성인들의 사명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시대를 분간하는 일은 조용히 침묵함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와 '아니요'는 시대를 분별하는 지성을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판단은 하지만 그걸 내색하거나 표현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금이요, 말은 은이다"라는 금언으로써 침묵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 '예' '아니요'를 표현한 사람들을 향해 무모하다거나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예'와 '아니요'를 외치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시대를 판단하는 그 '예'와 '아니요' 때문에 때로는 핍박을 당합니다. 유신 시대나 신군부하에서 교수들을 포함한 많은 지성인들이 고난을 당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독교 지성인들은 이 용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열두 사람의 정탐꾼 속에서도 유독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나머지 열 사람의 정세 판단에 반대하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 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베틀 채 같은 무기를 가진 가나안 사람들 앞에 자기들은 메뚜기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이스라엘 민족의 비전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전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누가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용기와 확신이 오늘 이 세대를 분별해야 하는 우리 지성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물음을 던지면서 제 말씀을 끝내고자 합니다.

열흘 남짓 있으면 종교개혁 496주년을 맞습니다. 루터의 'Nein(아니요)', 이 한마디가 교회사는 물론 세계사를 변혁하는 위대한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 시대를 향한 우리의 '예'와 '아니요'도 바로 그런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날마다 우리의 영성을 새롭게 했으면 합니다.



이만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 글은 필자가 10월 23일 한동대학교 교수 채플에서 한 설교의 원문이다. <복음과상황> 12월 호에 요약문이 실렸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