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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순 목사
역사상 가장 영화를 누린 왕 중에 하나였던 솔로몬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시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웠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부자 나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무엇이 인생의 행복일까 하고 열심히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행복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이 헛되다.’ 는 서글픈 고백만 하고 말았습니다. 인생은 실험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가르쳐 주신대로 순종하여 복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진짜인지 아닌지 한번 실험해보자.” 하고 실험하면서 사는 사람은 평생을 노력해도 실패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오십 보 백보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능력이 없는 사람은 평생 동안 한두 가지만 얻기 위해 노력하다가 죽는 것이고, 능력이 좀 있다는 사람은 솔로몬처럼 여러 가지 목표를 놓고 실험만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조금 유능하다는 사람이 늙어서 한다는 말은 “내가 여자도 쫓아 다녀보고, 돈도 따라 다녀보고, 명예도 얻어 봤는데 모두 다 헛되더라.”고 하지만, 조금 무능한 사람은 “내가 돈 좀 벌어보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아직도 못 벌었다.”고 말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인생을 실험으로 사는 사람은 똑똑해도 실패하고, 미련해도 실패할 뿐입니다.
솔로몬은 도대체 행복이 무엇일까 하고 실험 해보았습니다.
2장에 보니까 그는 웃음과 술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절을 보면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라고 말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지 다 해 보았다는 말입니다.
왕상 10:21에 보면 그는 자주 잔치를 벌였습니다. 솔로몬이 여는 연회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그가 사용하는 그릇은 모두 금이었습니다. 솔로몬이 먹는 음식도 대단했습니다.
왕상4:22-23에 보면 “솔로몬의 일일 분 식품은 가는 가루가 삼십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석이요, 살진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다.” 고 했습니다. 얼마나 호사스런 잔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는 삼백 사람 분량의 음식을 혼자 먹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혼자 먹은 게 아니라 그만큼 많은 음식을 만들어 바침으로 어떤 것은 냄새를 맡고 어떤 것은 감상을 하고 어떤 것은 먹었을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첩을 많이 두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좌우에는 항상 풍악이 울려 퍼지고 노래하는 남녀가 그 곁에서 노래를 불러주었고, 기분 좋게 하려고 별 호사스런 짓을 다 해봤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솔로몬은 부인과 첩이 천명이었습니다. 여자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은 모두 다 시도해 보았던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쾌락을 추구했더니 정말 기쁨을 얻었다고 말합니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비누거품처럼 금새 사라졌고 그 다음에는 더 큰 공허가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잠언 14장13절에는 그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여러분이 돈을 한 뭉치 가지고 가서 술집에 가서 술을 실컷 마셔대면서 음탕한 짓을 다 해보아도 가슴에 밀려오는 허전함과 슬픔은 지울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허망한 짓을 하는 사람의 영혼이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에서는 도리어 공허와 슬픔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한때 방탕하게 살았고 음란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나중에 꼭 후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쾌락을 따라가다가 인생 망쳤다고 쓴 눈물을 삼키게 되는 법입니다. 쾌락으로는 절대로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의 근로자들이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을 많이 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지만 밤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시간은 많은데 사막 한가운데서 할 일이 없습니다. 근로자들이 너무 고독하고 심심해합니다. 그래서 현장의 감독들이 그들의 고독함을 달래준다고 한동안 포르노비디오를 틀어줬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근로자들이 얼마나 열광하며 몰려드는지 몰랐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을 틀어주니까 오는 사람들이 드물어지고, 한 달 째 트니까 자리가 텅텅 비면서 “그거 집어치워” 하더랍니다. 포르노 비디오를 보면서 한 달 이상 즐거워할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런 쾌락으로 채워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쾌락은 도리어 마음속에 괴로움과 죄의식을 쌓아갈 뿐이고 평안이 없고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 데까지 가봤던 사람은 그것의 공허와 괴로움을 알았기 때문에 거룩한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설 수 있는데, 나름대로 경건하게 산다는 사람들 중에는 혹시 쾌락에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 하면서, 한발은 주님께 들여놓고 한발을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예수 안 믿었으면 저기 가서 노는 건데” 하면서, 걸핏하면 ‘예수 안 믿었으면’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부러워하느니 차라리 한번 타락해서 갈 데까지 가보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의 길에서 치르게 될 대가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가 될 것입니다.
육체적 쾌락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후회만 얻은 솔로몬은 이번에는 좀 도덕적이고 건전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부러워할 일들을 해보았습니다.
4-7절을 보면, 솔로몬이 벌인 사업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모두가 부러워하도록 아주 호화로운 집도 지어보고, 정원도 멋지게 조성해 보고, 양떼를 늘리면서 재산도 증식하여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정말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은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진정한 성취감을 맛보지는 못했다고 털어놓고 있습니다. 허망하더라는 것입니다.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동안에는 성공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리고 일에 몰두하느라고 다른 생각 없이 살았는데, 목표하던 것을 이루고 난 다음에는 허탈감이 몰려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출세하겠다고, 진급하겠다고, 부자가 되겠다고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것을 막상 얻고 나니까 별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는 허탈감만 밀려와서 괴로워합니다. ‘그동안 그렇게 수고한 결과로 얻은 게 겨우 이것인가’하는 생각 때문에 억울함과 허무감이 몰려오고 이제부터는 삶이 지루해지고 목표의식이 없어지며 방탕의 길로 접어들기 쉽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고 성공이라는 것을 얻었는데도 그것이 자신에게 만족이나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허탈감은 삶의 실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브러스 비어스라는 사람은 “성취란 노력의 죽음이요 삶의 실증의 시작이다.”라고 간파했습니다. 비록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얻은 성공일지라도 세상에서 얻는 성공은 인생의 참되고 지속적인 행복이 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공의 공허를 깨달은 사람들이 그것이 공허하다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공하니까 행복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동안 자기 수고가 억울해서 그렇습니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라는 게 있습니다.
어떤 여우가 높은 나무에 열려 있는 포도를 따먹으려다가 올라갈 수가 없어서 그냥 가면서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못먹어” 라는 말을 내뱉고 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똑똑한 여우들이 생각하기를 “너무 맛있지만 제가 오르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했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는 그 높이 열린 포도를 따먹어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맛있다고 소문난 포도나무에 수많은 여우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높은 가지에 매달린 먹음직한 포도를 따먹으려는데, 너무 높아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가장 똑똑하고 용감한 여우가 모두가 오르고 싶어 하는 그 포도나무에 올라가서 포도를 따서 입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시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밑에 있는 여우들이 ‘맛이 어때’ 하고 묻습니다.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너무 셔서 못먹겠어” 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너무 맛있어” 라고 말하겠습니까?
시다고 말하기에는 이 나무에 오르기 위해서 바친 수고가 너무 억울합니다. “이런 시시한 것 따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며 한평생을 바쳤나” 하는 생각이 나고, “이건 정말 별것 아냐,” 라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맛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여우들은 “아 부럽다. 나는 언제 저기에 올라가서 포도를 맛보나” 하고 목숨 걸고 나무에 오릅니다.
다음 여우가 가까스로 나무에 올라와서 그 포도를 따먹어 봅니다. 그리고는 속으로 욕합니다. “나쁜 놈, 이것을 맛있다고 해?”그렇지만 자기도 나무아래 여우들에게는 정말 맛있다고 말해줍니다. “여기 올라올 필요가 없어, 이건 가짜야” 이렇게 말하려니까, 자기가 했던 수고가 너무 억울합니다. 그래서 “응 정말 맛있는데?” 라고 성취감을 누리는 척 하고 내려갑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돈도 그렇고 학문도 그렇고 출세도 그렇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 명예, 출세라는 것들도 신 포도처럼 다 가짜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만족이나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요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22)
만족을 얻을 수없는 것을 위해서 목숨 걸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후회하는 것을 보았지만 자기가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일만 하는 나라의 대표는 일본입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아시아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복합니까? 도리어 공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함으로 마음속의 공허감을 메워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로 공허를 메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밤만 되면 도박장으로 가고, 밤만 되면 극도로 음란해집니다. 그러나 쾌락으로도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는 짓을 합니다. 그것이 집단가학증입니다.
일본의 학교에는 ‘이지메’ 라는 것이 있는데, 못난 사람 하나를 집단으로 공격하고 학대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즈음에 와서 생긴 것이 아니라 에도시대부터 내려온 사회적 구조랍니다. 우리는 시골의 동네를 일본시대부터 ‘부락’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부락이라는 말은 일본말 ‘부라꾸’에서 왔고, 부라꾸는 일본사회에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가리켰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에도시대부터 백정, 무당, 거지, 망나니 등 천민집단을 한 지역에 몰아넣고는 그들을 일부러 학대했습니다. 부라꾸 사람들은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못하게 했고, 그들이 우산을 쓰면 죽을 정도로 때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신발도 못 신었고 성도 가지지 못하는 천민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부라꾸 천민들을 학대하면서 자기들끼리 단결심을 고취했고, 우리는 저들 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아무 소망이 없이 일만 하면서 살지만, 그래도 부라꾸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의식을 가지기 위해서 일부러 천민들을 학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학교에서 적응 못하는 아이를 집단으로 학대하면서, 우리는 저 아이보다 낫다고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행복이나 보람 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로가 남을 학대하면서 ‘나는 저 학대받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버티는 것이라니 참으로 불행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식의 헛된 위로를 행복이라고 여기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돈을 모았어도 헛되고, 출세했어도 행복하지 못하니까, 남들이 감히 가질 수 없는 수십억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저런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나아” 하면서 무너지는 자존심을 스스로 버텨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딱한 인생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보다 집도 크고, 누구보다 많이 배웠고, 누구보다 돈을 많이 버니까 나는 행복한 편이야 하면서, 헛된 만족으로 자기 자존심을 세워가며 살지는 않습니까? 자가용 몰고 다니는 것을 자랑하고, 남보다 봉급 높은 직장을 자랑하면서 자존심으로 겨우 버티고 계십니까?
솔로몬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사업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결국 헛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하나님을 즐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가지신 지성을 주었고 하나님만 가지신 언어와 영혼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사귀도록 만들어진 존재요 하나님과 만나서 사귈 때 행복하고 만족해지는 존재입니다.
아이는 장난감이 아무리 많더라도 엄마가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인생은 돈이 아무리 많고 집이 아무리 크고 자가용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않고는 행복함이나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것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는 것을 ‘예배’ 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짜릿한 기쁨이 있을 것처럼 생각되고, 술집이나 노래방에 가서 춤추고 몸을 흔들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서 예배드리자 하면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가슴을 죄는 죄를 사함받아 평안을 얻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앞날도 하나님의 동행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에 말씀을 통해서 영혼과 지성의 만족을 얻고, 찬양과 기도를 통해서 감성의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할 때 확실한 삶의 목표가 생김으로 의지의 만족을 얻습니다. 사람은 참된 예배로만 육신과 영혼 전체가 만족을 얻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예배는 놀라운 것입니다.
삶이 만신창이가 되고 인격이 모난 사람이 그 인격을 바로 세우는 비결이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림에 있습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고 하나님을 바로 만나면, 깨어진 인격이 회복됩니다. 무식하던 사람도 한 십년만 예배를 드리면 유식해집니다. 말씀이 우리를 유식하게 만듭니다. 지성이 채워지고, 피도 눈물도 없던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따스한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밤낮으로 방황하던 사람도 예배를 드리면 주를 위해서 헌신하게 되고 그런 삶에서 두려움이나 지루함이 없는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행복의 길을 찾게 됩니다.
예를 들면, 주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과 나누는 삶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로가 되어야지 저수지가 되어서는 행복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소유를 통해서 만족을 얻고자 할 때는 소유의 강도가 자꾸 높아져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은 처음에는 한잔만 마셔도 기분이 좋지만 나중에는 더 많이 마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어버립니다. 이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손만 잡아도 행복했는데 나중에는 한 남자 한 여자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이 남자 여 여자를 찾아다녀야 하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니 난잡하고 변태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망가집니다. 돈도 그렇고 도박도 그렇고, 소유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행복은 강고가 높아져야만 하고, 그것은 결국 행복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다릅니다. 쾌락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줌으로 기쁨을 누리게 되는 방법입니다. 솔로몬처럼 소를 몇 마리씩 잡고 서태후처럼 삼백명의 음식을 혼자 다 차려놓아도 만족은 없습니다. 성경은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고 하지 않고 먹지 못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합니다. 네가 먹다가 질릴 그 음식을, 차라리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줘서 그들이 기쁨으로 먹는 그 모습을 한번 봐라. 너 혼자 먹는 기쁨 보다 주고서 보는 기쁨이 더 클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기쁨을 얻는 길입니다.
물질을 얻거나 지위가 높아짐으로 얻는 기쁨은 잠시고, 나중에는 욕심으로 타락합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욕심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나눠줄 때 그동안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기쁨과 만족이 가슴에 채워집니다. 그것이 행복을 얻는 진정한 방법입니다.
베풀고는 싶은데 손에 쥔 것이 없어서 못하십니까?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구하는 목적이 자신의 축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주기 위한 것이라면,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성도가 일을 해서 출세하고 자본을 축적하려는 것은 남에게 주기 위함입니다. 기도해도 못 받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믿지 못해서 안주시는 것입니다. 줘 봐도 저를 위해서 쌓아놓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보다 선수를 치면 됩니다. “주님이 안주시더라도 제가 먼저 주겠습니다.” 하고, 자기도 쓰기 모자란 것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마구 나눠줘서 거지가 되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때부터 부어주십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성경이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주리니, 곧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네가 먼저 주면 누르고 흔들어 채워주마 하셨습니다. 얼마나 확실 합니까?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절대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시면 나눠주지 않고 숨겨놓기만 바쁜 사람입니다. 체질적으로 인색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다가도 화가 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누어 주라고, 사명 감당하라고 주셨는데 밤낮으로 쌓아놓기만 하니까 더 이상 안주십니다. 소유본능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으로 ‘이것이 행복이 아닐까’ 하면서 그것을 탐색하고 그것을 실험해 보느라고 아까운 일생을 탕진하고는 ‘아, 그것도 헛되더라’ 는 비참한 고백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것이 행복이다.” 하신 말씀을 순종하는데 삶과 물질과 시간을 바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다가와서 바른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는 바른 예배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누어 주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이웃을 돕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멋지게 헌신하는 성도가 되셔서 주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하는 모든 수고는 인생을 더욱 목마르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행복의 단비입니다. 이미 드러난 사실을 ‘정말 그런가보자’ 하고 실험하지 말고 하나님말씀에 순종하여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행복의 단비가 풍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