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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학의 수필, 인문학의 수필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문학은 표현 속에 존재한다. 수필을 씀에 있어서, 한 작품이 실존적 불안이나 죽음을 표현하든, 소시민적 생활의 애환을 그리든, 병든 사회에의 저항과 분노를 나타내든 간에, ‘문학성’ 속에 그 대상을 용해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문학성이란 말이 상당히 막연한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주제와 구성 그리고 표현의 공감도를 의미한다. 물론 공감도란 말은 질의 면에서 더 깊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수필도 문학이기 때문에 문학성을 지녀야 한다.
또한 작품과 작가는 일치해야 한다. 수필적 삶의 진실이 그대로 자신의 수필 속에 투영되는 경우가 좋은 수필이 되는 가장 지름길일 것이다. 수필 쓰기를 삶의 한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수필이 정보나 사실의 나열이거나 말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 칸트의 말은 수필 창작에 그대로 원용해도 좋겠다. 문학성과 공감도란 제목으로 계간평을 쓰면서 한 가지 생각해 낸 것이 있다면, 삶의 진실과 수필의 진실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신용철의 <역사를 속이면 역사에 속는다>라는 작품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작가의 시선이 '나'보다는 '우리'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듯이 수필은 우리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하여 존재한다. 특히 이 수필은 시대정신을 가감 없이 구체적으로 표출한다는 차원에서 감동을 준다. 그러면서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일본인의 모순되거나 가식적인 현실 등을 진솔하게 밝혀낸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각성과 시정을 촉구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외교, 통일 문제 등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작가의 입은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위기의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것은 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려는 자세다. 수필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간과한 상태에서는 발아될 수 없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작가는 수필 속에서 시대의 울음을 담아내고자 한다. '우리'를 지향하는 시선은 응당 현실의 문제를 문학 속에 여과시킨다. 그러나 작가가 현실을 문학적으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문학적인 인간 행위로 나아갈 때, 독자들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나라다. 지구촌 시대, 언제까지 과거를 묻고 거짓되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 앞에 서면 답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손으로 태양을 가리려 하는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한 질타를 보낸다. 이 문제는 일본이 정직하게 고백하고 사죄해야만 풀리는 현안 문제가 아닌가. 일본 정부와 일본 지식인이 보여준 비지성적 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기에 이 수필은 사회 비평적 성격을 띤다. 강제로 끌려가 삶을 유린당해 그 억울함을 가눌 길 없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슬픔을 달래주려 한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이 갖는 가치는 크다. 그 치욕적인 전쟁범죄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한국인은 일본의 과거 부정과 역사를 지워버리려는 데 대해 항의해 왔지만, 변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는 언제나 분노를 느끼게 한다. 작가는 ‘일본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불과 반 세기 전의 생생한 과거를 부인하여 역사를 속이려 한다면, 그들의 후손들이 그 역사에 속는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기’를 당부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작가는 국가나 개인이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피해자에 대해 사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일본인의 만행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주제의식을 구체화하는 전략 차원에서 작가는 일본 지식인의 행동을 ’적반하장‘이란 사자성어에 담아 질타하고자 한다. 역사의 교훈을 일본의 작태로부터 진단해 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작가의 현실 인식이 돋보인다 하겠다. 다 읽고 나니, '문학적 형상화'에 좀더 관심을 갖고 창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정목일의 <표정>은 소재의 발견과 상관화 작업이 인간화로 승화되어 문학성이 창출된 작품이다. 본격수필 창작의 5단계 이론을 적용해 분석해 낼 수 있는 작품이라서 이번 호에서 뽑은 단연 수작이다. 이 수필은 작가가 가끔 석굴암 본존불을 보면서 ‘표정’의 가치를 구현해내고, 이것을 삶에 견주어 의미화한 까닭으로 감동을 준다. 사십대 이후의 얼굴은 그 비중이 미추에 있다기보다는 맑음과 표정에 있다는 작가의 깨달음에 공감이 가는 글이다. 좋은 수필이란 독자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작가가 발견하여 보여주는 데서 가치가 더해지는 것이다. 이 글의 문학성과 공감도는 작가의 탁월한 인식 세계가 보여준 빛나는 성찰에서 나온다. 정목일은 오래 전부터 미학 수필을 써온 저력이 있는 작가다. 마음의 번뇌와 먼지를 말끔히 씻어주는 본존불의 불가사의한 표정을 구체화하는 어구들이 가슴에 와닿는 건 무엇 때문일까? ‘천 년 명상 끝에 피워 올린 깨달음의 연꽃’ 또는 ‘동해 바다에서 막 떠오른 해가 얼굴을 비추일 적에, 그 빛살 하나하나와의 만남에 대한 응답‘은 표정을 상징화하는 진술로써 독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작가는 본존불의 불가사의한 표정에서 신라인이 도달하고 싶어 했던 깨달음의 경지를 찾아낼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갖고 싶어 했던 가장 거룩하고 대자대비한 얼굴의 원형도 발견한다.
이 글에서 가장 인식이 돋보이는 부분은 석굴암 본존불의 표정과 미소는 이를 만든 석공의 정성과 솜씨만으로 된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이 글의 가치는 본존불의 표정이 신비를 띠게 된 연유를 밝혀낸 데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살면서 욕심과 아집을 거둬낼 때,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띤 표정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수필이 존재하고 그 효용적 가치가 증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소명을 전제로 한다. 이 글에는 속되지 않은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에 백도라지 꽃처럼 맑은 표정을 지닌 두 내외와 얘기를 나누던 일을 삽화로 처리한 것이라든지, 차갑고 딱딱하고 더러는 뻔뻔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하고 자신의 표정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모습을 주제 의미화 단락 앞에 배치한 것은 주제의식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인식과 형상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더욱 감동을 준다.
이태복의 <아! 아버지>는 우리 시대와 역사에 대한 진지함으로 일어난 불효에 대한 단상을 화소로 해서 적어낸 글이다. 수필의 ‘정’의 문학이다. 부자지간의 인간적 정이 강물 같이 흐르고 있어 감동을 준다. 수필문학의 고백적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적 삶과 민족적인 삶 사이의 갈등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한 지식인의 고뇌가 잘 드러나 보이는 수필이다. 소유적 삶에서 벗어나 존재적 삶을 살면서, 아버지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과 좌절을 안겨 준 데 대한 인간적인 미안함을 자신의 체험담에 담아 서간문으로 구체화한 것이 눈길을 끈다. 서두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경구로 꾸몄다. 작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불효를 낳고 있음을 인생사적인 접근을 통해 하나하나 스토리로 전해주면서 박진감 넘치게 전개하고 있다. 수필 속에 어두운 우리 시대의 밑그림을 그려나간 것도 좋았다. 결말 앞 부분, 전개 마무리 단락에서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시도하고, 결말 단락에서 반성적 성찰을 놓아 전형적인 수필의 틀을 유지함으로써 일반적으로 평면적 구성이 가지는 단조로움을 잘 극복하고 있다.
출가하여, 민주화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자신의 체험을 불효에 대입시켜 수필화하는 발상이 참신해서 수필의 맛을 느끼게 한다. 조국과 역사를 껴안고 살면서 아버지를 힘들게 했지만, 그 아버지는 오히려 이런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하는 삽화는 주제의 함축적 표현으로 형상화되어 눈맛을 구축하고 있다. 체험을 통해 느낀 정서를 생활일상에 역류시키거나 여과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솔직한 자기 관조 또는 반조로 나아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주제화 전략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수필은 사랑의 구축을 목표로 하는 문학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증오심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태복의 이러한 글은 편협한 사고의 벽을 허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화 투쟁과 삶의 역정 속에서 아버지와 작가 사이에 쌓였던 불효의 한도 용서를 비는 자식의 눈물 앞에서 이미 삭아버린 지 오래다. 불효를 화해로 풀어내는 수법으로 공감을 자아내게 한 점도 좋았다. 이 글에서 높이 사야 할 점은 반성적 성찰의 진지함이다. 인간적 향기만 품어내어도 수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엄청자의 <연필을 깎으며>는 삼단 구성으로 짜여진 수필인데, 도입부는 연필을 제재로 해서 과거를 불러내는 현재의 공간이 배경으로 설정되고 있다.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그친다면 참다운 의미에서 문학일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연필을 깎다가 아이들을 위하여 연필을 깎던 자신과 자식을 위해 연필을 깎으시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삼대로 이어지는 내리사랑의 아름다운 모습이 연필을 깎는 여인들의 자화상을 통해 아련하게 전해진다. 결말부에서 작가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자녀 교육에 대한 단상을 주제의식과 연결하여 정리하고 있다. 편리를 위해 살면서 자꾸만 기계화되어 가는 어머니의 가족 사랑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머리로 자식을 기르는 탓이란 성찰의 결과가 공감을 준다. 이 수필은 삶에 시달려 사느라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주는 자상한 면모를 지닌다. ‘상처 없이 오는 봄이 없고, 상처 없이 깊은 사랑이 움트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글귀를 가슴에 주워 담는 작가의 인생론이 지극히 인간적이다.
사람의 한 평생은 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불안해진다. 그러나 이 작가는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바로 이런 정을 수놓는 수필적 일상이 미적 가치를 지닌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가족 사랑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리 사랑의 아름다움을 연필 깎기를 통해 제시하면서 지금까지 편리 중심이었던 인간의 삶을 희생과 헌신 중심으로 전환시키려 하고 있는 한국적 여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한 무한한 작가의 사랑 의지가 글을 살아 있게 한다. 극도의 이기주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는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것이 편리를 가치로 내세우는 이기주의다. 비유를 사용해 글의 품격을 높이고, 내리사랑에 대한 고마움, 헌신의 가치를 토로하면서 탈이기주의를 선언하는 작가에게 평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화에 대한 인식은 진정으로 인간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고 마음의 먼지와 욕심을 덜어내게 한다. 이 글은 이러한 것을 느끼게 하고, 보다 홀가분하게 하는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하기에 향기가 난다.
박중현의 <노약자 석에서>는 지하철이 소재가 된다. 소재가 현대적이다. 작가가 평소대로 우대권을 이용하고자 매표소에 섰는데, 역무원이 “신분증 좀 보여 주세요”하는 말에, 자신을 젊게 보았다는 데 대해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담담하게 진술하면서 바람직한 지하철 문화를 위한 제언도 아끼지 않고 있다. 전철 안에 있는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보호석’ 이용 실태 분석을 통해 작가는 사회적 약속의 실천과 봉사의 가치를 이 글의 주제로 내세우고 있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약자 보호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을 보는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을 것이다. 바쁘게 살다보니 누구나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작가는 두터운 벽 속에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넌지시 꾸짖는다.
앉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서있는 젊은이는 누가 봐도 멋있는 모습이다. 육신도 정신도 건강해 보인다. 노약자석 한 코너에 끼워있는 쪽지에 적힌, “빈자리가 나를 유혹해도 앞으로 30년은 참으리”라는 문구가 작품의 주제를 상상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손맛을 더해준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적절한 화제의 선택과 배열이다. 젊음과 늙음의 대립각에서 지하철 풍경을 비교와 대조의 묘사법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것도 좋았고, 인생을 축구 경기에 비유했던 전직 모 교수의 이야기를 끌어들여 주제 의미화를 돕는 자료로 활용한 것도 좋았다. 결구는 바람직한 노년 생활과 의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짐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으로 문학을 통해서 사회 현실을 선도해 나가는 역할 또한 작가에게 맡겨진 사명이라 할 수 있다. 몸은 늙었으나, 젊게 사려는 자세에 공감이 간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영진의 <새로운 추억의 상처인가>는 술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사고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살아있음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수필이다. 이 수필이 주는 맛은 호탕한 인간미에 있다. 현대인에게 가장 결여된 것이 있다면 인간적 향기일 것이다. 작가는 고향 친구들을 불러내어 마을회관에서 술을 마시고 대취하여 집으로 잘 돌아왔으나 아침에 일어나 상처를 발견한다. 이 글의 감상 포인트는 사고를 어떻게 처리하고 얼마나 다쳤느냐가 아니다. 사고를 당하고 난 뒤 작가에게 일어나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의미화하는가가 수필 창작에서 생명적이기 때문이다. 이 수필이 갖는 가치는 주당으로서의 삶에 대한 낙관적인 마음이다. 사고가 일어난 과정을 전개로 해서 펼치지는 이야기는 작가의 따뜻한 인간애로 수놓아지고 있다. 사고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향토적 삶에 대한 보람을 기쁨으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는 자세가 감동을 준다. '친구와 이웃들이 좋아 자기도 모르게 술의 유혹에 빠져 대취한 뒤, 또다시 후회하는 수레바퀴의 삶이고 보면, 삐걱거리면서도 모나지 않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살이가 재미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삶에 보내는 긍정적이며 따뜻한 시선은 독자들마저 따뜻하게 감싸안기에 우리에게 안도감을 준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고향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일상사의 추억이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인생관과 버물어져 탄생한 휴먼 수필이다. 일상사의 베풂에서 출발된 환희의 기쁨들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움의 자세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인생을 이처럼 제 멋대로 굴려도 되는 것이지 고개를 갸웃거린다’라는 마지막 멘트가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3.
이번 계간평은 수필을 독자와의 상호교섭 작용으로 이해하면서 공감도와 문학성의 차원에서 대체적으로 작품의 긍정적인 측면만 살펴보았다. 수필적 삶의 과정을 ‘길’과 ‘글’에 견주고 이를 형상미학으로 극대화시킨 박양근의 <길을 나서면 글을 만난다>, 서정적인 정조에 수미상관의 미학을 구축한 우한용의 <감이 익을 무렵의 단상>, '버림'에 대한 참신한 철학적 응시가 돋보인 김중위의 <비움과 채움>, 낙엽을 통해 삶과 죽음을 성찰한 조현의 <저승에서 온 편지>, 초콜릿을 제재로 해서 성희롱 문제의 허와 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이관희의 <초콜릿> 등 초대수필 코너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좋은 수필이나 지면 관계로 감상할 수 없었다. 안덕자의 <아름다운 용서>는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겪고 난 후, 발견한 미국인의 위대성을 잘 그려내고 있는 수필이다. 이 작품들을 다루지 못한 원망은 고스란히 평자가 안아야 할 짐이다.
간혹 수필은 ‘정의’를 내세우는데, 사람은 영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수필은 고고하나 사람이 글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종종 본다. 언행의 불일치다. 문학의 본질성에 대한 고뇌 없이 수필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사실을 단어로 나열해 놓는 사행심이 수필을 불행하게 만들고 수필을 사랑하는 독자를 실망시킨다. ‘인생은 살기 어려운데, 어찌 수필이 쉽게 쓰여질 수 있겠는가. 결코 자기 위로의 도구로 수필을 마치 복권을 사듯 마구 써서는 안 될 일이다. 수필가들이 내세우는 ’문학성‘이 각질 안에 움츠린 번데기와 같은, 자기의 생존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 작품은 굳이 발표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수필이 발표되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한 개인의 이야기일지라도 느낌을 문학적 형상화로 표현해서 독자와 함께 나누려는 데 있음을 우리 수필가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문학성이고 공감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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