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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청 잃은 새가 터뜨린, 저 아득한 속
---유영삼의 시
오홍진(문학평론가)
유영삼은 ‘시인의 말’에서 “입 속에 혀를 감추고/ 혀 속에 언어를 묻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혀는 드러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혀 속에 시인이 언어를 묻은 까닭은 무엇일까? 입속에 혀가 있고, 혀 속에 언어가 있다. 언어는 입을 통해 나오지만, 그 전에 혀를 거쳐야 한다. 감추어진 혀 속에 감추어진 언어가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이 언어로 시인은 시를 쓴다. 감추어진 혀와 언어는 일상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벚꽃」에서 시인은 봄소식을 전하는 벚꽃을 “목청 잃은 새”로 표현한다. 나무 위에 하얗게 앉은 새 떼는 “동그란 눈 커지는 눈 핏발 서는 눈”으로 시인을 내려다본다. 새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사람들 그의 목에 청을 불어넣으려 선창을” 한다. 그래도 새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입을 오물대지만 “저 아득한 속울음”은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않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왔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속울음이 흘러넘치는데, 목청이 도무지 터지지 않는다. “끝내 한 음도 내뱉지 못하고 눈으로 전한다,”라고 시인은 쓴다. 목청껏 울지 못하는 새의 아픔을 시인이 어떻게 모를까?
화사한 봄을 알리는 벚꽃은 바람이 불면 이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벚꽃은 더 오랜 시간을 나무에 매달려 마음껏 봄을 즐기고 싶을 것이다. 새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듯이. 하지만 아무리 속울음을 울어도 벚꽃은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목청도 없이 비명으로 봄소식을 전할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벚꽃은 덧없이 떨어질 터이고, 그만큼 봄은 더욱더 무르익을 터이다.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도 쉽사리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벚꽃의 “저 아득한 속울음”을 낳는다. 유영삼 시가 뻗어 나오는 근원이라고 봐도 좋겠다.
「삼매경」을 참조하면, 벚꽃이 그 속에 머금은 아득한 속울음은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져 스테인리스 대야에 시간이 고이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 한없는 고요가 흐르는 세계에서 시인은 대야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책 속 활자를 적시고 선운사로 흐르고/ 선운사 동백꽃을 떨어뜨리”는 상상에 빠져든다. 그곳에 “나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물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존재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똑, 찰, 똑 찰, 끈쩍한 파음”만이 시간이 흐르는 공간을 채운다.
말을 내려놓기 위해 산을 오른다
허리를 굽히고 혀를 꺼내 오른손에 쥐고 오를 때
비로소 들린다, 말
계곡물은 작은 돌에서 큰 돌 큰 돌에서 나무
나무에서 구름 위로 음계를 그리고
새들은 그 음계의 중간쯤에 있다
바위산은 가장 무겁고 두꺼운 시간의 책장
참나무 단풍나무 서로 다른 페이지로 흔들린다
단풍잎은 바람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뜨겁다고 느끼고 간지럽다고 말한다
발자국 소리에도 까르르 웃는 풀꽃의 이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까르르 풀꽃
말로는 형용할 수 없어
말을 내려놓는다
내려놓아야 비로소 들리는 저, 말
듣기 위해 내려놓는다, 말
- 「비로소, 들리다」
시인은 혀를 꺼내 오른손에 쥐고 산에 오른다. 입속에 감춘 혀를 꺼냈다는 건 혀 속에 묻은 언어를 쓰겠다는 말이 된다. “말을 내려놓기 위해” 오르는 산길에서 시인은 “비로소 들린다, 말”이라고 선언한다. 의미에 매이면 말에 묶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의미를 내려놓음으로써 말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려 한다. 의미에서 벗어난 말은 리듬을 타며 사물과 사물 사이로 뻗어나간다. 저마다의 사물은 저마다의 리듬으로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바위산이 “가장 무겁고 두꺼운 시간의 책장”을 형성하면, 풀잎들은 “발자국 소리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어/ 말을 내려놓는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따라 시인은 사물을 언어의 울타리에 억지로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 말에 서린 의미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사물이 하염없이 내뱉는 말소리가 들린다. 인간은 늘 눈에 보이는 사물에 의미를 붙이려고 한다. 그래야 사물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을 내려놓는 일은 그러므로 사물을 향한 지배 욕망을 내려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사물의 소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말을 풀어놓는다.
「산」에 드러나는 대로, 의미에 묶이지 않은 사물은 “나를 업고” 산에 오른다. 오르막길에서는 소나무가 팔을 뻗어 주고, 가쁜 숨을 고를 시점이 오면 바위가 알아서 무릎을 내준다. 암벽이 길을 막아서면 “산이 온 등을 내밀어 나를 업고 올랐다”. 산봉우리가 발아래로 아득한 세상을 펼쳐 보인다. 시인은 “그 들 가운데 점 하나 아니 먼지, 먼지였다”라는 시구로 자기 모습을 표현한다. 거대한 우주에 견주면 지구 또한 먼지에 불과하다. 그 지구에 사는 생명은 그럼 먼지보다 더 작은 존재가 아닌가.
자신을 먼지로 생각하는 사람은 겸손함이 몸에 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따로 중심을 설정하지 않는다. 중심을 세우는 순간 변방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때, 우리가 심었지」에서 시인은 “우리가 품었던 어머니의 둥근 배와 무덤 사이”에 놓인 “직선의 길”에 주목한다. “생사는 그 길 양끝을 움켜쥔 주먹”이라는 시구에 나타나는바,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은 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삶과 죽음은 그만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 시에서 시인은 “무덤 둘레에선 허공을 가르던 새의 울음도/ 구슬을 굴릴 줄” 안다고 이야기한다.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는 적당한 자리에서 휠 줄 알고, 숲속에 핀 초롱꽃은 둥근 등을 내걸 줄도 안다고 말한다. 싸움은 칼끝과 칼끝과 맞닿을 때 일어난다. 자기를 한없이 낮추면 서로를 향해 칼끝을 들이댈 까닭이 없다. 시인은 삶과 죽음을 잇는 직선의 길을 갈지자(之)로 걸으려고 한다. 겸손한 사람은 늘 에두른 길을 찾는다. 천천히 길을 걸으며 주변 사물을 돌아본다. 직선으로 뻗은 길일수록 더욱더 사물과 더불어 갈 길을 찾아야 하는 법이다.
목울대가 없다, 비雨
있다, 비悲
사물들이 제 머리를 들이대어
나름의 소리를 빚어내는 것이다
길은 온몸으로 누워 도 도, 도로 눕고
머리 꼿꼿이 세워 파 파, 파래진 풀잎
양철지붕은 두 팔 벌려 라 라 라, 날아가는 연습을 한다
나뭇잎 돌림노래처럼 박수를 치는 동안, 비
제 몸 촘촘히 세워 주름을 잡는다
허공이 접혔다 펴졌다 거대한 아코디언이 된다
아니 스틱이 된다, 물 스틱
맞는 자와 때리는 자만이 공존한다
저 물주름 새새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
자식을 잃고도 울지 않았던
때는 이때라고 빗줄기 세차게 콧등을 후려친다
내장 깊이 꾹꾹 눌러 묻어두었던 슬픔
목울대를 친다, 아버지 목울대가 운다
이제야 완성된 당신의 울음
울음이 젖는다
- 「비는 소리를 갖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는 목울대가 없지만, 사람의 마음에서 들끓어 오르는 “비悲”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사물들이 제 머리를 들이댄 곳에서 피어나는 빗소리를 다양한 이미지로 표현한다. 우선 “길은 온몸으로 누워 도 도, 도로 눕”는다.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비를 맞는 풀잎은 “파, 파 파래”지고, 양철지붕은 두 팔을 벌리고 “라 라 라, 날아가는 연습을” 하듯 비를 맞는다. 돌림노래를 부르듯이 나뭇잎이 박수를 치면, 몸에 촘촘히 주름을 세운 비는 거대한 아코디언이 되고, 스틱이 된다.
비는 다른 사물이 자기를 표현할 자리를 기꺼이 마련해 준다. 비가 내리는 곳에서는 “맞는 자와 때리는 자만이 공존한다”. 맞는 자와 때리는 자의 대립을 비는 용납하지 않는다. 비를 머금은 사물은 길에 눕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연습을 하기도 하며, 온몸을 흔들며 돌림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비는 땅과 만나면 땅으로 스며들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로 스며든다. 자기를 낮추어 새로운 생명을 일굴 줄도 안다. 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는 비를 떠올려 보라. 마른 땅을 때리는 일이 곧 생명을 환대하는 길이 되는 묘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가?
소리를 갖지 않은 비이기에 자식을 잃고도 울지 않았던 아버지조차 빗속에서는 서럽게 울 수 있다. 깊은 슬픔에 빠진 아버지의 콧등을 세찬 비가 거세게 후려친다. “내장 깊이 꾹꾹 눌러 묻어두었던 슬픔”을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울음으로 터뜨린다. 시인은 “이제야 완성된 당신의 울음”이라는 시구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비는 스며들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울음을 받아줄 사물은 비 말고는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지극한 슬픔이 아닌가. 목울대가 없는 “비雨”는 이렇게 아버지의 목울대를 통해 “비悲”로 거듭나게 되는 셈이다.
유영삼은 사물에 깃들어 있는 감정들을 다양한 이미지로 드러내는 시적 재능이 뛰어나다. 이를테면, 「바람의 색」에서 시인은 가까이 가면 “웃는 눈”이 되고, 조금 물러서면 “우는 입”이 되는 바람을 노래한다. 바람이 웃으면 햇살도 따라 웃고 “어둡고 습한 내 마음도 따라 웃”는다. 벽화 속 여인도, 산벚꽃나무도, 목련도, 진달래도 따라 웃는다. 바람이 울면 따라서 울어야 하기에 사물들은 바람이 웃을 때 어떻게든 더 많이 웃으려고 한다. 원 없이 웃은 사물만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날을 간다
제 등걸에 울림판을 두들겨 칼날을 세운다
바람의 치맛자락이 갈기갈기 베인다
베인 바람의 살점들 양철지붕을 두드린다
제재소 톱날을 울린다
퍼런 톱날에 허공의 몸통이 잘리고
톱밥처럼 소리가 쌓였다 흩어진다
-「매미 소리」 부분
울컥, 솟는다
순간 멎는다 피
주먹을 울리고
망막에 사람을 키우고
울음 목젖으로 짓누르면 저리될 수 있구나
저렇듯, 자신을 달래던 이의 피는 희디 흰가
할머니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고
내가 그럴 것 같은
죽은 여인들의 풀,
여인들만이 그들의 몸에 든 독을 삭힐 수 있다
저 먹먹해진 끈끈한 피를 걸러낼 수 있다
- 「고들빼기」 부분
산후풍의 몸으로 산을 오른다
산야는 온통 산실, 산모들 저마다
자기 성을 가진 아기를 출산한다
뜨거운 숨소리 들으러 간다
젖내 깊게 밴 살내 그리워 간다
아니 그때의 통증 느끼러 간다
군자산 조령산⁕ 돌고 돌아
봄을 훔쳐 업고 안고 내려온다
저 봄 생들 산후풍을 다스린다
- 「봄을 훔치다」 부분
「매미 소리」에서 시인은 일주일을 울기 위해 칠 년의 시간을 땅속에서 견디는 매미의 삶에 주목한다. 칠 년 동안 매미는 말 그대로 “날을 간다”. 울림판을 두들겨 칼날을 세우지 않으면 매미는 한여름의 열기를 소리로 품어낼 수가 없다. 한없이 날카로운 매미 소리에 “베인 바람의 살점들 양철지붕을 두드린다”. 매미는 온몸으로 노래를 부른다. 몸 전체가 울림판이 되어 온 세계를 울리는 매미 소리를 가만히 떠올려 보라. 칠 년의 기다림이 있었기에 매미는 마음껏 울어 젖힐 수 있다. 한이 깊을수록 소리 또한 더욱더 깊은 맛을 드러낸다고나 할까?
칠 년 동안 묵힌 한을 매미는 한여름을 울리는 소리로 원 없이 풀어냈다. 「고들빼기」에도 이런 매미에 버금가는 한을 품은 사물이 나온다. 시인은 고들빼기를 “죽은 여인들의 풀”이라고 부른다. 오로지 제 욕망을 짓누른 “여인들만이 그들의 몸에 든 독을 삭힐 수 있”다. 가슴에 맺힌 한이 얼마나 깊기에 스스로 몸에 든 독을 삭혀 “저 먹먹해진 피를 걸러낼 수 있”는 것일까? 할머니가 먹은 풀을 어머니가 먹었고, 그 풀을 이제는 시인이 먹고 있다. 가부장제를 사는 여인들의 한을 시인은 고들빼기에 비유하여 실감 나게 표현하는 것이다.
매미의 울음소리나, 고들빼기에 스민 독은 「봄을 훔치다」에 이르면 산후풍을 겪는 “저 봄 생들”로 이어진다. 봄이 온 산야는 지금 “자기 성을 가진 아기를 출산”하느라 바쁘다. 시인은 생명을 낳는 어미들의 뜨거운 숨소리를 들으러 산을 오른다. 산 곳곳에 풍기는 젖내와 살내를 온몸으로 느끼며 시인은 오랜만에 “그때의 통증” 속으로 들어간다. 산후풍을 기꺼이 감수한 어미가 있기에 저 생들은 서슴없이 꽃을 피웠다. 뭇 생명이 피어나는 봄이 오면 시인은 절로 온몸이 달아오른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어미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대지가 걸퍽지게 몸을 푼다
쫓기듯 쫓겨오는 바람을 끌어안고
삼라만상에 뼈마디를 세운다
자궁을 비집고 나온 푸른 눈을 가진
어린것들의 울음소리, 행인의 발을 잡는다
엎드려 맡아보는 이 비릿한 젖내음
혼탁한 내 피를 거른다
언덕을 받치고 허공을 괴고 있던 초목들
세상 밖으로 색색의 희망을 달아
금줄을 내건다
또 다른 산도를 빠져 나오려는
시심詩心 위로 동백꽃이 길을 밝히고 있다
바람이 저 혼자 동백꽃에 몸 부비며
온 산을 흔들고 있다
아직 뜨거운 눈맞춤도 없었는데
따닥, 바람이 동백의 따귀를 쳐
붉은 눈알을 빠뜨린다
툭,
- 「선운사의 봄 2」
유영삼의 시심(詩心)은 바람을 끌어안고 걸판지게 몸을 푸는 대지의 마음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따뜻한 바람을 머금은 대지가 삼라만상에 뼈마디를 세우면 “자궁을 비집고 나온 푸른 눈을 가진/ 어린것들”이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것들이 풍기는 비릿한 젖내가 사방으로 퍼진다. 시인은 “혼탁한 내 피를 거른다”라는 시구로 새 생명과 마주한 어미의 마음을 표현한다. 어미는 뼈마디가 뒤틀리는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아이를 낳는다. 이 힘으로 초목들은 “세상 밖으로 색색의 희망을 달아/ 금줄을 내건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고통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명을 낳는 어미도 고통스럽고, 생명으로 거듭나려는 아이도 고통스럽다. 시인은 산도(産道)를 빠져나오는 아이의 절실한 마음을 시심(詩心)으로 표현한다. 엄마와 아이는 이미 한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이는 산도를 빠져나오기 위해 힘을 주고, 엄마는 그 아이의 힘을 북돋기 위해 이를 악물고 힘을 준다. 산방(産房)은 엄마가 내지르는 신음으로 가득 찬다. 시를 쓰는 과정에 서린 고통의 강도를 새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선운사의 봄’이라는 제목에 드러나듯, 시인은 동백꽃으로 대변되는 선운사의 봄을 노래한다. 온몸으로 꽃을 피운 동백꽃을 바람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 온 산을 흔드는 바람이 동백꽃에 몸을 비빈다. 꽃이 핀 자리는 늘 꽃이 지는 자리를 마련해둔다. 꽃이 피는 게 자연이듯 꽃이 지는 일 또한 자연이라는 말이다. “아직 뜨거운 눈맞춤”이 있든 없든 동백꽃은 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온몸을 땅으로 떨어뜨린다. “툭,”이라는 음성상징어로 시인은 자연을 따르는 동백꽃의 모습을 표현한다. 자연은 생(生)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이 있는 곳에는 늘 사(死)가 따라붙는다.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에서 시인은 “이승은 저승의 집”이고 “저승은 이승의 집”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승이 없으면 저승이 있을 리 없다. 마찬가지로 저승이 없으면 이승이 있을 리 없다. 생명은 “최후의 순간을 코끝에 고”(「末」)하고 원점으로 돌아간다. 원점에는 “주검을 맞이하는 자와/ 죽음을 배웅하는 자가 함께 서 있다”(같은 시). 맞이하는 자와 배웅하는 자를 나누었지만, 원점에서 보면 둘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이치와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물에서 태어나 물 밖 허공에 떠돌다
한증막 같은 지옥을 건너 흙이 될 때까지,
점지된 발아점에 들다
- 「목욕탕」 부분
산 그림자에서 푸른 공기가 퍼질 때
하늘이 조금씩 찢어지더니 피를 흘린다
갑자기 조용해진 세상 저, 끝에서
훅, 어둠이 몰려온다
- 「어둠을 낳다, 노을」 부분
수직의 벽을 걷는다, 만 개의 발
발자국마다 실핏줄을 불어 넣는다
바람이 불자 천 개의 심장이 뛴다
집이 숨 쉰다
담쟁이넝쿨 뜨거운 심장이 뛴다
- 「숨」 부분
「목욕탕」에는 둥근 탕 속에 몸을 담근 채 배냇짓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양수에서 자라났으니 물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물 밖 허공을 떠돌다 보면 어김없이 물이 그립기 마련이다. 물은 곧 생명을 기르는 자양분이 아니던가. 시인은 “한증막 같은 지옥을 건너 흙이 될 때까지” 우리는 물 밖을 떠돌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물에서 태어나 물 밖을 떠돌다가 다시 물로 돌아가는 인생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점지된 발아점”이란 이런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 물 밖을 떠돌면서도 우리는 늘 물 안에서 꽃을 피우는 삶을 살려고 한다. 생명으로 태어난 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자연 사물마다 “점지된 발아점”이 있다. 「어둠을 낳다, 노을」을 보면, 찢어진 하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어둠을 불러낸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시 제목에 나타나는 대로, 어둠은 갑작스레 오지 않는다. 어둠 이전에 푸른 빛이 허공을 덮는다. 시인은 푸른 공기가 하늘을 조금씩 찢는 이미지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푸른 빛이 피를 머금으면 세상은 이내 조용해지고 그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피어난다. 빛이 빛으로만 남을 수 없듯, 어둠 또한 어둠으로만 남을 수는 없다. 빛은 어둠으로 가는 길 위에서 빛나고, 어둠은 빛으로 가는 길 위에서 비로소 세상을 덮는다.
빛과 어둠이 자연 속에서 벌이는 이 반복을 시인은 “천 개의 심장”을 지닌 담쟁이넝쿨이 “수직의 벽을 걷는” 이미지로 표현한다. 바람이 불면 담쟁이넝쿨 전체가 온전히 숨을 쉰다. 천 개의 심장이 한꺼번에 뛰는 것이니 담쟁이넝쿨은 얼마나 뜨거운 심장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만 개의 발로 수직의 벽을 오르는 힘은 무엇보다 뜨거운 심장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심장이 뛰지 않으면 어떤 생명도 숨을 쉴 수 없다. 숨은 생명이 살아 있다는 징표와 같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든 생명은 숨을 쉰다. 숨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빛과 어둠이 하나로 이어진다고 말하면 어떨까?
만삭의 몸을 안고 신음하고 있다
상수리나무 등걸에 업혀
삶을 즐기는 매미소리
까맣게 산을 들어올린다
산달이 차고 넘은 저
무덤의 배, 끝내
자궁 문을 열지 못한다
외로운 이의 머리칼을 끌어안고
혀를 묻은 산
숲 키워 죽은 자의 집을 가꾼다
산란을 위한 벌레들은 잎 뒤로
뒤로 가 수천 개의 길을 내고
나는 회임을 상상한다, 무덤의
여름 산, 저토록 뜨겁게 감싸 안으면
언젠가 멈춰선 시간을 깨치고 나오는
낯익은 사람을 만날까
- 「여름산」
만삭이 된 여름 산이 신음을 토한다. 여름 산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생명만이 신음을 내뱉는다. 만삭의 몸이므로 여름 산은 조만간에 숱한 생명을 낳을 것이다. 그것을 예언하기라도 하듯 상수리나무 등걸에 업힌 매미는 “까맣게 산을 들어올”리는 소리를 온몸으로 즐겁게 뿜어낸다. 산달이 넘은 것 같은데도 자궁 문은 쉬이 열리지 않는다. “혀를 묻은 산”은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다. 자연 순리를 어기고 함부로 자궁 문을 열 수는 없다. 침묵할 때는 침묵해야 하고,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여야 하는 게 자연 이치다. 침묵해야 할 때 움직이는 생명을 자연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돌보지 않는다.
스스로 자궁 문을 열 수 없는 산은 “숲 키워 죽은 자의 집을 가꾼다”라고 시인은 적는다. 죽은 자의 집이 곧 산 자들이 살아야 할 집이다. 산란한 벌레들이 잎 뒤로 수천의 길을 내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시인은 “무덤의 배”처럼 부풀어 오른 산을 보며 회임을 상상한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자기 앞에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는다. 태어날 때가 되었으니 태어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생명은 자연의 순리를 어길 수 없다. 여름 산이 지키는 순리를 여름 산에서 태어난 생명이 어떻게 지키지 않을 수 있을까?
여름 산은 만삭의 몸으로 뜨거운 햇볕을 견딘다. 뜨거운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지 못하면, 몸속 깊이 품은 생명은 갈 길을 잃어버린다. 회임을 상상하는 시인은 여름 산이 내는 신음을 뜨거운 마음으로 듣는다. 수천, 수만의 길을 품은 여름 산이다. 뭇 생명을 품은 여름 산의 자궁 문이 열리면, 우리는 어쩌면 “언젠가 멈춰선 시간을 깨치고 나오는/ 낯익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야 생명의 역사도 흐른다. 시간이 멈추면 생명의 역사는 끝장난다고 말해도 좋다. 시인은 회임을 상상함으로써 여름 산이 펼치는 시간을 온몸으로 감당한다.
유영삼의 시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흐르는 시간과 맞물려 있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수많은 고통이 새겨져 있다. “저 아득한 속울음”(「벚꽃」)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벚꽃은 땅으로 떨어지고, 하늘이 피를 흘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어둠은 소리 없이 지상으로 내려앉는다(「어둠을 낳다, 노을」). 시인에게 시작(詩作)이란 가슴 깊은 곳에 서린 아득한 속울음을 표현하는 일이고, 핏빛 하늘이 낳은 어둠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단단하게 다져진 내면의 힘으로 한여름 땡볕이 내리쪼이는 땅 위에 선다. 땡볕을 품지 않고 어떻게 열매를 익힐까? 목청 잃은 새는 그렇게 땡볕을 품고 새로운 생명을 낳는 길로 접어드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