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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목사
구약 성서에서 가장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의 조상이 된 야곱입니다. 이러한 야곱을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사자나 호랑이 같은 야곱이라고 하시지 않고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했을까요? 가장 축복을 많이 받고 이스라엘 나라의 조상이 된 야곱이 "지렁 이 같은 야곱"이라고 불리게 된 그 말씀 뜻은 무엇입니까?
<1. 지렁이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가치없고 약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능력있는 도구로 쓰신다는 말씀입니다>
지렁이는 이빨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사야 41:15에 보면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같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빨 하나도 없는 지렁이가 어떻게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고 작은 산들을 겨같이 날려 보내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능력있는 도구가 되려면 먼저 나의 부족과 결핍과 무능함과 약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지렁이와 같이 낮아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와 같이 능력있는 도구가 되게 해 주시고 승리자가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렸습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에게는 사탄 이 갖다 주는 이상한 병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를 세 번이나 드렸지만 하나님은 병을 고쳐 주시지 아니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하는 이상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을 알아서 지나치지도 않게 부족하게도 않게 해 주시며 우리 형편대로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 후부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한 것들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며 약함을 자랑 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내가 약할 그 때에 내가 참 으로 강해짐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지렁이와 같이 지극히 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머물고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와 같이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2. 지렁이와 같은 육에 속한 수단과 방법이 다 없어질 때 하나님의 진정한 방법이 생겨난다는 말씀 입니다.>
지렁이는 남을 물어 뜯을 이빨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남을 할퀼만한 손도 없습니다. 또 교만히 뻣뻣하게 내세울 척추뼈도 없습니다. 남을 걷어찰 발도 없습니다. 들이받을 만한 뿔도 하나도 없습 니다. 재주를 짜낼만한 두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렁이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 작기계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렁이와 같이 수단과 방법이 다 없어져야 하나님의 비상한 방법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수 단과 방법이 우리 자신에게서 깨어져야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내 수단, 방법 내 지혜와 총명 가지고 하려고 할 때는 자꾸 실패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방법은 기껏해야 호미나 삽과 같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산을 깎아 무너뜨리는 날카로운 불도저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란 의지할 만한 것이 눈에 보여도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약하고 무능하고 보잘 것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면 나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물떠난 고기가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주님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자기의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성도입니다.
<3. 하나님은 육성과 인간의 고집이 깨어져야 능력을 부어 주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지렁이와 같이 완전히 항복한 사람을 축복하시고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집도 육성도 딱딱한 마음도 깨어지고 부스러지고 지렁이처럼 항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은 능력과 축복 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렁이와 같이 우리의 육성이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서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성이라는 것은 마귀편을 들기 쉬운 것입니다 . 우리 인간의 육성과 고집은 하나님의 뜻에 거슬리기가 쉽고 반항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 에는 훌륭한 성도같고 믿음이 좋아 보여도 마음 속에 강철같은 고집과 육성이 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은 귀하게 쓰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 잘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축복을 안 해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육성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야곱은 지렁이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교묘하고 약삭 빠른지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교묘하게 자기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기도를 받았습니다. 또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는 종살이 한다고 하면서 아주 약삭 빠르게 외삼촌의 많은 재산을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야곱을 깨뜨리시기 위해서 집을 떠나 고생을 시켰던 것입니다. 2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고생을 했는데도 야곱은 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마침내 많은 재산과 처자식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 는 길이었습니다. 그 때에 얍복강 여울에 이르러서 소문을 들으니까 옛날에 자기가 골려먹고 속여먹던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번쩍거리는 창칼을 들고 자기를 죽이러 쫓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도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재산이 많이 있으니까 선물을 많이 보내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만나면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많은 선물을 앞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재산을 두 떼로 나누어 가게 했습니다. 앞에 있는 재산을 잃어버리면 뒤의 것이라도 찾으 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자식도 아내도 다 앞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강을 건너지 않고 얍복강 여울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재산이 다 없어지고 사랑하는 처자식들이 다 죽어도 자기만은 살려 고 했던 것입니다. 이윽고 밤이 되었습니다.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철야하며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그 천사를 붙들고 씨름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천사가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내 문제 를 해결해 주시고 나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놓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매달렸습니다. 그 때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내리쳤습니다. 우지끈 하면서 환도뼈가 위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마지 막으로 믿고 있던 것, 자기의 성한 두 다리, 재산이 다 없어져도 처자식이 다 없어져도 그 성한 두 다 리로 도망쳐서 돈 벌고 또 장가 가서 자식 낳고 살려고 생각했는데 그만 하나님께서 깨뜨려 버리신 것 입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어쩔 수 없는 절망에 부딪혀서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축복 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이를 인자같은 이라고 한 것을 보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의 현현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꽃 속에 들어갔을 때도 인자같은 이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세 친구가 나타났다가 다 가버리고 한 분만 남았는데 그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엎드렸더라고 했습니다. 그도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축복해 주시기를 이제부터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하는 뜻입니다. 약한 인간 이 하나님을 이겼다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지렁이와 같이 완전히 항복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대로 들어 주시고 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깨져야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성과 고집이 깨질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데 제일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의 육성과 고집입니다. 이 인간의 육성과 고집이 하나님께 굴복해 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고통과 시련과 실패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을 깨뜨리시고 부스러 뜨리시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환경,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어서 정말 항복해야 그제서야 축복해 주십니다.
여러분 방언이나 은사를 받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육성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 육성이 고난을 통해서 깨어져야 그 다음에 완전히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려고 사람을 통해서, 실패를 통해서 질병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깨뜨리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원망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깨어지고 항복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남편의 방망이를 통해서, 어떤 이는 부끄러움과 수치의 막대기로 때릴 때도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로 우리를 때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원망하지 말고 겸손히 낮아지면서 깨어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노라면 언젠가는 십자가가 나를 떠받들어 준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담아 주시기 전에 온전한 그릇을 만들기 위하여 질병을 통해서 경 제적인 고통을 통해서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혹은 식구를 통해서 친척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시키십 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히 지렁이와 같이 말랑말랑 해져야 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험과 고난이 올 때 원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 때는 우리가 "주여 이 시험이 지난 다음에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려고 그러십니까? 감사합니다"하고 깨어지고 겸손한 심령을 가져야 할 것 입니다. 큰 시험이 오면 오는 것만큼, 고난이 크면 큰만큼 큰 축복이 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슬픔과 고난의 보자기에 싸서 준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과 고통과 시련이 올 때에 원망하지 말고 먼저 원인을 내게서 찾아야 됩니다. 요나가 큰 폭풍을 만났을 때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내 까닭이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고백입니다.
한 집안에서도 한 사람만 기도 생활 바로하게 되면 한 사람 때문에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내가 바로 회개하고 깨어지고 목숨 걸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안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순길인 것을 알고 속히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환난과 시험이 올 때 원망하거나 불신앙으로 떨어지지 말고 감사하면서 축복의 징조로 알아야 합니다. 내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내 육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지렁이와 같이 녹아지고 깨어지고 부스러질 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멘-
지렁이 같은 야곱아'(사 41:14) 이사야서 41장 14절 첫 부분을 <구역> <개역> <개정>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새번역>과 <새번역>은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어제 우리 통화에서 우리는 이 “지렁이”라는 말에 주목하면서, “야곱”과 관련된 어떤 함의 含意를 생각해 보고 싶어 했지요. 우선, 우리가 잠깐 대화에서 나눈 “땅과 지렁이의 상생” 같은 것은 이사야서 본문에서는 볼 수가 없다는 점을 먼저 급히 말하고 싶습니다. 피조물 중에서 어떤 것을 폄 貶하여 “연약 軟弱하다”라거나 “멸시 蔑視의 대상이 된다”라거나 “보잘것없는 존재”라거나 하는 피조물 사이의 차별을 합법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창조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히 “미물 微物”이라고 말하는 것 중에는 이사야서에서 보듯이 지렁이 같은 벌레나 곤충도 있지만, 기생충 寄生蟲이나 세균 細菌, 그리고 COVID-19 같은 바이러스도 있지요, 바이러스 같은 것은 생물 生物이라고 보아야 할지 무생물 無生物이라고 보아야 할지 구별조차 어려운 존재이지만 지금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닙니까! 시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 듣는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어서 오늘 모든 일 다 접고 다음과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1) 이사야서에 나오는 우리말 “지렁이”에 관해서는 영어번역들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BibleWorks와 YouVersion에 나오는 영어번역 60여 종에서 99%에 해당하는 영어번역들이, 우리가 “지렁이”라고 번역한 것을, 영어로는 “worm”(벌레)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LXX)은 우리가 “지렁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톨레아’를 그리스어 번역에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NET (New English Translation)은 <개역>이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번역한 것을 “멸시받는 하찮은 야곱/ despised insignificant Jacob”이라고 번역합니다. EASY (Easy-to-Read Version)는 “너 약골 弱骨 [야곱]/ you may be weak”이라고 번역합니다. GNB (Good News Bible)은 <개역>이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번역한 ‘톨레아’와 ‘므팀’을 “[야곱아] 너는 수도 적고 약하다/ Small and weak as you are”라고 번역합니다. 2) 우리말 번역들 사이에도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구역 1911>, <개역1938>, <개역 1961)>); “지렁이 야곱아, 이스라엘 사람아,”(<두란노우리말성경 (20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개역개정판 1998>);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공동번역 1977>, <가톨릭성경 2005>)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표준 1993>; <새번역 2004>) “지렁이 같은 야곱아, 얼마 남지 않은 너희 이스라엘 백성아,”(<아가페쉬운성경>) “너 벌레 야곱아, ...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한글킹제임스 1994>) “너 벌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흠정역 2008>) (‘톨레아’와 ‘므팀’을)“작고 보잘것없는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현대인의성경 1985>) 3) “지렁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톨레아’의 사전상의 의미를 다음 세 히브리어 사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① Holladay,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② Brown, Driver, Briggs, A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③ Harris, et als, - Theological Word Book of the Old Testament 4) “사람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므팀 m?tim’을 위 세 사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5) “한줌밖에 안 되는”, “미미 微微한”, “하찮은” 등으로 번역된 1) 히브리어 ‘므팀 m?tim’의 또 다른 의미영역 semantic domain, 혹은 의미장(意味場/ semantic field)을 위 세 사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6) “벌레”로 번역된 2) 히브리어 동족어 아카디아어의 ‘므팀 m?tim’을 위 세 사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7) “시체 屍體”로 번역된 3) 히브리어 ‘매트 met’를 위 세 사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맺는말 우리말 “지렁이”는 우리말 사전이 정의한 대로 “?동? 지렁이목 目 환형 環形동물의 총칭. 몸은 원통형이며 많은 마디로 이루어지고, 길이는 10cm 정도이며 등은 암적갈색임. 암수한몸으로, 부식토를 먹고 그 속의 식물질을 영양으로 섭취함. 한방 韓方에서 약용 藥用하며, 낚싯밥으로 씀. 지룡 地龍. 지룡자 地龍子. 토룡 土龍.” 입니다. 여기에 반해 영어번역의 worm은 “곤충이나 기생충 따위의 하등 동물의 총칭”인 “벌레”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톨레아”의 한국어 <개역> 등의 대응어는 “벌레 worm”여야 합니다. 우리말 이사야서의 “지렁이”는 “벌레” 중에서 “지렁이”를 예로 들은 것으로서, 히브리어 “톨레아”의 뜻을 충분히 전달한 것이 못됩니다.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나타내기 위해 “벌레”(해톨레아)를 예로 든 것은 벌레의 힘을 모르고, 벌레를 미물로 차별한 인간의 오만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계시 啓示의 수납 受納 과정에서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어 청중을 위해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나는 감히 ‘톨레아’(“벌레”)는 이사야의 오역이라고 주장합니다. 잠깐, 궁금증을 풀고 갑시다. 우리말 “지렁이”가 히브리어 ‘톨레아’의 뜻 [“벌레”]을 전달했다기보다는, 다만 ‘톨레아’[“벌레”]에 속하는 것 중 하나로 “지렁이” 예를 든 것이라면 왜 하필 지렁이를 예로 들었을까요? 우리말 <구역>(1911) 번역자들 앞에는 당시 두 종류의 한문 성경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舊新約全書代表本文理/ 구신약전서대표본문리>(1854)였고, 다른 하나는 쉐레쉐브스키/ Samuel Isaac Joseph Schereschewsky, (1831-1906)의 번역인 <施約瑟舊約官話譯本/ 시약슬구약관화역본>(1902)과 <施約瑟淺文理譯本/ 시약슬천문리역본>(1902)입니다. <舊新約聖書 代表本 文理>(1854) 以賽亞書 41:14 “雅各家以色列族, 素若?蚓, 我耶和華 乃爾聖主, 必加拯救, 眷祐爾躬”. 대강의 뜻 - “야곱 가문 이스라엘 족속은 지렁이와도 같다. 나 여호와 너의 거룩한 주가 반드시 구원하여 줄 것이고, 너를 몸소 도울 것이다.” <舊約聖經 淺文理>(1902) 以賽亞 41:14 “主云, 爾如?蚓之雅各, 爾曹以色列人乎, 勿畏懼, 我救濟爾, 贖爾者, 乃以色列之聖主,” 대강의 듯 - “주께서 말씀하신다. ‘너 야곱은 지렁이와 같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구제한다. 너의 속죄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주다.’” 번역을 비교해 보면 <舊約聖經 淺文理>(1902)가 <셩경젼셔>(구역, 1911)의 대본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한문역은 <舊新約聖書 代表本 文理>(1854)이든 <舊約聖經 淺文理>(1902)이든 둘 다 히브리어 ‘톨레아’를 “지렁이”[?蚓]로 번역하고 있고, 우리 <구역>이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정도의 소견이 시인에게 참고되었기를 바랍니다. 1) “작고 보잘것없는”(<현대인의성경>; NJB “You little handful of Israel!”;TNIV “little Israel,”; LXE “and thou Israel few in number”; 2) NAB “O maggot Israel”; NRSV “you insect Israel.” 3) DRA Isaiah 41:14 Fear not, thou worm of Jacob, you that are dead of Israel: 민영진 목사/http://www.newsprout.org/bible/bi2010.htm 자료 편집(인명 삭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