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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3)
출 30: 17-21
세계 지도를 펴놓고 나라마다 수도나 큰 도시를 보면 반드시 공통점을 한가지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도시들이 강을 끼고 발달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물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 중 물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물의 기능을 생각할 때 먼저 씻어내는 기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욕하는 일, 세면하는 일, 손과 발을 씻는 일은 우리의 몸밖의 부분을 씻어주는 기능입니다. 우리는 물을 마실 때마다 좋은 물을 마시려고 합니다. 약수터에 가서 물을 먹어도 먼저 사람이 먹은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 그 물을 휘휘 저어 버리고 다시 떠 먹어야 성이 찹니다. 그렇다고 소독이 될 까닭이 없지만 그래야 마음이 놓이지요. 할 수 있으면 깨끗한 물을 먹으려고 그럽니다. 아무리 수돗물이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그래도 수돗물을 먹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먹는 사람조차도 할 수 없어 먹는 것이지 좋아서 먹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정수 물을 먹으려 하고 생수 물을 먹으려고 합니다. 사실, 물을 마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 속에 수분이 섭취될 뿐만 아니라 모든 장을 청소해 주는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본문 말씀에 회막과 번제단 사이에 "물두멍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물두멍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잘 쓰지 않은 표현이 되어서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놋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큰 놋대야'라고 하면 정확할 것입니다. 거기에 항상 가득하게 깨끗한 물을 담아놓고 손을 씻고 발을 씻었습니다. 성막의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번제단이 있고, 번제단을 지나면 성막 입구에 물두멍이 있습니다. 물두멍에서 씻은 사람만이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위치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물두멍에서 씻어야 할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성막 뜰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예요. 이미 번제단에서 피로 씻음을 받고 죄사함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을 불러 만찬을 베푸시던 중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주님의 하시는 일에 순종하면서 손과 발을 내어 맡기는데 베드로는 "왜 스승이 제자의 손과 발을 씻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거부하다가 "내가 너를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에 그러면 온몸을 씻어달라고 하지요. 온몸을 씻어달라는 베드로의 요구에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성막 뜰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 번제단에서 어린양 예수의 피로 용서함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뜰 안에 들어와 있는 그들이 손과 발에 더러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선 손을 씻어야 할 첫 번째 사람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이고 아들들은 제사장입니다. 대제상과 제사장들도 성막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알고 보면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충고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지도자는 참으로 뼈를 깎는 인내와 절제, 그리고 믿음의 성결됨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인 아론과 제사장인 그의 아들들에게 먼저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가장 헌신된 사람이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면 그 성막을 출입하는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막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를 정해주셨는데 유독 물두멍 만큼은 규모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자유롭게 만들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 회막의 크기에 맞게, 그 출입하는 사람들의 수효에 맞게 자율적으로 만들도록 하신 유일한 성막의 도구가 물두멍입니다.
자, 이 물두멍을 만드는 재료는 놋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막을 짓는데 들어간 모든 놋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번제단은 싯딤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놋으로 입혔다고 했습니다. 쓸모없는 우리가, 흠이 많은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함 받고 거듭나 새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놋으로 만든 물두멍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과 발을 씻으십니다. 씻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2년 전에 구원받고 10년 전에 은혜의 체험을 했어도 성막을 출입할 때마다 손과 발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 예배를 위해서 손과 발을 씻으셨습니까?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으셨습니까? 흔히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표현은 이론적인 부분이 강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한국의 성도들을 비판하기를 "신앙생활은 잘하는데 생활신앙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이 머리와 마음으로 깨닫고 느끼는 것이라면 생활신앙은 손과 발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은혜를 받았으면 손과 발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추상적인 말씀을 듣고 부담없이 돌아가는 것보다 생활신앙의 구체적인 것을 말씀 드리면 부담이 되어서 어쩌면 예배가 힘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끊임없이 그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쉬운 예로, 목욕을 하셔도 때가 많거나 몸이 찌뿌둥해서 목욕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옷을 하나 다려 입어도 예배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자는 것이지요. 동기가 중요하고 마음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38장에 보면 이 놋 재료가 어디서 왔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킨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1년 후 회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무성이 있어요? 제사장의 에봇에 다는 각종 보석들도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여인들이 준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성막을 지을 때 다 헌물해서 그것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놋입니다. 그곳에 광산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수많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 놋을 어디에서 구할꼬..." 그리고 한가지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출애굽기 38장에 보면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의 놋 거울을 가지고 물두멍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집집마다 깨끗한 거울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그런 거울들이 없어서 놋으로 만든 거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놋거울은 여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귀중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드려 그것으로 물두멍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회막 밖에 있는 여성들의 거울이 아니라 회막 안에서 섬기는 여성들의 놋거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의 놋거울이예요. 하나님의 교회에 귀중한 비품들은 세상 사람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한다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국회의원이 선거를 앞두고 큰 것을 기증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법으로 제재하기 이전에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두멍을 주님께서 준비하라고 할 때 거기에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었습니다. 쓰다가 남은 것도 아니고, 여러개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그것도 여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놋거울을 가지고 물두멍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의 비품 하나 하나는 그래서 성도들의 눈물과 희생이 담겨져 있는 거예요. 의자 하나를 봉헌하면서, 비품 하나를 봉헌하면서 준비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눈물이 있었겠습니까?
물두멍을 대할 때마다 여인들이 생각합니다. "내게 하나밖에 없는 놋거울을 주님 제단을 위해서 드렸으니 여기서 손발을 씻을 때마다 내가 다시 은혜의 자리, 성막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구나" 교회를 바라볼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전 입구에 물두멍을 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날마다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고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을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외쳐야 합니다. "너는 천사가 아니다. 너는 완전하지 않다. 손과 발을 씻지 않고서는 저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어" 사실 천사라고 하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지요. 성경에서 천사의 위치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는 위치이지만 아직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 전이니까 우리는 늘 겸손한 표현으로 좋은 마음,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을 보면 천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내 부족함과 내 연약함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얘기하는 한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올 틈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물두멍에서 손발을 씻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높은 곳에 오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시편 24편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거룩한 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 곧 손이 깨끗하며"라고 선언합니다. 손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성결된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가 높은 산에 올라갈 수 있고, 누가 거룩한 산에 올라갈 수 있느냐는 말은 곧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누구냐고 하는 말입니다. 곧 손이 깨끗한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 주시는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욥기 17장에 보면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 주시는 새로운 능력은 손이 깨끗한 자들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이미 피로 구원함을 입은 우리는 이제 물두멍에서 씻기만 하면 됩니다. 목욕한 자는 손과 발만 씻으면 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두 번 다시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번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를 영원토록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 성결함을 잃지 않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물두멍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한번 힘입는 시간을 주신 은혜의 주님,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어 깨끗하고 성결된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 강해 (4)
출 30: 34-38
종교의식을 보면 불교나 유교 혹은 일반 제사에서 공통된 의식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향을 피우는 일입니다. 향을 피우는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 향을 피우는 목적이 무엇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특별히 장례식에서는 시신이 썩는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향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신이 냉동실에 따로 보관되지만 여전히 영정 앞에 향을 피우는 것은 돌아가신 분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의미가 넓혀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절에 가면 언제나 향을 피우는데 어떤 이들은 그 향의 냄새가 좋아서 간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 냄새가 싫어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지난 주 교토에 갔을 때 '니가시 혼지'라고 하는 참으로 엄청난 규모의 절을 방문하였는데 절의 규모처럼 마당 한가운데 있는 분향 향로도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컸는데 거기서 끊임없이 연기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마침 소학교 학생들, 중학교 학생들이 견학을 온 것인지 수백명은 족히 될 학생들이 절에 들어와 제일 먼저 간 곳이 바로 향로였습니다. 끊임없이 뿜어나오는 그 향의 연기가 자기의 몸에 들어오도록 애를 쓰고, 어떤 아이들은 머리를 집어넣고 향을 손사래로 또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향을 가라?막 밀어주는 그런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절이나 신사에 가면 향을 자기 몸에 먼저 끼얹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밀어주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복을 받기를 원하는 그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렇게 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식마다 꼭 의미가 있는 필수적인 것인데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3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시고, 성소 안의 분향단에 분향할 향품을 만들기 위해서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과 같은 무게로 섞어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목적의 향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향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원하실 때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도를 받기를 원하실 때에는 제사장들을 통해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드려진 기도가 하나님 앞에 기쁘게 드려졌음을 그들에게 가시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한가지 중요한 재료가 바로 향을 피우는 것입니다.
향을 피우게 하신 이유는 곧 그들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겠다고 하는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나와 기도할 때 내가 너희 기도를 들으리라"고 하는 그 약속을 기억하면서 향기로운 향의 연기를 백성들이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5장 8절에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큰 대접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거기에 향이 있었고 그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려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가 24장로들에 의해 어린양 앞에 드려지는 즉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짐을 계시록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지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후안 오르티즈' 목사님은 "많은 기도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처럼 취급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열납되어지고 상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것들이 되고 만다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인지, 하나님 앞에 기쁘게 받으실만한 것인지, 아니면 잡동사니처럼 취급을 당할 것인지 이것은 우리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는 것이지요. 기도는 그래서 간단하게 지나가야 할 순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는 기도로 준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번의 기도를 위해서 참으로 많은 기도의 준비가 있을 때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기도가 되고 받으실만한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4가지 향의 재료를 가지고 만드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유향에 섞어서 만들라"
하지만 우리는 이 향의 이름도 생소하고 그 이름도 낯익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는데 "몰약과 섭조개 가루와 페르시아 수지와 순수한 유향을 같은 무게로 섞어서 만들라" 조금 이해가 될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향품들은 팔레스틴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모두 다른 곳에서 수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지역같은 아라비아 지역에서 먼 곳에서 수입을 해와야 할 흔하지 않은 향 재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 중에는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구하기가 무척 어려운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대부분의 재목은 향기나는 나무, 곧 백향목을 가지고 지었는데 백향목은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이스라엘 북쪽 레바논 지역에 있는 백향목을 지중해에 뗏목을 사용해서 시돈과 가이사랴 지역으로 옮긴 뒤 다시 육로로 실어서 예루살렘 성전의 재료로 사용을 했습니다.
어떤 중요한 성전의 재료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곳에서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렸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향목은 이름 그대로 아주 은은한 향기가 나는 미색의 향나무입니다.
울릉도에 가면 모기와 파리 같은 해충들이 없는데 이유는 울릉도에 자생하는 향나무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전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재료들은 적어도 우리가 성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재료의 선택에서부터 우리는 정성과 수고를 다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음식점에 가서 짜장면은이나 볶음밥은 드시지 않는다고 그래요. 짜장면은 그 속의 재료가 무엇인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별이 안되어서 그렇고, 볶음밥은 찬밥 남은 것을 볶아놓기 때문에 좋은 밥인지, 먹다가 남긴 밥인지 구별이 안되어서 먹지 않는다고 그래요.
중요한 것은 정성과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쓰여지는 것이 그 재료의 준비과정부터 온전하고 순수한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하고 순수한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이 귀한 것들을 준비를 시키는 그런 주님의 의도, 물론 그 광야에서 생활하는 그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지만 주님은 그러나 그들에게 그 4가지 향유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만들되 특별히 35절에 보면 "성결하게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결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보이지 않는 개념입니다. 어떤 특정 재료를 넣는다고 성결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4가지의 순수하고 귀한 향품을 같은 무게로 섞어서 만드는 것까지는 재료가 순수하고 온전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을 아무리 정성껏 만들어도 성결하거나 깨끗할 수는 없는 것예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물건도 사람에 따라서는 쓰고 남은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자기의 전부를 다 드려서 구입한 최고의 헌신의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4가지 향료로 만들어진 이 향을 성결케 하라고 하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우리의 향기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내면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4가지 향료의 정성껏 배합된 향료 속에 소금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분쟁이 생겼을 때 소금을 두고 화해하라고 말씀하기도 하셨고, 주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말씀하실 때 "너희가 만일 맛을 잃어버리면 사람들에게 짓밟히리라"고 예고하시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지금 이 시대에 예수의 사람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맛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언론에게 짓밟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큰 사건만 터지면 거기에 장로, 권사, 집사가 꼭 끼여있어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어요. 그만한 지위에 이르기까지 그만한 경제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기회를 주셨는데 왜 주신 물질의 은혜와 사회적 지위의 기회를 맛을 내고 향을 내는 그 삶으로 쓰지 않고 인간의 육신과 정욕을 위해서 사용하다가 사람들에게 짓밟히느냐 그 말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특별히 또 다른 의미에서의 소금의 역할을 말씀하시는데 성별케 하는 일을 위해서 소금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이 성결케 하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소금을 쳐서 성별케 함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에도 절제됨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많이 쳐서도 안됩니다.
교회 김장을 하다 보면 어느 해는 짜고, 어느 해는 싱겁습니다. 매년 여선교회 회장님들과 성도들이 교회 김장을 담굽니다. 배추 포기를 썰어 큰 통에 담은 뒤 "이 정도면 되겠지"하고 소금을 적당히 뿌려놓습니다.
문제는 새벽에 일어납니다. 소금을 뿌리지 않은 다른 사람이 간을 보고 "왜 이렇게 싱겁지?"하고 한 바가지 소금을 뿌리고 갑니다. 그분은 그래도 새벽 기도회에 나와서 정성껏 애를 쓰신 거예요. 그러나 어제 저녁에 소금을 뿌려 간을 본 분은 영문도 모르고 "어유, 왜 이렇게 짜졌나?" 그래서 김장이 어느 해는 짜기도 하고, 어느 해는 싱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짜도 감사한 일이고 싱거워도 감사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사랑의 수고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향에 소금을 치면 향이 더 잘탄다든지, 혹은 그 향이 변질되지 않는다든지 그런 의미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향에 소금을 침으로써 절제된 모습의 성결된 삶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도 절제되지 아니한 모습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성결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지 않을 때 그것은 받으실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가장 향기로운 제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받으시기에 합당한 만족할 만한 향기로운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다시 살리심이 그 증거입니다. 주님을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만 다시 살렸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만족하심은 십자가의 달리신 주님과 그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확신하는 성도들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렇게 드려지는 향기로운 향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향기로워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의 의미는 "무릇 자기가 그 향기로운 향을 맡으려고 자기를 위하여 만드는 자는" 그런 뜻입니다. 성전에서 주의 일을 하다 보면 욕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제사보다 젯밥이라고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자기의 욕심을 채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38절에 보면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대단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개인의 목적을 위해, 인간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거나 전용하는 일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일본 이바라끼현의 이시오까교회를 중심해서 C.C.C 마게도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두어달 일본어를 배운 학생들이기 때문에 일본어가 매우 서툴어요. 중요한 문장만 메모해 다니면서 카세트 테이프와 전도지를 가정마다 편지함에 넣어주고 또 만나면 가게든 길이든 붙잡고 학생들이 메모한 문장을 보고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두 조로 나누었는데 한 조는 고베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는 학생이 책임을 맡아 문제가 없었는데 다른 한 조는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없어서 부득이 부족한 제가 인솔 책임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 전도하다가 말이 안통하면 제가 쫓아가서 보충 설명을 해주고 점심시간에 돌아와서 라면으로 자기들이 식사 준비해서 먹고, 또 나가서 일본인들 가정에 전도를 열심히들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오랜만에 많이 걸었더니 지금 발바닥에 물집이 많이 잡혀 걷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말도 안통하는 이 나라에 와서 이렇게 가가호호 말씀을 증거하고 전도를 하는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이 통하는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에서 전도지조차 나눠주지 못할까?" 해야 합니다. 한번 그 일을 위해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평생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소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가장 만족하실 만한 그런 향이라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향은 무엇입니까? 곧 시간의 헌신, 물질의 헌신, 정성의 헌신을 주님 앞에 드릴 때 주님께 만족하실 만한 향기로운 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바로 계시록 5장 8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눈물과 수고가 포함되지 않은 그런 성도의 모습은 하늘나라의 잡동사니 취급밖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도의 눈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도의 희생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도의 땀입니다. 그것이 다른 영혼들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하나님의 일답게 만들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그러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시대를 가리켜 경쟁시대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경쟁이 기본입니다. 그리고 이 경쟁의 결론은 'zero game' 즉 하나가 죽든지 하나가 살든지입니다.
그런데 이제 각성의 분위기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협력'이라고 하는 'cooperation'과 '경쟁'이라고 하는 'competition'을 합성해서 'coopetition'이라고 하는 신조어가 생겼어요. 아직 영한 사전에도 나와있지 않은 최신 단어입니다. 'coopetition'이란 경쟁은 하되 협력적인 경쟁을 하자는 거예요. 너도 살고 나도 사는 'win win game' 즉 모두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활은 이것입니다. 내가 승리할 뿐 아니라 당신도 승리하는 협력적인 경쟁의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그런 승리의 삶을 먼저 앞서가야 합니다.
1속에서 성경을 500장을 읽으면, 2속에서는 성경을 550장을 읽는 그런 모습입니다. 주보를 보고 성경란이 빈칸으로 나와 있으면 마음이 아파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가 사는 협력적인 경쟁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예요.
성미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속회를 볼 때 마음 아파하고 그 속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함께 온전한 성도의 생활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질 때 'win win game'이 되는 거예요. 우리 주님은 모두가 함께 승리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평안의 성도들이 향기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십자가의 삶 뿐만 아니라 당신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삶으로 함께 가는 일이 되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일어나신 주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일어나 함께 가자" 고난의 자리도 함께 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향기나는 삶을 위하여 고난의 자리도, 영광의 자리도 함께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일을 위하여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에 담겨진 뜻을 헤아리며 다시금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에게 십자가의 고난의 자리도, 부활의 감격의 자리도 함께 일어나 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드려지는 우리의 모든 모습들이 주님 앞에 향기나는 기도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